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60년 전 일본의 전설적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천국과 지옥(High and Low)’을 통해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이 질문을 오늘 뉴욕 한복판에 다시 던진다. 그리고 답한다. “지금의 천국은 너무 높아서 그 안에서도 지옥이 보인다”라고. 스파이크 리의 ‘천국부터 지옥까지(Highest 2 Lowest)’는 구로사와의 1963년작의 리메이크다. 납치된 아이, 몸값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 그리고 부자와 빈자의 대립 등 줄거리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중심축은 완전히 다르다. ‘천국부터 지옥까지’는 리메이크라기보다는 구로사와의 60년 전 질문에 대한 스파이크 리의 ‘응답’에 가깝다. 구로사와가 자본주의 초기의 계급 사회를 통해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을 묘사했다면 스파이크 리 감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체성과 이미지에 투영된 흔들리는 윤리를 탐색한다. 리는 구로사와의 그림자 위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시대 윤리에 대한 ‘리믹스’다. 구로사와가 이야기했던 도덕의 무게를 리는 음악과 이미지의 진동으로 다시 연주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는 리듬으로. 영화는 음악계의 거물 데이비드 킹(덴젤 워싱턴)이 뉴욕의 고층 펜트하우스에서 맨해튼 전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킹의 야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가 처한 재정적 위기가 암시된다. 킹의 아들 트로이가 납치된다. 납치범은 몸값 1750만 달러를 요구한다. 하지만 곧 납치된 아이는 데이비드의 친구 카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데이비드는 의도치 않게 친구의 가족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에 갈등한다. 몸값을 지불해야 할지,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회사 지분을 포기해야 할지를 놓고 딜레마에 빠진다. 처음엔 지불을 거부하지만 자신의 공적 이미지나 친구와의 관계, 윤리적 책임 등이 개입되면서 결국 돈을 지불하기로 결정한다. 납치범과의 협상 끝에 돈을 건네기로 하고 킹이 직접 현장에 나간다. 범인과의 대치 상황에 이어 마침내 돈과 아이를 교환하는 장면에서 범인이 킹의 주변 인물 래퍼 영 펠론임이 밝혀진다. 그는 데이비드와 개인적·사업적 관계에 얽혀 있던 인물이다. 킹이 펠론을 자신의 레이블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지속해서 충돌했다. 래퍼의 야망과 분노가 갈등의 증폭제 역할을 했다. 펠론은 체포되고 그가 훔쳐간 돈도 회수된다. 영화는 킹의 가족이 펜트하우스에 모여 신예 아티스트 술라의 노래를 듣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시작이다. 데이비드 킹은 엄청난 부를 이룬 흑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다. 그는 백인 권력의 전유물이던 초호화 고층 건물의 펜트하우스에 산다. 그러나 그가 오른 정상의 빛 아래에는 여전히 가난과 분노가 뒤엉켜 있다. 랩 스타, 스트리트 청년, 실패한 뮤지션들이 뒤섞인 브롱크스의 거리 출신 영 펠론은 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소외된 세대의 초상이다. 그는 ‘악’이 아니라 자본주의 언어로부터 추방된 목소리다. 돈과 성공, 이미지로만 말하는 세상에서 그는 자기 언어를 박탈당했다. 그에게 랩은 복수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의 언어다. 분노에 찬 랩 뮤직은 침묵 당한 세대의 외침이다. 스파이크 리의 모든 영화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내러티브와 정체성의 핵심 언어로 작동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구로사와 원작의 정적 구도를 리듬으로 치환한다. 음악은 인종·정치·감정을 연결해 스토리의 흐름을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대사보다 먼저, 그리고 화면보다 더 직접 음악으로 세상의 불평등에 접근한다. 킹과 펠론의 대결 구도 역시 랩 배틀 스타일의 음악으로 처리된다. 감정적 대립, 힘의 논리, 명예와 돈의 유혹 등이 뒤섞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힙합 비트, 거리의 불빛, 인물의 호흡이 하나의 진동으로 얽힌다. 음악에 맞춰 카메라가 현란하게 움직인다. 원작은 1960년대 전후 일본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했고, 계급 갈등이 주된 맥락을 이루며 도덕과 자본이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스파이크 리는 그 구조를 21세기 뉴욕, 흑인 음악 산업의 세계로 옮겨온다. 구로사와가 ‘고정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봤다면 스파이크 리 감독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사회의 리듬을 포착한다. 현대 미국, 특히 흑인 커뮤니티, 음악 산업, 자본과 미디어 권력의 관계 등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의 미장센은 절제 대신 불안정함으로, 명암 대비 대신 네온의 과잉으로 사회를 비춘다. 스파이크 리는 뉴요커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리듬, 고독, 다문화의 긴장, 아이러니한 유머를 영화 언어로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뉴욕은 배경이 아니라 세계관 그 자체로 다루어진다. 이 영화에서 만나는 뉴욕은 분노와 사랑이 공존하고 재즈와 힙합이 흐르는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덴젤 워싱턴의 강렬한 존재감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는 윤리와 내면, 리듬과 침묵을 동시에 통제하는 절제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워싱턴의 권위와 위엄이 넘치는 카리스마가 너무 강렬한 탓에, 조연이나 주변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옅어 보인다. 워싱턴이 연기하는 데이비드 킹은 성공한 음악계의 거물이지만, 도덕과 욕망, 명예와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부와 명성의 정점에서 윤리적 균열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과 성공의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고뇌한다. 워싱턴의 연기는 이 내적 진동을 표정보다 침묵으로, 감정보다 리듬으로 표현한다. 