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일 거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한이 없다는 말이나 더 살아서 뭐하겠는가 하는 말은 욕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욕망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삶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은 삶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끈다. 욕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욕구를 따라 행동하면 때로 동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동물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욕망은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절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욕망은 나의 가치가 되기도 한다. 종교에서는 욕망을 이겨내고, 벗어나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어릴 때는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깨니 괴로운 건 식욕뿐이다. 배고플 때 엄마가 젖을 주어야 하는데 엄마가 안 보이면 하늘이 무너진 듯 울어 재끼고 소리 지른다. 아기 때는 식욕이 제일 중요하다. 물론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 잠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때 배고픈 줄 잘못 알고 젖을 주면 난리가 난다. 자라면서도 식욕은 늘 왕성하나 아이가 먹는 것보다 노는 게 재미있을 때는 부모의 속이 탄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안달 나는데, 아이는 안 먹겠다고 도망을 다닌다. 어른들이 아이는 굶기면 저절로 먹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답인 줄을 알지만 굶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 놀고 나면 밥을 찾으니 노는 게 밥보다 먼저일 뿐 밥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사춘기는 욕망이 분출하는 시기이다. 식욕도 수면욕도 왕성하나 마음껏 잠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워야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자도 자도 부족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기가 바로 사춘기다. 물론 낯선 성욕에 어쩔 줄 모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욕망을 제어할 수도 없고, 욕망을 실현할 수도 없다. 욕망의 균형이 맞지 않은 괴로움과 궁금함의 시간이 바로 이 시기인데, 그래서 힘이 든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일이다. 특히 부모님과의 마찰이 심각하다. 청년이 되면 성욕이 가장 중요한 욕망인 것 같다. 좋은 이를 만나기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고 몸을 만들고 나를 꾸민다. 먹는 것도 줄이고 자는 것도 줄이니 삶의 재미가 참을성에서 온다. 좋은 짝을 만나는 게 모든 것의 목표는 아니겠으나 주요 원인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일찍 짝을 만나는 것이 안정을 줄 것이다. 짝을 찾는 시간은 재미있지만 힘든 시간이다. 갱년기는 몸에서 욕망이 떨어져 나가는 시기라고나 할까. 성욕이 귀찮고, 수면욕은 충족되지 않아 불면의 밤을 이루며, 작은 식욕만으로도 배의 둘레는 한없이 불어난다. 괴로움의 시간이다. 그렇게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데도 인간의 욕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앉으면 옛날 자랑, 돌아서면 자식 자랑이다. 쓰지도 않을 돈 자랑에, 다 늙은 몸 자랑까지 자랑은 그대로 집착이 되어 나 자신과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나이를 먹지만 여전히 음식에 집착을 보이고 아직도 이성에 눈과 몸이 향하니 괴로운 일이다. 잠을 못 잔다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그렇게 졸아대니 밤에 잠이 안 오는 게 당연하다는 말에 달리 변명할 말도 없다. 욕망이 욕구가 되고, 욕심이 된다 히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마지막이 왜 욕인지 알겠다. 욕이 사라지면 깨닫거나 죽는 거다. 내 욕망을 바라본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욕망 동물 취급 주위 사람 주요 원인
2025.08.03. 18:17
한글 창제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글자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문자의 기원에 관하여 세종실록 25년 12월의 내용이나 정인지 서문,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옛 전자를 모방(模倣)하였다고 되어있어서 어찌 보면 결론은 간단해 보인다. (字倣古篆) 이 말대로라면 전자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을 두고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신하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방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한글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주장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하들이 당시에 전자를 알고 있고, 한글과 전자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글과 전자가 비슷하지 않았다면 ‘자방고전’이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다른 주장은 ‘방(倣)’을 닮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두 글자가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되,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닮았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 주장도 실은 한글의 독창성에 무게를 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방(倣)이라는 한자의 의미에는 다른 것을 본떴다는 의미도 있고, 닮았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방에는 ‘의거하다, 의지하다’ 등의 의미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자방고전의 의미를 ‘글자는 옛 전자를 참고하였다’ 정도로 보려고 한다. 전자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드는 방식이나 운용하는 방식이 전자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상형문자에서 출발하여 단순화된 글자이지만,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발음기관을 상형화하면서 글자의 모양은 옛 전자를 참고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최만리도 상소에서 한글이 옛글자를 참고한 것은 맞지만 그 운용이 전혀 다르기에 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이다. 사실 한글은 옛 전자만 참고한 것이 아니다. 세종은 수많은 언어와 문자를 보고, 공부하고, 연구한 후에 훈민정음을 창조한 것이다. 훈민정음에 대해 다양한 기원의 주장이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자면 훈민정음이 다양한 문자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글의 창제가 독창적인 점도 분명하다. 니은이 기역을 반대 방향으로 쓴 것은 명백해 보이지만 혀뿌리가 입천장에 닿은 모습을 상형화한 기역과, 혀끝이 잇몸에 닿은 모습을 상형화한 니은의 창제 원리는 명확히 다르다. 입의 모양을 입 구(口)의 글자 모양으로 쓴 것은 참조로 보이나, 미음이 입술소리를 나타내는 것은 명백한 창의성이다. 이는 이의 모양을 시옷으로 쓰는 과정도 유사하다. 이 치(齒)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시옷이 치음을 나타내는 것은 창의적 발상이다. 모음의 경우도 기존의 문자 체계를 참고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분류를 천지인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은 놀라운 발상이며, 우리 음운체계에 관한 과학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와 아는 하늘을 ‘땅의 위’와 ‘사람의 오른쪽’에 둠으로써 밝음을 나타내고, 우와 어는 하늘을 ‘땅의 아래’, ‘사람의 왼쪽’에 둠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를 새로 만들 때, 기존의 문자를 참고하지 않는 것이 좋은가? 기존의 문자와는 형태적으로 전혀 닮지 않은 문자를 만드는 것이 좋은가? 아니 가능하기는 한가? 기본적으로 한글의 기원을 논할 때는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훈민정음은 기존의 문자 체계에 관한 연구와 우리말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학문적 객관성과 창의성이 동시에 담겨있는 문자가 바로 한글인 셈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글 기원 한글 창제 사실 한글 글자 모양
2025.07.27. 18:10
귀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보통 목숨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숨이 여러 개 있었다면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귀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드물다, 희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잘것없는 곤충이어도 세계에 남아있는 게 몇 마리뿐이라면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석이 귀한 것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흔한 물건이고,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면 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귀해야 보석입니다. 인간이 창조해 놓은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선사시대에 돌을 깎아놓은 석기라면 귀하겠지요. 아마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누군가 깎아놓은 돌이라면 그야말로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전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현대에 만들어진 돌이라고 하여도 예술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라든지, 유명인이 애지중지하던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귀한 물건이 될 겁니다. 여러 개가 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사람이 있지요. 우선 내게 하나뿐인 어머니, 아버지라면 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자식이 있다면, 자식도 너무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저 역시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귀하다는 말의 뜻이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귀한 것은 드문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정말 귀한지 알고 싶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들을, 딸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고 보면 어쨌든 가장 귀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드문,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고, 그 사이에서 내가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기적이 다른 게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종교에서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라고 했을 겁니다. 