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화의 시대입니다. 21세기가 들어서면서 문화의 시대, 정보화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놀라운 속도로 정보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에서, 스마트폰의 시대로 바뀌었고, 지금은 인공지능의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변화해 갈까요? 인간의 문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의 시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주장도 맞다고 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도 중요한 문화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문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종교도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부터 행해진 제천의식은 모두 문화입니다. 춤도, 노래도, 악기 연주도 문화이고, 동굴이나 벽에 그린 그림도 모두 문화 행위입니다. 고대문명도 모두 문화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그리고 중국, 한국, 일본 등 끊임없이 문화는 발달하여 왔습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나 산업혁명 이후의 눈부신 문화 발전도 지금만이 문화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문화의 시대라는 정의를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문화는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 정치는 인간이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행하는 최상의 문화 행위입니다. 그리스어의 학교라는 말의 어원도 ‘여유’에서 왔다고 합니다. 문화는 경제적인 여유,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발전하고 누리게 됩니다.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정의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더 들어맞게 될 겁니다. ‘반공일’과 ‘놀토’의 뜻을 아시나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이제 한국에서 반공일(半空日), 놀토의 개념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반공일은 토요일에 오전 근무만 하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고, 놀토는 격주로 토요일을 쉬었기 때문에 생긴 표현입니다. 지금은 사어(死語)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주 4일 근무를 실시하거나 재택근무를 늘리고 있는 회사가 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주 3.5일 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점점 인간에게 여유의 시간이 많아질 겁니다. 정보화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로 바뀌면서 인간의 노동은 점점 줄어듭니다. 일자리의 감소 또는 사라짐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인간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의해서 대체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여유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유시간은 필연적으로 문화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다른 일자리와는 달리 문화와 관련된 일자리는 훨씬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문화에도 수많은 AI의 활용이 있을 겁니다. 그림, 문학작품, 음악 등 다양한 문화의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활용이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를 즐기는 주체는 사람이고, 사람과 사람 간의 온기가 문화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으로 그린 그림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글씨를 베껴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문화의 시대는 더 활짝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문화 모습은 변화할 겁니다. 하지만 문화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화의 요소는 인간의 즐거움이자 기쁨이며, 치유의 순간이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문화의 시대입니다. 인간성이 메말라가고,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이 눈앞에 있다면 인간은 더욱더 문화를 가까이하고, 직접 문화의 수용자에서 창작자로 모습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다양한 기술은 문화 창작의 협력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화의 시대일수록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 문화 발전 문화 창작 문화 자체
2026.02.01. 17:05
우리말에서 꿈과 관련이 있는 서술어는 ‘꾸다, 가지다, 있다’ 정도일 거다. 이 중에서 ‘꾸다’는 ‘꿈’과 동원어여서 흥미로운 어휘다. 우리말에는 이런 동원어 구성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잠과 자다, 얼음과 얼다 등이 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즉 ‘자다’의 명사형이 잠인지, 잠이라는 말에서 ‘자다’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어휘는 불과 붉다, 신과 신다, 발과 밟다 처럼 명사에서 용언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어휘의 경우는 반대로 동사에서 명사가 생긴 예로 보이는 것이다. 살다와 삶, 쥐다와 줌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꿈은 가지기도 하고 꾸기도 한다. 잘 때 꾸는 꿈인지, 깨어서 꾸는 꿈인지에 따라 의미와 사용이 달라진다. ‘가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로 희망을 나타낸다. 반면에 ‘꾸다’는 주로 잘 때의 꿈이지만, 희망을 나타낼 때도 쓸 수 있다. ‘있다’는 주로 희망을 나타낼 때만 쓰인다. ‘꿈이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꿈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공통점 때문이리라. 허황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게 꿈이다. 꿈을 꾸는 것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다. 밤에 잠 속에서 꾸는 꿈은 무의식의 세계다. 꾸려고 해도, 꾸지 않으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은 억지로 안 된다. 어릴 때 나는 떨어지는 꿈이 많았다. 무서웠다. 높은 곳에 아찔하게 서 있다가 발을 헛디딘다. 끝없는 추락은 공포 그 자체다. 이렇게 끝인가 보다 하고 떨다가 보면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다. 