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가까워 타오르는 땡볕 진한 달빛 수백 년, 수천 년을 거듭하다 보면 천지간의 생명은 서서히 영면에 들고 우주는 침묵에 들어간다 오직 침엽수만 하늘을 찌른다 살아남기 위해 외로운 나무들은 팔을 뻗어 서로를 만지고 끌어안고 비벼댄다 그들의 간절함은 부싯돌을 토해내며 사랑은 불타오른다 불붙은 사랑은 칼바람 타고 번지고 부풀어만 간다 화염보다 강렬했던 사랑도 언젠가 지치면 사그라들고 타고 남은 재 다음 생을 위해 뿌리 위에 살포시 눕는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자연 산불 자연 산불 진한 달빛
2025.08.07. 17:52
외롭고 자유로우며 어두워지는 사막이 있습니다. 모든 말을 잃어버립니다. 이토록 텅 빈 청정한 저 고요 단순하고 단순하게 지금 막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의 시끄러운 세월은 마치 순간의 일인듯합니다. 한여름, 사막의 빛과 바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깊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수많은 바람의 가닥들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르다 공중에서 접히고 풀어지면서 스스로를 끌어당깁니다. 항상 변하면서 투명한 사막의 영혼이여 내 안 깊은 곳 어딘가에 흐르는 강 저녁놀 지는 붉은 모래언덕에 몸을 눕힙니다 나는 바람 속에서 잠들고 꿈을 꿉니다. 이춘희 / 시인글마당 노래 한여름 사막
2025.08.07. 17:51
4월의 봄 강남을 떠나 멀고 먼 여름 고향 집 돌아와 우린 알 수 없는 짝들의 속삭임 둥지 틀었다 고난의 바람과 열의 융합 속에 인내의 둥지 속 작은 생명줄 엮었다 하얀 주둥이 턱을 기대고 처음 보는 신기한 세상을 노래한다 어미는 하루종일 먹이를 잡아 나른다 입 쫙 벌린 주둥이 어미는 순서를 알고 있다 십여일이 지나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다 이때가 정말 귀엽다 20여일 자라면 날개를 펄럭인다 일가친척 가족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 둥지를 요란스럽게 재잘대며 배회하면 자신도 모르게 창공에 날개를 편다 하늘을 정복했다 따가운 여름의 그림자는 어느 날 가을의 들녘을 보면서 처음 가는 강남 새 가족들이 함께 떠날 것이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그림자 여름 여름 고향 일가친척 가족들 주둥이 어미
2025.08.07. 17:50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더위는 먹지 말아야 한다 더위를 먹으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갈증이 나면 냉수를 마셔 더위를 쫓아라 텃밭의 채소는 더위를 먹을수록 쑥쑥 자란다 나무는 더위를 먹고 넘어지기는커녕 잎이 무성해져 강한 햇볕을 피한다 꽃은 더워야 활짝 핀다 벌레들은 더운 여름에 기승을 부린다 왜 한여름에 더위는 먹는데 엄동설한에 추위를 먹었다는 사람은 없는가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불볕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친구들이여 먹을 것이 없어도 더위는 먹지 마라 최복림 / 시인글마당 더위
2025.08.07. 17:49
처음 뉴욕에 와서 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나는 늘 외롭고 쓸쓸함에 수업이 없을 때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안이 많지 않았다. 아시안만 보면 눈인사하고 인상이 좋다 싶으면 말 걸어 친구가 되었다. “한국인이세요?” “아니요. 일본인이에요” 그녀도 나와 같은 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나를 그녀의 그리니치빌리지 아파트로 초대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 배경인 Grove court 근처 아담한 아파트였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며 와! 이런 위치에 분위기 좋은 집에서 산다니 부러웠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져 거실을 향해 있는 검은 책상과 의자. 코너에는 초록색 안락의자가 자신감 가득 찬 자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옆으로 피아노가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유학 생활하면서 피아노까지 있다니! 그녀의 넉넉한 부유함에 움찔했다. “와! 멋지다. 너 혼자 사는 거야? 좋겠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내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화제를 바꿨다. “아빠가 일본에서 다음 달에 온다는 데 큰일 났어.” “왜? 아빠와 이곳에서 함께 있으면서 구경 시켜드리면 되잖아.” “실은, 이 아파트 아빠 친구가 해준 거야. 