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4회를 맞은 밴쿠버국제영화제(VIFF)가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10월 12일 막을 내렸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전 세계 270여 편의 작품이 관객과 만났다. 특히 한국영화를 조명하는 특별 섹션 ‘스포트라이트 온 코리아(Spotlight on Korea)’가 신설되며 관심을 모았다.
그 무대에서 단연 주목을 받은 작품이 있다. 2025년 기대작으로 떠오른 한국 독립영화 ‘3670’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석권하며 저력을 보여준 이 작품은 이미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고, 밴쿠버에서도 다시 한번 K-무비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제44회 VIFF 공식 초청작으로 상영되며,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3670'은 탈북 청년 ‘철준(조유현)’의 서울 생활 적응기이다. 영화는 내성적이고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던 철준이 동갑내기 영준(김현목)과 만나 게이 커뮤니티에 첫 발을 들이며 겪는 일상과 내면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진='3670'의 스틸 컷
지난 10월 7일 밴쿠버국제영화제(VIFF) 극장 앞 작은 공원에서 ‘3670’의 주역들과 만났다. “밴쿠버까지 같이 오게 될 줄 몰랐어요”라며 웃는 박준호 감독과 조유현, 김현목 배우. 세 사람은 인터뷰에서도 오래된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운 호흡을 보여줬다.
사진=왼쪽부터 김현목 배우, 박준호 감독, 조유현 배우.
Q. 제목 ‘3670’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제목부터 소개해 주시겠어요.
박준호 – ‘3670’은 종로3가 6번 출구 저녁 7시, 그리고 마지막 숫자 0은 모이는 사람의 수를 말해요. 커뮤니티에서 쓰는 은어로 한 사람이 오면 3671, 두 사람이 오면 3672, 이런 식이죠. ‘3670’은 약속 장소에 아무도 나오지 않는 쓸쓸한 상황인데요. 동시에 ‘0’이 가능성이 담긴 기호인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줄 수 있는 희망적인 제목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제목으로 지었습니다.
Q. 인기가 대단해요. 밴쿠버국제영화제에서 일찍이 매진이 되었는데, 해외 영화제에서 초청이 잇따르고 있다면서요?
박준호 - 얼마 전 홍콩에서 상영했고, 곧 대만 가오슝 영화제에서도 소개될 예정이에요. 파리, 런던, 헝가리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에서도 상영이 잡혀 있습니다.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가 첫 해외 상영이었고, 이번에 밴쿠버에서도 캐나다 첫 상영을 하게 되었어요. 제 첫 장편영화인데, 이렇게 잘 봐주시니 감사하지요.
Q. 박 감독님도 상영 전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캐나다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소개하셨습니다. 캐나다에서 만난 관객들 반응은 어땠어요?
박준호 - 캐나다에서 영화를 보여드린 건 저희에게도 남다른 경험이었어요. 확실히 샌프란시스코나 밴쿠버 같은 지역은 이민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민 경험이나 정체성 문제에 대한 이해나 공감이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보였어요. 탈북자 이야기나 이주 서사뿐 아니라, 퀴어 캐릭터에 대한 시선도 훨씬 덜 경직돼 있고요. 동성애라는 소재보다는 삶의 조건이나 감정에 집중해 주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유현 –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캐나다에서도 제가 맡은 철준이를 보면서 공감하셨다는 관객들이 있었어요. 북에서 온 철준이가 남한에 적응하고, 게이 커뮤니티에 소속되려고 애쓰는 행동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랬는데…’ 하면서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씀하세요. 남 얘기처럼 볼 수가 없는 거지요.
사진=VIFF 센터 극장에서 3670 트레일러가 나오자 인증샷을 찍는 세 사람.
Q. 그렇게 ‘남 얘기처럼 볼 수 없게’ 하려고, 감독님이 이 영화를 만드신 거 아니에요?
박준호 - (웃음) 그렇죠.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가려 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티에 적응하려는 철준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했을 때, 또 누군가에게는 직장에 입사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이민을 가서 낯선 땅에 적응하려 애쓸 때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준에게 감성적인 몰입을 강요하는 영화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Q. 그런 공감대가 형성된 데에는 두 배우의 연기가 큰 몫을 한 것 같아요. 철준 역의 조유현 배우는 이번 작품으로 장편영화에 데뷔했는데 ‘올해의 발견’이라는 평을 받고 있죠. 김현목 배우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배우상을 수상했고, 최근 화제작인 ‘폭군의 셰프’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고 있고요. 두 분은 어떻게 영화 ‘3670’과 만나게 되었어요?