꿈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면 키 크는 꿈이라고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두려움의 크기에 비해 키는 생각만큼 자라지 않았다. 약간 아쉽다. 더 떨어졌어야 했을까? 아마도 나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서도 하루를 사는 게 무서웠나 보다. 떨어지는 꿈을 계속해서 꾼 것은. 사춘기 시절, 청춘의 시대. 그 시절의 가엾은 나를 위로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떨어지는 꿈 대신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온몸의 힘을 스르르 빼면 나는 공중으로 맘대로 날아오른다. 공중부양 능력이 꿈속에서는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 으쓱한 마음이 가득했다. 가고 싶은 대로 날아다니면서 가벼워진 나를 즐겼다. 새벽에 꿈에서 깨어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나는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이었나 보다. 그때는 헤엄치는 꿈도 많았다. 사실은 수영도 잘 못 하는데 꿈속에서는 물살을 잘 가르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다시 그 꿈을 꾸고 싶다. 잘 나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최근 몇 년간 꾸는 꿈속의 나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다.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중요한 자리에서도 벌거벗은 내 모습이 나타난다. 깜짝 놀라 몸을 가려보지만 뛰는 심장을 어찌할 수 없다. 어찌어찌하여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잠에서 깬다.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본다. 깨어났지만 여전히 부끄럽다. 내보이고 싶지 않은 거짓된 내 모습이 많아서일까? 나는 내가 숨겨놓은 나를 잘 안다. 부끄럽다. 내가 나를 아는데 누가 누구를 욕하랴. 함부로 남을 평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일까. 내 실수가 두렵다. 실수 그 자체보다 남의 시선이 더 두렵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벌거벗은 채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깊은 부끄러움이다. 나도 이제 좀 편해지고 싶다. 그런데 산을 힘겹게 오르고 돌아온 날, 운동장을 몇 바퀴 뛰고 온 날은 꿈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기억도 없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쉬나 보다. 그런 날은 새벽에 깨지도 않는다. 그렇다. 새벽 꿈이 두렵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좋은 꿈을 위해서라면 좋은 생각과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시간이 온다. 삶과 꿈과 깨달음이 하나가 된다. 삶이 엉망이고 불안 속에 있는데, 좋은 꿈을 꿀 리가 없다. 오늘도 벌거벗은 꿈을 꾸고 새벽에 이 글을 쓴다. 아직 멀었다, 나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꿈이지만 희망 공중부양 능력 동원어 구성
2026.01.25. 18:16
친구(親舊)의 순우리말은 ‘벗’입니다. 친구라는 말에도 따뜻함이 있습니다만, 벗이라는 말에는 온기와 함께 깊이가 느껴집니다. 옛 친구를 죽마고우라고 하는데, 사실 죽마고우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전처럼 사는 곳이 자주 바뀌지 않으면 죽마고우는 오래 만나는 사이가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고향에서 뿔뿔이 흩어지기에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죽마고우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친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벗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안도감이 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즐거울 때나 힘들 때 마음을 나누고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내 기쁨을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요?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질투하지 않을 친구는 얼마나 있나요? 슬픔이나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은 꽤 있는 듯하나 사실은 오랫동안 힘듦의 무게를 같이 짊어질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한번은 연락하고 만나겠지만, 또다시 연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물보다 피가 진하다고 하며, 가족에 매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벗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벗 사이에 나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나이가 적어서 벗이 될 수 없다면 사귀는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라는 걸림돌을 치워야 좋은 벗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벗은 마음이 맞는 사이이기도 합니다. 다른 조건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다투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나다’는 말이 ‘맛나다’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민간어원으로 보이나 생각은 참 좋습니다. 벗은 맛난 만남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만나서 참 좋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벗은 만나서 무엇을 할까요? 첫째, 밥 한 끼 하면 좋겠습니다. 만나면 밥을 먹는 사이, 밥을 먹고 싶은 사이라면 벗입니다. 싫거나 불편한 사람과 밥을 먹으면 체합니다. 만나서 체하는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둘째, 이야기를 오래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말도 길어집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말벗’이라고 합니다. 서로에게 말벗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겁니다. 셋째, 같이 걸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같이 걷다가 보면 더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서로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어 가며 걷는 겁니다. 때로는 아무런 말 없이 걸어도 기쁩니다. 서로가 있기에 힘이 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길벗’이라고 합니다. 함께 걸으면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도 벗을 생각해 봅니다. 이미 죽마고우는 만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제 고향은 서울이지만 서로 하는 일이 달라서 만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참 벗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듯합니다. 