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고향에 가면 마음을 비우세요 그 곳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곳 해변을 걸으세요 남산에 오르세요 텅 빈 가슴 그 곳에 놓고 오세요 아픈 가슴에 다리 절며 바닷가 헤메는 나그네 세상 애환 등에 지고 산에 오르는 산객 누군가 문드러진 마음 주워 가겠지요 그 것은 새벽을 밝히는 반짝이는 진주 이슬 너와 나의 치유의 눈물 이강민 / 시인글마당 향수 진주 이슬 세상 애환
2025.07.10. 17:56
주체는 사랑의 창조물 투명한 빛이 갈색 회색 초록색으로 얽힌다 초록은 초록위에 갈색과 회색은 땅위에 빛은 자신의 즐거움과 가벼움에 다시 놀란다 돛단배는 태양과 함께 부풀고 태양을 향해 순항하며 또 바라기하며 돛단배에서는 돛이었다가 나뭇가지에서는 숨찬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앞 다투어 재잘거리는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나뭇잎으로 나아간다 푸르게 자라는것들이볼수있는태양 멀리서 가까이에서 수수께끼풀이가 아니라면 푸른잎이나 꽃들의 수다는 행동이다 그 열정적인 사랑스러움으로 단 한번이라도 무리하거나 떨쳐버리지 않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향기 끊임없이 나를 향해 흐르는 빛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갈색과 회색 갈색 회색
2025.07.10. 17:55
산천이며 마을과 도시에 수북이 쌓인 함박눈 저게 다 쌀이라면 사람들은 만족해할까 아닐 거야 쌀만으로는 살 수 없다면서 김치며 고기도 그 외 다른 반찬도 내려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다행이지 뭐야 저게 쌀이 아니고 함박눈이니 사방이 고요하고 사람들도 조용하게 있는 거야 조성내 / 시인·의사글마당 함박눈
2025.07.10. 17:54
포트 워싱톤 기차 정거장 주차장 수 백 대의 차들이 땡볕 더위에 서 있다 주인은 차를 걱정하지 않는다 저녁에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것이다 고된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쁜 얼굴로 맞으며 집에 데려다 줄 것이다 차와 사람은 소중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수 년이 되었다 차는 가끔 졸면서도 고령의 주인 걱정을 한다 더운 날씨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만하탄은 항상 복잡하니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하세요 남하고 다투면 혈압이 올라가요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참으세요 하나님 우리 주인을 보살펴 주세요 저녁이 되자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종점에 도착한다 차는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 셨군요 주인을 잃은 차는 너무 슬퍼서 눈물도 안 나와요 기도의 응답이 있었군요 최복림 / 시인글마당 기차역 주차장 기차역 주차장 정거장 주차장 포트 워싱톤
2025.07.10. 17:52
고추 조림, 김치와 배추 된장국을 떠 놓고 남편 맞은편에 앉았다. 밥상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남편 눈치를 살폈다. 국에 밥을 말아 먹던 그가 한마디 한다. “배추 된장국이 진국이야. 최고의 건강식이지.” 시래깃국을 먹고 자란 남편은 매일 된장국을 먹어도 질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의 ‘진국’이라는 말에 옛일이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살만한 옷이 있나 보려고 종로 지하상가 옷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가게 안에 있던 여자가 “어머, 너 수임이 아니야.” “어머머, 미정아 웬일이니?” “나 여기서 일해.”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진국이 생각나니?” “그 아이 잘생기고 남자다워 무척 인기 있었잖아.” “너 학교 졸업하고 그 애 만난 적 있니? 진국이를 내가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혹시나 너는 그 애 근황을 알고 있나 해서. 나야 이미 결혼해서 끝난 일이지만.” “어머머 언제? 누구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남쪽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만난 경상도 남자하고.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 예전에 너희 집에 가서 밥통에 있는 밥 다 먹고 삼립빵을 또 먹어도 네 엄마가 한창 클 때라며 더 먹으라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미정이는 내 초등학교 착한 단짝이었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 따라갔다. 