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를테면 서울 근교 어느 동네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고 치자. 남녀노소 모두 어둡고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대기실이 빼곡하다. 당신 아버지는 혈압이 좀 높은 것 말고 아주 건강하신 편. 정기적 피검사 차 행차하신 터.
아버지는 옆에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말을 건다. 청년은 한동안 공손한 태도로 네네 하다가 이내 더 이상 재미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기색. 급기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기실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아버지는 하시던 말씀을 끝내야겠다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그를 따라가며 계속 무슨 열변을 토하신다.
왜 노친네들은 말을 끊지 못하고 오래 힘들고 지루하게 계속하는가. 우리는 왜 말을 길게 하는가.
내 학설은 이렇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옆에서 오냐오냐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말을 할 기회가 적어지기 마련. 두뇌의 언어기능이 마비되는 느낌. 그런 이유로 자꾸만 아무 말이라도 해서 두뇌활동을 증폭시키려는 본능적 동기의식이다. 오래된 두뇌는 내버려 두면 급속히 쇠락한다. 생명의 특징은 끊임없는 ‘역동성(dynamicity)’에 있다.
말을 길게 하는 것은 시대상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요즘 당신의 셀폰에 자주 뜨는 유튜브 ‘숏츠(shorts)’의 5초 영상을 음미해 보라. 짤막한 자극이 후다닥 찌르고 지나가는 통에 당신은 움찔움찔하지 않는가.
정신감정에서 언어는 참 중요한 부분이다. ‘우회증(circumstantiality)’은 말의 속도와 흐름, 막힘과 일탈 따위를 제쳐놓고 금세 인터뷰 무드를 장악한다.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빙빙 돌며 우회하는 긴 여정을 거치는 증상이다.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은 자칫 지리멸렬해지는 소통의 위기에 처하는 상대를 도와준답시고 말을 막아서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리기도 하지만.
‘circumstantiality’는 ‘circumstance(환경, 상황)’의 명사형. 원형극장을 일컬었던 ‘circus(서커스)’, ‘circle(원)’과 말뿌리가 같다. 말이 길다는 뜻으로 ‘long-winded’가 있다. 부정적 의미다. 성경 욥기 16장 3절에 그 말이 나온다. “Is there no end to your long-winded speeches(너의 긴말에는 끝이 없는가)?” (필자 譯)
요즘 부쩍 자주 보는 정치 유튜버 중 왜들 그리들 종종 한 단어의 끝을 길게 끄는지 모르겠다. 가상적 예를 억지로 들자면, ‘이순신 장군’이라고 간명하게 발음하는 대신 ‘이순신~’ 하며 단어의 끝을 길게 끈다. 민감한 화제를 다루는 조심스러운 마음일까? 다음 말을 찾으려는 은근한 술책일까? 어딘지 비겁한 태도다.
미 남부 사투리 ‘drawl(모음을 길게 빼며 느릿느릿 말하기)’가 편하고 정겹게 들린다. 전라도와 충청도 말투는 ‘이순신~’ 케이스와는 다르게 느려도 아련한 향수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셰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햄릿’에서 강물에 빠져 죽는 햄릿의 애인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우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간결함은 지혜의 정수(Brevity is the soul of wit).”
당신 아버지가 그때 그 젊은이에게 길게 말하지 않고 짧고 간략하게 말했더라면 나중에 그가 버르장머리 없다며 화를 내시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말이 쉽지, 하겠지.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