대학 시절의 친구도 자주 보지는 않습니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도 스치듯 지나갑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사람도 많은데 벗이라고 부르기에는 왠지 어색합니다. 그도 어색할 겁니다. 벗은 상호관계니까요. 그러고 보니 벗이 별로 없습니다. 벗도 현재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연락하고, 만나고,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벗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벗 이야기를 써 봅니다. 어쩌면 매주 같이 국악 연습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요양원에 공연을 가는 사람이 벗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는 벗일 테니까요.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밥을 먹거나 먹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몇 명 떠오릅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도 있고, 선후배나 제자도 있습니다. 먼 나라에 있지만, 그곳에 가면 꼭 연락하고 만나고, 같이 밥 먹는 사람도 모두 벗입니다. 멀리에 있어도 평소에 연락을 주고받으니 심리적 거리는 가까운 편입니다. 벗이 그리운 하루입니다.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걷고 싶네요. 말벗, 길벗과 함께.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실 죽마고우 말벗 길벗과 심리적 거리
2026.01.18. 18:12
한국인이 먹는 식재료를 보면 비교적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추나 마늘입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식재료이기도 합니다. 한국 음식 중에는 쓴맛이 강한 경우도 있고, 썩은 맛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이 먹기에는 부담스럽거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식재료가 그 나라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같이 식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인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고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고추장이 만들어진 것도 일반적으로 18세기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고추의 매운맛을 좋아한 지도 오래되지 않습니다. 붉은 김치나 고추장 비빔밥, 매운 떡볶이는 모두 후대에 발달한 음식입니다. 김치는 어원이 침채(沈菜)에서 왔다고 보는데, 물에 담그는 김치 즉 물김치가 기원이었을 겁니다. 김치, 김장을 담근다는 표현도 그래서 생겼습니다. 사실 고추라는 말은 어원이 고초(苦椒)에서 온 말로 보입니다. ‘고초당초(苦椒唐椒) 맵다지만’의 고초와 당초는 모두 후추를 의미하는 말에서 변한 것으로 봅니다. 후추는 호초(胡椒)에서 온 말입니다. 서역에서 들어온 매운맛을 더하는 향신료로 보아야 할 겁니다. 호(胡)는 주로 서역에서 들어왔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호떡이나 호주머니도 호(胡)로 보입니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성향에 맞아서일까요? 널리 보급되었고, 지금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한편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은 제 생각에는 우리 전통의 식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상에게 바치는 음식에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합니다. 붉은색이 귀신을 쫓아서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제사상에 홍동백서라고 하여 붉은 음식이 올라가는 것으로 봐서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한국인이 ‘마늘’을 좋아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단군신화에도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마늘은 우리 역사 최초의 식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달래’였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 우세합니다. 우리나라에 마늘이 들어온 것은 그 이후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늘이 한국을 대표하는 식재료가 된 것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생마늘을 고기와 함께 먹는 민족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요리에 마늘을 듬뿍 넣습니다. 단군신화에 나온 또 하나의 식재료 ‘쑥’은 우리 민족의 음식 중에서 빠질 수가 없습니다. 단군신화처럼 쑥만 먹는 경우는 적겠으나 우리의 대표 음식과 쑥은 잘 어울립니다. 우선 쑥은 떡과 잘 어울립니다. 쑥으로 만든 절편이나 송편 등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쑥은 국으로도 끓입니다. 도다리쑥국 등은 지금도 인기가 높습니다. 쑥은 차로 마시기도 하고, 칼국수 등에 쓰이기도 합니다. 쑥은 건강에 매우 좋은 음식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쑥은 아예 뜸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쑥은 치유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식재료에는 자극적인 것도 많습니다. ‘씀바귀, 고들빼기’처럼 쓴 음식 재료도 있습니다. 쓴맛이 한국에서는 꼭 싫은 맛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가지 맛이 강하면 덜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달다’가 좋다는 의미도 되지만, 달아서 싫은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달달하다’와 같이 첩형을 사용하면 좋은 맛이 됩니다. ‘짭짤, 쌉쌀’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아니면 ‘-콤’을 붙여도 좋습니다. ‘달콤, 매콤, 새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맛의 느낌을 잘 보여줍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식재료는 우리 땅에서 나고 자라는 재료일 겁니다. 동물도, 식물도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먹었을 것이고, 우리 몸에 익숙해져 있을 겁니다. 심지어는 물도 그렇습니다. 낯선 지역에 가면 물갈이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물뿐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는 삶의 원리이자 지혜일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대표 음식 한국 음식 음식 재료
2026.01.11. 17:37