어찌어찌해서 그녀가 사는 곳에 갔는지는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산다는 집 구조를 한국 드라마에서 서너 번 본 적 있다. 옥탑방으로 문을 열자마자 부엌이 있고 방 한 칸이 훤하게 보이는 구조였다. 우리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남편이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함께 왔어요.” “안녕하세요.” 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그는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운 아저씨 인상이다. “수임아, 방에 들어가 있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들어가 앉을 곳도 마땅치 않고 친구 남편이 몹시 화가 난듯해 무서웠다. “나 그냥 여기 있을게.” 친구도 남편 눈치가 보이는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느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문가에 서 있었다. 친구가 저녁상을 차려 들고 남편 앞에 가져다 놓으려는 순간, 남자가 벌떡 일어나 밥상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배고파 죽겠는데 어디를 쏘다니다 온 거야.” 에구머니나! 난 너무 놀라서 냅다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경상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나이 하면 밥상을 걷어차는 남자로 기억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사나이 경상 친구 남편 남편 눈치 남편 맞은편
2025.07.10. 17:51
붉고 실한 캘리포니아 대추가 바람에 실려 왔다. 고것 참 꿀맛이다. 햇볕이 찐했나! 바람이 달콤했나 아니면 농부의 간절함이 통했나! 캘 대추는 한 계절을 옹골지게 살아냈다 대추는 주름으로 생을 마감한다 주름 하나에 고통 한 조각 주름 둘에 상처 한 움큼 주름 셋에 아픈 기억 한 겹 켜켜이 쌓인 주름진 생애 캘 땡볕에 덴 상처투성이 천둥번개 폭풍우에 아슬아슬했던 생명줄 견뎌낸 것은 기적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날 때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 쪼글쪼글 대추 닮았다 대추는 제 몸을 말려서까지 향과 당을 만들기에 진심이다 대추 닮은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는 걸까 정명숙 / 시인글마당 주름 주름 하나 캘리포니아 대추 천둥번개 폭풍우
2025.06.26. 17:38
사고의 작동 원리는 유전한다 -플라톤 학교 앞에 서면 교육자 후손은 교사와 학생을 생각하고 기업가 후손은 학교 재정 상태를 검토하고 부동산 사업가 후손은 땅과 건물을 살펴보고 사기꾼 후손은 사기 칠 대상을 찾는다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자는 천수설을 주장했다 맹자는 교육을 순자는 법을 주자는 수양을 강조했다 性稟 天受 不可 改也 성품 천수 불가 개야 성품은 하늘에서부터 받았으니 고칠 수 없다 고칠 수도 없고 수양도 부족하다 물 찾아 바람 찾아 곰산에 가자 그래서 물 같이 바람 같이 살자 봄바람에 흩날리는 분홍 꽃잎 하나처럼 이강민 / 시인글마당 사기꾼 후손 교육자 후손 기업가 후손
2025.06.26. 17:33
돌아보지 마라 지나쳐버린 길도 앞에 있다 후회가 되지 않을 그 길도 앞에 있다 돌아보지 마라 지치지 않으려거든 돌아보지 마라 많이 즐거웠던 시간도 많이 아팠던 그 시간조차도 돌아보지 마라 그것이 너를 견디게 해준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외로운 지금보다 낫다고 한들 뽑히지 않는 것들을 애써 꺼내보려 마라 가시들은 기억하되 그 상처는 기억하지 마라 성장의 눈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니 날마다 흐르는 물이 같은 물이던가 돌아가고 오지 않는 시간의 아쉬움처럼 궂어도 좋아도 그때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코 돌아보지 마라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2025.06.26. 17:32
집 떠나 먼 길 시작의 끝을 보며 늘 그랬듯이 항구의 별빛은 바다의 그림을 그린다 파도의 쟁기를 한차 가득 싣고 바다의 꿈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렸다 만선의 무대는 항상 넓게 열려있다 사방에서 모여든 물길의 바람잡이 별난 세상을 만지며 스물여섯명의 낚시꾼들 물길을 따라 별을 보며 달을 끌고 꿀잠을 잤다 아침 햇살의 틈이 열리며 낚싯줄을 내렸다 배고픈 맛, 세상의 속임수에 별난 세상에 누웠다 갑판 위에서 비늘을 털며 바다의 옷을 벗는다 만선의 하루가 저물어 수평선 넘어 숨어 간 뱃머리는 고요한 밤을 깨며 별빛을 보는 선장의 외로움은 오직 바다의 노숙자들을 위한 그 까만 길 피곤한 바다의 파도를 재우며 길 없는 길을 찾아 항구에 닻을 내렸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여행 아침 햇살
2025.06.26. 17:31