조유현 - 감독님이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이런 영화를 준비 중인데, 주인공을 찾고 있다. 시나리오를 보내드리겠다.” 그때는 제가 맡을 역할이 정확히 어떤지 몰랐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다보니 '내가 철준이겠다' 싶은 거예요. 이 기회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미팅하고, 오디션까지 보고 참여하게 됐어요.
김현목 – 저는 배우로서 대본이 욕심났어요.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 푹 빠져 시나리오를 읽었고, 그다음에 ‘영준이는 이런 사람이었지’ 하면서 캐릭터에 집중했습니다. 이전 작품에서 성소수자 역할을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또 다른 인물이니까요. 계속 영준이를 탐구하면서 디테일을 녹여내려 했습니다.
■ 있는 그대로, 이 시대를 포착한 기록물로
Q. 감독 박준호는 왜 퀴어 영화를 첫 장편으로 만들었을까요?
박준호 – 제가 여수 출신인데, 거기서 한 번도 ‘내가 이 사회랑 잘 맞는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늘 내가 좀 겉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밀려나 있거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이 많이 갔고, 그 감각이 지금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2017년에 썼던 단편영화의 초고가 씨앗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법적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도 환대받지 못하지만, 그 안에는 독특하고 역사 있는 문화가 있거든요. 저는 그게 정말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그 문화가 제대로 기록된 적이 없다는 게 아쉬웠고, 그래서 영화로 남겨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획했습니다.
Q. 2017년부터 준비하셨다고 했는데, 계속 세상에 내놓을 시기를 보고 있었을 것 같아요. 왜 지금인가요?
박준호 – 준비는 했지만 이 이야기를 공개할 용기가 없었죠. 종로나 이태원이 조금만 노출돼도 커뮤니티 안에서 불안해하던 시기라 저도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 미뤄왔는데, 변희수 하사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존재만으로 삶이 막히는 현실을 보면서 ‘이제는 그만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퀴어를 교훈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냥 삶 자체를 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고, 이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거였죠. 걱정은 끝까지 있었지만, 당사자들이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더라고요.
Q.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담담하고 유쾌했습니다. 시나리오 쓰기 전에 취재를 많이 하셨겠어요.
박준호 - 영화를 만들기 전에 3년 정도 탈북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 뵌 분들을 보면 정말 당당하게 살아가시거든요. 그런데 기존 매체에서는 탈북자를 비극적으로만 그리거나 북한 생활과 탈북 과정만 반복해서 보여주잖아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지는 않지만, 이들을 대변하고 싶었어요. 탈북 커뮤니티와 게이 커뮤니티는 주류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내부의 관계도 꽤 비슷하다고 느꼈고, 두 집단을 나란히 보여주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로 엮게 됐습니다.
Q. 영화에 나오는 배경이 세트가 아니라 100% 실제 로케이션이던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요? 섭외나 촬영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박준호 - 저는 한국 게이 커뮤니티만큼 역동적인 곳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동갑 모임, 번개 같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집단 문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잖아요. 저는 이런 문화를 영화에 꼭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희가 종로3가랑 이태원에서 촬영했는데, 이곳은 지금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변화가 너무 빨라요. 1년만 지나도 가게가 다 바뀌어요. 저는 그 공간들을 일종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건 기록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게 되었어요. 촬영 협조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들 적극적으로 찍으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 ’누구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Q. 제가 세 분을 옆에서 보는데 ‘삼총사’처럼 잘 어울려요. 촬영할 때도 호흡이 잘 맞으셨어요?
김현목 - 즐겁게 촬영했어요. 조유현 배우와 제가 실제 동갑이어서 금세 가까워졌어요. 감독님과 장면이나 캐릭터를 두고 얘기를 많이 나눴고요.