언어 접촉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접촉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언어 접촉의 시작은 개인과 개인의 접촉이었을 것이고, 점점 확대되어 사회와 사회의 접촉, 지역과 지역의 접촉, 국가와 국가의 접촉, 문화권과 문화권의 접촉, 세계와 세계의 접촉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겁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접촉하는 존재입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소통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발전은 언어의 접촉이 이루어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대화의 힘을 느낍니다. 좀 넓게 말하자면, 강의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원래 강의하려고 했던 내용보다 훨씬 많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있습니다. 대화가 인류의 발전에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겁니다. 서로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다른 언어이거나 같은 언어라도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을 때 일어납니다. 접촉이 오해를 부르면, 그 오해는 다시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소한 오해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오해를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싸울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저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지식의 측면도 있겠지만, 가치의 측면이 강하고, 궁극적으로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한국어 교육에서 언어 접촉이 중요한 이유는 ‘궁금함’과 ‘답답함’ 때문일 겁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습자의 경우 한국인과 만나서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물론 이때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배운 표현과 문법, 어휘를 사용해보고 싶은 겁니다. 이때 감정이 궁금함입니다. 스스로의 실력도 궁금하지만 한국과 한국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에 궁금증도 생깁니다. 하지만 두려움도 있겠죠. 두려운 마음으로 접촉을 했는데, 의사소통이 어렵다면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어 학습자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제일 흔한 경우는 관광 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간단한 인사말과 가격을 묻는 말 정도가 필요할 겁니다. 언어 접촉에서 설렘이 주 감정일 겁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게 되면, 영어나 본인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그것도 어렵다면 통역을 사용합니다. 요즘에는 다양한 통번역기계를 사용합니다. 실시간 통역을 해주는 서비스도 점점 정교함을 더해갑니다. 심지어는 말하는 사람 본인의 목소리로 목표어를 통역해주는 서비스도 개발되었습니다. 거의 실시간에 통역을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생길 겁니다. 그래도 기쁨이나 즐거움의 측면에서 보자면,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비할 수 없겠죠. 여행이 목적이라면 언어가 덜 필요할 것이고, 비즈니스가 목적이라면 좀 더 필요할 겁니다. 이제는 비즈니스 현장에도 AI의 도움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화상회의라면 통역조차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편지를 쓰는 일은 AI에게 부탁하거나 많은 부분 도움을 받습니다. 하지만 직접 살기 위해 가는 경우라면 언어의 중요성은 달라집니다. 아니 여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학이나 직업 때문에 이민자가 되는 경우에 언어 접촉은 매순간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연히 상대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이주의 목적이 결혼이라면 접촉의 강도와 깊이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다른 가족, 친척, 동네 사람과 살아야 하고, 아이들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언어 접촉을 고민하는 사람은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연구자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언어 접촉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맞는 교육 내용과 방법, 교재 등을 마련해야 합니다. 언어 접촉의 여러 문제는 다양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첫 접촉이 첫 고민의 시작인 셈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접촉 언어 접촉 접촉 문화권 접촉 지역
2026.01.04. 18:26
문화를 언어권, 민족 등으로 구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문화의 특징적 요소를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요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 한국인의 대표적인 문화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바로 숟가락입니다. 식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놓여 있다면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식탁 위의 모습만으로 어떤 문화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탁 위에는 젓가락, 포크, 숟가락, 나이프(칼) 등이 올라갑니다. 이 중에서 무엇이 식탁에 있는지 여부로 문화를 구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올라가 있는 한국문화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한국어에는 숟가락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이 많습니다. 우선 수저라는 말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타내는 한자어 시저(匙箸)에서 변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수저라고 하면, ‘숟가락’만 떠올리기도 합니다. 수저는 젓가락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한국어에서는 숟가락이 대표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경상도 지역에 가면 노인들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숟가락은 한민족 식사 도구의 대표입니다. 또한 숟가락은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는 말은 그 집 사정을 안다는 뜻입니다. 손님이 오면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며 같이 식사를 권유하기도 합니다. 