내가 뉴욕에 공부하러 간다며 친구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아빠가 부탁했는데 그만 그와 살게 됐어.” “아빠 친구 싱글이야?” “아니. 부인과 아이들은 업스테이트 뉴욕에 살아. 부인이 우리 관계 몰라. 불안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빠도 전혀 몰라. 알면 큰일이야. 나 어떡하지? 너 무슨 좋은 아이디어 없어?” 나는 할 말을 잃고 검은색 피아노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 헨리 작품의 특징인, 예상치 못한 반전 같은 일본 친구 삶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내가 불륜 문제 해결책을 알 수 있을까? 한동안 우리는 차만 조용히 홀짝거렸다. 갑자기 나는 뻘떡 일어나 문을 열고 도망치다시피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나를 믿고 속마음을 터놓았는데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순간 후회했다. 괴로웠다. 친구에게 따뜻한 한마디 못 해주고 나온 것이 미안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파트 주변을 맴돌며 다시 그녀에게 갈까? 말까? 고민하다 집에 왔다. 그 이후 그녀를 피해 다녔다. 불륜이 만연한 요즈음, 그녀의 근심 어린 희고 둥근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지금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아파트 아빠 아빠 친구 그리니치빌리지 아파트
2025.08.07. 17:48
하루 치의 노동을 마감하는 저녁노을이 지는 골목길 저마다 하루 치를 끝내고 오늘을 정리했지만 세탁소 안은 훤하게 불이 켜져 있다 세탁소 아저씨는 노동을 끝내고 돌아온 와이셔츠 앞에 정성껏 다리미를 대고 하루의 구겨진 인생을 펴주고 있다 심하게 구겨진 와이셔츠는 한번 들었다 놨다 하며 어디서부터 펴줄까 매서운 눈으로 제단을 하는 모습은 마치 남의 인생을 펴주는 성자 같다 등 뒤로 깨끗하고 하얗게 매끈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는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데 등 굽은 아저씨의 짐은 누가 펴주나 열심히 살고 수고하고 고단한 하루의 구겨진 인생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당신을 활짝 펴주겠노라 아저씨는 잠시 기지개를 피듯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박도준 / 플러싱글마당 세탁소 아저씨 선풍기 바람 하루 치의
2025.07.24. 18:08
울타리 옆 텃밭으로 아이가 간다 부드럽게 윤이 나는 진보라 가지꽃맺이들 이슬 머금은 오이 꽃맺이들도 태양의 발아래 손가락 내밀고 웃고 있다 아이는 허리를 구부려 드려다 본다 뾰쪽뾰쪽 보라색 가시가 번들거린다 무섭지 그래 네 살배기 목덜미도 번들거린다 아이는 그렇게 몇 날을 그곳에 가곤 했다 두 무릎 옹색하게 쭈그리고 다섯 손가락 오므렸다 폈다 엉거주춤 눈 안으로 쏘는 햇볕도 가시만큼 성가시다 눈으로는 딸 수 없고 서면 보이질 않아 어찌 주저앉아버린 놀란 눈이 코끝에 닿는 순간이다 혀 내밀고 당당히 깨물었다 그랬다 아이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보고서야 텃밭 꽃다지처럼 씨앗이 되어갔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발아래 손가락 텃밭 꽃다지 보라색 가시
2025.07.24. 18:07
물과 바람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 뉴욕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물 같이 바람 같이 그 녀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과 함께 바람과 함께 서 있는 여인 아니라고 말 하지 않는 여인 자유를 숨 쉬는 여인 어제 그리고 오늘 또 내일 이강민 / 시인글마당 liberty statue 여기 뉴욕
2025.07.24. 18:06
알제리 태양보다 강한 햇살이 정수리에 쏟아진다 내 심장 눈부시게 어지럽고 내 몸이 붉게 물들어가자 토마토가 얼굴을 붉힌다 질투하던 붉은 장미 검붉게 화장하고 뒤뜰에 핀 맨드라미 벼슬도 붉게 익어간다 엊그제까지 싱그럽던 연두 세상 서둘러 검푸른 녹음으로 뛰어드니 내 마음 사방으로 꽉 차오르고 질기게 나만 따르던 내 그림자 길게 드러눕는다 젊음을 잃고 시들어가는 내 마음 꺼내 팽팽하게 당기고 눅눅해지는 내 생각 땡볕에 말려보자 늘어지고 휘어진 나 파란 여름 바다에 담가보자 어느새 내 얼굴 토마토보다 붉다 정명숙 / 시인글마당 토마토 얼굴 토마토 마음 사방 알제리 태양
