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시장을 겨냥한 현대차의 2026년형 팰리세이드의 오프로드 모델, XRT PRO를 디자인한 한인 차량 디자이너가 있다. 한국 쌍용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독일 오펠, 복스왜건, BMW를 거친 최수민(사진) 현대차 디자인 매니저다. 그는 지난 8월 XRT PRO를 끝으로 35년 경력을 마치고 은퇴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결국 차에 대한 열정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자동차에 어떤 기능이 들어가든, 기술이 뛰어나든, 외관이 어정쩡하면 이미 끝이에요. 차는 사람처럼 첫인상이 중요합니다. 3초 안에 시선을 사로잡아야 해요. 차의 외형은 ‘자세’가 생명입니다. 앞을 향해 튀어 나아갈 듯한, 그런 역동적인 느낌이 있어야 하죠. 자세가 어설프면 그래픽이나 디테일을 아무리 얹어도 소용이 없어요. 비례가 제대로 잡힌 외형을 만드는 게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콘셉트카가 양산으로 이어지진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브랜드들이 계속 선보이는 이유는.
“콘셉트카는 브랜드의 디자인 역량을 보여주는 쇼케이스예요. 최근에는 단순히 ‘쇼’에 그치지 않고, 향후 출시될 모델을 암시하는 ‘티저’ 역할도 하죠. 유럽 패션쇼처럼 말이죠. 디자인 방향이나 기술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디자인이 있나.
“현대에서 비전 GT라는 레이싱 콘셉트카를 맡았어요. 원래 게임용 차량 디자인이었지만, 제가 밀어붙여서 실제 차 모델을 만들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전시했죠. 현대차가 레이싱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산도 부족해서 부서들을 돌아다니며 지원받았고요. 결과적으로 반응이 굉장히 좋았고, 광고에도 많이 활용됐습니다.”
-공들인 디자인이 채택되지 않으면 속상할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죠. 대개 7~8명이 각자 만든 디자인 중 한두 개만 본사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각국 스튜디오와 경쟁해야 하니까요. 수개월 간 밤늦게까지 작업한 결과물이 탈락하면 실망도 크죠. 그래도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시간 그 자체’입니다. 그 시간이 즐겁고 의미 있으면 다음에도 계속할 수 있어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자동차 디자인은 열정 없이는 힘들어요. 양산 차에 내 디자인이 반영되는 기회는 드물고, 수개월을 투자해도 채택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죠. 그래서 저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과정을 즐기고, 발표 이후엔 마음을 비우고 다음 프로젝트에 몰입할 준비를 하라고요. 차를 좋아하는 마음, 끈기, 꾸준함이 결국 살아남게 하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