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인이태리의 한 작은 중세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싶다 성당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지 않아도 된다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고 예배당 안에서는 낡은 오르간 연주가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교회 작은 십자가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된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난 작은 사람 평생 큰일을 해 본 적이 없다 큰 교회에서는 기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안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착하게 보이는 여인 허리 굽은 노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다 예수님은 초라한 교회의 주인도 되실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살아온 몸 주님은 늦게 올리는 기도도 받아 주실 것이다 부족한 이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그 누군가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싶다 성전을 나오는데 Tuscany의 폭우가 쏟아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비를 맞고 지내온 생이 아닌가 먹구름이 지나고 찬란한 해가 나오면 그 자리에 서서 젖은 몸을 말려야겠다 *Tuscany-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는 지역. 인근에 몬테푸치아노, 시엔나 등 유적지가 있다. 2시간 반 거리에 플로렌스가 있다. 여름에는 거의 매일 한 낮에 소나기가 지나간다. 최복림 / 시인글마당 교회 기도 중세 교회 이탈리아 중서부 오르간 연주
2025.09.18. 19:05
고추잠자리가 고추꽃 위에 앉아 오수를 즐긴다 보기에도 아까운 9월의 찬란한 햇살 상큼한 온도 청량한 습도 선선한 바람에 고추를 말리고 9월의 화사한 유혹에 냉장고 안을 기웃거리다가 호박과 가지도 말려본다 아 아니지 이참에 눅진하고 깊이 겹겹이 접힌 내 속마음도 꺼내 신선한 바람 넣어주자 아 이 화려한 9월의 유혹! 정명숙 / 시인글마당
2025.09.18. 19:04
깊게 내려간 햇살 딴 세상에 머물고 있는 듯 적막의 숨소리만 곁에 있습니다 누구랑도 같이 가고픈 옛날의 밤 초저녁인가 깊은 밤인가 새벽 인가 숨어 있었던 숨 막힌 표류의 젊음은 사랑의 강물로 노도의 절정에서 한 획을 그었지만 이젠 그 별이 낮과 밤 창밖의 그리운 곳에 아무렇게나 모른 척아는 척 한구석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길에 서 있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표류 새벽 인가
2025.09.18. 19:01
사람들은 왜 여름에 바람이 날까?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 속 로맨틱한 가을에 날 것 같은데. 태양이 지글거리는 땡 여름에 몸이 뜨거워서 풀어헤치다가 바람피우는 걸까? 났다가도 땀이 흐르는 여름엔 짜증이 나서 헤어질 것 같은데. 가을이 오면 뜨겁게 달궈져 붙었던 바람기가 떨어질까? 한 유부녀와 유부남이 운명적 만남이라며 올여름에 바람났다. 왜 같은 인종끼리 붙었을까? 한국 사람끼리는 살아봐서 지겨워서라도 다른 인종과 바람피울 것 같은데. 한국 음식 말고 다른 나라 음식 먹기가 불편해서일까? 영어도 연애할 만큼은 하던데. 불륜은 호러 무비 보다 더 무섭다. 아무리 떼어 말려도 한동안은 떨어지지 않는다. 남녀가 붙으면 도덕, 신의, 의리와 양심도 칼로 베어 버린 듯 떨어질세라 딱 붙어있다. “많은 사람이 알아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아요.” 와우! 바람나면 눈에 뵈는 것도 없는지 얌전하고 교양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무척 뻔뻔해진다. 불륜이 오히려 더 짜릿한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그 둘을 꽁꽁 감싼 듯 당당하게 큰소리친다. 그들에게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동료도 둘의 애타는 사랑에 방해꾼일 뿐이다. 오로지 두 남녀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한 듯 행동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인간들이 암묵적으로 응원하며 지지한다. 동지애를 구축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서로의 불륜을 합리화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있을까? 그리도 애타게 뜨겁던 불륜도 언젠가는 끝난다. 