내가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종교의 시작입니다. 내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이 귀하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겁니다. 동물도 귀하고, 나무도 귀하고, 꽃도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에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흔해 보이지만 사실 각각은 모두 귀한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 기적을 알기에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됩니다.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오늘이 한없이 귀합니다. 오늘은 내게 온 선물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역시 종교에서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것은 오늘을 귀하게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 한탄하고,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과거를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하거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겁니다. 지금, 여기, 오늘이 귀한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오늘이 변하면 과거가 변하고, 미래가 변하고, 내가 변합니다. 내가 더 귀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줄여야 합니다. 귀하지 않게 여기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귀찮다’라고 합니다. 귀하지 않다가 줄어든 말이 귀찮다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한심(寒心)하다고 합니다. 한심은 새로움에 감동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차가워진 겁니다. 오늘을 귀하게 여기고, 만남을 귀하게 여기는 삶이기 바랍니다. 또 귀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보통 목숨
2025.07.20. 17:54
오늘 아침,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나요? 나도 모르게 손전화로 손이 향하고, 온갖 복잡한 소식에 머릿속이 멍해진 채로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부터 나를 가라앉게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좋은 사람을 떠올리고, 좋은 어휘를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애쓰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좋은 어휘가 일상의 시작입니다. 어휘는 그냥 말이 아닙니다. 어휘는 세상을 잇고 있습니다. 단어와 단어를 잇고, 단어와 생각을 잇고, 단어와 사람을 잇습니다. 그러고는 기어코 사람과 사람을 잇습니다. 우리가 동물과 달리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말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을 담을 수 있고, 생각을 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말에는 그 에너지가 더욱 큽니다. 조상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은 우리 속 무형의 유전자이며, 문화입니다. 말이 곧 사람이고, 말이 곧 가치인 셈입니다. 말에서 힘을 느껴보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고, 듣고, 살아갑니다. 표면적인 뜻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표면적인 관심에 휘둘리게 됩니다. 드러나 있는 의미를 만나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위험한 어휘의 세상입니다. 어휘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다른 깊은 정신의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어휘를 공부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어휘를 통해서 내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종종 내 삶이 안쓰러워지기도 할 겁니다. 하루를 바둥거리면 살고 있음에 한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겁니다.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한참을 마주하고 나면, 자신이 더 귀하게 느껴질 겁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귀하다는 말은 드물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드물지 않으면 귀하지 않습니다. 어휘는 나를 깨우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토닥여주는 거죠.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순간 행복해집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기쁩니다. 기쁜 마음은 즐거운 마음과 통합니다. 그래서 짜증과 미움을 멀리해야 하고, 귀찮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서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서로 함께하는 삶이 좋아야 합니다. 같이 미리내도 바라보고, 어깨춤도 추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좋은 일이 많기 바라고, 슬픈 일이 적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닥친 힘든 일이라면 잘 넘길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곳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휘를 생각하며 행복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바라는 일이 많고, 궁금증이 많은 삶이면 좋겠습니다. 웃음꽃 피는 하루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날씨’처럼 오늘의 어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
2025.07.13. 19:03
숫자는 그대로 스토리의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숫자 자체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상징도 되고, 비유도 됩니다. 그야말로 흥미로운 숫자 세상입니다. 우선 38이라는 숫자부터 살펴볼까요? 38이라는 숫자를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요? 혹시 삼팔선을 생각했다면 역사나 사회 현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삼팔 광 땡’을 생각했다면 화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뜻밖에 여성의 날을 떠올린 사람이 있다면 놀라운 일입니다. 여성의 날이 3월 8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삼팔’이 욕처럼 쓰인다고 하니 중국인 앞에서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마치 한국에서 18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삼팔선은 위도 38도와 관련이 있는 숫자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한을 분단시킬 때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삼팔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삼팔이라는 숫자가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자신이 사는 나라의 위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위도를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게 정상일 수도 있습니다. 위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오히려 안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편 우리는 숫자로 의사소통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삿짐센터의 전화번호는 거의 2424였습니다. 중고거래를 하는 곳은 4989가 대부분이었고요. 8282는 일을 빨리한다는 의미였고, 012는 ‘영원히’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0102는 ‘열렬히’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가 의사소통에 쓰였습니다. 숫자는 그 자체로 소통의 수단이 된 겁니다. 숫자 중에서 1004는 천사의 의미로 쓰입니다. 전화번호나 차량번호에 선호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화번호로는 최고의 번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9988은 노인이 좋아하는 숫자입니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666은 종교적인 이유로 기분 나쁜 숫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666은 중국에서는 좋은 숫자입니다. 중국사람 전화번호 중에는 666이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 친구의 번호를 살펴보세요. 아시다시피 7은 서양에서는 매우 선호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도 북두칠성과 관련지어 7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7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도 많습니다. 중국 남부의 경우도 7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저우에 갔을 때 엘리베이터에 4층과 7층이 없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4층은 병원 입원실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는 겁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선이 위도 38도라고 했는데, 위아래로 가르는 선은 경도 몇 도일까요? 숫자는 의외로 모든 게 관심사는 아닙니다. 관심이 있어야 숫자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경도와 관련이 있는 표준시간이 한국과 일본이 왜 같을까요? 북한은 왜 표준시를 30분 바꾸려고 했을까요? 경도가 다르면 시간도 달라져야 정상 아닌가요? 중국은 지역에 따라 시간이 변하지 않는데, 미국은 왜 지역마다 시간이 달라질까요? 궁금증 천지입니다. 오늘 글을 쓴 동기이기도 한 전화의 국가 번호는 어떻게 정한 걸까요? 한국의 국가 번호는 왜 82일까요? 누군가 농담처럼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빨리’와는 상관이 없겠지요. 아무튼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는 한국인이 ‘빨리 빨리’를 좋아해서 ‘팔이’라고 농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래 기억하겠네요. 하지만 일본이 81인 걸로 봐서 답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서울은 왜 국번이 02일까요? 왜 01은 없을까요? 03은 없는데 031, 032 등이 있는 이유는 무얼까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숫자들이 수수께끼이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911과 한국의 119도 궁금한 이야깃거리입니다. 숫자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숫자 숫자 자체 숫자 세상 사람 전화번호
2025.07.06. 18:14
