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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 까마득하게 잊다

New York

2025.11.16 17:00 2025.11.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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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검다’와 ‘까맣다’는 색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비슷한 색이죠. ‘희다와 하얗다, 붉다와 빨갛다, 푸르다와 파랗다, 누르다와 노랗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다, 하얗다, 빨갛다, 파랗다, 노랗다’가 더 밝은 느낌입니다. 물론 밝고 어두운 모음의 차이가 큽니다. ‘검다, 희다, 붉다, 푸르다, 누르다’는 모두 음성모음의 어간입니다. 음성모음은 어둡고, 무겁고, 짙은 느낌을 나타냅니다. 빛과 색의 차이로도 보입니다. 까맣다는 빛으로, 검다는 색으로.
 
검은색은 모두 어두운 느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검은색에도 밝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쓰는 표현이 바로 까만색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색처럼 보여도 밝고 어두운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우리말입니다. 우리도 색을 표현할 때는 이런 느낌을 잘 골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같은 색처럼 표현하면 우리말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게 됩니다. 까맣다의 밝은 느낌에 주목해 보세요.
 
깜깜, 껌껌, 감감 등의 표현도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두움에도 차이가 있고, 안 보이는 느낌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앞이 깜깜하다는 말은 추상적일 때 쓰입니다. 눈앞이 껌껌하다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소식의 경우는 ‘감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감감 무소식이죠. 깜깜 무소식이나 껌껌 무소식은 특별한 의도가 담기지 않는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편 까마득하다는 표현도 합니다. 까마득하다는 말은 ‘까맣다’와 ‘아득하다’가 합쳐진 말로 보입니다. 아득하다는 말이 검은색과 관련이 됩니다. 한자에서 검을 현(玄)은 검은색이기도 하지만 아득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현(玄)’이라고 표현합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늘을 검다고 한 것은 색의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윽함이나 아득함이 있습니다. 블랙홀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까마득하다는 말은 검다는 의미보다는 아득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까마득한 높이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죠. 까마득한 산의 정상이라든지,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높이의 절벽을 까마득하다고 하는 거죠.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추상적으로 표현할 때도 까마득하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까마득하게’와 ‘까맣게’는 비슷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주로는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까맣게 잊었다고 할 때도 역시 검은 색과는 관계가 적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게 잊으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 아득해지고,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죠.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참으로 힘든 순간이죠.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때 놀라며 경험하는 일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잊는 일이 많아집니다. 괴로웠던 일이나 미운 사람을 잊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잊어서 집착이 옅어진다면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잊음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주면 큰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치매(인지증)를 제일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잊은 것조차 기억을 못 하게 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신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설렜습니다. 무슨 음식을 먹으면 좋을지, 어디에 가면 좋을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선생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 안 되어 이번에는 만나기가 어렵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메시지를 다시 보았더니 전에 선생님 연락에 제가 답을 안 한 겁니다. 설레기만 하고 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습니다.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후에 다시 미국에서 뵙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만,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참 묘한 일입니다. 까맣게,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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