처음엔 서로의 몸을 탐하려고 애틋한 말과 행동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한쪽의 집착으로 불화가 생긴다.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 달구어졌던 몸도 식고 불 꺼진 칙칙한 검은 재를 보는 듯한 끝을 본다. 지루해져 새로운 흥미의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불륜은 습관이고 생활 패턴이다. 두 가정이 깨지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는다. 천생연분을 왜 이리 늦게 만났냐며 유부남 부인을 밀어내고 유부녀 남편을 내치고 둘이 영원히 살 것처럼 재혼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남의 것을 훔쳐서 잘 써먹을 수 있을까? 저만치 여름이 가는 뒷자락이 보인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불륜 남녀는 집착으로 괴로워서 아니면 다른 흥미진진한 파트너를 찾아 옷깃을 또 세운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올여름 불륜 남녀 유부녀 남편 한국 음식
2025.09.18. 19:00
늙었다고 해서 더 늙어지지 않는 게 아니야 이미 늙어버린 것도 슬픔인데 하루 살면 하루 더 늙어진다는 게 그게 늙음의 아픔이야 다 늙어지고 나면 죽어야 하는데 죽음이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죽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게 그게 또한 늙음의 아픔이야 죽을 때 이삼일 앓다가 죽고 싶은데 어디 죽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가 내가 의식을 잃고 이삼일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면 여보, 치료를 거부해서 빨리 죽게끔 해줘, 부탁이야 뉴욕정부에 기증한 내 장기(臟器) 내가 죽으면 내 장기는 떼어가겠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내 장기로 치유해준다니! 남을 이롭게 해주고 떠나니 죽음에도 좋은 점이 있구나 조성내 / 시인·의사글마당 이삼일간 혼수상태 어디 죽음
2025.09.04. 17:48
나비는 수 없는 날갯짓으로 꽃술을 밟았지 꿀샘에 발자국 하나 남겨보지 못하고 꽃길에도 태풍은 지나가 가림 없는 강둑은 찢겨나가고 끊긴 다리는 더욱 외로워 문득 쓸쓸하다 느껴지는 것도 이래 변해가는 것들이 많아서이지 아직도 내일은 낯선 길 알려고 애쓰는 일도 생소한 외로움이고 사는 일에 눈물이 있어 다행이지 울 수도 없었다면 나는 벌써 타버렸을 거야 그 외로움으로 그림을 그려 봐 계절이 없는 회전문도 그려 넣고 사방으로 통하는 길도 내어 보고 벽도 무너지면 길이 돼 밀물과 썰물을 껴안은 바다가 잠잘 날 있던가 다는 깨닫지 못해도 순리가 사는 길이지 싶어 그림자가 길어진 오후에도 바람은 불어 너무 애쓰지 마 사는 일에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발자국 하나
2025.09.04. 17:47
누군가 내 집에 살고 있다 초대한 적도 허락한 적도 없는데 분명 불청객이 살고 있다 열심히 문단속하며 조심하며 살아왔는데 내 살림보다 더 큰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다 나름 쓸고 닦고 정돈하며 살고 있는데 이 친구는 마치 주인인 양 내 집 전체를 점령하고 있다 이 친구는 세상의 이치를 득도한 양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어디든 착륙할 수 있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 속에도 벽에 걸려있는 액자 안에도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선물 세트 안에도 비집고 들어간다 하강밖에 모르는 물보다 재주가 많은 이 친구는 날기도 오르기도 뛰어내리기도 스미기도 풀어 놓기도 하는 초능력자다 지하실 천장에 살림을 차리고 살던 거미가 “너 왜 내 집을 부수고 야단이니?” 나를 노려본다 내 집이 내 집이 아니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불사조 지하실 천장
2025.09.04. 17:46
둘이 들어가면 안성맞춤인 작은 야외 풀장에서 동양계 부부가 선글라스를 쓰고 와인잔을 맞부딪치며 한마디 외친다. 확실하게 들리지 않아서 긴가민가했다. 그 부부를 자세히 훑어봤다. 한인 같기는 한데 말 걸기 쉽지 않은 터프한 인상이다. 크루즈에서 보름이 지나도 한인을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아시안은 차이니스다. 배 탄 지 20일이 지난 후 와인잔을 부딪치던 부부가 중국인처럼 생긴 다른 부부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한국말이다. “저 사람들 한국 사람이야. 인사할까?” “말 걸지 마. 조용히 있다가 배에서 내리자고.” 남편 말에 나는 한인을 만났다는 반가움을 떨쳐버리고 그들에게 눈인사만 했다. 한 달 후 배에서 내려 비행장에서 그들과 맞닥뜨렸다. 눈인사했다. 비행기를 탔다. 와! 바로 옆자리에 그 부부가 앉았다. 참다못한 나는 아는 척하려는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쳤다. 