박준호 – 가끔 제가 감정의 강도나 결을 조금씩 조절하면서 여러 번 찍자고 한 적은 있죠. 그런데 결국 처음 찍는 걸로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김현목, 조유현 (웃음)
조유현 – 철준은 제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이고 함경북도 사투리를 쓰잖아요. 감독님이 북한에서 오신 선생님을 소개해 주셔서 함께 대본을 읽으며 계속 연습했어요. 사투리나 장시간 촬영이 처음이어서 촬영 초반에 많이 힘들었는데, 어색하고 서툴렀던 것이 점점 적응되더라고요. 제가 편해지는 그 감각이 영화 속 철준이가 적응해가는 상황이랑 비슷했어요. 제가 느끼는 걸 최대한 활용하고 연기에 가져가려고 했어요.
김현목 – 저는 제가 맡은 영준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이라고 생각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영준이가 철없이 귀엽고 위트 있는 인물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있을 법한 감정들, 밝은 에너지 안에 숨겨진 결이나 무게 같은 것들에 더 집중해서 연기하고 싶었어요.
Q. 영화에서 철준과 영준이 계속 자기소개서를 쓰잖아요. 훗날 여러분의 ‘자소서’에는 이 작품을 어떻게 기록할 것 같아요?
김현목 - (컴퓨터 자판 치는 시늉 내며) “3670?... (고개 갸웃) 맞다! 맞다! 내가 그 작품 했었죠?” (웃음) 농담이고요. 제게는 2025년을 떠올리게 할 소중한 작품이지요.
조유현 - ‘3670’은 제게 ‘초심’이에요. 이 작품이 제 데뷔작이라는 게 제게 큰 자부심입니다.
Q. 아까 관객들에게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혹시 캐나다 관객들에게 묻고 싶은 건 없었는지 궁금해요.
김현목 – “영준이가 캐나다 선택한 거, 잘한 결정이라고 보세요?”라고 묻고 싶었어요. 영준이가 철준이 앞에서 “나도 퀴어 친화적인 곳 가서 손도 잡고 길도 걷고, 나다운 도전해보고 싶다”며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캐나다 사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했어요. “여기도 보수적인 시선 많다, 결국 한국이랑 비슷할 거다”라고 하실 수도 있고 “그래도 한국보단 낫다”라고 하실 수도 있잖아요.
Q. 제게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다 행복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겠니?”라는 대사와 엔딩곡 ‘회전목마’였어요.
박준호 – 두 장면 모두 제게 의미가 커요. 철준이처럼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마음을 그 대사에 담았어요. 영화 포스터에도 이 대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또 누군가를 만나고, 상처 주고받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철준의 인생에서도 반복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엔딩곡으로 ‘회전목마’를 고른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원래 염두에 두었던 곡이 다른 영화에 먼저 쓰여 고민했는데, 우연히 ‘회전목마’를 알게 됐어요. 처음부터 정해놓았던 건 아니지만 영화가 스스로 끌어온 노래 같다고 할까요. 그런 우연이 영화 작업의 묘미이자 신기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셋이 만나게 된 것도 마찬가지고요.
조유현 - 철준이가 마지막에 롱테이크로 ‘회전목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장면에 감동받았다는 분들이 많아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저는 ‘성장의 순간’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성장은 잘 안 보이지만 어느 순간 한 단계 성장한 것이 딱 드러나게 되잖아요. 그 순간을 관객이 본 거죠. ‘성장하는 사람’이 가장 매력적이라는 말처럼, 그 지점에서 공감이 터졌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저도 그 장면에 제 성장의 순간이 담겨 있다고 느꼈고요. 그래서 이 영화를 어떤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보면서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큽니다.
사진=VIFF 센터에서, 왼쪽부터 조유현 배우, 박준호 감독, 김현목 배우.
Q. 밴쿠버에 오셨으니 이곳에 계신 교민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시겠어요?.
박준호 – 주인공 철준이 새로운 커뮤니티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깨닫잖아요.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외롭고 버티고 있었구나. 그걸 알게 되면서 철준도 조금 성장하고요.
미국이나 캐나다에 사시는 분들도 어떤 이유로든 각자 자기 자리에서 고단한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제 영화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가 언제든 첫 발을 내디딜 때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봐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글·사진=밴쿠버 중앙일보 이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