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인상파 화가 반 고흐는 일평생 12편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그린 자화상의 대부분은 타계하기 3년 전에 시작해서 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린 작품들이었다.
자화상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표정이 낱낱이 담겨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날이 가까울수록 그의 자화상은 점점 침울해지고 얼굴은 더욱 말라가고 퀭한 두 눈은 광기에 젖어 가고 있다. 죽기 전 자화상을 완성하고 나서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자화상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다.”
고흐의 탄식처럼, 나란 존재도 거대한 거짓말로 포장되어 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언행을 꾸밀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내가 아니다. 인생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연기하는 배우처럼 ‘나’는 각양각색의 가면을 쓰고서 상황에 따라 나 아닌 나로 살아간다. 다양한 페르소나(persona)를 쓰고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우리는 숱한 가면들을 돌려쓰면서 생활하는 군상들이 어우러진 ‘가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페르소나’는 본래 고대 그리스의 연극 용어였다. 그 당시 배우들이 쓰고 연기했던 ‘가면’을 페르소나라 칭했다. 페르소나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그 어원처럼 가면일 뿐이므로 필요할 때 쓰고 벗어 버리면 되는데, 어떤 페르소나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여 그 가면을 벗지 않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페르소나’는 위선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만 쓰이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집단이 요구하는 생각과 태도, 역할과 행동 규범 등과 같은 사회적 코드에 맞춘 ‘외적 인격’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표면 자아’다.
우리 각자는 속한 계층, 국적, 문화, 상황, 인종, 직업에 따라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쓰며 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속성을 갖고 있다.
서양 문화를 ‘유죄와 무죄의 문화’라 한다면, 동양 문화는 ‘수치와 명예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공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서양 문화에 비해 동양 문화는 개인이나 가문의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 가운데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말로는 ‘체면’, ‘낯(얼굴)’, ‘본분’, ‘도리’가 있다. 한국의 체면 문화를 반영하는 이러한 말들은 ‘연극의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와 쉽게 상응한다.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가 체면과 도리를 들먹이며 도와달라 청할 때, 쉬 뿌리치지 못하여 공적인 옳고 그름에 눈감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도 연줄로 통하는 한국 문화의 정서가 흠씬 묻어 있다.
이 시대는 자기 본연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페르소나를 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쓸 수 있는 사람을 유능하다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페르소나가 바깥으로 드러난 외적 인격이라면 내면에 감추어진 내적 인격도 있을 것이다. 외적 인격에 의해 억압된 성격인 내적 인격은 당연히 외적 인격과 반대의 성향을 갖게 된다.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자신의 내적 인격은 왜곡되어 결국 병든다.
자신의 자아가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거짓 페르소나로 깊이 각인되면 공허함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불안, 우울, 인지 왜곡 등에 시달리게 된다. 페르소나와 내적인 자아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면, 이 경우를 우리는 ‘가식(외식)’ 혹은 ‘허위의식’이라 부른다.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고 고백한다. 속사람은 참사람을 이름이다. 가식, 위선, 욕망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참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현대 소비사회는 가면을 쓴 인격을 다양하게 연출하여 성공하는 처세를 충동하는 소비문화로 가득하다.
모방적 페르소나는 일종의 아바타(avatar)로 살아가는 삶이다. 아바타는 사회적 인격체(페르소나)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가상 존재다. 거짓 페르소나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낳은 결과다. 거짓 페르소나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인격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이 참사람이고 교회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