그러든지 말든지 더는 죄짓고는 못 살겠다는 심정으로 이실직고했다. “안녕하세요. 배 내리기 전에 어떤 한국분과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아 그러세요.” 남자분이 벌떡 일어나 내 남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내 남편도 마지못해 악수했다. “어디로 가세요?” 남자가 물었다. 남편이 “뉴욕”이라고 대답하자 “우리는 플로리다로.”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약속이라도 하듯 네 명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조용했다. 긴 비행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비행기 안에서 짐을 내리며 작별 인사했다. 뭔가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찜찜한 갑갑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한인이 별로 없던 예전 같으면 반가워서 이미 친구가 됐을 텐데. 한인이 많아지자 누구나가 슬그머니 피하는 데야. 나도 그들의 편안함을 위해 남편 말대로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나의 이실직고가 그들을 불편하게 한 것 같다. 이수임 / 화가·맨해글마당 한인 한인 같기 동양계 부부 야외 풀장
2025.09.04. 17:45
하늘과 가까워 타오르는 땡볕 진한 달빛 수백 년, 수천 년을 거듭하다 보면 천지간의 생명은 서서히 영면에 들고 우주는 침묵에 들어간다 오직 침엽수만 하늘을 찌른다 살아남기 위해 외로운 나무들은 팔을 뻗어 서로를 만지고 끌어안고 비벼댄다 그들의 간절함은 부싯돌을 토해내며 사랑은 불타오른다 불붙은 사랑은 칼바람 타고 번지고 부풀어만 간다 화염보다 강렬했던 사랑도 언젠가 지치면 사그라들고 타고 남은 재 다음 생을 위해 뿌리 위에 살포시 눕는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자연 산불 자연 산불 진한 달빛
2025.08.07. 17:52
외롭고 자유로우며 어두워지는 사막이 있습니다. 모든 말을 잃어버립니다. 이토록 텅 빈 청정한 저 고요 단순하고 단순하게 지금 막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의 시끄러운 세월은 마치 순간의 일인듯합니다. 한여름, 사막의 빛과 바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깊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수많은 바람의 가닥들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르다 공중에서 접히고 풀어지면서 스스로를 끌어당깁니다. 항상 변하면서 투명한 사막의 영혼이여 내 안 깊은 곳 어딘가에 흐르는 강 저녁놀 지는 붉은 모래언덕에 몸을 눕힙니다 나는 바람 속에서 잠들고 꿈을 꿉니다. 이춘희 / 시인글마당 노래 한여름 사막
2025.08.07. 17:51
4월의 봄 강남을 떠나 멀고 먼 여름 고향 집 돌아와 우린 알 수 없는 짝들의 속삭임 둥지 틀었다 고난의 바람과 열의 융합 속에 인내의 둥지 속 작은 생명줄 엮었다 하얀 주둥이 턱을 기대고 처음 보는 신기한 세상을 노래한다 어미는 하루종일 먹이를 잡아 나른다 입 쫙 벌린 주둥이 어미는 순서를 알고 있다 십여일이 지나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다 이때가 정말 귀엽다 20여일 자라면 날개를 펄럭인다 일가친척 가족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 둥지를 요란스럽게 재잘대며 배회하면 자신도 모르게 창공에 날개를 편다 하늘을 정복했다 따가운 여름의 그림자는 어느 날 가을의 들녘을 보면서 처음 가는 강남 새 가족들이 함께 떠날 것이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그림자 여름 여름 고향 일가친척 가족들 주둥이 어미
2025.08.07. 17:50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더위는 먹지 말아야 한다 더위를 먹으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갈증이 나면 냉수를 마셔 더위를 쫓아라 텃밭의 채소는 더위를 먹을수록 쑥쑥 자란다 나무는 더위를 먹고 넘어지기는커녕 잎이 무성해져 강한 햇볕을 피한다 꽃은 더워야 활짝 핀다 벌레들은 더운 여름에 기승을 부린다 왜 한여름에 더위는 먹는데 엄동설한에 추위를 먹었다는 사람은 없는가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불볕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친구들이여 먹을 것이 없어도 더위는 먹지 마라 최복림 / 시인글마당 더위
2025.08.07. 17:49