대사 사이의 공백, 눈빛의 흔들림, 말끝의 미묘한 떨림이 그가 내면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관객은 그의 절제된 연기 속에서 도덕적 불안의 떨림을 감지한다. 스파이크 리는 결코 킹을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윤리적 혼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켜내려는 한 남자의 초상으로 바라본다. 워싱턴은 그 무게를 절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힘으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영화의 핵심은 윤리의 유효기간이다. 데이비드 킹은 돈을 지불하고도 구원받지 못한다. 구조적 부조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공허할 뿐이다. 너무 높아 못 오르는 천국, 그 안에도 지옥이 있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지옥 천국 관계 윤리적 거물 데이비드 지옥 사이
2025.10.15. 20:39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옥을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불교 잡지를 읽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그림까지 보니 더 아찔했습니다. 지옥은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옥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지금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 많았습니다. 우울증이니 불안이니 공황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말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삶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을까요? 안타까운 선택이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람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느낌입니다. 잔인한 장면은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할 겁니다. 사지가 찢기고,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고, 소에게 짓눌리고, 칼에 찔리고 등등.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삶에서 느끼는 지옥은 엄살 같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면서 저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겪는 괴로움, 맛보는 지옥은 심리적인 게 많습니다. 우선 자식이 아프고, 가족이 아픈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예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은 지옥 그대로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 맞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사는 게 천국이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옥과 천국이 논리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고 천국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살면서 천국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소망입니다. 죽어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죽어서 천국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도 있겠죠. 지옥은 죽어서라도 갈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천국은 살아서 맛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꽃이 만발한 동산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남녀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정의가 참 어렵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꽃에 날아온 벌레를 끔찍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매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면 오히려 그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천국이 간단합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면 그게 천국입니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 곳은 죽어서 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죽어서는 못 가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이 가능하죠.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이 천국의 다른 말로 들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쁘고 즐거운 표정입니다. 꽃은 웃음꽃이 천국의 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가 늘 천국입니다. 예전에 천국 그림에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는 남편의 모습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천국 참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옥 천국 천국 그림 불교 잡지 우리 속담
2025.09.21. 18:37