바람이 없다면 우리는 공기가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흔들고 깃발을 펄럭이기에 공기가 흐름을 알고 세상이 변해감을 압니다. 바람이 부니 그야말로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風景)이 변합니다. 풍경이라는 말에 바람 ‘풍(風)’이 쓰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렇듯 바람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왔냐는 말은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었냐는 의미가 됩니다. 바람이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니 변화의 상징이 되었을 겁니다. 바람에는 부정적인 바람도 많습니다. 부동산 바람, 조기 유학 바람 등 부정적인 유행을 바람이라고도 하고,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바람을 피운다고도 합니다. 부정적이죠. 바람이 났다는 말도 합니다. 바람을 연기처럼 피운다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고, 바람이 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돈바람, 치맛바람 등처럼 합성어로 만들어 부정적인 느낌을 더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스타일을 한자어 바람 풍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럽풍이라는 말은 유럽 스타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풍조라는 의미에도 바람이 쓰입니다. 풍조(風潮)는 바람에 따라 바뀌는 조류라는 의미입니다. 풍속도 바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풍습도 바람이 들어가 있습니다. 풍습(風習) 풍속과 습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우리말 어휘와 한자 어휘에 많은 바람이 들어갑니다. 안 좋은 바람을 좋은 풍조로, 그것이 좋은 풍습으로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민요 군밤타령을 보면 연평 바다에 돈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풍어가 돈바람을 불러왔겠죠. 돈바람은 다른 바람으로 이어져 집안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가요 ‘바람이 분다’에는 쓸쓸함이 한가득입니다. ‘바람이 분다. 그리운 마음에’와 같이 허전함이 느껴지는 바람입니다. 바람은 하나가 아닙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바람 중에서 서글픈 바람도 있습니다. 그때 쓰는 표현은 바로 바람맞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이 말의 느낌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면 더 서글프고 화가 나겠지요. 헛바람이 가득 든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집에 붙어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의 바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희망을 나타내는 바람과 부는 바람이 형태가 같다는 점입니다. 바람을 바라는 것이죠. 한편 바람의 깊이는 음악에서 나타나는 듯합니다. 음악은 어쩌면 모든 것을 비운 후에 깊은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관악기의 깊은 소리를 들으면 몸속에서 비롯된 바람이 모든 마음을 담아 음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풍악, 풍물, 풍류, 풍류도, 풍월 등에 모두 바람 풍이 쓰이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람은 불지 말고, 시원하고 즐거운 바람이 불기 바랍니다. 바람이 가득한 세상에서 좋은 바람, 즐거운 바람이 불기 바랍니다. 여름입니다. 올해도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바람에 관한 어휘 이야기를 길게 풀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단어를 살펴보면 문해력도 늘어납니다. 문해력 바람도 붑니다. 행복한 바람이 붑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돈바람 치맛바람 풍습도 바람 풍속도 바람
2025.06.29. 16:41
언어교육은 문화교육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언어교육의 역사에서 문화교육이 중심으로 들어온 시기는 오래이지 않다. 이는 한국어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한국어 교재를 보면 어휘, 문법, 대화문, 연습문제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대화문의 설명이나 어휘의 설명에서 문화적 요소의 설명이 일부 이루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 내용 중에 문화를 본격적으로 들여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교육이 언어교육에 들어온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교육이 이루어졌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문화 내용을 각과의 뒤에 싣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5과 정도에 한 과 정도로 특별과를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목표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국 문화와의 대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즉 학습자의 문화에 대한 관심 부족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는 상호문화교육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교육이 단순히 목표 언어의 문화 습득 또는 이해만 목표로 하지 않음을 자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습자는 목표 언어의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비교, 대조하면서 문화에 대한 관점을 공고히 한다. 단순히 목표 문화를 동경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문화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 등을 학습하는 것이다. 이제 상호문화교육은 시민교육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언어교육은 문화교육이고, 동시에 가치교육이며, 시민교육이다. 언어교육과 문화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탐색하고, 차별 없는 세상과 배려의 세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장애, 인종, 국적, 성별, 경제력, 정치적 입장 등에 의한 차별을 해소하고 배려를 일상화하는 노력을 언어문화 교육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이는 미국 중심 교육에서는 DEI(다양성, 공평, 포용)로, 유럽중심 교육에서는 상호문화 시민교육으로 나타난다. 문화교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식의 측면이다. 예를 들어 한국문화의 특징, 한국문화와 다른 문화의 차이점 이해 등은 지식의 측면에서 가능하다. 이는 인공지능의 시대 이전에도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교재의 문화캡슐 등은 지식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식 전달을 위해서 때로는 학습자의 모국어로 문화를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체험의 측면이다. 문화는 지식 이상의 행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어를 배운 사람이 해당 국가나 지역에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것은 직접 체험의 욕구를 반영한다.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의 촬영 장소를 찾아가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하는 것은 체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가상 현실이나 챗지피티를 활용한 문화의 간접 경험은 결국 한계점에 이를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이나 다른 인공지능의 활용은 직접 체험을 위한 마중물의 역할 또는 동기 유발의 기능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동기 유발의 기능도 매우 필요하고, 훌륭한 것이다. 외국어교육의 필요성과 문화교육의 필요성을 유지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접 경험의 중요성과 한계도 있다. 직접 경험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간접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즉, 직접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간접 경험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나의 말하기, 쓰기, 문화 능력을 높일 수는 없으나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체험 준비를 위한 인공지능 활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교육은 점점 직접 체험 학습의 시대로 발전해 갈 것이다.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고,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직접적인 체험이다. 이러한 문화교육이야말로 감정을 움직이는 문화교육이다. 문화교육은 치유다. 새로운 문화교육은 긍정언어교육을 통한 문화교육의 세계이며 우리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치유의 세계가 될 것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교육 상호문화 시민교육 언어문화 교육 특징 한국문화
2025.06.22. 17:49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도 웁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웃으면 나도 웃음을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다르다면 충돌이 생깁니다. 함께 살기가 어려울 겁니다. 같은 감정을 지니고, 드러내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건 미운 감정 때문입니다. 미움은 받는 것도 힘이 들지만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언어적으로 보자면 힘이 들어갔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미운 감정은 ‘헛된 힘’을 쓴 겁니다. 의미 있는 에너지 소비가 아니니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나쁜 감정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한자가 보여 줍니다. 미울 오(惡)라는 한자의 다른 독법은 나쁠 악(惡)입니다. 한자가 같습니다. 나쁜 것을 미워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미워하는 것은 나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증오(憎惡)라고 할 때 미울 오의 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한자를 자세히 보면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다른 말로는 ‘싫어하다’가 있습니다. 미워하다에 비해서는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말 ‘싫다’와 ‘슬프다’는 어원이 같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싫은 게 많은 건 슬픈 것이고, 슬픈 게 많은 건 싫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은 모두 싫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기도 하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인 것도 맞습니다. 반면에 싫은 일이 많은 것도 생각해 보면 슬픈 일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싫은 일 속에서 산다니 정말로 슬픈 일이지요. 우울한 인생입니다. 살면서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미워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 역시 그를 싫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나를 싫어하는 이를 내가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것도 슬픈 일이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미움은 거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차갑게 대하는데 따뜻한 반응을 하기는 힘듭니다. 반면에 내가 차갑게 대하는데 나를 따스하게 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감정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종종 어둠이 어둠을 낳는다는 말이 감정에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감정은 어두운 감정을 부릅니다. 미움이 미움을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거죠. 내가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도 인사하기가 싫습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활을 바꾸려면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미소 짓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상대가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감정은 거울입니다. 내 감정이 그대로 그에게 비춥니다. 길을 걷는데 나를 슬쩍 피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만난 게 아니라 스쳐 지나간 거네요. 사는 게 참 그렇습니다. 나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미움 에너지 소비