2025.07.24. 18:05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가서 판화 작업하던 날, 작업실 문틈으로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들~ 엄마 왔어. 얼굴 좀 보자.” “엄마, 나이키(프렌치 불도그 이름) 산책시켜야 해요.” “알았다. 그럼 좀 이따가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급하게 들어왔다. “엄마 나이키 좀 데리고 있어요. 길에 버려진 TV를 가지러 가야 해요.” 아이는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를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엄마 나이키가 갑자기 멈추고 ‘너 이거 가져갈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봤더니 너무 멀쩡한 TV가 있는 거예요. 나이키는 쓸만한 물건이나 돈이 떨어져 있으면 나를 쳐다보고 ‘어때 이 물건 쓸 만하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봐요. 너무 똑똑하고 사랑스러워요.” TV를 틀었다. 소리도 화면도 좋다. 단지 화면 밑부분이 윗부분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아이는 너무 멀쩡한 것을 도로 내다 버리기가 아까운지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수리공을 부르겠단다. “수리 비용으로 차라리 TV를 사겠다.” “돈 안 들이고 고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이는 TV 만든 회사에 전화했다. “언제 어느 매점에서 구입했냐고 묻길래 맨해튼 14가 근처 폐점한 전자제품 매장 이름을 췄더니 수리공이 와서 공짜로 말짱하게 고쳐줬어요.”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니?” “엄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일단 말해보고 안되면 포기해야지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을 내가 미리 안 될 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돼요.” “그래 옛말에 우는 아이가 떡을 받는다는 것과 같구나.” 공짜라선가! 소리도 잘 들리고, 화면도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강아지 나이키도 우리 식구를 닮아 공짜를 좋아하는 눈치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엄마 나이키 엄마 나이하기 작업실 문틈
2025.07.24. 18:04
그대여 고향에 가면 마음을 비우세요 그 곳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곳 해변을 걸으세요 남산에 오르세요 텅 빈 가슴 그 곳에 놓고 오세요 아픈 가슴에 다리 절며 바닷가 헤메는 나그네 세상 애환 등에 지고 산에 오르는 산객 누군가 문드러진 마음 주워 가겠지요 그 것은 새벽을 밝히는 반짝이는 진주 이슬 너와 나의 치유의 눈물 이강민 / 시인글마당 향수 진주 이슬 세상 애환
2025.07.10. 17:56
주체는 사랑의 창조물 투명한 빛이 갈색 회색 초록색으로 얽힌다 초록은 초록위에 갈색과 회색은 땅위에 빛은 자신의 즐거움과 가벼움에 다시 놀란다 돛단배는 태양과 함께 부풀고 태양을 향해 순항하며 또 바라기하며 돛단배에서는 돛이었다가 나뭇가지에서는 숨찬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앞 다투어 재잘거리는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나뭇잎으로 나아간다 푸르게 자라는것들이볼수있는태양 멀리서 가까이에서 수수께끼풀이가 아니라면 푸른잎이나 꽃들의 수다는 행동이다 그 열정적인 사랑스러움으로 단 한번이라도 무리하거나 떨쳐버리지 않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향기 끊임없이 나를 향해 흐르는 빛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갈색과 회색 갈색 회색
2025.07.10. 17:55
산천이며 마을과 도시에 수북이 쌓인 함박눈 저게 다 쌀이라면 사람들은 만족해할까 아닐 거야 쌀만으로는 살 수 없다면서 김치며 고기도 그 외 다른 반찬도 내려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다행이지 뭐야 저게 쌀이 아니고 함박눈이니 사방이 고요하고 사람들도 조용하게 있는 거야 조성내 / 시인·의사글마당 함박눈
2025.07.10. 17:54
포트 워싱톤 기차 정거장 주차장 수 백 대의 차들이 땡볕 더위에 서 있다 주인은 차를 걱정하지 않는다 저녁에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것이다 고된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쁜 얼굴로 맞으며 집에 데려다 줄 것이다 차와 사람은 소중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수 년이 되었다 차는 가끔 졸면서도 고령의 주인 걱정을 한다 더운 날씨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만하탄은 항상 복잡하니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하세요 남하고 다투면 혈압이 올라가요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참으세요 하나님 우리 주인을 보살펴 주세요 저녁이 되자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종점에 도착한다 차는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 셨군요 주인을 잃은 차는 너무 슬퍼서 눈물도 안 나와요 기도의 응답이 있었군요 최복림 / 시인글마당 기차역 주차장 기차역 주차장 정거장 주차장 포트 워싱톤