LA 웨스트우드의 고급 주택가가 최근 수년간 지속된 한 채의 문제 주택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이 집에 대한 주민들의 호칭은 "지옥의 집(Hell House)"이다. 이 주택은 샌타모니카 블러버드 인근, 웨스트필드 센추리 시티 몰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한 쌍의 노년 남매 소유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 집에 각종 무단 침입자와 노숙자, 방문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면서 인근 주민들이 공포와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집 주변에서는 대낮에도 마약 거래로 보이는 행위, 노상방뇨, 쓰레기 무단 투기, 창문이나 울타리를 넘어드는 침입 행위, 심지어 성매매로 의심되는 상황까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부 방문자들은 이웃 여성들을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 집에 거주 중인 남매는 이에 대해 "이웃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집을 비운 사이 침입자들이 들어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자신들 역시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차에서 자는 이유는 집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현재 주민들은 15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시의원에게 민원을 전달한 상태이며, 시가 이 집을 ‘공공 유해 장소(public nuisance)’로 규정하고 행정 조치를 취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AI 생성 기사웨스트우드 지옥 웨스트우드 지옥 la 웨스트우드 인근 주민들
2025.05.22. 16:01
얼마나 될까 천국과 지옥의 거리 하늘과 땅, 아니면 밤하늘 별만큼 멀까 얼마의 세월일까 이승과 저승 전생과 이생 눈감아 생각하니 어제 죽은 이는 오늘이 저승 내일 태어날 아인 오늘이 전생이라 나 서있는 바로 이 자리 저승이며 내생인 것을 그대 진정 후회 없이 감사한 오늘을 살았는가 지금이 천국 일세 그대 세상 원망하며 괴로운 날 보냈는가 그날이 바로 지옥인 걸 천국과 지옥은 아주 가까운 한 뼘 그대 가슴에 있다네 강언덕 / 시인문예마당 천국 지옥 전생과 이생 그대 가슴
2025.04.17. 18:31
한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정치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정말로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지옥’이라는 말은 형용 모순입니다. 지옥이 어떻게 좋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백 년 전에 루쉰이 쓴 산문시 ‘잃어버린 좋은 지옥’을 보면 ‘좋은 지옥’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말을 통해서만 진실이 포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화자 ‘나’는 지옥 근처에서 지옥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지옥의 소리는 지옥답습니다. 그때 홀연 마귀가 나타납니다. 한때 지옥의 통치자였으나 이제 지옥을 인류에게 빼앗기고 도망쳐온 마귀가 “이제 다 끝났네, 이제 다 끝났어! 불쌍한 귀신들은 그 좋은 지옥을 잃어버렸어!”라고 비분강개하며 ‘나’에게 그 전말을 알려줍니다. 원래 지옥은 천신(天神)의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천신과 싸워 이겨 빼앗았던 것이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옥의 통치는 해이해졌습니다. 그러자 칼의 숲은 빛을 잃었고, 끓는 기름도 식었고, 불구덩이도 미지근해졌고, 비록 작고 창백하지만, 만다라 꽃이 움텄습니다. 해이해진 지옥에서 귀신들이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귀신들은 갑자기 인간 세상을 기억해내고 지옥에 반대하는 절규를 터뜨렸습니다. 인류가 그 소리에 응해 일어났고, 마귀와 싸웠고, 싸워 이겼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인류의 것입니다. 이제 인류가 지옥을 통치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상황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집니다. 인류는 마귀보다 더 무서운 통치자가 됩니다. 귀신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다스림을 받는 자일 뿐이며, 인류의 무서운 통치 아래 더욱 무력해지고 더욱 고통받습니다. 귀신들이 지옥에 반대하는 절규를 터뜨려도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영원한 고통이라는 벌을 받고 칼의 숲 복판으로 쫓겨날 뿐입니다. 이러한 지옥의 현재 모습을 마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만다라 꽃은 금세 시들었어. 기름은 똑같이 끓었고, 칼은 똑같이 날카로웠고, 불은 똑같이 뜨거웠고, 귀신들은 똑같이 신음했고, 똑같이 몸부림쳤고, 심지어 잃어버린 좋은 지옥을 기억할 겨를조차 없어졌어.” 마귀가 통치하던 과거의 지옥이 상대적으로 더 좋은 지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좋은 지옥’이라는 형용 모순이 확실히 성립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신을 청나라, 마귀를 베이징 군벌정부, 인류를 국민당 우파와 그들이 장악한 국민정부라고 보는 해석인데,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럴듯하지는 않습니다. 루쉰이 이 작품을 쓴 때가 1925년 6월이었고, 국민당 우파의 쿠데타는 1927년 4월이었으니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루쉰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다며 그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억지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권력은 동일하며 단지 위치가 바뀔 뿐이라는 보편적 진실입니다. 청나라나 베이징 군벌정부나 국민정부나, 그 이후 지금까지의 여러 형태의 정부들도 모두, 나아가서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각종 정부도, 그 보편적 진실에 비추어 보면 다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루쉰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 봅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통치자가 누구든 간에 피통치자는 언제나 귀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옥의 주민은 누구입니까? 귀신들입니다. 그렇다면 귀신들이 스스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일까요? 자치(自治)는 불가능한가요? 왜 통치를 귀신들 자신이 아니라 천신이 하고 마귀가 하고 인류가 해야 하는 건가요? 귀신들이 자치하지 못하고 통치받는 자로서만 존재하는 한에는 다 똑같은 지옥이고, 통치 기술이 갈수록 더 발달하기 때문에 지옥은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질 것입니다. 자문해 봅시다. ‘나’는 귀신인가요, 인류인가요? ‘우리’가 사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부른다면 지옥의 주민인 ‘우리’는 인류가 아니라 귀신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인류라고 믿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수 있습니다. 지옥의 귀신들에게 ‘잃어버린 좋은 지옥’이라는 말은 너무나 슬픈 말입니다. 성민엽 / 문학평론가문학으로 세상읽기 지옥 정치 해이해진 지옥 지옥 근처 한때 지옥