2025.06.15. 17:26
불교에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말을 합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다는 의미로 잠들었을 때도 깨달음의 경지가 한결같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놀랍고도 부러운 경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꿈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폭력을 쓰기도 합니다. 꿈속의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꿈은 내 무의식의 경지 혹은 숨기고 싶었던 세계일 겁니다. 난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는 자각에 마음이 쓰립니다. 오매일여라는 말을 하면서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표어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오매의 순우리말 번역으로는 ‘자나 깨나’가 딱 맞습니다. 자나 깨나 임 생각뿐이라는 구절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보면 잔다고 삶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나 깨나 나는 늘 같은 사람입니다. 꿈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잠들었을 때 내 모습을 맑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잠은 죽음의 비유로 쓰입니다. ‘여기에 잠들었다.’는 묘비명이 죽음을 의미하고, 눈을 감았다는 말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말은 직접적인 비유네요. 하긴 잠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예전에 본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에서 잠들면 죽는다고 잠들지 못하게 계속 말을 거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잠든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해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경우도 실제로 많습니다. 하지만 잠이 죽음인 동시에 삶인 것은 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많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낮 동안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앞일을 예측해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현실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꿈속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때가 많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면 서서히 떠오르는 꿈입니다. 꿈속에서 집착을 버리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편 꿈은 고통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꿈은 집착과 욕망입니다. 안 그런 척했던 수많은 일이 꿈속에서는 현실이 됩니다. 베개가 식은땀으로 젖는 이유죠. 자고 일어났는데도 맑지 않은 이유입니다. 잠들기 전에 오늘 있었던 감사 일기 쓰기나 고마운 사람 떠올리기는 좋은 꿈에 도움이 됩니다. 잠들기 전에 단전 호흡을 하거나 몸을 이완시키는 것도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새벽에 깨었을 때도 삶을 돌아보고 꿈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도 삶을 바꿉니다. 밤에 좋은 꿈을 꾸려면 낮을 잘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자기 바로 전이라도 생활을 바꾸어야 꿈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하루가 달라지고, 그렇게 한 달이 달라지고, 그렇게 1년이 달라지고, 그렇게 한 생애가 변해갑니다. 오매일여의 경지는 꿈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겁니다. 늘 감사하고, 집착을 버리고, 내 몸을 유연하게 바꾸면 꿈도 바뀝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면 오매일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한 경지가 성인의 경지고 성자의 경지고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다시 무너지지 않을 경지가 되는 겁니다. 꿈이 편안해질 겁니다. 어쩌면 꿈조차 꾸지 않는 편안함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만 늘 새롭게 태어나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가 새롭게 맞고 싶습니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사실은 이 글도 꿈속에 헤매다 새벽에 깨어 쓰는 글입니다. 정말 아직 멀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법 경지가 성인 죽음인 동시 감사 일기
2025.06.08. 17:08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하는 건 어떨까요? 부여라고 하면 충청도에 있는 도시 이름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충청도 부여에서는 왕 노릇을 할 수는 없겠죠, 나라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한다고 하면, 옛 만주 벌판에 있었던 나라를 떠올려야 할 겁니다. 저는 역사가 전공이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역사책을 봅니다. 그중에 최근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나라는 바로 부여입니다. 그런데 부여라고 하면 한 나라가 아닐 수 있겠습니다. 역사책에도 부여는 다양하게 나옵니다.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가 모두 등장합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천제가 용을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세우고, 이름을 해모수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해 쪽으로 나라를 옮겨 세운 나라가 바로 동부여였습니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부여에서 나온 주몽이 졸본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성왕이 도읍을 사비 즉, 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여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여러 부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이야기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직과 사출도에 관한 이야기는 윷놀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관직명으로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나오는데, 이는 윷놀이의 도, 개, 윷, 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는 돼지, 개는 개, 윷은 소, 모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어원을 살펴볼 때 특별히 이견을 달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걸’에 있습니다. 걸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이라는 주장이 제밀 많고, 가끔 코끼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개윷모가 가축명이고, 우리와 가까운 동물이라는 점에서 ‘양’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 같습니다. 코끼리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발음의 유사성에 끌리는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양을 ‘걸’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다른 동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여를 공부하다가 사출도(四出道)를 다시 찾게 되고, 부여의 도읍을 둘러싼 지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맡았다는 논의를 보고, 도읍에 해당하는 동물을 찾으면 ‘걸’의 비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자치통감에 부여가 처음에 도읍을 ‘녹산(鹿山)’에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슴이 가운데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논의는 추론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사슴에 해당하는 우리말에는 ‘노루’와 ‘고라니’가 있음은 추론의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사슴의 방언에도 고라니의 유형이 나타납니다. 고라니는 ‘걸’과 음운적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걸이 사슴의 의미였을 수 있습니다. 사슴은 뿔이나 고기, 가죽 등 우리에게 매우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사슴의 뿔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편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부여는 체격이 크고 굳세지만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 들어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쫓겨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릇 노릇 하기 걸이 사슴 관직과 사출도
