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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악당들

New York

2025.08.1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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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巴人): 촌뜨기들’ - 2025년 여름.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화면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한다.
 
1975년. 신안군 해역에서 한 어부가 청자 꽃병을 발견한 후 세상에 알려진 거대한 침몰선을 ‘신안선’이라 부른다. 1323년에 원나라에서 출발한 상선이 일본으로 항해 중 서해로 표류하다가 그곳에서 가라앉았다는 것.
 
원작은 웹툰 작가 윤태호. 이 같은 실화에서 픽션으로 가지에 가지를 뻗어 보물선(寶物船)을 발굴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의 연속이다.
 
주인공 청년 오희동은 어릴 적부터 삼촌 오관석의 도둑질을 돕는다. 신안선에 삼촌과 함께 눈길을 주기가 무섭게 촌뜨기 부랑자들 여럿이 이들 ‘서울 양반’ 주위로 모여든다. 서울말,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충청도 사투리가 내 거실 벽을 때린다. 독특한 개성과 수(手) 싸움에 뛰어난, 순진하면서도 그지없이 잔인한 불한당들의 숨소리가 세차다.
 
큰 재벌 천사장이 음습한 표정으로 보물선 도굴 음모를 짠다. 부산 출신 ‘김교수’가 농간을 부리고 마침내 오관석은살인 청부를수행하기까지에 이른다. 드라마 끝부분에서오관석과 희동이의 도굴 트럭이 낭떠러지로 추락한 지 1년이 지난후화면에 나타난 그들의 웃는 모습이 측은지심을 부른다. 파인은 중국의 시골 지방 이름 파시(巴市)에서 유래한 한자어. 그냥 ‘촌뜨기들’이라 해도 될 걸 굳이 그런 식으로다가….
 
‘보물섬’ - 1999년도 영화를 새삼 다시 본다. 1883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의 명작. ‘해적의 황금기’라 불리던 18세기를 누비며 지중해, 카리브해, 대서양에 실존했던 해적들의 전설과 사건에 바탕을 두었다는 해설이다.
 
영국 남서부 해변. 한적한 마을 여관집 주인 아들 짐 호킨스(Jim Hawkins)가 주인공. 하루는 얼굴에 칼 상처가 있는 뱃사람이 큰 상자를 들고 투숙한다. 그는 ‘외다리 남자’가 나타나면 곧 알려달라고 짐에게 부탁한다. 수상한 인물들이 여관에 꼬이고 뱃사람이 죽은 후, 상자에서 해적선 선장이 남긴 보물섬 지도가 나온다. 짐은 동네 의사와 지주를 설득하여 선박을 만들어 보물섬을 찾아간다. 존 롱 실버(John Long Silver)라는 외다리 남자가 앵무새를 어깨에 얹은 채 목발을 짚고 승무원으로 등장한다.
 
전에 해적이었던 존 실버가 반란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짐은 선장에게 이를 알리고 해적 세력과 맞서 싸운다. 보물섬에서 홀로 생존해온 한 해적의 도움으로 짐 일행은 반란 세력을 물리치고 보물 궤짝 앞에 선다.
 
항복한 존 실버는 짐 일행과 함께 보물섬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중 은화 몇 자루를 훔쳐 배를 탈출한다. 짐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존 실버가 편안하게 은퇴했을 것이라 짐작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 글쎄, 다른 세계에서 그가 편안할 가능성은 희박할지도 몰라.” 이 부분도 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pirate, 해적’은 중세 라틴어로 ‘sailor, 뱃사람’이라는 뜻이었고 애당초 전인도 유럽어로는 ‘try, risk, 시도하다, 모험하다’라는 의미였다.
 
존 롱 실버는 이런 말을 남긴다. “Them that die’ll be the lucky ones, 죽는 놈들이 오히려 운이 좋은 놈들이지” - 이것은 그야말로 삶을 ‘시도’하고, ‘모험’을 감행하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지성을 약탈하는, 그런 몸서리치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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