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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행복이 뭐 별거냐

올가을은 유난히도 길었다. 나뭇잎은 계절을 잊은 듯 여전히 초록색을 띠며 떨어질 생각이 없다.     센트럴파크를 걷다가 갑자기 설사가 나오려고 했다. 티제이 맥스에 들어가 화장실로 뛰었다. 남자 소변보는 용기를 본 것도 같은데 급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지 그냥 들어갔다. 변을 봤다. 휴지통에 휴지가 없다. 내 주머니에도 없다. 와! 어떡하지.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는데 바로 옆 칸에서 인기척이 났다. 밑 뚫린 곳을 보니 남자 구두가 보였다. 아이고, 내가 남자 화장실에 앉아 휴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급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뻔뻔해진다더니.     “죄송한데요. 여기 휴지가 없어요. 휴지 좀 건네줄 수 있을까요?”   조용히 화장실 밑으로 한 움큼의 휴지를 받았다. 내 사정을 훤히 안다는 듯 또다시 한 뭉치의 휴지를 건네줬다.     “대단히 고마워요. 혹시 제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왔나요?”     굵직한 소리가 말했다.   “네, 여자 화장실은 입구 오른쪽에 있었는데 지나쳤군요.”   “너무 급해서 보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 남자가 나오기 전, 후다닥 일어나 뒷정리를 위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이 급할 때마다 자동으로 닥터 지바고 영화가 떠오른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태운 영화의 기차 안 풍경을 떠올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대변이 급하면 어찌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기차에서 생긴 오물을 버리기 위해 문을 여니 문 크기의 얼음판으로 막혀있다. 삽으로 얼음을 후려쳐서 깨고 볏짚 더미에 엉긴 오물을 문밖으로 쓸어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변기에 앉아 변을 볼 수 있다는 크나큰 행복에 빠졌다.   고차원적인 삶이 굳이 아니더라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행복하다.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옆 화장실에 앉아 있던 점잖은 남자에게 감사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행복 별거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남자 구두

2025.10.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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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단단한 슬픔의 제곱

유럽을 여행하면     그 화려한 흉터 뒤에 갇혀 있는   단단한 슬픔을 본다   그 찬란한 흔적 뒤에 숨어있는     고통의 잔해를 듣는다   우리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다   종교의 역사다   힘의 역사다   한번 전쟁을 치를 때마다   팔뚝은 굵어지고   다리는 단단해진다   물기 하나 없이 단단해진 슬픔은     돌이 되고   초석이 되어     성을 쌓고 성전은 치솟고     처절한 역사를 올린다         오늘 나는     수많은 관광객에 밀려   황홀한 상처를 우러러보고   지하에서 울려 나오는 신음에   다리가 멎는다   겉은 아름답고   속은 슬픈 제곱을 듣는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슬픔 제곱 물기 하나

2025.10.30. 17:54

[글마당] 어떤 위로

침묵의 언어는     외로움의 사이에 있습니다     따뜻한 언어는       사랑의 사이에 있습니다         키우던 햄스터가 죽었다고 아이가 울고     아이의 엄마도 울고     허한 가슴이 빈집이라고 눈물 질척이다가     닮은 녀석 찾아 슬픈 얘기를     또 털어내고 있습니다         평생 살아갈 듯 누군가와 부대끼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나보낸 후에야       흙 한 삽으로 이별이란 옷을 입히고     그리움의 덧 살로 그리 살아가지요         매사 그러하지 않던가요     사랑이란 깊이도 모르면서요         독이고 약은 순간의 말에 있습니다     그것도 숨을 쉬는 동안에만 있어요     행여 나에게 가시 바늘이 돋거든 그것을 뽑아     찌르는 상처보다 봉합으로 쓰인다면     가시나무도 양지를 내어 줄 것이라고     그리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이 보입니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가시 바늘

2025.10.30. 17:53

[글마당] 허드슨 캐뇬

캄캄한 밤 별을 세며   대서양의 밤을 가른다   모두들 잠들고   선박은 이름 없는 춤   밤이 새도록 추었다       음과 양의 경계선   수평선을 떠난 태양의 축   밤과 낮을 잊은 물꽃놀이   바다의 노숙자들 곤한 숨을 감추며   바다의 미사일을 만나는 깊은 파도.   24시간의 기 싸움은 대서양을 흔들어 깨웠다       생과 사의 밧줄을 풀고 당긴 싸움   먹이 사슬을 꿀꺽 삼킨 채   갑판을 때리는 꼬리의 마지막 고별       대서양이 울었나 오광운 / 시인글마당 허드슨 사의 밧줄 양의 경계선 마지막 고별