2025.06.01. 17:03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를 먹습니다. 언어표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번역소학을 봐도 나이는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랜 표현이죠. 대부분의 언어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나이가 내 몸속에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나이에 따라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저의 배 둘레를 살펴보게 되네요. 나이를 먹으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일단 많이 듣는 말대로 어린아이처럼 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해서 참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특히 소변은 큰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소변 생각만 해도 조건 반사로 화장실을 찾게 됩니다. 이때 주변에 화장실이 없으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주변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어릴 때 참지 못하고 옷에 실례를 하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처럼 눈물도 많아집니다. 특히 누가 울면 나도 따라 웁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아이가 우니까요.’라는 귀여운 대답을 하더군요. 나이 먹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귀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타인의 슬픔에 내 몸이 공감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남이 울면 나도 울어야 합니다. 남이 슬픈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드라마가 점점 곤욕이네요. 우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입니다. 한편 신체 기능의 약화는 세월 탓이려니 하면서도 서글프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가까운 게 안 보이고 먼 게 잘 보입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고 옛일은 또렷합니다. 눈앞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멀리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빨리 변하는 현실 속의 역할보다는 오랜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정말 그러한가요? 신체는 그렇게 변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눈앞에 일에 집착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점점 실수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미안한 사람이 늘어갑니다. 글을 쓰면서 지난번에 기억나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니 아직도 망각 속이네요.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 좋아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남의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 반면에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안 좋은 일이죠. 여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나이 들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은 내가 옳다는 생각과 고집이죠. 집착이 늘어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좋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남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적게, 작게 들어야 합니다. 순하게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귀가 순해져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논어에서는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60세를 의미하는 나이죠. 만약 나이를 먹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고집이 세어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이 먹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문제인 겁니다. 자꾸 남에 대한 욕이 나온다면 내 집착이 늘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나를 말려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 사람 말은 꼭 들어야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좋다면 죽은 다음의 내 모습도 좋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이 천국이어야 죽어서도 천국입니다. 주변 사람과 못 지내고, 자녀와 못 지내고, 화가 많고, 욕심이 늘어난다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일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하게 됩니다. 나잇값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올라가는 나의 가치입니다. 나이를 먹었는데 값이 떨어졌다면 나는 잘못 산 겁니다. 우리 모두 나잇값을 하고 살기 바랍니다. 저부터 나잇값을 해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고 맑은 제 모습이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나잇값 소변 생각 주변 화장실 신체 기능
2025.05.26. 16:53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때로 반대말이나 반의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반대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서로를 밀어내는 듯합니다. 상대 또는 짝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서로 짝을 이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실에서도 짝이 있었는데 점점 혼자 앉는 책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지만 예전에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머니날만 있고, 아버지날이 없다고 하여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어머니날도 있고, 아버지날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자기 나라에서는 어머니날은 중요한데 아버지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덩달아 대우를 받는 나라입니다. 한편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스승의 날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은 좋은 날입니다. 제가 선생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스승께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날이 있음은 다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늘 부끄럽고 어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스승의 날이 있다면 ‘제자의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학생의 날’이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생의 날은 제자의 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교사의 날의 반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정말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스승이 있습니까? 스승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운 사람이지요. 저는 제자의 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승이 되기도 힘들지만 사실은 제자가 되기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옛 사극을 보면 제자로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수업료 내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스승의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입니다. 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기를 원했겠지만 제자는 한정적입니다. 공자의 제자도, 부처의 제자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승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저 사람은 내 제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자의 뜻을 보면 ‘덕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이’라고 하는 정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이 덕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내 제자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누구의 스승이 되고 싶다면, 덕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의 날이 있다면, 스승의 날처럼 제자에게도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날이 될 겁니다. 누가 나를 제자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자신의 그릇을 생각하면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은 찾으면 되지만, 제자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막상 제자의 날에 고마운 제자가 없다고 부끄러워하는 선생님도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날이나 제자의 날이나 모두 귀한 날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제자 제자도 부처 자기 나라 기독교 성경
2025.05.18. 19:39
하루의 일과를 정리해 보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하루는 늘 어휘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어휘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합니다. 언어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어휘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어휘는 말의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어휘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휘는 인간이고, 삶이고, 우리의 생각입니다. 어휘의 하루를 살펴볼까요?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해가 일찍 뜨는 하지가 가까워지니 새벽에 눈을 뜨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새벽’이라는 말은 해와 관련이 있는 말로 보입니다. 햇빛이 창틈으로 들어오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해가 밝아지는 때가 새벽입니다. 새벽의 ‘새’는 해와 관련이 됩니다. ‘새롭다’는 말도 해와 관련되는 말로 보입니다. 해가 뜨면 모든 게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롭습니다. 날이 밝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새다’라는 표현에서 ‘새’도 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해는 새와도 관련이 됩니다. 새롭다는 의미로 해를 쓰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햅쌀, 햇곡식, 햇것’은 모두 올해 새로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햇병아리’라는 표현에서도 ‘해’는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해가 흰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희다’라는 말도 ‘해’에서 온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해오라기’라는 새는 흰 새입니다. 아침이라는 말도 재미있는 말입니다. 