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병동에 한 흑인 환자가 입원한 적이 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용산 미8군에서 한동안 체류를 한 적이 있다며 내게 붙임성 있게 다가왔다. 그는 복도에서 나를 보면 “칭구~, [친구(親舊)의 영어 발음]” 하며 커다랗게 소리치곤 했다.
말끝마다 “Okay, friend?” 하며 팔을 툭툭 치던 동료 의사가 생각난다. 그는 자신의 우월성을 남들에게 공격적으로 과시하는 축이었지만 나를 향한 ‘friendly 우정 어린’ 태도에는 기분 좋은 면이 있었다.
사전은 친구라는 한자어를 친할 親, 옛 舊로 싱겁게 풀이한다. 사람과 사람이, 옛날에, 또는 오랜 세월을 가깝게 지낸 사이라면, 그 둘은 친구라는 뜻이다. 세월의 길고 짧음, 그리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당신과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둥근 갑 속에 말아둔 긴 줄자라도 들고 다녀야 되지 않을까 싶지.
이런 사고방식에는 계산적인 면이 숨어 있다. 인간의 감성이나 심리적 요소가 배제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마냥 오랫동안 가까이서 공존하면 친구가 된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까.
남자친구, 여자친구 하는 대신에 ‘남친’, ‘여친’ 할 때는 옛 舊자가 삭제되기에 매우 모던한 분위기를 풍긴다. 남녀가 삽시간에 가까워져도 남친, 여친이 되는 법이거늘. 꼭 그렇게 ‘오래된 관계’만 보이프렌드, 걸프렌드가 되는 건 아니잖아.
‘friend’는 당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순수하고 감성적 어휘다. 친구라는 한자어처럼 공간적, 시간적 개념이나 수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고대영어에서 ‘개인적 관심, 배려, 존경’을 뜻했고, 북구와 고대 독일어에서 ‘좋아하다, 사랑하다’는 의미였고, 전인도유럽어에서는 ‘loving’ 즉, ‘love’의 현재진행형 동사로 쓰였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우리말 ‘친구’에서 풍기는 고리타분한 ‘세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친구를 고색창연한 중국어로 붕우(朋友)라 한다. 벗 朋, 벗 友. 朋자는두 개의 달(月)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양새. 네이버 사전 왈, 朋은 갑골문자에서 상(商)나라 때 중국인들이 화폐로 쓰던 ‘마노 조개’가 두 줄로 주렁주렁 달린 모양이라서 원래 ‘돈뭉치’를 뜻했지만, 조개가 서로 연결된 모습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벗’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 그 뜻이 변했다는 사연이다. 뭐라고? ‘돈뭉치=친구’라고?
2021년 9월에 전 세계를 경악시킨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에 ‘깐부’라는 우리말 속어가 등장한다. 극중인물 오영수(오일남 역)와 이정재(성기훈 역)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 “우리는 깐부잖아. 기억 안 나? 우리 손가락 걸고 깐부 맺은 것. 깐부끼리는 니거내거가 없는 거야.”
1960년대에 미8군에서 활약했던 흑인 재즈 밴드를 ‘combo band’라 불렀는데, 이 촌스러운 명칭이 당시에 내 귀에는 왜 그때는 그리도 시대의 첨단을 달리는 멋진 말처럼 들렸는지 몰라. 그때는 콩글리시로 ‘콤보뺀드’라 발음했다. 나중에 발음이 변했지. (콤→캄, 캄→깐, 보→부) ‘죽이 잘 맞는 친구’를 뜻하는 우리말 슬랭으로 통한다.
옛날 용산 미8군에서 소속이었다던 그 흑인 환자가 “헤이, 칭구~” 하며 어금니까지 내보이며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문득, 그에게 넓은 보폭으로 다가가 “헤이, 깐부~” 하고 어깨를 툭 치는 상상을 한다. 요컨대 그와 나는 병동에서 서로에게 호감(好感)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 같다.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