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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살이] STX의 꿈과 조지아의 현실

Los Angeles

2025.09.1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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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건 회계사

이유건 회계사

LA에 살던 시절 대부분의 친구들은 불법 체류자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영주권 혹은 시민권자 행세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네들이 겪은 삶의 궤적을 공유하게 되고, “사실 난 학생 비자야” 혹은 “형 난 불체로 여기 15년 넘게 살고있어” 등의 고백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쉽지 않은 삶이었으리라. 미국의 박하디 박한 비자, 영주권 정책 때문에 이미 뿌리를 내린 땅에서도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비자가 연장되지 않아 급여가 끊긴 적이 있었고,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영주권이 승인되어 미국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 300여 명의 한국인이 합법적 체류 신분 없이 근무하다가 이민단속국에 적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있는 본사 입장에서도 답답했을 것이 눈에 선하다. 미국에 공장을 지어놓고 운영을 원활하게 해야 하는데, 취업비자 발급에는 하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급한 마음에 여행비자를 발급받아서 직원들을 단기간으로 회전시켰겠지만, 이 편법이 어느 정도 굳어지면서 이런 사태로 이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미국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자국민’은 고용이 되고 소득세와 사회보장세를 성실하게 납부함으로써 경제에 선순환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나 불법체류자의 경우 현금을 받고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인프라를 무임승차하는 꼴이 된다.  
 
물론 DACA 등의 제도가 있어서 불법 체류자도 고용세를 납부할 수 있는 루트가 확보가 되어있으나, 제한적으로만 활용될 뿐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배경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분노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양국의 정상이 만나서 미국에 더 큰 투자를 약속한 상태인데, 한편으로 현지 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한국인 인력들을 구금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미국에 배신당했다”는 말까지 나올 수밖에 없다.
 
투자란 자본뿐 아니라 인력도 포함된다. 그러나 지금은 돈만 들어오고, 정작 기계를 돌리고 교육할 사람은 없는 셈이다. 과장을 보태면 미국인 직원들이 매뉴얼만 보고 운영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STX 라는 조선회사에서 근무했다. 2008년 당시 이 회사는 ‘아커야즈’라는 유럽 최대 크루즈 조선사의 인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아커야즈의 기술을 배워서 언젠가는 진해의 조선소에서 크루즈를 진수할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이후 4년 동안 진해 조선소에서는 단 한 척의 크루즈도 건조되지 못했다. 결국 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해외 자회사를 정리했다.  
 
지금 조지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와 별 차이가 있을까 싶다.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려면, 물적 자본뿐 아니라 인력 유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거센 파도와 원주민의 저항을 이겨내며 이 땅을 개척한 이들은 다름 아닌 영국 출신 이민자들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이민자의 나라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다시 제조업을 부흥시키고 싶다면, 단순히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본만이 아니라 그 공장을 움직일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을 길러낼 제도적 장치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한국인 기술자들이 현지 인력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함께 융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국이 스스로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이유건 /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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