아침밥이라고 하지 않고, ‘아침을 먹는다’고 표현하면 놀라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해 보면 어색함을 알 겁니다. 저녁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낮은 안 먹는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습관을 반영한 게 아닌가 합니다. 낮이라는 말 대신에 점심이라고 하는데, ‘점심(點心)’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배고플 때 조금 먹는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딤섬’을 한자로 쓰면 점심인 점도 흥미롭습니다. 딤섬으로 배부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이 사이에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을 참이라고 합니다. 사이에 먹는다고 해서 새참이라고 합니다. 일을 많이 하면 새참을 여러 번 먹기도 합니다. 저녁을 먹고도 배가 고프면 밤에 군것질을 하게 됩니다. 그때 먹는 것을 ‘밤참’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야식’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밤참이나 야식이나 배 둘레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혹 그 자체입니다. 잠자리에서는 특별히 먹지는 않습니다만, 물을 마시기는 합니다. 어른들은 자다 깨면 물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준비해 두는 물을 ‘자리끼’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잠자리에 자리끼를 준비해 드리는 것은 효도의 시작입니다. 효도는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효도는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어휘 이야기로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놀라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외래어, 외국어가 정말로 많이 쓰인다는 점입니다. 하루 종일 외래어 홍수 속에서 삽니다.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샤워를 합니다. 물론 샴푸와 린스가 필요하죠. 드라이를 하고, 티셔츠를 입고, 간단하게 토스트와 커피를 마십니다. 티브이를 보고, 노트북을 들고,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갑니다. 외래어의 홍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어휘로 시작해서 어휘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어휘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하루가 참 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 어휘 이야기 사실 어휘 외래어 홍수
2025.05.11. 16:37
어떤 말은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거나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삶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다루고자 하는 낱말은 우리말에서 매우 중요한 어휘입니다. 아니, 인간의 언어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화 없는 하루하루는 상상하기 어렵죠. 정치가 없다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과 마음의 평화는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라는 말이나 정치, 종교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 듯합니다. 말의 원래 의미와 사용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라는 말은 결국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화(文化)의 방향은 글이고, 정치(政治)의 방향은 올바름이고, 종교(宗敎)의 방향은 높음입니다. 한자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각각 다른 방향이 아닙니다. 같은 방향을 달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자로 보면 글로 하는 게 문화고, 바르게 다스리는 게 정치이고, 가장 높은 가르침이 종교입니다. 문화는 근본적으로 동물과 달라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겁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Culture’가 ‘재배, 경작’과 ‘교양’의 의미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말’입니다. 인간은 말로 서로 소통합니다. 그야말로 말을 하며 울고 웃습니다. 강하게 말하자면 말이 곧 인간입니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것은 폭력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겁니다. 문화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폭력이 아닙니다. 폭력을 부추기는 문화, 싸움으로 가득한 화면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두 번 놀랐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잘못 알고 인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 좋은 의미라는 점입니다. 하도 우리말 표현에서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폭력이 아닌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는 겁니다. 폭력을 벗어나야 비로소 정치가 시작됩니다. 야유가 아닌 설득이 정치의 기본입니다. 멋진 수사학과 연설의 기법이 정치의 묘미인 셈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우리 정치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네요. 소리 지르고, 야유하고, 비꼬는 낮은 수준의 언어 구사력입니다. 종교는 사실 좀 어려운 영역입니다. 분명 가르침을 좇아야 하는데 의외로 믿음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믿음이 시각을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은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됩니다. 다른 종교의 책은 읽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하게는 버리거나 불태우거나 금서로 만들기도 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서로의 믿음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은 폭력과 폭언, 악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교를 떠올리면 폭언과 악담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 종교 현실이 또 떠오르네요. 문화와 정치, 종교가 향하는 곳은 평화입니다. 원래 이 세 어휘는 모두 평화를 향하고 조화를 향합니다. 싸우지 않아야 하고 서로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폭력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설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종교는 평화입니다. 종교는 사랑입니다. 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말대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 정치 정치 종교가 종교가 우리 우리 정치
2025.05.04. 17:40
우리에게는 죽음을 표현하는 많은 어휘가 있습니다. 일단 ‘죽다’가 대표적이죠. 죽었다는 말은 살았다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살아있지 않으니 죽었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사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중립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에 감정을 싣습니다. 왠지 꺼리게 된 겁니다. 그래서 표현을 바꿉니다. 완곡하게, 둘러서 표현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런 표현을 완곡 표현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뜨다, 세상을 떠나다’라고 표현하는 게 간단한 방법입니다. 죽었다는 말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면 ‘뜨다’나 ‘떠나다’는 여전히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왠지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간 곳을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 쓰는 표현이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갔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저승은 저 생(生)을 의미합니다. 이쪽을 마감하고 저쪽에서 다시 사는 셈입니다. 저승을 저세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세상에도 종류가 있겠지요. 저승에는 지옥이 있을 수 있으니, 구체적으로 천국에 갔다거나 천당에 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희망 사항이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애매하게 하늘나라로 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소천(召天)하셨다는 쓰기도 합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죠. 언어권이나 문화권마다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숨이 끊어졌다는 표현이나 눈을 감았다는 표현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숟가락을 놓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숟가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권에 따른 죽음에 대한 표현만 비교해 보아도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가 있습니다. 종교에 따라서도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납니다. 어쩌면 종교야말로 죽음과 가장 관계가 깊을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승려라면 열반(涅槃)에 들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모든 번뇌를 벗어난 경지가 열반이니 어쩌면 최종 목표가 열반일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소천이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하늘나라로 가고 싶은 소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이라고 표현합니다. 선종은 좋게 마무리했다는 의미입니다. 큰 죄 없이 세상을 떠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종은 특별한 죽음은 아닌 셈입니다. 한국어에서는 주로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주로 죽었다는 말을 높일 때 씁니다. 어린 죽음 앞에서는 돌아갔다는 표현을 잘 안 합니다. 돌아가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온 곳이 있다는 겁니다. 온 곳이 있기에 돌아갈 곳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살면서 늘 온 곳을 생각하고, 돌아갈 곳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철학이고, 종교네요. 우리는 누구나 온 날에서는 멀어지고, 돌아갈 날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모든 번뇌를 벗어나고, 좋은 저세상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그곳이 하늘이라면 하늘나라로, 그곳이 서방정토라면 서방정토로 가면 좋겠습니다. 선종을 꿈꿉니다. 돌아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칩니다. 교황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실 감정 최종 목표
