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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분꽃, Four O‘clock

Los Angeles

2025.08.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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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자 수필가

최미자 수필가

수필가 여러 해 전이다. 한 지인이 캐나다 친구 집의 정원에서 씨앗을 가져왔다면서 나에게 작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젊은 시절 남편의 직장을 따라 그곳에서 가족이 십 여 년 살았기에 가끔 캐나다로 여행을 가곤 했다.  
 
그녀는 꽃이 너무 예뻐서 가져왔는데 이름은 모른단다. 우리 집에서 씨앗 두 알이 들어있는 봉지를 받으며 나는 ‘와우, 반가운 분꽃 씨!’ 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민 오고는 여기서 분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 씨앗을 부셔 속에 있는 하얀 가루가 분이라며 화장품 바르는 흉내를 내던 추억의 꽃씨.
 
내가 윤 선생님 부부를 만난 것은 삼십 여 년 전 스키비치 해변의 한인 행사장에서였다. 쾌활하고 조금 수다스러운 남편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의 현모양처, 부산사투리로 지금까지도 꼬박 꼬박 나에게 존경어를 쓰는 분이다. 인격으로 배울 것도 많지만, 언니처럼 따르고 싶은 분이라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샌디에이고 북부에서 오랜 세월 피아노를 아이들에게 가르쳤기에 한인들에게도 알려진 분이다.  
 
나이 들면 다 변하는데,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을 인내심으로 병 수발하는 아내의 역할에 난 놀라기도 한다. 네 해 전인가, 이층 계단이 힘들어 아담한 새집 동네로 이사를 했기에 한번 뵙고 왔다.  
 
그녀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편이 세상 떠난 후, 하나님께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신단다. 자녀들이 가까이서 멀리서 보고 있지만, 병원을 가느라 남편을 태우고 프리웨이를 달리는 요즘 세상에 드문 용감한 여인이다.  
 
또한 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정성스러운 감상문을 매번 보내온다. 그것도 부족해 우린 해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가득히 소식을 담아 보낸다. 전화를 드리면 항상 남편이 부를 때까지 다정하게 긴 대화를 나누는 분이라 자주 뵙고 싶지만 멀리서만….
 
문득 여름에 피는 분꽃을 바라보며 나는 미세스 김/윤 선생님을 생각한다. 분꽃의 영어 이름은 ‘Four O’clock’ 이다. 원산지가 남아메리카인데 색깔이 너무 곱다. 단색보다는 혼합 색의 꽃이 더 신비롭다. 작은 나팔꽃 모양인 분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니 윤 선생님과 닮았다.  
 
언젠가 아이스크림 샵에서 전에 살던 그분의 이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뜨개질 선물을 하는 한국아주머니로 알려져 있었다. 나도 그분으로부터 뜨개질 선물을 여러 개 받았다. 컵 받침, 손전화기 주머니 등등. 늘 소곤거리는 예쁜 목소리로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분에게 나도 감출 것이 없기에 대화시간이면 행복하다. 같은 여성으로 긴 세월 살아오며 마음 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삼매에 빠져버리는 뜨개질처럼 나는 정원 일에 푹 빠져 버리곤 했다. 이젠 허리랑 무릎이 아파서 거의 못하지만,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한 뜨거운 태양을 피해 저녁 무렵부터 아침까지 피는 독특한 분꽃처럼, 우린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여인들이라며 살아간다.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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