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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잊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

Los Angeles

2025.10.29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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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리, 베이비]
선댄스가 주목한 에바 빅터 감독 첫 장편 영화
성폭력으로 멈춘 삶, 유머·인간미로 풀어낸 수작
폭력의 기억 넘어 웃음으로 이어진 치유의 여정
주변 ‘도와주는 척’ 위선적 행동 예리하게 풍자
에바 빅터 감독은 애써 치유나 결말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아그네스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들로 대치한다. [A24]

에바 빅터 감독은 애써 치유나 결말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아그네스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들로 대치한다. [A24]

트라우마는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아픈 경험이 마음이나 몸에 남긴 깊은 상처를 의미한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강렬한 공포, 위협, 상실, 폭력, 재난 등의 경험이 남긴 심리적 충격은 신체적 반응, 감정, 사고방식, 대인관계, 심지어는 자기 인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쏘리, 베이비(Sorry, Baby)'는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그러나 영화는 충격적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이후의 회복에 더 집중한다.  
 
에바 빅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쏘리 베이비’는 202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시나리오 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에바 빅터라는 이름을 단숨에 각인시킨 작품이다. ‘패스트 라이브즈’(2023, 셀린 송 감독), ‘웨딩 뱅큇’(2025, 앤드류 안 감독)처럼 선댄스가 발견한 또 하나의 수작이다.  
빅터 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고 스스로 주인공 연기한다. 프라임 비디오와 애플 TV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다. [A24]

빅터 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고 스스로 주인공 연기한다. 프라임 비디오와 애플 TV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다. [A24]

 
인디 영화의 성격이 강해 광범위한 대중성 확보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시상 시즌에 돌입하면 배급사 A24는 각본과 연출, 주연까지 겸한 에바 빅터의 다역 수행을 집중 프로모션할 것으로 예상한다. 2026년 오스카상에 최우수 각본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등의 부문에 후보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
 
‘쏘리, 베이비’는 성폭행과 트라우마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어둠에 잠기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형적인 복수나 심판 중심의 트라우마 영화와 다른 점은 ‘사건 이후의 삶’에 더 무게를 둔다는 데 있다. 빅터 감독은 성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를 블랙코미디적 유머와 섬세한 인간미로 풀어낸다. 비극과 유머, 냉소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의 결은 놀랍도록 솔직하고 투명하다.      
 
뉴잉글랜드 시골의 한 대학가, 대학원 졸업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아그네스(에바 빅터)는 여전히 같은 집에서 같은 길을 따라 학교로 향한다. 이제는 학생이 아닌 인문학 교수로 강단에 서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제자리다.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 이후 조용한 정적 속에서 이어지는 하루하루는 멈춰버린 듯하고 살아간다기보다 버티는 시간에 가깝다.  
 
영화는 명확히 구분된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그네스의 단편적인 기억을 조각내어 그 감정의 파편들이 하나의 연작처럼 펼쳐진다. 첫 번째 장은 '아기의 해(The Year with the Baby)'. 오랜 친구 리디(나오미 애키)가 찾아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전한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대화를 이어간다.
 
그들의 대화는 솔직하고 거침없다. 섹스, 외로움, 죽음까지. 그러나 그 친밀함은 곧 불안으로 이어진다. 아그네스는 아기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해달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공허가 배어 있다.  
 
리디와의 우정, 말보다 깊은 위로가 아그네스를 지탱하게 만든다. [A24]

리디와의 우정, 말보다 깊은 위로가 아그네스를 지탱하게 만든다. [A24]

대화 중, 아그네스가 대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아그네스와 리디, 그리고 몇몇 동문이 프레스턴 데커 교수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 시절 '나쁜 일이 있던 해(The Year with the Bad Thing)'로 돌아간다. 데커 교수는 아그네스의 글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에게 친밀하게 접근한다. 아그네스 또한 그의 첫 소설을 높이 사며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다.
 
어느 날 아그네스는 데커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날 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데커가 아그네스를 성폭행했음이 암시된다. 이 장면은 잔혹한 폭력의 재연이 아니라 차분하고 세밀한 기억의 복원이다. 그 이후 아그네스의 세계는 조용히 균열을 일으킨다. 깊은 혼란과 충격 속에서 그녀의 삶은 무너져 내린다.  
 
아그네스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대학 측에 사건을 알리지만 데커가 이미 직위를 내려놓은 상태라 학내 조치가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는다. 경찰에 신고할지를 묻는 말에 데커를 감옥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영화가 정의보다는 치유와 회복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아그네스의 삶은 기억이 뒤섞이고 고립감과 불안이 엄습하는 순간들로 반복된다. 흔들리는 감정, 그 혼란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되찾으려 애쓴다. 영화는 아그네스의 일상과 관계의 결을 따라가며 트라우마 이후에도 어떻게 삶이 지속하는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여기에서 유머와 일상성은 단순한 분위기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적 톤을 조율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관객은 천천히 아그네스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모임, 학생들과의 수업, 이웃과의 짧은 대화 등 삶의 작은 연대 속에서 아그네스의 내면은 조금씩 회복의 결을 찾아간다. 동물을 돌보고,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하루하루가 어느새 회복의 리듬이 된다.
 
무엇보다도 리디와의 우정이 그녀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들의 우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 침묵으로 이어지고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서로를 밀어 올린다.
 
아그네스는 세상과 멀어진 듯 보이지만 고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세계를 응시한다. 빅터 감독은 아그네스의 정직한 시선을 통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치유와 회복의 조용한 언어로 다시 써 내려 간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도와주는 척하는 위선적 행동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풍자한다. 피해자를 위하는 듯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블랙코미디의 리듬으로 읽어낸다. 행정의 무능, 형식적인 상담, 공감의 흉내 속에서 아그네스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빅터 감독은 이 모든 순간을 날카로운 관찰과 아이러니한 유머로 엮어낸다.  
 
아그네스에게 유머는 방어가 아니라 회복의 언어다. 웃음은 세계를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비극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슬픔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나는 위트야말로 ‘쏘리, 베이비’를 단순한 ‘트라우마 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드는 에바 빅터만의 고유한 표현이다.      
 
빅터 감독은 애써 치유나 결말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아그네스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들로 대치한다.  
 
트라우마는 결코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아그네스는 고통을 잊지 않지만, 그것에 잠식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미묘한 균형 위에서 상처 너머 삶의 회복 의미를 찾아낸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영화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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