결혼 전엔 친정아버지가 결혼 후엔 남편이 나의 외출 통행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을 관리했다. 아버지에게는 용돈을 받으려고 지켰지만, 남편의 통행금지 시간은 억울하다. 아이들 잘못될까 봐 모범을 보이며 항상 아이 곁에 있느라고 금지 시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이들이 다 커서 집 떠났는데도 나의 금지 시간은 이어졌다.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참았다. “우리 젊은 아이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가자.” “아버지, 우리가 그런 곳에 가면 아이들이 불편해해요. 그냥 적당한 데 가요.” “나이 들수록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틈틈이 기웃거려야 해. 그래야 젊은 기를 받아.” 다행히도 나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 화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논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간다고 절대 먼저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또 다른 만남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만, 그날의 만남은 과거가 되고 다시 오지 않는다. 그날 하루 그 만남에 올인하다 늦을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반기지 않는 남편은 친정아버지보다 더 꼰대다. 남편은 저녁밥 먹고 나면 졸다가 8~9시경에는 잔다. 자다가도 내 통행 시간은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전화해서 소리 지른다. “어디야? 지금 몇 신데 아직 놀고 있어.” 아이들과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남편에게 통행금지 해제를 요청했다. “나는 어릴 때 아프면 엄마가 자매 많은 집에 가서 놀다 오라고 했어. 그러면 앓던 병도 사라지고 밥도 잘 먹었거든. 난 놀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내가 집에 처박혀 아프다고 징징거리다가 우울증이라도 생기면 좋겠어. 내 친구 남편은 12시까지 집에 돌아오면 된다고 했데. 나도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해 주든지 아니면 해제해 주든지. 난 자유인이라고.” “어 그래. 그러면 자정까지 연장해 줄게.” “알았으니까. 조금 늦는다고 전화질하지 말고, 그냥 푹 주무세요.” 결혼 40년 만에 나의 통행금지 시간이 밤 10시에서 12시로 두 시간 연장됐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통행금지 통행금지 시간 통행금지 해제 친구 남편
2025.06.26. 17:29
125차 US OPEN이 열리는 펜실베이니아의 Oakmont Country Club 3번 홀, 4번 홀 중간에 전설적인 기도석 벙커가 있다 (Iconic Church Pew Bunkers) 공을 기도석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 깊은 벙커에서 허우적대야 하고 벙커 사이의 러프에 빠지면 몸의 평형을 유지하기 힘들다 선수들은 제발 기도석에 앉게 하지 말아주십사고 빈다 기도는 게임 전에 벙커에 앉아 올려야 한다 이 골프장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허허벌판에 길고 험한 코스를 만들었다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내와 지혜가 요구된다 Par는 좋은 스코어, 보기도 나쁘지 않다 애초 설계자인 Henry Fownes는 1903년 왜 코스 한가운데에 교회를 설립했을까 골프 애호가들을 벌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무서워하고 자연을 존중하라고 했을 것이다 오만하면 지옥의 벙커에 빠지기 쉬우니 자신을 낮추고 항상 기도하라고 했을 것이다 최복림 / 시인글마당 골프 기도석 기도석 벙커 벙커 사이 country club
2025.06.12. 18:00
누군가 비석 앞에 놓고 간 시든 꽃 한 송이 잿빛 하늘에 보낸 눈길 쇠락한 시간은 멈추어 있고 되돌아올 세월은 없어 바람이 그들 곁을 떠나면 적막 속에 묻어둔 빛바랜 사연들 잊혀진 발길이 남긴 적멸의 공허함만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다 어쩌다 찾아온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에 온몸을 기대어 보지만 흐려져 가는 남겨진 이름 시든 꽃송이로 지워지고 있다 양기석 / 시인·퀸즈글마당 비석 잿빛 하늘
2025.06.12. 17:59
요즘 부쩍 악몽을 꿉니다 검정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것도 많은 나는 분명 검정입니다 미움받을 용기도 없이 속으로만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검정입니다 평생 고운 색만 찾아 열렬하게 나선 순례길 보이지 않는 그윽한 색을 찾아 나선 고고한 길 낮과 밤을 수천 번 수만 번 겪는 사이 하양이 검정으로 퇴색되어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악몽을 멈출 수 있을까요 색은 섞을수록 탁해지니 날마다 빛만 가득 먹어볼까요 맑은 하늘만 마셔볼까요 빛으로 가득 채워진 내 몸이 투명해질 때까지 검정이 얇아질 때까지 악몽이 희석될 때까지 네가 좋아 네가 참 좋아 반복하며 나는 정화 중입니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정화