숟가락이 곧 정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숟가락 밑에서 정분나다.’라고 하여 함께 식사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숟가락이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숟가락을 놓았다는 말은 죽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때 젓가락을 놓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숟가락 문화가 밥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저는 국 문화와 더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한국은 특별한 날에 국을 먹습니다. 생일날 특별한 국을 먹는 문화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미역국을 먹습니다. 설날에는 떡국을, 추석에는 토란국을 먹습니다. 밥상에는 늘 국이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밥과 국을 놓는 위치도 중요한 식탁 문화입니다. 밥은 오른쪽에 국은 왼쪽에 놓습니다. 수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숟가락은 왼쪽, 젓가락은 오른쪽에 놓습니다. 한국어에서는 국물이 중요합니다. 국은 ‘국, 탕, 찌개, 전골’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모두 국물이 있습니다. 탕은 주로 국을 높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끓였음을 나타냅니다. 설렁탕이나 곰탕, 갈비탕이 그러한 예입니다. 또한 약을 탕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로 보입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 외국인이 제일 특이하다고 하는, 정확히는 이상하다는 음식이 국밥입니다. 특히 젓가락만 사용하는 문화에서 국밥은 이상한 음식입니다. 주로 남은 음식을 버릴 때만 국에 밥을 넣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은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숟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말아먹었다’는 표현은 부정적일 때도 있습니다. 타문화와 비교할 때, 한국의 숟가락 문화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한국 문화를 젓가락 문화에 포함시키는 것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은 것입니다. 오히려 해외의 숟가락 문화를 한국 문화와 연결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중국 등에서는 언제, 어디에서 숟가락을 쓰는지, 그리고 누가 숟가락을 쓰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신라 시대의 청동 숟가락, 고려시대의 청동 숟가락의 모양을 연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국에서 지금도 금속으로 된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숟가락이 한국 음식 문화 연구의 시작입니다. 한편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등 새로 생긴 수저의 계급은 씁쓸한 한국 문화의 현재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숟가락 이야기 숟가락 문화 숟가락과 젓가락 한국 문화
2025.12.28. 17:48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하고 자세한 여행기를 남긴 영국인 비숍 여사의 글을 보면 한국인은 매우 유쾌한 민족으로 나옵니다. 한국인에게 한이 많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신이 많고, 유머가 많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가장 우울해 보이는 시대 19세기에도 한국인은 외국인의 눈에 즐겁게 비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말하는 습관을 살펴보면 늘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코미디 방송 중에 ‘웃으면 복이 와요’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만나면 즐겁고, 좋은 방송이 모토이기도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올 거라는 믿음은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웃습니다. 누군가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해도 화를 내기보다는 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지금 웃음이 나와?’라고 물으면 ‘그럼 웃어야지, 울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때로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는 말도 합니다. 화를 내야 하는 장면인데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 겁니다. 물론 모든 순간에 웃지는 않겠지요. ‘일소일소일노일로’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사람의 가장 튼 소망은 아마도 늙지 않고 건강한 것일 겁니다. 그게 지극한 복이겠지요. 그래서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는 말은 큰 깨달음입니다. 웃으면 젊어집니다. 신체적 나이가 젊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심리적 나이는 젊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굴 표정이 미소를 따라 갈라집니다. 편해 보인다는 말은 웃는 이에게 드리는 찬사입니다. 화를 내면 그 모습대로 굳어 갑니다. 가만있을 때도 화를 내는 듯하여 다가가기조차 무섭습니다. 당연히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까이에 없으니 즐거울 일도 줄어듭니다. 한국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리 오므리고 자고, 맞은 놈은 두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속이 편한 속담입니다. 맞은 놈이 낫다니요? 때린 놈은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룹니다. 도둑이나 강도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마음은 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피해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억울한데, 가해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 힘이 들 겁니다. 최소한 가해자가 잠이라도 못 자기 바랍니다.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와 같은 속담도 실제로는 희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부 싸움은 화해가 쉬운 게 아닙니다. 어쩌면 싸운 후 곧바로 또 봐야 하기에 화가 더 쌓일 수도 있습니다. 이혼이 쉬워진 것도 아마 부부 싸움의 해결이 어려워서일 겁니다. 부부 싸움으로 물을 베는 것이 아니라, 몸을 베고 마음에 상처를 깊게 남기기도 합니다. 같이 살기 어렵겠지요. 부부 싸움의 화해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던지는 말이 칼로 물 베기입니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마음에 담아두면 부부는 헤어지는 게 정답처럼 됩니다. 그러나 빨리 화해하고, 미안하다고 먼저 툭 이야기하고 나면 부부는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이때 칼로 물 베기가 실현되는 겁니다. 한국 속담에 나타나는 긍정적 마음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행한 일이 없어서 긍정적인 게 아닙니다.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 어서 화해해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는 지혜가 모여서 속담이 된 겁니다. 지금은 이런 속담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과 계속 이렇게 싸우느니 이쯤에서 그만 갈라서자는 생각이 희망 없는 삶으로 귀결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속담 한국 속담 부부 싸움 한국어 긍정