처음 뉴욕에 와서 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나는 늘 외롭고 쓸쓸함에 수업이 없을 때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안이 많지 않았다. 아시안만 보면 눈인사하고 인상이 좋다 싶으면 말 걸어 친구가 되었다. “한국인이세요?” “아니요. 일본인이에요” 그녀도 나와 같은 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나를 그녀의 그리니치빌리지 아파트로 초대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 배경인 Grove court 근처 아담한 아파트였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며 와! 이런 위치에 분위기 좋은 집에서 산다니 부러웠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져 거실을 향해 있는 검은 책상과 의자. 코너에는 초록색 안락의자가 자신감 가득 찬 자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옆으로 피아노가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유학 생활하면서 피아노까지 있다니! 그녀의 넉넉한 부유함에 움찔했다. “와! 멋지다. 너 혼자 사는 거야? 좋겠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내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아빠가 일본에서 다음 달에 온다는 데 큰일 났어.” “왜? 아빠와 이곳에서 함께 있으면서 구경 시켜드리면 되잖아.” “실은, 이 아파트 아빠 친구가 해준 거야. 내가 뉴욕에 공부하러 간다며 친구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아빠가 부탁했는데 그만 그와 살게 됐어.” “아빠 친구 싱글이야?” “아니. 부인과 아이들은 업스테이트 뉴욕에 살아. 부인이 우리 관계 몰라. 불안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빠도 전혀 몰라. 알면 큰일이야. 나 어떡하지? 너 무슨 좋은 아이디어 없어?” 나는 할 말을 잃고 검은색 피아노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 헨리 작품의 특징인, 예상치 못한 반전 같은 일본 친구 삶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내가 불륜 문제 해결책을 알 수 있을까? 한동안 우리는 차만 조용히 홀짝거렸다. 갑자기 나는 뻘떡 일어나 문을 열고 도망치다시피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나를 믿고 속마음을 터놓았는데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순간 후회했다. 괴로웠다. 친구에게 따뜻한 한마디 못 해주고 나온 것이 미안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파트 주변을 맴돌며 다시 그녀에게 갈까? 말까? 고민하다 집에 왔다. 그 이후 그녀를 피해 다녔다. 불륜이 만연한 요즈음, 그녀의 근심 어린 희고 둥근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지금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아파트 아빠 아빠 친구 그리니치빌리지 아파트
2025.08.07. 17:48
하루 치의 노동을 마감하는 저녁노을이 지는 골목길 저마다 하루 치를 끝내고 오늘을 정리했지만 세탁소 안은 훤하게 불이 켜져 있다 세탁소 아저씨는 노동을 끝내고 돌아온 와이셔츠 앞에 정성껏 다리미를 대고 하루의 구겨진 인생을 펴주고 있다 심하게 구겨진 와이셔츠는 한번 들었다 놨다 하며 어디서부터 펴줄까 매서운 눈으로 제단을 하는 모습은 마치 남의 인생을 펴주는 성자 같다 등 뒤로 깨끗하고 하얗게 매끈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는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데 등 굽은 아저씨의 짐은 누가 펴주나 열심히 살고 수고하고 고단한 하루의 구겨진 인생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당신을 활짝 펴주겠노라 아저씨는 잠시 기지개를 피듯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박도준 / 플러싱글마당 세탁소 아저씨 선풍기 바람 하루 치의
2025.07.24. 18:08
울타리 옆 텃밭으로 아이가 간다 부드럽게 윤이 나는 진보라 가지꽃맺이들 이슬 머금은 오이 꽃맺이들도 태양의 발아래 손가락 내밀고 웃고 있다 아이는 허리를 구부려 드려다 본다 뾰쪽뾰쪽 보라색 가시가 번들거린다 무섭지 그래 네 살배기 목덜미도 번들거린다 아이는 그렇게 몇 날을 그곳에 가곤 했다 두 무릎 옹색하게 쭈그리고 다섯 손가락 오므렸다 폈다 엉거주춤 눈 안으로 쏘는 햇볕도 가시만큼 성가시다 눈으로는 딸 수 없고 서면 보이질 않아 어찌 주저앉아버린 놀란 눈이 코끝에 닿는 순간이다 혀 내밀고 당당히 깨물었다 그랬다 아이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보고서야 텃밭 꽃다지처럼 씨앗이 되어갔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발아래 손가락 텃밭 꽃다지 보라색 가시
2025.07.24. 18:07
물과 바람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 뉴욕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물 같이 바람 같이 그 녀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과 함께 바람과 함께 서 있는 여인 아니라고 말 하지 않는 여인 자유를 숨 쉬는 여인 어제 그리고 오늘 또 내일 이강민 / 시인글마당 liberty statue 여기 뉴욕
