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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트렌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던지는 질문들

Los Angeles

2025.10.2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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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욕에서 한국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영어제목: Maybe Happy Ending)'을 보게 됐다. 한국에서 유명세를 얻은 이 작품은 미국 배우들과 감독에 의해 뉴욕에서 공연되고, 많은 미국인들이 관람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공연장을 찾았다.
 
주말이라 객석은 가득 찼고, 관객 대부분이 미국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의 연기, 노래, 무대장치, 음향, 미디어, 스토리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감동의 공연이었다. 이를 보면서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되었다.  
 
이 연극에는 두 개의 휴머노이드 로봇, ‘헬퍼봇 5호 올리버’와 ‘헬퍼봇 6호 클레어’가 등장한다. 그들은 더 이상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수명이 다해 버려지고, 잊히고, 낡은 배터리와 함께 조용히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로봇들의 서사는 단순히 ‘기계가 인간처럼 변해간다’는 미래적 상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된 존재가 창조주를 닮아가는 과정’을 은유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며, 창조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뮤지컬 속 로봇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프로그램된 기능을 넘어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고, 희생을 배우며, 존재의 이유를 찾아간다.
 
이 지점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은 세기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인간이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라면, 로봇은 금속과 전선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발견하려 했던 것처럼, 로봇은 인간의 손을 떠난 뒤에야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SF적 상상력의 결과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모든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신학적 질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사랑은 결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과 희생의 결합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말씀처럼, 참된 사랑은 주는 것에서 완성된다. 올리버가 클레어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포기하는 장면은 바로 이 사랑의 신학을 닮았다.
 
뮤지컬 전반을 감싸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로봇들은 인간에게 버림받았고, 인간들은 더 이상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다. 이 고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그 단절된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결국 ‘어쩌면 해피엔딩’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상처받고, 기억을 잃어가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 그 여정 속에서 인간은 창조주를 닮아가는 존재, 즉 ‘불완전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이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은 슬프지 않다. 사랑이 남는 한, 그것은 ‘어쩌면’이 아니라 ‘분명한’ 해피엔딩이다. 사람의 기억은 지워질 수 있지만,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겨 넣으신 영원한 코드, 복음의 DNA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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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 J&B푸드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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