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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정점에서 윤리의 무게에 눌리다…천국부터 지옥까지

Los Angeles

2025.10.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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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와 감독 1963년작 ‘지옥과 천국’ 리메이크
스파이크 리, 신자유주의 시대 정체성·도덕 탐색
납치 사건이 드러낸 돈·명예·도덕의 불안한 균형
뉴욕, 배경 아닌 세계관,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
스파이크 리 감독은 일본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갈등을 다룬 아키라 구로자와 감독의 원작을 현대 미국, 음악 산업, 자본과 미디어 권력 영역으로 확장한다. [A24]

스파이크 리 감독은 일본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갈등을 다룬 아키라 구로자와 감독의 원작을 현대 미국, 음악 산업, 자본과 미디어 권력 영역으로 확장한다. [A24]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60년 전 일본의 전설적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천국과 지옥(High and Low)’을 통해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이 질문을 오늘 뉴욕 한복판에 다시 던진다. 그리고 답한다. “지금의 천국은 너무 높아서 그 안에서도 지옥이 보인다”라고.
 
스파이크 리의 ‘천국부터 지옥까지(Highest 2 Lowest)’는 구로사와의 1963년작의 리메이크다. 납치된 아이, 몸값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 그리고 부자와 빈자의 대립 등 줄거리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중심축은 완전히 다르다.
 
‘천국부터 지옥까지’는 리메이크라기보다는 구로사와의 60년 전 질문에 대한 스파이크 리의 ‘응답’에 가깝다. 구로사와가 자본주의 초기의 계급 사회를 통해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을 묘사했다면 스파이크 리 감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체성과 이미지에 투영된 흔들리는 윤리를 탐색한다.
 
리는 구로사와의 그림자 위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시대 윤리에 대한 ‘리믹스’다. 구로사와가 이야기했던 도덕의 무게를 리는 음악과 이미지의 진동으로 다시 연주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는 리듬으로.
 
덴젤 워싱턴의 강렬한 존재감이 다시금 느껴지는 영화. 음악계의 거물 데이비드 킹은 도덕과 윤리적 딜레마에 휘말린 복합적인 인물이다. [A24]

덴젤 워싱턴의 강렬한 존재감이 다시금 느껴지는 영화. 음악계의 거물 데이비드 킹은 도덕과 윤리적 딜레마에 휘말린 복합적인 인물이다. [A24]

영화는 음악계의 거물 데이비드 킹(덴젤 워싱턴)이 뉴욕의 고층 펜트하우스에서 맨해튼 전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킹의 야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가 처한 재정적 위기가 암시된다.
 
킹의 아들 트로이가 납치된다. 납치범은 몸값 1750만 달러를 요구한다. 하지만 곧 납치된 아이는 데이비드의 친구 카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데이비드는 의도치 않게 친구의 가족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에 갈등한다.
 
몸값을 지불해야 할지,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회사 지분을 포기해야 할지를 놓고 딜레마에 빠진다. 처음엔 지불을 거부하지만 자신의 공적 이미지나 친구와의 관계, 윤리적 책임 등이 개입되면서 결국 돈을 지불하기로 결정한다.
 
납치범과의 협상 끝에 돈을 건네기로 하고 킹이 직접 현장에 나간다. 범인과의 대치 상황에 이어 마침내 돈과 아이를 교환하는 장면에서 범인이 킹의 주변 인물 래퍼 영 펠론임이 밝혀진다. 그는 데이비드와 개인적·사업적 관계에 얽혀 있던 인물이다.
 
킹이 펠론을 자신의 레이블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지속해서 충돌했다. 래퍼의 야망과 분노가 갈등의 증폭제 역할을 했다. 펠론은 체포되고 그가 훔쳐간 돈도 회수된다. 영화는 킹의 가족이 펜트하우스에 모여 신예 아티스트 술라의 노래를 듣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시작이다.
 
데이비드 킹은 엄청난 부를 이룬 흑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다. 그는 백인 권력의 전유물이던 초호화 고층 건물의 펜트하우스에 산다. 그러나 그가 오른 정상의 빛 아래에는 여전히 가난과 분노가 뒤엉켜 있다.
 
랩 스타, 스트리트 청년, 실패한 뮤지션들이 뒤섞인 브롱크스의 거리 출신 영 펠론은 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소외된 세대의 초상이다. 그는 ‘악’이 아니라 자본주의 언어로부터 추방된 목소리다. 돈과 성공, 이미지로만 말하는 세상에서 그는 자기 언어를 박탈당했다. 그에게 랩은 복수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의 언어다. 분노에 찬 랩 뮤직은 침묵 당한 세대의 외침이다.
 
스파이크 리의 모든 영화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내러티브와 정체성의 핵심 언어로 작동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구로사와 원작의 정적 구도를 리듬으로 치환한다. 음악은 인종·정치·감정을 연결해 스토리의 흐름을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대사보다 먼저, 그리고 화면보다 더 직접 음악으로 세상의 불평등에 접근한다. 킹과 펠론의 대결 구도 역시 랩 배틀 스타일의 음악으로 처리된다. 감정적 대립, 힘의 논리, 명예와 돈의 유혹 등이 뒤섞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힙합 비트, 거리의 불빛, 인물의 호흡이 하나의 진동으로 얽힌다. 음악에 맞춰 카메라가 현란하게 움직인다.
 
원작은 1960년대 전후 일본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했고, 계급 갈등이 주된 맥락을 이루며 도덕과 자본이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스파이크 리는 그 구조를 21세기 뉴욕, 흑인 음악 산업의 세계로 옮겨온다. 구로사와가 ‘고정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봤다면 스파이크 리 감독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사회의 리듬을 포착한다.
 
현대 미국, 특히 흑인 커뮤니티, 음악 산업, 자본과 미디어 권력의 관계 등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의 미장센은 절제 대신 불안정함으로, 명암 대비 대신 네온의 과잉으로 사회를 비춘다.
 
스파이크 리는 뉴요커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리듬, 고독, 다문화의 긴장, 아이러니한 유머를 영화 언어로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뉴욕은 배경이 아니라 세계관 그 자체로 다루어진다. 이 영화에서 만나는 뉴욕은 분노와 사랑이 공존하고 재즈와 힙합이 흐르는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덴젤 워싱턴의 강렬한 존재감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는 윤리와 내면, 리듬과 침묵을 동시에 통제하는 절제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워싱턴의 권위와 위엄이 넘치는 카리스마가 너무 강렬한 탓에, 조연이나 주변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옅어 보인다.
 
워싱턴이 연기하는 데이비드 킹은 성공한 음악계의 거물이지만, 도덕과 욕망, 명예와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부와 명성의 정점에서 윤리적 균열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과 성공의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고뇌한다. 워싱턴의 연기는 이 내적 진동을 표정보다 침묵으로, 감정보다 리듬으로 표현한다. 대사 사이의 공백, 눈빛의 흔들림, 말끝의 미묘한 떨림이 그가 내면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관객은 그의 절제된 연기 속에서 도덕적 불안의 떨림을 감지한다.
 
스파이크 리는 결코 킹을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윤리적 혼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켜내려는 한 남자의 초상으로 바라본다. 워싱턴은 그 무게를 절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힘으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영화의 핵심은 윤리의 유효기간이다. 데이비드 킹은 돈을 지불하고도 구원받지 못한다. 구조적 부조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공허할 뿐이다. 너무 높아 못 오르는 천국, 그 안에도 지옥이 있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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