2025.06.12. 17:58
오랜 세월 크루즈를 타면서 단 한 번도 밴드가 연주하는 밤에 춤추러 가지 않았다. 남편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고 춤추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릴 때마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춤을 추지 못한 것을 후회하다가 한이 되었다. “이번에는 꽤 오래 배 안에 있어야 하니까 밤무대에서 춤을 꼭 춰야겠어. 나 춤추러 가는 것 말리지 말고 케빈에서 자고 있어.” “알았어. 마누라 하고 싶은 대로 해.” 남편도 나의 춤 사랑에 지쳤는지 흔쾌히 허락해 줬다. 나흘째 되는 날 큰맘 먹고 추러 갔다. 모두가 부부들이 왔다. 나만 혼자다. 연주가 시작된 지 15분쯤 후, 한 여자가 그녀보다 마른 남편을 끌어내어 추기 시작했다. 배 둘레가 키보다 더 굵었지만, 통통한 몸매로 잘도 흔들었다. 흥이 많은 와이프를 위해 마지못해 끌려나가 쑥스럽다는 듯 흔들며 그만 추었으면 하는 표정이다. 여자는 흥에 겨워 벌어진 입으로 남편에게 뭐라고 지껄이며 잘도 흔들었다. 갑자기 춤추는 여자만큼이나 통통한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나를 자꾸 쳐다보며 웃었다. 쳐다보는 눈초리가 예사 눈빛이 아니다. ‘혹시 레즈비언은 아니겠지?’ 비슷한 경험이 한번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밴드가 연주하는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뚱뚱한 브라운 피부의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여자가 자꾸 나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도 웃음으로 인사했다. “이 동네 살아요?” “네 당신은?”으로 시작한 대화가 점점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레즈비언 파트너를 찾는다는 직감에 먼저 가겠다고 일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크루즈 춤으로 돌아가서 내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브라운 여자와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눈빛이 같다는 느낌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추워요?” “약간” 그녀의 물음에 내가 대답하자 “그럼 우리 나가서 춤출래요?” 춤추고 싶어 하던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와 함께 무대로 나가 추기 시작했다. 다른 키 큰 여자도 합세했다. 그리고 이어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나와 흔들었다. 밴드도 신나는 춤곡을 마구 연주하고 가수는 목청을 높였다. 우리는 음악이 끝나도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췄다. “우리 그만 자리에 들어갈까?” 그녀가 헐떡이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더 출래요.” 대답했더니 “그럼 한 곡만 더 추고 들어가지요.” 처음엔 신나서 추더니 힘든가 보다. 우리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내가 물었다. “혼자 배 탔어요?” “아니. 남편은 피곤하다고 자요.” “내 남편도 지금 자고 있어요. 밥 먹을 때만 나와요. 나는 싱글처럼 혼자 돌아다녀요. 우리 내일 또 함께 출까요?” “글쎄 내일은 잘 모르겠는데.” 예상을 뒤엎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했지만, 내일은 나 혼자 서러도 흔들어야겠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영혼 브라운 여자 레즈비언 파트너 세월 크루즈
2025.06.12. 17:57
어린아이는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엄마랑 말을 탄 기억 옛날에 물놀이하던 기억 옛날에 놀이공원에 간 기억 아주 옛날에 갔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옛날이란 말에 힘주어 발음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지금 아이는 7살 그러니깐 그 아이의 옛날은 5살 그러니깐 두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도 그 아이 에게는 엄연한 먼 과거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옛날이야기를 하고 살까요 옛날에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그 아이는 일주일 전도한 달 전도 일 년 전도 옛날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이 우리는 잊지 않고 살아온 옛날이야기가 전부 생각난다면 얼마나 먹먹한 삶을 살까요 박도준 / 플러싱글마당 옛날