2025.07.10. 17:52
고추 조림, 김치와 배추 된장국을 떠 놓고 남편 맞은편에 앉았다. 밥상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남편 눈치를 살폈다. 국에 밥을 말아 먹던 그가 한마디 한다. “배추 된장국이 진국이야. 최고의 건강식이지.” 시래깃국을 먹고 자란 남편은 매일 된장국을 먹어도 질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의 ‘진국’이라는 말에 옛일이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살만한 옷이 있나 보려고 종로 지하상가 옷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가게 안에 있던 여자가 “어머, 너 수임이 아니야.” “어머머, 미정아 웬일이니?” “나 여기서 일해.”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진국이 생각나니?” “그 아이 잘생기고 남자다워 무척 인기 있었잖아.” “너 학교 졸업하고 그 애 만난 적 있니? 진국이를 내가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혹시나 너는 그 애 근황을 알고 있나 해서. 나야 이미 결혼해서 끝난 일이지만.” “어머머 언제? 누구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남쪽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만난 경상도 남자하고.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 예전에 너희 집에 가서 밥통에 있는 밥 다 먹고 삼립빵을 또 먹어도 네 엄마가 한창 클 때라며 더 먹으라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미정이는 내 초등학교 착한 단짝이었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 따라갔다. 어찌어찌해서 그녀가 사는 곳에 갔는지는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산다는 집 구조를 한국 드라마에서 서너 번 본 적 있다. 옥탑방으로 문을 열자마자 부엌이 있고 방 한 칸이 훤하게 보이는 구조였다. 우리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남편이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함께 왔어요.” “안녕하세요.” 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그는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운 아저씨 인상이다. “수임아, 방에 들어가 있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들어가 앉을 곳도 마땅치 않고 친구 남편이 몹시 화가 난듯해 무서웠다. “나 그냥 여기 있을게.” 친구도 남편 눈치가 보이는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느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문가에 서 있었다. 친구가 저녁상을 차려 들고 남편 앞에 가져다 놓으려는 순간, 남자가 벌떡 일어나 밥상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배고파 죽겠는데 어디를 쏘다니다 온 거야.” 에구머니나! 난 너무 놀라서 냅다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경상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나이 하면 밥상을 걷어차는 남자로 기억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사나이 경상 친구 남편 남편 눈치 남편 맞은편
2025.07.10. 17:51
붉고 실한 캘리포니아 대추가 바람에 실려 왔다. 고것 참 꿀맛이다. 햇볕이 찐했나! 바람이 달콤했나 아니면 농부의 간절함이 통했나! 캘 대추는 한 계절을 옹골지게 살아냈다 대추는 주름으로 생을 마감한다 주름 하나에 고통 한 조각 주름 둘에 상처 한 움큼 주름 셋에 아픈 기억 한 겹 켜켜이 쌓인 주름진 생애 캘 땡볕에 덴 상처투성이 천둥번개 폭풍우에 아슬아슬했던 생명줄 견뎌낸 것은 기적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날 때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 쪼글쪼글 대추 닮았다 대추는 제 몸을 말려서까지 향과 당을 만들기에 진심이다 대추 닮은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는 걸까 정명숙 / 시인글마당 주름 주름 하나 캘리포니아 대추 천둥번개 폭풍우
2025.06.26. 17:38