2025.10.30. 17:53

[글마당] 돼지 감자 꽃

꽃도 아닌 것이   꽃보다 이쁘며       먹을 줄도 모르는 것이   주저리주저리 엉켜있다         해바라기도 아닌 것이   코스모스보다 아름답고       감자도 아닌 것이   어이해 밉지가 아니한가       친구 기다리는 마음같이   제비콩 콩깍지 기다리누나       하얀 꽃 파란 잎   보라색 콩깍지       너는 밤나무 나는 감나무   네 타령이나 내 타령이나       가을밤은 깊어 가고   고향 하늘 그리워진다 이강민 / 시인글마당 돼지 감자 돼지 감자 제비콩 콩깍지 보라색 콩깍지

2025.10.30. 17:52

[알림] ‘글마당’ 코너는 부득이하게 10월 31일(금)자로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애정 어린 관심과 참여를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안타깝게도 지면 축소로 인해 ‘글마당’ 코너는 부득이하게 10월 31일(금)자로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더 풍성한 콘텐츠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알림 글마당 코너 독자 여러분 그동안 애정

2025.10.16. 21:11

[글마당] 백림사와 원각사를 돌고 돌아

“사랑방 마운틴에 가자. 가기 전에 절에 들렀다가. 내가 픽업 갈게. 준비하고 있어.”   지난밤부터 배가 살살 아프고 구토증이 나는 것이 심상치 않다. 산책하면 나을 것 같아 공원에서 걷고 있었다.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아플 때 친구들과 놀면 낫는 체질인 나는 신이 났다. 다운타운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친구도 함께 간다고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이다. 셋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절로 가는 거야.”   운전하는 친구에게 내가 물었다.   “백림사.”   “사랑방 마운틴이 그 사찰 근처에 있어? 내가 오래전에 그곳에서 템플 스테이 했는데. 꽤 멀어.”   “그 절에서 조금만 가면 사랑방 마운틴이야.”     11시경에 떠났는데 백림사에 도착하니 2시경이었다. 사찰 마당이 횅하니 비어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우리가 식당 안을 기웃거리자, 비구니 두 분이 들어오라고 했다. 콩나물밥을 먹으라며 김치와 상추와 양념장과 된장국을 꺼내주셨다. 신도들을 점심 봉양하시고 다 치운 상태에서 우리가 들이닥쳤는데도 반가이 맞아주셨다. 한국인만이 베풀 수 있는 마음 씀씀이에 미안하고 고마워서 나는 문밖에서 우물쭈물했다.   산사에서 새우와 오징어를 넣은 콩나물밥을 상추에 싸서 양념장을 얹어 먹는 맛이란! 정신놓고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학 선배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아닌가. 서로 껴안고 반가워 어쩔줄 몰랐다.   “사랑방 마운틴은 원각사 근처에 있어. 여기서 뉴욕 가는 길로 한 시간 되돌아가야 해.”   선배님이 말했다. 원각사에 가야 하는데 친구가 내비게이터에 백림사를 찍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뵙지 못한 선배님을 만나려고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일까? 길을 잃을 때마다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기는 까닭은 부처님 은덕인가 보다. 선배님과 아쉽게 헤어진 후 우리는 원각사를 향해 또 달렸다. 너무 늦어 원각사는 다음에 방문하기로 하고 그 근처에 사는 화가 조성모 작가 스튜디오 사랑방 마운틴에 도착했다. 돌고 돌아오다 보니 저녁나절 4시 30분이었다.     운전하는 친구는 꼬리뼈가 아프고 또 다른 친구는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아침에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팠는데 말짱해졌다. 보고 싶었던 선배를 우연히 만나고, 친구들과 마음껏 수다 떨고, 게다가 백림사 두 비구니 스님의 은덕으로 어릴 때 엄마와 자주 가서 먹던 사찰 음식이 나의 아픔을 말끔히 치료했다. 예상치 못한 즐거운 행복한 하루였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원각사 원각사 근처 사랑방 마운틴 가면 사랑방

2025.10.1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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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길을 잃다