2025.07.24. 18:06
알제리 태양보다 강한 햇살이 정수리에 쏟아진다 내 심장 눈부시게 어지럽고 내 몸이 붉게 물들어가자 토마토가 얼굴을 붉힌다 질투하던 붉은 장미 검붉게 화장하고 뒤뜰에 핀 맨드라미 벼슬도 붉게 익어간다 엊그제까지 싱그럽던 연두 세상 서둘러 검푸른 녹음으로 뛰어드니 내 마음 사방으로 꽉 차오르고 질기게 나만 따르던 내 그림자 길게 드러눕는다 젊음을 잃고 시들어가는 내 마음 꺼내 팽팽하게 당기고 눅눅해지는 내 생각 땡볕에 말려보자 늘어지고 휘어진 나 파란 여름 바다에 담가보자 어느새 내 얼굴 토마토보다 붉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토마토 얼굴 토마토 마음 사방 알제리 태양
2025.07.24. 18:05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가서 판화 작업하던 날, 작업실 문틈으로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들~ 엄마 왔어. 얼굴 좀 보자.” “엄마, 나이키(프렌치 불도그 이름) 산책시켜야 해요.” “알았다. 그럼 좀 이따가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급하게 들어왔다. “엄마 나이키 좀 데리고 있어요. 길에 버려진 TV를 가지러 가야 해요.” 아이는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를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엄마 나이키가 갑자기 멈추고 ‘너 이거 가져갈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봤더니 너무 멀쩡한 TV가 있는 거예요. 나이키는 쓸만한 물건이나 돈이 떨어져 있으면 나를 쳐다보고 ‘어때 이 물건 쓸 만하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봐요. 너무 똑똑하고 사랑스러워요.” TV를 틀었다. 소리도 화면도 좋다. 단지 화면 밑부분이 윗부분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아이는 너무 멀쩡한 것을 도로 내다 버리기가 아까운지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수리공을 부르겠단다. “수리 비용으로 차라리 TV를 사겠다.” “돈 안 들이고 고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이는 TV 만든 회사에 전화했다. “언제 어느 매점에서 구입했냐고 묻길래 맨해튼 14가 근처 폐점한 전자제품 매장 이름을 췄더니 수리공이 와서 공짜로 말짱하게 고쳐줬어요.”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니?” “엄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일단 말해보고 안되면 포기해야지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을 내가 미리 안 될 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돼요.” “그래 옛말에 우는 아이가 떡을 받는다는 것과 같구나.” 공짜라선가! 소리도 잘 들리고, 화면도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강아지 나이키도 우리 식구를 닮아 공짜를 좋아하는 눈치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엄마 나이키 엄마 나이하기 작업실 문틈
2025.07.24. 18:04
그대여 고향에 가면 마음을 비우세요 그 곳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곳 해변을 걸으세요 남산에 오르세요 텅 빈 가슴 그 곳에 놓고 오세요 아픈 가슴에 다리 절며 바닷가 헤메는 나그네 세상 애환 등에 지고 산에 오르는 산객 누군가 문드러진 마음 주워 가겠지요 그 것은 새벽을 밝히는 반짝이는 진주 이슬 너와 나의 치유의 눈물 이강민 / 시인글마당 향수 진주 이슬 세상 애환
2025.07.10. 17:56
주체는 사랑의 창조물 투명한 빛이 갈색 회색 초록색으로 얽힌다 초록은 초록위에 갈색과 회색은 땅위에 빛은 자신의 즐거움과 가벼움에 다시 놀란다 돛단배는 태양과 함께 부풀고 태양을 향해 순항하며 또 바라기하며 돛단배에서는 돛이었다가 나뭇가지에서는 숨찬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앞 다투어 재잘거리는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나뭇잎으로 나아간다 푸르게 자라는것들이볼수있는태양 멀리서 가까이에서 수수께끼풀이가 아니라면 푸른잎이나 꽃들의 수다는 행동이다 그 열정적인 사랑스러움으로 단 한번이라도 무리하거나 떨쳐버리지 않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향기 끊임없이 나를 향해 흐르는 빛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갈색과 회색 갈색 회색
2025.07.10.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