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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어느 젊지 않은 여가수의 노래

Los Angeles

2025.08.1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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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소영 전 언론인

허소영 전 언론인

필자는 한인 인구가 거의 없는 오하이오에서 한인 문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처지로 30여 년을 거주했다.
 
그런 곳에 ‘어느 젊지 않은 여가수의 노래’라는 생소한 제목의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무엇보다 배우 손현주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인 사회는 술렁였다.
 
하지만 공연장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거웠다. 낯선 여주인공의 이름, 개인 간증이 예상되는 제목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전직 언론인이자 미국 듀크대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필자에게, 알맹이 없이 ‘하나님, 예수님’만 외치다 끝나는 기독교 대중문화는 비평의 대상일 뿐이었다. 결국 공연장을 찾은 이유는 배우 손현주를 보겠다는 소시민적 집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시간 반이 어찌 갈지 모르실 겁니다.” 연출 감독의 호언장담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예상대로 무대는 여주인공의 개인사로 시작됐다. 준비된 실망감이 냉소적인 프레임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길목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개입은 종종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공연은 여주인공의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토대로 했지만, 관객들은 어느새 여주인공의 삶을 자신의 삶에 대입하며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회고가 나의 고백이 되는 체험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우리 중에는 한때 ‘특별했던’ 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하고, 중학교때 반장 완장을 찼으며, 명문고등학교를 거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대를 졸업하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던 이들. 하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운이 없어서, 혹은 때로는 한 끗 차이로 ‘특별한 나(One of Kind)’는 군중 속 ‘그저 한 명(One of Them)’이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예측하지 못한 인생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 공연은 어찌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한 인간이 신을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난 대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면, 이 작품은 또 하나의 시시한 기복 신앙극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여주인공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해 길을 만들 뿐이었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 평범한 구원의 서사 앞에서 관객들은 각자의 기억을 소환했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은혜를, 또 다른 이는 감사를 떠올렸다. 여주인공을 향한 하니님의 선택이 아닌, 오직 나만이 아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에 각자의 제목을 붙이며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
 
공연 시작 전, 배우 손현주의 등장에 환호하던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여주인공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건넸다. 내 삶을 대신 살아내고, 대신 표현해준 그녀를 안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공연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신의 실존을,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신의 실체를, 믿음이 강한 자에게는 신앙의 확증을 전달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은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힘과 다르지 않았다. 공연은 잃어버린 우리 삶을 위한 설교였고, 내재된 상처를 위로받는 예배였다. 공연장으로 향한 발걸음은 여주의 삶을 보러가는 길이 아닌 각자의 일기장을 읽는 과정이었다.  
 
여주인공 ‘윤영아’라는 고유명사가 ‘우리’라는 대명사로 해석되는 한 시간 반 동안, 신은 묵혀둔 우리 각자의 일기장을 꺼내 보이며 말씀하고 있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자아의 우월감이 무너지고 실존적 자존감이 파괴된 경험이 있다면, 이 공연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우리의 상처를 품은 노래였다. 공연을 마치고 필자는 일면식 없는 연출 감독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이건, 사람이 만든 작품이 아니네요.”

허소영 /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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