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아픈 경험이 마음이나 몸에 남긴 깊은 상처를 의미한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강렬한 공포, 위협, 상실, 폭력, 재난 등의 경험이 남긴 심리적 충격은 신체적 반응, 감정, 사고방식, 대인관계, 심지어는 자기 인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쏘리, 베이비(Sorry, Baby)'는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그러나 영화는 충격적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이후의 회복에 더 집중한다. 에바 빅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쏘리 베이비’는 202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시나리오 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에바 빅터라는 이름을 단숨에 각인시킨 작품이다. ‘패스트 라이브즈’(2023, 셀린 송 감독), ‘웨딩 뱅큇’(2025, 앤드류 안 감독)처럼 선댄스가 발견한 또 하나의 수작이다. 인디 영화의 성격이 강해 광범위한 대중성 확보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시상 시즌에 돌입하면 배급사 A24는 각본과 연출, 주연까지 겸한 에바 빅터의 다역 수행을 집중 프로모션할 것으로 예상한다. 2026년 오스카상에 최우수 각본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등의 부문에 후보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 ‘쏘리, 베이비’는 성폭행과 트라우마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어둠에 잠기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형적인 복수나 심판 중심의 트라우마 영화와 다른 점은 ‘사건 이후의 삶’에 더 무게를 둔다는 데 있다. 빅터 감독은 성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를 블랙코미디적 유머와 섬세한 인간미로 풀어낸다. 비극과 유머, 냉소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의 결은 놀랍도록 솔직하고 투명하다. 뉴잉글랜드 시골의 한 대학가, 대학원 졸업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아그네스(에바 빅터)는 여전히 같은 집에서 같은 길을 따라 학교로 향한다. 이제는 학생이 아닌 인문학 교수로 강단에 서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제자리다.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 이후 조용한 정적 속에서 이어지는 하루하루는 멈춰버린 듯하고 살아간다기보다 버티는 시간에 가깝다. 영화는 명확히 구분된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그네스의 단편적인 기억을 조각내어 그 감정의 파편들이 하나의 연작처럼 펼쳐진다. 첫 번째 장은 '아기의 해(The Year with the Baby)'. 오랜 친구 리디(나오미 애키)가 찾아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전한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대화를 이어간다. 그들의 대화는 솔직하고 거침없다. 섹스, 외로움, 죽음까지. 그러나 그 친밀함은 곧 불안으로 이어진다. 아그네스는 아기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해달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공허가 배어 있다. 대화 중, 아그네스가 대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아그네스와 리디, 그리고 몇몇 동문이 프레스턴 데커 교수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 시절 '나쁜 일이 있던 해(The Year with the Bad Thing)'로 돌아간다. 데커 교수는 아그네스의 글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에게 친밀하게 접근한다. 아그네스 또한 그의 첫 소설을 높이 사며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다. 어느 날 아그네스는 데커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날 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데커가 아그네스를 성폭행했음이 암시된다. 이 장면은 잔혹한 폭력의 재연이 아니라 차분하고 세밀한 기억의 복원이다. 그 이후 아그네스의 세계는 조용히 균열을 일으킨다. 깊은 혼란과 충격 속에서 그녀의 삶은 무너져 내린다. 아그네스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대학 측에 사건을 알리지만 데커가 이미 직위를 내려놓은 상태라 학내 조치가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는다. 경찰에 신고할지를 묻는 말에 데커를 감옥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영화가 정의보다는 치유와 회복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아그네스의 삶은 기억이 뒤섞이고 고립감과 불안이 엄습하는 순간들로 반복된다. 흔들리는 감정, 그 혼란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되찾으려 애쓴다. 영화는 아그네스의 일상과 관계의 결을 따라가며 트라우마 이후에도 어떻게 삶이 지속하는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여기에서 유머와 일상성은 단순한 분위기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적 톤을 조율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관객은 천천히 아그네스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모임, 학생들과의 수업, 이웃과의 짧은 대화 등 삶의 작은 연대 속에서 아그네스의 내면은 조금씩 회복의 결을 찾아간다. 동물을 돌보고,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하루하루가 어느새 회복의 리듬이 된다. 무엇보다도 리디와의 우정이 그녀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들의 우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 침묵으로 이어지고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서로를 밀어 올린다. 아그네스는 세상과 멀어진 듯 보이지만 고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세계를 응시한다. 빅터 감독은 아그네스의 정직한 시선을 통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치유와 회복의 조용한 언어로 다시 써 내려 간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도와주는 척하는 위선적 행동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풍자한다. 피해자를 위하는 듯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블랙코미디의 리듬으로 읽어낸다. 