2024.09.02. 16:37
“여기서 나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가 웃는다. “그러면 저들이 당신을 가능한 한 빠르게 치워버릴 거예요.”…나는 여기에 얼마나 더 있게 될까?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물 밑에 갇혀 있고 수면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수면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캐서린 조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여기’란 정신병원이다.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를 기다렸고, 사랑스런 아이가 태어났다. 백일잔치를 앞둔 어느 날 아이를 침대에서 안아 올리려는데 아들의 눈이 “악마의 눈으로 바뀌었다”. 호흡이 짧아지고 방안의 벽이 두꺼워졌다. 미친 듯 집에서 뛰어나왔다. 누군가 쫓는 것 같아 SNS 계정을 다 지웠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출산 후 환청과 망상을 동반한 산후정신증에 시달린 기록을 책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한동안 작가는 자신이 출산한 사실도, 아이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출산은 축복이지만 모성이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산후우울증을 경험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산후정신증에 대한 생생한 고백이자 모성신화를 예리하게 비트는 책으로, 가디언 등이 2020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부제가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다. 그에게 한국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한국의 해녀는 모두 여성이다.…이들이 파도를 헤치고 깊이 잠수해 들어가면서 심청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나는 이들이 진주를 발견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눈물과 같은 진주, 바다 여왕의 선물.”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눈동자 지옥 한국 여성 모성과 광기 수면 위로
2023.07.12. 18:38
“저희 엊그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사 왔어요.” 한동안 뜸했던 김 교수님에게서 온 소식이다. 교수님은 커뮤니케이션 분야 은퇴 교수로 파킨슨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여러 해 동안 간호했다. 그러다 본인이 뇌졸중으로 1년 반 전 아들이 사는 근처 시애틀 요양원으로 갑작스레 들어갔다. 5명의 환자가 멤버인 개인 요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의 삶에 채 적응도 하기 전 바로 건너편 방에 거주하던 NASA 엔지니어 출신 분이 들것에 실려 나가 영 돌아오지 않는 일을 목격했다고 한다. 5명 중 한 명이 숨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다음 날도 나머지 4명의 방으로 환자가 먹는지 마는지, 로봇처럼 세끼 밥그릇을 들여놓고 들고 나가는 로봇 하우스 같은 요양원. ‘지옥’ 과 다를 바 없다고 괴로워 하시던 그 열악한 요양원에서 얼마나 더 계셔야 하나, 멀리서 답답해하던 중 날아온 반가운 소식이다. 교수님이 그 ‘지옥’ 같았던 요양원에서 이제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날의 꿈이었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불편한 손으로 수많은 수채화를 그려내시며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지난여름에는 그분의 주옥같은 그림을 아끼던 미술 교수들의 주선으로, 은퇴 전 가르치셨던 마운트 버넌 나자린 대학교(Mount Vernon Nazarene University)와 고향 제주도 용담문화센터에서, ‘마지막 불꽃’ 이란 주제로 전시회도 가졌었다. 그분이 드디어 ‘천국’으로 이사하셨다는 소식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시설인 노세이븐 어시스트 리빙으로 들어가신 것. 40여 명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3층 방 창문 밖으로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을 내다 볼 수 있고 밤에는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감격해 하신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나자렛과 인도에서 온 파마인더, 엘살바도르에서 온 제니퍼 등 천사같은 3명의 도우미들의 초상화와 함께 교수님의 미술 클래스가 스케줄에 들어간 팸플릿도 보내주셨다. 체크무늬 반소매 셔츠차림으로 회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열정적인 옛 모습이 확연하다. 언젠가는 우리가 모두 다 가야 할 길. 인생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더는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는 때가 올 것이고, 그때 더러는 노인단지를 거쳐 양로원의 삶을, 혹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요양원에서 서글픈 끝을 맺을 것이다. 교수님은 졸지에 요양원을 미리 경험하시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시설로 다시 되돌아오신 것. 지옥같은 삶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노세이븐 시설이 천국처럼 감격스러운 교수님. ‘천국’에 입성하신 것을 교수님과 함께 기뻐하며 ‘천국’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해 본다. 김찬옥 / 수필가이 아침에 지옥 천국 미술 교수들 개인 요양원 nazarene university
2022.07.25. 18:50