2025.04.27. 18:56
우리는 모순 속에서 삽니다. 나의 지향과 삶의 방향이 서로 엇갈리며 부끄러운 삶을 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모순투성이인 나의 모습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모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합니다. 여태껏 살아온 삶이 그러하고, 앞으로의 삶도 그러할 겁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을 물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문득 다가오는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갖고 싶은 게 많다기보다는 놓치지 않고 싶은 게 많습니다. 물욕은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머릿속은 온갖 집착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집착임을 알고 있지만, 살면서 오히려 집착이 늘어납니다. 집착 중에서도 제일 괴로운 집착은 자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떼어낼 수 없는 집착에 삶의 무게가 짙어집니다. 어쩌면 물욕의 근원에서도 자식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원인일 겁니다. 집착과 사랑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여, 자유를 잃습니다. 나이 들면서 집착은 고집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아는 것, 믿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양 생각하여 머리가 굳어갑니다. 유연성이 사라진 사고가 남을 가볍게 평가합니다. 젊은 사람의 행동을 퇴폐라고 진단하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세상을 몰래 엿보기도 합니다. 사고와 감정이 모순됩니다. 내가 내린 평가가 오히려 한없이 가볍습니다. ‘요즘 것들은’이라고 쉽게 평가하면서도, 나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벼운 음악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어느새 내 발은 박자를 맞추고 있습니다. 어깨를 들썩이기도 합니다. 젊은이의 옷차림을 비난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봅니다. 젊음을 부러워하면서도 욕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제일 심한 모순은 정치를 보면서 일어납니다. 정치가를 욕하고, 정치의 타락과 권력의 타락을 비난하지만, 권력에 기대고 맙니다. 나에게 돌아올 혜택을 반기고, 나에게 발생할 불이익에 화를 냅니다. 정치에 대한 기준이 나에게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부끄럽기도 합니다. 욕하면서 욕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순 속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 속에 가득한 모순을 덜어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철학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삶이 바빠서 철학에서 멀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철학에서 멀어져서 삶이 바쁜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철학책은 무엇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나를 붙잡아주는 책이나 사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요즘 다양한 책을 보고, 다양한 강의를 듣습니다. 논어나 맹자, 도덕경이나 장자, 법화경이나 금강경, 요한복음 등 고전을 읽고, 또 읽습니다. 좋은 강의도 영상매체 속에 한가득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삶의 지혜가 수천 년간 이어져 오고 있음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세상 속에서 나를 잃어버립니다. 살고 싶은 삶과 살고 있는 삶의 모순이 참으로 큽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에 지난밤 꿈자리가 뒤숭숭했습니다. 식은땀을 한바탕 흘리고 나니 정신이 아득합니다. 아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남은 날을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모순과 집착은 불안의 원인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모순 집착 타락과 권력 금강경 요한복음 물질적 풍요
2025.04.20. 17:26
초창기의 한국어 교육은 재외동포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선교사나 군인 등의 특수 목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육의 뿌리에는 힘들지만 모국어로서 한국어를 이어가려는 재외동포의 힘이 컸습니다. 한글학교를 비롯한 자치적인 교육기관이 주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학회인 이중언어학회의 경우는 창간호부터 한동안의 학술지를 재외동포 특집으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소련,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동포와 그 자녀의 한국어 교육이 주요 연구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재외동포 한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이주 노동자가 급증합니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교육의 수요가 높아지고, 이에 대한 연구도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여성결혼이민자가 급증합니다. 역시 결혼이민자를 위한 연구가 급증하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진학 목적의 한국어 학습자의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에 진학하려는 외국인이 증가하면서 연구도 학문 목적 외국인 학습자를 위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류라는 세계적 현상과 더불어 한국어는 재외동포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할 때입니다.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교육 연구가 매우 부족함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재중동포 중에도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실정에 이르렀습니다. 해외입양아, 국제결혼 자녀, 중도입국 자녀 등 재외동포의 범위도 점점 넓어집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한쪽 날개라면,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교육도 한쪽 날개입니다. 균형 있는 연구와 지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편 생각해 볼 점이 또 있습니다. 한국어를 영어로 하면 코리안 랭기지가 됩니다. 하지만 코리안 랭기지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 한국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북한 즉, 조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코리안 랭기지는 ‘조선어’라는 단어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정확히 하자면 노스 코리안은 조선어로, 사우스 코리안은 한국어로 번역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어와 조선어가 모두 코리안 랭기지임을 종종 잊습니다. 한국어 교육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는 반면에 조선어교육의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1992년 수교 이전에는 조선어교육이 주를 이루었지만, 현재 중국 대부분의 ‘조선어과’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두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폴란드,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현재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어교육에 대한 관심도 매우 낮은 편입니다.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조선어교육에 관하여 제한된 자료에 의거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남한의 국제통용 표준한국어 교육과정과 유사하게 북한에서는 조선어 소유급수기준에 의거하여 교재를 만들고 있는데, 이 기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향후 연구에서는 한국어와 조선어라는 두 날개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한국어 교육은 하나가 아닙니다. 재외동포를 위한 교육이 있고, 외국인을 위한 교육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어 교육도 있고, 조선어교육도 있습니다. 연구해야 할 분야가 너무나 많습니다. 앞으로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더 많아지기 바랍니다. 특히 미주 지역의 재미동포를 위한 한국어 교육 연구를 기대해 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교육 한국어 교육 재외동포 한국어 국제통용 표준한국어
2025.04.13. 17:49
세상에 알아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과목도 늘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도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그럼 우리는 정말로 똑똑해졌을까요? 지식인은 많은데, 지혜로운 이는 적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지식은 쌓여가는데 지혜는 오히려 옅어집니다. 지식인(知識人)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지식인이라는 말은 칭찬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지식인을 나무랄 때는 지식을 쌓아는 가지만, 지혜로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지식(知識)이 넘쳐나니 지식인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한자 지(知)에는 날 일(日)이 더해 있습니다. 지식이 밝아져야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빛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하며 자신의 성적을 내세우는 세상, 자신을 숫자로 표현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당연히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인공지능 앞에서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인공지능의 속도와 정확성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예 경쟁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면 경영의 목표가 돈이 되고, 법의 목표가 돈이 되고, 의술의 목표가 돈이 됩니다. 모든 걸 돈에 초점을 맞추는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지식이 머리에 머물러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일을 머리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도 아파야 옳은 해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세상에서, 지식이 감정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정보라고 합니다. 정보(情報)는 사정(事情)을 알린다는 뜻이고, 정보나 사정이나 모두 감정(感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情)이 담긴 글자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가슴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입니다. 