높은 산에 올랐다   정상에 서니 전신이 후들댄다   천하를 얻은 벅참이 고동친다   땀을 식히려 바위에 걸터앉으니   명상에 잠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빗방울이 맨살을 두드린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세상이 검게 물들더니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 많던 인파 다 언제 어디로 숨었나   나만 홀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공포가 안에서 어둠이 밖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킨다   서둘러 내려갈 길을 찾았으나     눈앞은 진흙 구덩이다   방향감각도 어둠에 묻혔다   길을 잃었다       젊은 시절     위만 보며 뛰고 날았다   매번 지쳐 쓰러지고   불안스레 젖은 날개를 퍼덕이기만 했다   다시 일어날 수밖에   몸이 쓰러지는 것보다   영혼이 쓰러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기에       선잠에 헤드라이트가   아스라이 비친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2025.10.16. 21:08

[글마당] 집으로 가는 길

얼마나 멀리 어디서 헤매다 왔는가   가장 깊은 곳에서 부는 바람이여!       삭막한 어느 겨울날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을 걸었습니다     화강암 모래, 황무한 언덕, 건조하고 광활한 땅   인간의 어떤 소망이나 희망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고동칩니다       고요함으로 진동하는 현   거대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작은 침묵   우리의 시끄러운 세월은     영원한 침묵의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작열하는 태양열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알 한알, 한알에 쌓인 수천만개의 기억들     소음 되어 사라지고       지금 막 태어난 것처럼 단순하고 단순하게 가벼워집니다       손을 뻗치면 닿을듯한     새까만 별 무더기들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나리고       고독한 방랑자     오늘 밤 영원을 꿈꿉니다. 이춘희 / 시인글마당 화강암 모래 사하라 사막 머리 위로

2025.10.16. 21:06

[글마당] 인연

인연이 이란   아름다움과 그리움이 직조된 원초적인 순수함   서쪽 하늘을 바램으로 반짝이는   변함이 없는 하늘의 별빛       특별하고 잘난 사람들이 아닌   사랑스러운 사람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면 족한   하늘 아래 피어있는 꽃 일래라         자유의 힘에 설래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   뜨거운 태양과 바람소리   어디선가 귀로 흐르는 노래소리들으며   손을 맞잡는순수한 당신이라면   피하고 싶지않으리       자꾸 생각 나는 당신   바닷물의 속 정을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랑하고싶다   함께 흘러 가고 싶다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인연 서쪽 하늘 하늘 아래

2025.10.16. 21:06

[글마당] 시월

언제나 설레는   어머니 계절       다 큰딸   걱정하며       몇 십년 만에   친정 나들이         까만 가슴에는   수많은 별과 서리       주름진 얼굴에는   인자한 웃음   곰산 고개   넘지 못하신 채       하얀 소복에   옥색 고무신       눈물 가득한     옷 소매       그래서 시월은   설레는 계절 이강민 / 시인글마당 시월 어머니 계절 친정 나들이 옥색 고무신

2025.10.16. 21:04

[글마당] 무언

초가을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맑아   눈부신 아침       비취 옥색 물살 위   대서양 한복판   카니발 여객선 창가에 앉아   바라본 망망대해   세상 떠나서   두 발이 별천지에서 있다.       저 수평선 너머로   갑자기 떠오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얼굴들   아득한 빛으로 너울 되어   이렇게 말 없고 끝없는 바다로   잔잔한 파도를 타고 갔을까       그 깊고  신비한 침묵 앞에   고개 숙이며   더 먼 바다로 떠나보낸다.       황혼의 문턱에서   나의 발자국은 어디쯤 와 있을까?       보고 싶은 눈망울들   그리움이 머리를 들고 흐느끼며   파도처럼 쌓여온다. 김복연 / 시인·웨스트체스터글마당 무언 카니발 여객선 대서양 한복판 비취 옥색

2025.10.02. 17:53

[글마당] High line

지금   옛꿈은 묻어 놓고   새로운 꿈을 엮고 있다       가끔   뼈처럼 드러낸 녹슨 철로는   구름 너머 아득한 옛일을 간직한 채   희미하게 잊혀져 가고 있다       피곤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젊은 연인들의 싱그러운 미소를 본다   길옆 꽃밭에 그들의 미소가   예쁘게 피어나고 있다       벤치에서 일어나   녹슨 내 꿈을 안고 잊혀져 가듯이   High line 길을 천천히 걷는다       낯선 존재처럼 양기석 / 시인·퀸즈글마당 high line high line 나무 그늘 길옆 꽃밭