최근 필자는 한국을 3주간 다녀왔다. 한국 여행의 후유증인지 내가 살던 미국이 낯설게 느껴진다. 시차 적응하랴 현실 적응하랴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세월을 뒤돌아보면 미국에서 뼈를 묻으리라 결심하고 이민을 왔다. 그래서 더욱 이민생활에 정착하고자 하여 한국 드라마, 영화, 가요 등도 일부러 접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 애들이 커가며 대학에 들어가니 혼란스럽다. ‘나는 왜 미국에 있는 것일까’ ‘더 잘 살기 위해서인가’ ‘애들 교육을 위해서인가’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나름 미국에서 이루고 싶은 것은 소소하게 이루고 나니 이제 미국 생활만이 길인가를 재고하게 된다. 한국에 나갈 때마다 이제는 한국이 더 잘 산다는 느낌이 든다. 집값도 한국이 더 높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외제 차도 많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며 깨끗한 거리에서 최신 IT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누리며 사는 한국 국민이 너무 세련되어 보인다. 한국이 더 외국 같은 느낌이다. 미국에 살다 보면 땅덩이는 넓지만 사는 반경은 제한적이다. 한인과 주로 교제하고 한인교회에 다니며 한인 마켓에만 다니게 된다. 생활 반경이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영화 세트처럼 뱅뱅 도는 느낌이다. 한국은 곳곳이 다 볼거리다. 감성 넘치는 힙한 카페들도 넘쳐난다. 문화 전시회, 미술관, 축제, 동네 행사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다. 게다가 마음껏 한국말을 쓸 수 있다는 점은 미국에서 언어로 인한 긴장감에서 해방될 수 있어 좋다. 다만, 한국에 3주째 있다 보니 사람들과 빽빽한 높은 건물로 서울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때마침 찾아온 장마도 하루 이틀 접하고 나니 이제는 남가주의 청명한 날씨가 그립다. 심화한 양극화도 문제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분위기다. 운전할 때 차선 변경 시 잘 끼워주지도 않는다. 어느새 같이 한국식으로 운전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아파트에 몇 주 머무르다 보니 층간 소음이 뭔지 체감도 해봤다. 운전하다 보면 과속 카메라는 왜 이리 많은지 캘리포니아의 프리웨이가 그립다. 결국, 처음에는 좋았는데 몇 주 있어 보니 미국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다시 한국이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제 한국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 미국에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교육도 입시학원에서 스펙을 쌓게 한 뒤 미국 대학에 곧바로 유학을 보낸다. 미국이 한국보다 월등히 잘 사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스타일로 살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물리적인 국적보다는 나의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어느 환경에 맞는가로 사는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필자의 경우 이민 중 얻은 최고의 혜택은 미국에서 신앙이 자란 점이다. 한국에서 있었다면 음주와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자기 성찰과 함께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싶다. ‘주님, 지금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다. 기존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타지에 어쩔 수 없이 정착할 숙명이었다면 이제는 노마드 적인 디아스포라의 의미도 고민해 봐야 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지옥 천국 한국 드라마 한국 여행 한국 국민
2022.07.18. 18:51
요즘 지옥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드라마 ‘지옥’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그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떠올렸다. ‘저게 말이 되나. 유아적 망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비 종교, 공포정치 등이 연상돼서였다. 드라마 속 지옥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개념은 종교 안에서도 비슷하다. 지옥론이 종교계에서 거론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문맹이기에 일명 지옥도라는 그림으로 가르침을 준듯하다. 지옥도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있다. 드라마를 본 많은 이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지를 궁금해한다.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지옥’과 ‘사랑이신 신’의 존재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신이 자기 창조물을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 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생의 불공평성을 놓고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상은 태어날 때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을 때도 불공평한데,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여 지옥행을 결정한다면 그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대개 심리적으로 병적인 종교인이 만든 지옥론에 대한 반박이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지옥은 신이 인간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신을 버린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성인들은 천당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신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옥 같은 가정 안에서 살던 기억이 종교까지 연장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공포 신앙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 으뜸은 공포심이다. 군부 독재 통치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포정치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안다. 위축된 자아, 정신적 질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감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 신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가학-피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세가톨릭은 지옥론으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였고, 이런 방법이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중세에 머무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옥론은 신자들을 노예화하지만 반대로 교주는 신격화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판단자인 듯이 선민의식을 가진다. 