- I am fond of children, except boys. (나는 어린애들을 좋아한다, 사내애들을 제외하고) - Lewis Carroll (1832~1898)
비 갠 후 온 천지가 수채화처럼 맑아 보이는 어느 날, 웅덩이에 철버덕 발을 굴러 속절없이 고여 있는 빗물을 튀겨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겨우 대여섯 살 밖에 안되는 나이에.
이제 예절 바른 어른이 된 당신은 어느 늦여름 소나기 멎은 미국 소도시 아스팔트 길을 운전한다. 쿵, 하며 ‘pot hole, 도로에 움푹 팬 곳’을 지나다가 아, 나는 왜 그때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내버려 두지 않고 발로 찼을까, 하는 호기심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는 성격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위인이다.
남을 괴롭히기 위한 놀부의 ‘즐겨찾기’ 목록 몇 가지를 소개한다. - 우는 아기 똥 먹이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
아이 밴 아낙네 배 차기. 이쯤 해서 당신은 사내애가 웅덩이 물을 철버덕 차는 발길과 임산부를 타깃으로 하는 발놀림을 비교하기에 이른다. 나이 어린 사내애의 본능과 어른의 고의적인 악행(惡行)의 엄청난 차이에 대경실색하면서.
그렇다. 나는 시방 악행이라 했다. 이제 악당(惡黨), 악한(惡漢)이라는 뜻의 ‘villain’이라는 영어단어를 검토할 단계다.
‘villain, 악당’, ‘village, 마을’, ‘villa, 별장’의 말뿌리가 다 같다. ‘villain’은 ‘시골 사람, 촌사람, 촌놈’이라는 뜻으로서 13세기에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호칭이었고, 16세기에 악한, 19세기에는 소설이나 연극에 나오는 현대적 의미의 ‘빌런’이 된 것이다. ‘빌런’이 촌놈에서 악당으로 변하는 데 600년이 걸렸다.
‘village’는 14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 군청소재지로 약간의 도시 냄새를 피우는 읍(邑)보다 더 작은 농촌에 해당하는 면(面) 또는 ‘마을’에 해당한다.
‘villa, 별장’은 한국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 아파트보다 격식 있는 사회계층이 선호하는 입주환경으로서 17세기 로마와 이탤리언들이 좋아하던 말이었는데 현대의 그들은 ‘빌라’를 아파트나 다름없이 취급한다는 소문이다.
올해 들어 입때껏 인기 영화에서 주인공보다 빌런들이 각광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다.
우리는 영웅보다 악당의 기행(奇行)에 애정을 쏟는다. 삶의 기복을 영화를 감상하듯 넘기는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선보다 악(惡)이 우월하다는 슬픈 각성에 시달리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은유법이 성행한다. 세상을 섭렵하는 영웅의 힘이 달린다는 증거가 도처에 즐비하다.
변화무쌍한 악행의 역할분담이 두 시간 정도 기획으로 펼치는 스토리라인으로는 불가능하다. 악당도 한둘이 아닌 여럿이 혼돈의 도가니에서 부글거리는 동안 엄지 척을 받지 못하는 ‘never-ending drama’의 세례를 받는 우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여자애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남자애들을 제외한 어린애들이 좋다고 하는 루이스 캐롤의 발언에 이해가 간다.
웅덩이 물에 발을 넣는 당신의 조그만 흥분이 바늘도둑이라면, 아이 밴 아낙네 배를 발로 차는 놀부의 고의적인 악행이 소도둑이라는, 수컷들의 공격본능을 몹시 꺼리는 자신의 ‘insight, 통찰(洞察)’을 그는 발설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villain mentality, 악당 정신’을 향한 혐오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