2025.10.02. 17:52

[글마당] 무제

아침 산책길   한 남자가 개를 끌고 가고 있었다   굿모닝, 인사했다   개 주인은 들은 척 하지 않았다   개는 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개가 사람보다 더 인간적이었다 최복림 / 시인글마당 무제 아침 산책길

2025.10.02. 17:51

[글마당] 엄마 상어

물을 떠난 상어   밀리고 밀려 닿은 곳이 중환자실   80년 동안 무섭게 흔들며 헤엄쳐온 그녀   호흡이 가쁘다   폐에 물이 가득 찼단다   폐의 물을 뽑기 위해 환자를     거꾸로 눕힌다 (prone position)   회복 가망 없는 생명유지 장치는 거부한다는   환자의 유언장에     두 아들은 머뭇대고 주춤하다가   인공호흡기를 떼기로 한다   제발 제발 그녀가 더 이상의 고통은     받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   평생을 치이고 받치고   참아내고 이겨내온 그녀   피부는 바짝 말라 소나무 껍질보다 거칠고     세상의 등짐에 눌려   새우등보다 더 굽은     그녀의 실루엣   한 방의 진통제에     죽음과 격투를 벌이던 그녀의 시선이   풀어진다   굽은 등이 펴진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엄마 상어 엄마 상어 생명유지 장치 소나무 껍질

2025.10.02. 17:50

[글마당] 김치 한 조각의 서글픔

“김치 좀 주세요”     반찬이 주르르 나오지 않고 기본 반찬으로 김치만 나오는 이 식당 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이 말했다.     “식사시키기 전에 김치는 안 나옵니다.”   우리는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서울서 온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석영의 장길산 소설 속 나그네처럼 주막에 들러 국밥이 나오기 전, 빈속에 술을 털어놓고 김치 쪼가리를 씹고 싶어서였다. 무표정한 웨이터의 대답이 술맛을 싸하게 만든다.     우리가 초대한 두 분이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남편이 파전과 순대와 찐만두를 시켰다. 사이드 종지를 주지 않는다. 아무도 안주를 건드리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종지와 김치 좀 주실래요.”   다시 웨이터가 무뚝뚝한 얼굴로 “식사를 주문하지 않으시면 김치는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술과 안주를 먼저 먹고 식사는 나중에 시킬 테니 김치는 가져다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식사 주문하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언제부터 안주와 식사가 분리되었던가? 웨이터는 무반응으로 계속 외면한다. 술맛이 슬슬 달아났다.     “사장님 나오시라고 해요.”     웨이터는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무표정으로 가더니 누군가가 김치를 가져왔다.   물가가 너무 올라 김치가 금치 되었나? 식당 매니저의 지시인가? 웨이터의 융통성 부족인가? 안주만 시켜 놓고 김치를 달라는 우리가 무례한 건가? 아니면 요즘 한국 젊은이 중에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무응답 凝視(응시)’ 즉 질문이나 말을 걸었을 때 대답은 하지 않고 상대를 빤히 바라보는 태도로 일관한다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 생긴 변화인가?     손님도 많지 않다. 웨이터는 우리 테이블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도 여전히 종지는 가져다주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술잔을 마주하면, 아주 오래전에 읽은 장길산에서 아낙들이 국밥 끓이는 장면을 연상하며 한마디 한다.     “종지라는 말 너무 예쁘지? 봉지도.”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국밥 가격이 예전의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어쩌겠는가. 식당도 이윤을 남겨야 하니. 그래도 소주와 안주를 세 개나 시키고 식사도 나중에는 주문했는데. 한국인의 기본 반찬인 김치는 미리 줘야 하지 않을까? 무척이나 야박하고 헷갈리는 저녁이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서글픔 김치 식당 김치 김치 쪼가리 기본 반찬

2025.10.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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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작은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싶다