무미건조한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파하는 정보입니다. 공감의 세상, 동감의 세상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아니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핏줄이 돌 듯이 모세혈관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가슴으로 옮기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사실 이 지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멀리서 떨어져서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내게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대로, 내가 쓴 대로 행동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글 읽기에서 이런 읽기를 체독(體讀)이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며 읽는 것입니다. 주로 경전을 이렇게 읽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그저 읽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중요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쓰기에서도 체서(體書)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인 척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지혜는커녕 지식인도 못 되었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도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위해 체독의 삶, 체서의 삶, 체학(體學)의 삶을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가슴 모두 감정 해결 방향 칭찬 같기
2025.04.06. 18:02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이 말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 겁니다. 외국어를 공부해서 남과 경쟁해야 하고, 시험에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고통이 따르겠지요. 이때 심각해지는 감정이 바로 불안입니다. 언어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데는 불안이 따르게 됩니다. 말할 때의 불안, 글 쓸 때의 불안. 들을 때의 불안 등은 학습자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불안과 긴장으로 실력 발휘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언어교육에서는 학습자, 교실의 불안에 관한 연구가 이어져 왔습니다. 연구 결과에 나타난 것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불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안 덕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더 정확성을 기하게 되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적당한 불안은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에 관한 연구는 왠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불안에 관한 연구는 한쪽 날개에 불과합니다. 언어학습에는 불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불안 이전에 존재하는 즐거움의 요소가 있습니다. 미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은 불안해서가 아니라 즐거워서입니다. 따라서 불안 못지않게 연구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즐거움입니다. 교실에서의 즐거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즐거움 척도도 개발하여야 합니다. 어떤 요소들이 즐거움의 원인이었는지를 밝히면 언어교육의 효용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측정하는 도구의 개발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즐거움 척도의 개발은 긍정심리학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심리상태뿐 아니라 인간의 긍정적 심리상태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언어교육에 적용한 것입니다. 즐거움, 기쁨, 사랑, 행복, 감사 등의 긍정 감정이 언어교육에 어떤 효용을 주는지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중요한 목적은 즐거움에 있습니다. 현재의 언어교육은 이 점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접근 방법을 긍정언어학이라고 부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언어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통역이나 번역이 인공지능을 통해 실시간으로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는데 힘들게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지만 언어교육은 의사소통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순간의 환희와 설렘이 공존합니다. 즐거움, 놀라움, 기쁨의 감정을 언어학습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즐거움의 측면에 집중을 둔 언어교육이 다른 날개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어 교육은 즐거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학습자가 한국어를 취미로 배우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입니다. 진학이나 취업이 목적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나 노래를 듣고, 배우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때문에 즐거움이 많습니다. 어쩌면 한국어 교육이 즐거움 관련 언어교육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교육에 좋은 방향 제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어 학습자의 즐거움 척도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교육과 긍정심리학을 연계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한국어 공부가 즐겁기 바랍니다. 또한 교사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즐겁기 바랍니다. 교실에서 배우는 내용이 재미있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재미있는 신나는 한국어 교실을 설계해 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불안 한국어 교실 한국어 교육 한국어 공부
2025.03.30. 16:28
아낀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행복해지는 표현이기도 하죠. 물건을 아끼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아낀다고 표현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낀다는 말에는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서로 아끼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아끼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로는 함부로 쓰지 않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의미를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낀다는 말의 단어의 구성을 살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낀다는 말은 겉으로는 구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아끼다’라는 말은 아깝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즐기다와 즐겁다, 반기다와 반갑다의 구성과 같습니다. ‘기와 갑/겁’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끼’나 ‘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앞에 받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앗다’에 ‘-기-’, ‘-갑-’이 붙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앗다는 주로 예전에 많이 쓰던 말로 ‘빼앗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지금도 ‘청춘을 앗아갔다’와 같은 표현에 쓰이곤 합니다. 따라서 아끼다와 아깝다는 빼앗다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가져갈까 봐, 빼앗아갈까 봐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심해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를 보고 아낀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음에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아깝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까워서 쓰지 못하는 감정을 아끼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빼앗아 갈까 봐 두려운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은 먹을 것이 있겠네요. 먹고 싶었던 맛있는 것이라면 조금씩 아껴서 먹게 됩니다. 어릴 적 아이스크림을 아껴먹던 기억이 납니다. 아껴 먹느라 천천히 먹었는데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뚝뚝 떨어지던 씁쓸한 기억입니다. 종종은 숨겨놓고 먹기도 합니다. 저는 식탐은 별로 없어서 숨겨두지 않아서 음식을 숨겨두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식탐도 늘고 있습니다. 아끼는 것의 대명사는 아마도 ‘돈’일 겁니다. 구두쇠나 수전노 등은 돈을 아끼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아끼는 것은 좋은 것임에도 구두쇠나 수전노에 부정적 감정이 한가득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절약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아끼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쓸 데 쓸 줄 아는 사람이 사회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사회는 빈부의 차이 없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베풀고, 나누고,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끼는 마음 중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 대한 마음입니다. 물론 사라져가는 생명이나 자연 유산을 아끼는 마음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겠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아끼는 마음입니다. 또한 늘 함께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아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내가 아끼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겁니다. 저는 아끼다와 아깝다를 보면서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봅니다.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누구를 아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낌없이 나누어야 하는 것은 무언인지, 누구에게 아낌없이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아끼는 마음이 아름다운 쪽으로 깊어지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마음 부정적 감정 자연 유산
2025.03.23.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