사고의 작동 원리는 유전한다 -플라톤 학교 앞에 서면 교육자 후손은 교사와 학생을 생각하고 기업가 후손은 학교 재정 상태를 검토하고 부동산 사업가 후손은 땅과 건물을 살펴보고 사기꾼 후손은 사기 칠 대상을 찾는다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자는 천수설을 주장했다 맹자는 교육을 순자는 법을 주자는 수양을 강조했다 性稟 天受 不可 改也 성품 천수 불가 개야 성품은 하늘에서부터 받았으니 고칠 수 없다 고칠 수도 없고 수양도 부족하다 물 찾아 바람 찾아 곰산에 가자 그래서 물 같이 바람 같이 살자 봄바람에 흩날리는 분홍 꽃잎 하나처럼 이강민 / 시인글마당 사기꾼 후손 교육자 후손 기업가 후손
2025.06.26. 17:33
돌아보지 마라 지나쳐버린 길도 앞에 있다 후회가 되지 않을 그 길도 앞에 있다 돌아보지 마라 지치지 않으려거든 돌아보지 마라 많이 즐거웠던 시간도 많이 아팠던 그 시간조차도 돌아보지 마라 그것이 너를 견디게 해준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외로운 지금보다 낫다고 한들 뽑히지 않는 것들을 애써 꺼내보려 마라 가시들은 기억하되 그 상처는 기억하지 마라 성장의 눈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니 날마다 흐르는 물이 같은 물이던가 돌아가고 오지 않는 시간의 아쉬움처럼 궂어도 좋아도 그때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코 돌아보지 마라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2025.06.26. 17:32
집 떠나 먼 길 시작의 끝을 보며 늘 그랬듯이 항구의 별빛은 바다의 그림을 그린다 파도의 쟁기를 한차 가득 싣고 바다의 꿈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렸다 만선의 무대는 항상 넓게 열려있다 사방에서 모여든 물길의 바람잡이 별난 세상을 만지며 스물여섯명의 낚시꾼들 물길을 따라 별을 보며 달을 끌고 꿀잠을 잤다 아침 햇살의 틈이 열리며 낚싯줄을 내렸다 배고픈 맛, 세상의 속임수에 별난 세상에 누웠다 갑판 위에서 비늘을 털며 바다의 옷을 벗는다 만선의 하루가 저물어 수평선 넘어 숨어 간 뱃머리는 고요한 밤을 깨며 별빛을 보는 선장의 외로움은 오직 바다의 노숙자들을 위한 그 까만 길 피곤한 바다의 파도를 재우며 길 없는 길을 찾아 항구에 닻을 내렸다 오광운 / 시인글마당 여행 아침 햇살
2025.06.26. 17:31
결혼 전엔 친정아버지가 결혼 후엔 남편이 나의 외출 통행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을 관리했다. 아버지에게는 용돈을 받으려고 지켰지만, 남편의 통행금지 시간은 억울하다. 아이들 잘못될까 봐 모범을 보이며 항상 아이 곁에 있느라고 금지 시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이들이 다 커서 집 떠났는데도 나의 금지 시간은 이어졌다.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참았다. “우리 젊은 아이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가자.” “아버지, 우리가 그런 곳에 가면 아이들이 불편해해요. 그냥 적당한 데 가요.” “나이 들수록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틈틈이 기웃거려야 해. 그래야 젊은 기를 받아.” 다행히도 나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 화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논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간다고 절대 먼저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또 다른 만남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만, 그날의 만남은 과거가 되고 다시 오지 않는다. 그날 하루 그 만남에 올인하다 늦을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반기지 않는 남편은 친정아버지보다 더 꼰대다. 남편은 저녁밥 먹고 나면 졸다가 8~9시경에는 잔다. 자다가도 내 통행 시간은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전화해서 소리 지른다. “어디야? 지금 몇 신데 아직 놀고 있어.” 아이들과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남편에게 통행금지 해제를 요청했다. “나는 어릴 때 아프면 엄마가 자매 많은 집에 가서 놀다 오라고 했어. 그러면 앓던 병도 사라지고 밥도 잘 먹었거든. 난 놀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내가 집에 처박혀 아프다고 징징거리다가 우울증이라도 생기면 좋겠어. 내 친구 남편은 12시까지 집에 돌아오면 된다고 했데. 나도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해 주든지 아니면 해제해 주든지. 난 자유인이라고.” “어 그래. 그러면 자정까지 연장해 줄게.” “알았으니까. 조금 늦는다고 전화질하지 말고, 그냥 푹 주무세요.” 결혼 40년 만에 나의 통행금지 시간이 밤 10시에서 12시로 두 시간 연장됐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통행금지 통행금지 시간 통행금지 해제 친구 남편
2025.06.26.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