2025.12.21. 18:26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은 심리학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셀리그만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 몰입,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의 행복뿐 아니라 외국어학습에서도 적용 가능합니다. 외국어 학습을 통해 언어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언어 학습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첫 번째 조건인 즐거움은 선천적인 조건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사교적인 성격은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삶 속의 다양한 장면은 즐거움의 조건이 됩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은 오늘 하루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런데 즐거움은 그 순간이 끝나면 함께 사라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원하기도 합니다. 도파민 중독이란 즐거움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언어교육은 근본적으로 즐거운 현장입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접하고, 배우는 현장입니다. 특히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학생과 일반인 간의 다양한 만남과 교류는 즐거움을 배가시킵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각각의 영역에서 즐거움을 줍니다. 문화 학습은 교실의 안과 밖에서 큰 즐거움을 줍니다. 단순히 학습자만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언어교육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합니다. 행복의 두 번째 조건은 몰입입니다. 즐거움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몰입은 개인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관계 속에서 즐거움 찾기가 어려운 사람도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에는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몇 시간이고 꿈쩍도 안 하고,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람은 책 읽기나 만들기에 집중합니다. 그림이나 음악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는 감상보다는 직접 실행하는 것에서 몰입의 강도가 커집니다. 언어의 학습은 몰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몰입이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고, 언어를 학습하면 몰입감이 커지기도 합니다. 외국어로 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몰입하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어휘를 암기하거나 문장을 외울 때도 몰입은 필수적입니다. 또한 외국어 글쓰기의 경우도 자신을 잊고 글을 쓰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국어의 글쓰기와는 다른 몰입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외국어 학습이 행복하였다면 몰입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수업, 재미있는 교육 내용이 몰입을 높일 겁니다. 세 번째 조건은 의미를 찾는 겁니다. 행복의 조건에 봉사나 종교가 들어가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나 자비, 인(仁)은 모두 의미를 찾는 과정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 평화에 대한 갈망은 의미의 정도를 높입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애씁니다. 어둡고, 낮은 곳을 찾아가서 봉사합니다. 의미를 찾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본주의 정신, 생태학적인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언어교육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외국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언어교육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서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학습자와 교사의 활동 속에서 수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언어교육은 대부분 의미교육이었습니다. 주로 종교 서적이나 고전이 주요한 학습의 자료이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의 언어교육도 시민성 교육이나 생태주의, 차별 없는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외국어가 권력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행복인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승진이나 진학을 위해서 외국어는 실력의 조건이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언어가 능력이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저는 긍정심리학을 바탕으로 행복한 언어교육의 미래를 제안합니다. 한국어 공부가 행복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긍정심리학 언어교육 외국어 학습 언어 학습 외국어 글쓰기
2025.12.14. 17:11