자신에게 천국행 선발권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병적인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화살촉’ 같은 자들이 설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서 열등감과 권력욕을 채우려는 인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단이니 악마니 하며 마녀사냥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자들을 보면서 지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약 그런 자들을 보내는 지옥이 없다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들에게 지옥문이 열려서 드라마에 나오는 사자들이 데려가길 학수고대한다. 지금 사는 것이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지옥살이를 면하게 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기고 드라마 지옥 지옥 불구덩이 요즘 지옥 사이비 종교
2021.12.27. 17:32
요즘 지옥 이야기가 자주 회자한다. 드라마 ‘지옥’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그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떠올렸다. ‘저게 말이 되나. 유아적 망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비 종교, 전두환 시절의 공포정치, 보안사와 제주 4·3 사건 등이 연상돼서였다. 드라마 속 지옥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개념은 종교 안에서도 비슷하다. 지옥론이 종교계에서 거론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문맹이기에 일명 지옥도라는 그림으로 가르침을 준듯하다. 지옥도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있는데, 불교계의 지옥이 더 다채롭게 표현된다. 드라마를 본 많은 이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지를 궁금해한다.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지옥’과 ‘사랑이신 신’의 존재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신이 자기 창조물을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 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생의 불공평성을 놓고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상은 태어날 때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을 때도 불공평한데,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여 지옥행을 결정한다면 그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대개 심리적으로 병적인 종교인이 만든 지옥론에 대한 반박이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지옥은 신이 인간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신을 버린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성인들은 천당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신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옥 같은 가정 안에서 살던 기억이 종교까지 연장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공포 신앙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 으뜸은 공포심이다. 군부 독재 통치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포정치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안다. 위축된 자아, 정신적 질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감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 신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가학-피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세가톨릭은 지옥론으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였고, 이런 방법이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중세에 머무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옥론은 신자들을 노예화하지만 반대로 교주는 신격화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판단자인 듯이 선민의식을 가진다. ‘14만4000명’처럼 숫자로 사람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천국행 선발권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병적인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화살촉’ 같은 자들이 설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서 열등감과 권력욕을 채우려는 인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단이니 악마니 하며 마녀사냥을 한다.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종교 안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자들을 보면서 지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약 그런 자들을 보내는 지옥이 없다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들에게 지옥문이 열려서 드라마에 나오는 사자들이 데려가길 학수고대한다. 지금 사는 것이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지옥살이를 면하게 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지옥 드라마 지옥 불구덩이 요즘 지옥 공포정치 보안사
2021.12.26. 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