2025.05.29. 17:36
긴 여행을 시작한다. 멜로디를 따라 우주의 무한한 공간 속에서 꿈을 꾼다. 노래의 손가락들 지나간 세월 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추억들을 흔들어 깨워 창문을 두들긴다. 줄의 소리는 어머님이 고이 숨겨 두셨던 사랑의 눈물방울들 떠나간 사람, 잃어버린 사랑 어두움에 젖게하지만 신이 부여한 빛도 있지 않은가? 노래는 날개를 달고 신비한 언어와 곡조로 화합하여 푸른 들녘으로 비와 설경 속으로 잔잔한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며 오늘도 동면에서 깨어난 비발디의 〈사계절- ‘봄’〉이 귓전을 맴돈다. 김복연 / 시인·웨스트체스터글마당 숨소리 음악
2025.05.29. 17:35
꿈속에서 꿈을 꾼다 XX 씨 X 시에 사망하셨습니다 가족이 ㄱㄴㄷㄹ으로 구겨진다 서로서로 접힌다 간혹 히스테리가 터진다 방금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천장에 붙어 내 침대를 둘러싸고 늘어져 있는 가족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토록 가뿐한데 무겁게 늘어진 가족을 어떻게 위로하지! 미안한데 나 방금 죽었거든 고통을 느끼는 몸을 작게 둥글게 말아 꼭꼭 접어서 심장박동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거든 너무 슬퍼 말아요 너무 아파하지도 말아요 심장이 멈추면 가슴이 멈추면 혀가 멈추면 고통이 없어져요 몸이 없어져요 정명숙 / 시인글마당 꿈속 심장박동 틈새
2025.05.29. 17:34
굶주린 호랑이 달려가서 사슴을 잡는다 사슴은 말한다 호랑이야 왜 나를 죽이려고 하니? 너 자신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내가 잔인하다고? 호랑이는 혼자 되새겨본다 사람들도 배가 고프면 소 돼지를 잡아먹는데 사슴아, 너도 배가 고프면 풀을 뜯어 먹는데 그게 다 그렇게 돼 있는데 나도 배가 고파 너를 잡아먹는데··· 내가 잔인하다고? 왜 내가 잔인하다고 너는 생각하니? 조성내 / 시인·의사글마당
2025.05.29. 17:32
밤새도록 비가 왔다. 아침에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우비를 입고 리버사이드 공원에 갔다. 84가까지 내려가서 강가 진입도로 들어갔다. 다리 밑에 혼자서 웅크리고 자는 사람이 있었다. 자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놨다. 강가를 따라 콜롬비아 대학 쪽으로 올라갔다. 조지 워싱턴 브릿지가 안개에 묻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이 많이 사는 강 건너 뉴저지는 안개 속에 둥실 떠 있는 섬 같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루트 9A를 따라 다운타운으로 내려가는 차가 움푹 파인 도로를 지날 때 튀기는 물살을 피해 강가 쪽에 바짝 붙어 걸었다. 12마리 오리들이 조지 워싱턴 다리 방향으로 미끄러지듯 가고 있다. 오리들도 나처럼 안개로 덮여 없어진 다리를 찾으려고 부지런히 가는 듯하다. 춥던 날에는 볼 수 없었던 오리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간다. 저 멀리 앞쪽에 또 한 무리의 동료들이 다리를 향해 가고 있다. 나도 강물을 보며 그들을 따랐다. 그중 한 마리가 짝없이 혼자 강 한가운데서 헤맨다. 짝을 잃었나? 아니면 고독을 즐기는 건가? 예전에 우리 부부는 아침에 함께 공원을 산책했다. 남편은 나이 들수록 더 바빠져서 나와 함께 걸을 일이 없어졌다. 그는 새벽에 7 전철을 타고 Vernon Blvd-Jackson Av에서 내린다. 퀸즈와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Pulaski bridge를 걸어 그린포인트 스튜디오로 출근한다.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으면 모를까 우리는 각자 걷는다. 혼자 떠도는 오리처럼 나 홀로 걸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짝 잃은 오리를 보면서 ‘외롭겠구나!’ 생각하다가 아마 오리도 질서 정연하게 함께 물 위를 떠도는 것보다는 자유를 즐기고 싶어서 혼자 있기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까이 있으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잊기가 어렵다. 멀리 있으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어 잊힌다.’ 언젠가 헤어질 우리 부부 사이 헤어지는 연습이라도 하는 양 걷는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외톨 오리 오리도 질서 조지 워싱턴 강가 진입도로
2025.05.29. 17:31
오월은 청춘이 입은 초록빛 드레스 햇살은 그 위에 수놓은 금실 자수 바람은 감춰둔 연인의 편지 꽃잎마다 숨은 이름을 읽고 시간은 고백처럼 느릿느릿 번진다 오월은 창 너머의 빛나는 장면 사람들의 하루를 반짝이게 하는 작은 기적의 연속 오월은 말 없는 시인 마음속 가장 깊은 은유를 침묵 속에서 읊조린다 최영배/ 대한민국 해병대전우회 부총재글마당 초록빛 드레스 금실 자수
2025.05.15.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