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고래(bowhead whale)는 북극 해양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등지느러미가 없는 뚱뚱한 몸집에, 몸길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머리를 가진 고래다. 특히 두꺼운 지방층(최대 70cm) 덕분에 북극해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존할 수 있다. 또한, 200년 넘게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동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이래 멸종위기종으로 국제법에 보호받고 있지만 국제포경협회는 극지방 원주민들에게만은 봄과 가을, 제한적으로 포경을 허용하고 있다. 극지방 원주민들에게 예로부터 식생활에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이 중요한 자원이 기후 변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래 배설물에서 발견된 독성 조류가 바로 그 증거였다. 이는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극의 해수면 상승과 관련성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WHOI: 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의 연구팀은 약 20년간 205마리의 북극 고래 배설물 샘플을 채취해 독소 유무를 분석했다. 고래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만큼, 배설물 검사는 해양 환경 변화를 파악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분석 결과, 고래 배설물에서 독성 조류가 생성하는 삭시톡신(saxitoxin)이 50~100% 검출됐다. 삭시톡신은 홍합과 같은 조개류에 축적되어 사람에게 식중독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기억상실 패류 중독(ASP)을 유발하는 도모산(domoic acid)은 검출되지 않았지만, 해양 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미래에 발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구팀은 알래스카 북극 해저에서 독성 조류의 휴면 상태 세포인 와편모조류 포낭이 대량으로 분포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그동안 차가운 수온 때문에 포낭의 발아가 억제되었지만,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즉,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독성 조류가 번성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연구팀은 북극 해빙감소와 고래 배설물 시료에서의 독소도 비교했다. 해빙의 급격한 감소로 봄철 태양광선이 직접 해수를 따뜻하게 하면서 조류 번성을 빠르게 유발시켰다. 즉, 해빙이 감소한 해에 북극 고래의 배설물 중 독소가 증가했음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독성 조류는 한국 남해안에서 발견되는 신경마비성 조류와 유사하다. 이 조류를 섭취한 물고기를 먹은 인간에게 피해를 입힌다. 또, 독성 조류도 한국의 조류처럼 바다 속 용존산소를 고갈시켜 어류를 죽인다.
연구결과는 독성 조류가 조개, 물고기같은 어패류는 물론, 고래 등 해양동물을 넘어 알래스카 원주민에게까지 북극 먹이 사슬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애틀에 있는 국립해양대기국(NOAA) 북서부 어업 과학 센터의 연구자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위험”이라고 경고했다.
이제 알래스카 해역은 유해 조류 번성(HAB: harmful algae blooming) 연구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해양 수온의 빠른 상승과 함께 와편모조류가 대규모로 검출되면서다. 북극 지역 원주민 공동체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체감하고 피해를 입고 있다. 이들의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는 독성 조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검사가 필수적이다.
한국 연안에서만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유해 조류 번성이 북극해까지 확산하는 현상은, 지구 온난화가 더 이상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가 직면한 현실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