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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나 어떡해

New York

2025.08.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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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im lee, the red eye black cat, monoprint, 2010. 5.5x6.75 in

sooim lee, the red eye black cat, monoprint, 2010. 5.5x6.75 in

처음 뉴욕에 와서 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나는 늘 외롭고 쓸쓸함에 수업이 없을 때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안이 많지 않았다. 아시안만 보면 눈인사하고 인상이 좋다 싶으면 말 걸어 친구가 되었다.  
 
“한국인이세요?”
 
“아니요. 일본인이에요”
 
그녀도 나와 같은 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나를 그녀의 그리니치빌리지 아파트로 초대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 배경인 Grove court 근처 아담한 아파트였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며 와! 이런 위치에 분위기 좋은 집에서 산다니 부러웠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져 거실을 향해 있는 검은 책상과 의자. 코너에는 초록색 안락의자가 자신감 가득 찬 자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옆으로 피아노가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유학 생활하면서 피아노까지 있다니! 그녀의 넉넉한 부유함에 움찔했다.
 
“와! 멋지다. 너 혼자 사는 거야? 좋겠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내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아빠가 일본에서 다음 달에 온다는 데 큰일 났어.”
 
“왜? 아빠와 이곳에서 함께 있으면서 구경 시켜드리면 되잖아.”
 
“실은, 이 아파트 아빠 친구가 해준 거야. 내가 뉴욕에 공부하러 간다며 친구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아빠가 부탁했는데 그만 그와 살게 됐어.”
 
“아빠 친구 싱글이야?”  
 
“아니. 부인과 아이들은 업스테이트 뉴욕에 살아. 부인이 우리 관계 몰라. 불안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빠도 전혀 몰라. 알면 큰일이야. 나 어떡하지? 너 무슨 좋은 아이디어 없어?”
 
나는 할 말을 잃고 검은색 피아노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 헨리 작품의 특징인, 예상치 못한 반전 같은 일본 친구 삶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내가 불륜 문제 해결책을 알 수 있을까? 한동안 우리는 차만 조용히 홀짝거렸다. 갑자기 나는 뻘떡 일어나 문을 열고 도망치다시피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나를 믿고 속마음을 터놓았는데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순간 후회했다. 괴로웠다. 친구에게 따뜻한 한마디 못 해주고 나온 것이 미안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파트 주변을 맴돌며 다시 그녀에게 갈까? 말까? 고민하다 집에 왔다. 그 이후 그녀를 피해 다녔다.  
 
불륜이 만연한 요즈음, 그녀의 근심 어린 희고 둥근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지금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수임 / 화가·맨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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