여행 중인이태리의 한 작은 중세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싶다   성당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지 않아도 된다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고   예배당 안에서는 낡은 오르간 연주가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교회   작은 십자가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된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난 작은 사람   평생 큰일을 해 본 적이 없다   큰 교회에서는 기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안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착하게 보이는 여인   허리 굽은 노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다       예수님은 초라한 교회의 주인도 되실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살아온 몸   주님은 늦게 올리는 기도도 받아 주실 것이다   부족한 이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그 누군가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싶다       성전을 나오는데 Tuscany의 폭우가 쏟아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비를 맞고 지내온 생이 아닌가   먹구름이 지나고 찬란한 해가 나오면   그 자리에 서서 젖은 몸을 말려야겠다       *Tuscany-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는 지역. 인근에 몬테푸치아노, 시엔나 등 유적지가 있다. 2시간 반 거리에 플로렌스가 있다. 여름에는 거의 매일 한 낮에 소나기가 지나간다. 최복림 / 시인글마당 교회 기도 중세 교회 이탈리아 중서부 오르간 연주

2025.09.18. 19:05

[글마당] 9월의 유혹

고추잠자리가 고추꽃 위에 앉아   오수를 즐긴다   보기에도 아까운     9월의 찬란한 햇살   상큼한 온도   청량한 습도   선선한 바람에   고추를 말리고     9월의 화사한 유혹에   냉장고 안을 기웃거리다가   호박과 가지도 말려본다   아 아니지   이참에     눅진하고     깊이 겹겹이 접힌     내 속마음도 꺼내     신선한 바람 넣어주자   아 이 화려한 9월의 유혹! 정명숙 / 시인글마당

2025.09.18. 19:04

[글마당] 숨 막힌 표류

깊게 내려간 햇살   딴 세상에 머물고 있는 듯   적막의 숨소리만 곁에 있습니다       누구랑도 같이 가고픈 옛날의 밤   초저녁인가   깊은 밤인가   새벽 인가 숨어 있었던   숨 막힌 표류의 젊음은 사랑의 강물로   노도의 절정에서 한 획을 그었지만       이젠 그 별이   낮과 밤 창밖의 그리운 곳에   아무렇게나 모른 척아는 척   한구석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길에 서 있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표류 새벽 인가

2025.09.18. 19:01

[글마당] 하필이면 올여름에

사람들은 왜 여름에 바람이 날까?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 속 로맨틱한 가을에 날 것 같은데. 태양이 지글거리는 땡 여름에 몸이 뜨거워서 풀어헤치다가 바람피우는 걸까? 났다가도 땀이 흐르는 여름엔 짜증이 나서 헤어질 것 같은데. 가을이 오면 뜨겁게 달궈져 붙었던 바람기가 떨어질까?     한 유부녀와 유부남이 운명적 만남이라며 올여름에 바람났다. 왜 같은 인종끼리 붙었을까? 한국 사람끼리는 살아봐서 지겨워서라도 다른 인종과 바람피울 것 같은데. 한국 음식 말고 다른 나라 음식 먹기가 불편해서일까? 영어도 연애할 만큼은 하던데.     불륜은 호러 무비 보다 더 무섭다. 아무리 떼어 말려도 한동안은 떨어지지 않는다. 남녀가 붙으면 도덕, 신의, 의리와 양심도 칼로 베어 버린 듯 떨어질세라 딱 붙어있다.     “많은 사람이 알아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아요.”   와우! 바람나면 눈에 뵈는 것도 없는지 얌전하고 교양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무척 뻔뻔해진다. 불륜이 오히려 더 짜릿한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그 둘을 꽁꽁 감싼 듯 당당하게 큰소리친다. 그들에게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동료도 둘의 애타는 사랑에 방해꾼일 뿐이다. 오로지 두 남녀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한 듯 행동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인간들이 암묵적으로 응원하며 지지한다. 동지애를 구축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서로의 불륜을 합리화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있을까? 그리도 애타게 뜨겁던 불륜도 언젠가는 끝난다. 처음엔 서로의 몸을 탐하려고 애틋한 말과 행동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한쪽의 집착으로 불화가 생긴다.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 달구어졌던 몸도 식고 불 꺼진 칙칙한 검은 재를 보는 듯한 끝을 본다. 지루해져 새로운 흥미의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불륜은 습관이고 생활 패턴이다. 두 가정이 깨지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는다. 천생연분을 왜 이리 늦게 만났냐며 유부남 부인을 밀어내고 유부녀 남편을 내치고 둘이 영원히 살 것처럼 재혼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남의 것을 훔쳐서 잘 써먹을 수 있을까?   저만치 여름이 가는 뒷자락이 보인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불륜 남녀는 집착으로 괴로워서 아니면 다른 흥미진진한 파트너를 찾아 옷깃을 또 세운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올여름 불륜 남녀 유부녀 남편 한국 음식

2025.09.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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