행정의 무능, 형식적인 상담, 공감의 흉내 속에서 아그네스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빅터 감독은 이 모든 순간을 날카로운 관찰과 아이러니한 유머로 엮어낸다. 아그네스에게 유머는 방어가 아니라 회복의 언어다. 웃음은 세계를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비극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슬픔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나는 위트야말로 ‘쏘리, 베이비’를 단순한 ‘트라우마 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드는 에바 빅터만의 고유한 표현이다. 빅터 감독은 애써 치유나 결말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아그네스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들로 대치한다. 트라우마는 결코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아그네스는 고통을 잊지 않지만, 그것에 잠식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미묘한 균형 위에서 상처 너머 삶의 회복 의미를 찾아낸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영화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트라우마 인간미 트라우마 영화 선댄스 영화제 빅터 감독
2025.10.29. 18:57
영화·TV 제작사에게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영화산업을 키워온 조지아주가 올해 처음 국제영화제 개최에 도전한다. 조지아주 엔터테인먼트·관광업 연합회 관계자는 22일 애틀랜타 저널(AJC)에 세계적인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 2027년 유치를 위해 애틀랜타, 애슨스, 사바나 등 세 도시가 개최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선댄스 영화제는 지난 40여년간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렸지만, 2026년부로 계약이 만료돼 새로운 개최지를 물색 중이다. 2027년 1월 개최를 앞두고 다음달 21일까지 개최지 신청을 받고 있다. 5월 현재 접수된 신청은 총 15개로, 조지아주 3개 도시 외에도 인접한 노스 캐롤라이나주 세 도시가 신청했다. 후보 도시지의 절반 가량이 남부 도시인 셈이다. 선정 결과는 올해 말 또는 내년 초 발표된다. 국제적 규모의 영화제 개최는 조지아주에 새로운 문화산업 역량을 개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조사업체 와이투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의 타주 방문객이 유타주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한 경제적 가치는 약 1억 1830만 달러에 달한다. 다만 조지아 공영방송(GPB)은 "유타주의 예술 문화 관련 예산액은 790만 달러로, 조지아주(150만 달러)의 5배 이상"이라며 "아울러 대중 교통 인프라가 부족해 대형 문화행사를 개최할 역량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장채원 기자 [email protected]애틀랜타 사바나 국제영화제 개최 선댄스 영화제 사바나 선댄스
2024.05.23. 14:06
탈북민 구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가 미주 전역 800여개 영화관에서 상영된다. 영화는 3대 가족의 북한 탈출기를 담았다. 탈북 후 중국에 은신한 한 가족과 10년 전 북한에 남기고 온 아들을 탈북시키려는 어머니, 이들을 돕는 목사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티 오브 조이’ 등을 연출한 미국 감독 매들린 개빈이 제작했다. 영화 관계자에 따르면 영화에 등장하는 김성은 갈렙선교회 목사는 지난 23년간 1000여 명의 탈북민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줬다. 김 목사는 지난 6월 노르웨이 ‘오슬로 프리덤 포럼’에서 연설했고, 오늘 28일 뉴욕 오슬로 포럼에도 연사로 초청됐다. 영화는 지난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돼 관객상을 탔다. 다음 달 23~24일 국내 800개 영화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인 감독이 미국적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며 “조국 분단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민 2세대가 1세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세대 간 격차를 메우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하은 기자 [email protected]유토피아 비욘드 비욘드 유토피아 다큐멘터리 영화 선댄스 영화제
2023.09.25. 19:45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1932~2006)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달은 가장 오래된 TV(The Moon is the Oldest TV)’ 특별 상영회가 열린다.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은 오는 30일 오후 6시 30분 문화원 아리홀에서 KAM(Korean American Muse, 회장 제인 이)과 함께 영화상영회를 개최하고 연출한 아만다 김 감독과 Q&A 시간을 갖는다고 밝혔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과 총괄 프로듀서를 맡고 2023년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분에 진출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이 영화는 비디오 아트계의 거장이자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백남준의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The Moon is the Oldest TV)’를 활용한 첫 다큐멘터리 영화로 그의 예술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백남준 작가가 1965년 뉴욕의 보니노 갤러리에서 처음 소개한 TV 모니터 12대에 변화하는 달의 영상을 담은 대표작이다. 동 제목의 이 영화는 미디어 아트 거장인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통해 미래를 내다본 천재 아티스트의 혜안을 담고 있으며, 그의 전위적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스승 존 케이지, 평생 예술 동지였던 독일 거장 요셉 보이스, 함께 연주 퍼포먼스를 벌였던 단짝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 교분이 깊었던 후배 예술가 오노 요코, 전위파 시인 앨런 긴즈버그,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등과의 인터뷰가 담겼다. 문화원 홈페이지(www.kccla.org) 통해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주소:5505 Wilshire Blvd, LA ▶문의:(323)936-3018 이은영 기자다큐영화 백남준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백남준 다큐영화 선댄스 영화제
2023.06.25.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