언어의 접촉에서 몇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접촉은 아마도 관광, 여행일 겁니다. 새로운 곳에 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언어의 접촉을 낳습니다. 외국어 학습자 중에는 여행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서 외국어로 대화하는 것은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관광보다 조금 더 접촉의 강도가 센 것은 무역 등 비즈니스의 목적일 겁니다. 무엇을 팔고 사는 과정, 교류를 나누는 과정에서 언어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비즈니스 영어, 비즈니스 한국어의 학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누군가의 직업이 외국인을 상대해야 하거나 그 나라에 가서 일해야 하는 경우라면 훨씬 높은 수준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언어 접촉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수 목적 언어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직업 목적입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른 나라에서 일합니다. 현재 한국에도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있습니다. 한국도 예전에는 독일, 중동, 미국 등지에서 노동자로 있었습니다. 광부, 간호사 등으로 파견되기도 하고, 단순 노무자의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도 역시 해당 언어를 학습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직업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온 노동자의 경우는 건설, 염색, 가구 등의 공장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농어촌의 일로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에 따라 배워야 할 어휘와 표현이 달라집니다. 직업 목적이라고 하여도 목표점이 다른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가 각 개인에게는 잘 맞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직업의 종류에 따른 세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직업 목적 한국어의 대상에 최근에는 사무직 노동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거나 본국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한 경우도 있지만, 한국어와는 무관한 전공을 졸업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대상자를 위한 교육도 직업 목적으로 개발되어야 합니다. 향후에는 새로운 직업 목적의 학습자가 늘어날 겁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종의 외국인 취업자가 늘어날 겁니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의 예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도 향후 외국인 요양보호사가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일본어 학교에는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2018년과 2019년에 5개월간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하였습니다. 그때도 일본어 학교에 요양보호사가 되려는 외국인 학습자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따라서 요양보호사를 위한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한 가사를 돕는 외국인 노동자도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류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K-뷰티 관련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서 관련 산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외국인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아이돌을 희망하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도 실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기를 원하는 스포츠 선수도 증가하고 있는데, 스포츠 관련 한국어 교육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경희대학교에서는 외국인 농구 선수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한 적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몽골 선수로 이루어진 고등학교 배구팀이 있어서 화제입니다.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의 내용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편지쓰기나 전화 받기가 중요한 교육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이메일이나 메신저 한국어가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직업 형태, 한국어의 새로운 의사소통 도구 등에 관한 관심을 계속 가져야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들도 더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교육 한국어 교재 외국인 노동자
2025.12.07. 17:13
우리는 방언이라고 하면 주로 사투리를 떠올립니다. 방언에는 지역 방언과 계층 방언이 있지만, 주로 지역 방언이라는 인식이 있는 겁니다. 계층 방언은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상류층의 언어가 다르고, 중류층의 언어가 다르고, 하류층의 언어가 다릅니다. 계층을 상, 중, 하로 나누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네요. 계층 방언은 지역 방언보다 오히려 언어 접촉의 기회가 적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른 계층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어의 경우는 비교적 계층 방언이 덜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의 경우를 보자면, 왕실의 언어가 달랐고, 양반 계층의 언어가 다르고, 평민의 언어가 달랐을 겁니다. 물론 백정이나 심마니, 광대 등의 특수한 언어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의 권력층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평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황실이 남아있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될 터이고, 권력자들이 서민의 말투를 쓰는 것도 원인이 될 겁니다. 서민이 된 것은 아니나 서민과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고 일부러 계층의 말투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예전 양반의 언어는 아무래도 한자어나 고사성어의 표현이 많았을 겁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통감 등을 공부하면서 공유되는 언어 표현이 많았을 겁니다. 당연히 이러한 한자어 표현은 계층 방언의 중요한 요소였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표현이 서민에게 확산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판소리를 비롯한 민요에도 수많은 한자성어와 표현이 등장합니다. 춘향가나 적벽가 등은 양반 계급의 취향의 노래여서 더욱 한자성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게 서민의 언어 속에 담깁니다. 일반 민요에도 칠십 고래희(회심곡), 녹음방초승화시(사철가) 등등 수많은 한자성어, 고사성어가 담겨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계층간 언어접촉이 일어납니다. 계층 방언이 두드러지는 곳은 특정 직업을 바탕으로 한 집단입니다. 집단 안에서만 사용이 되기 때문에 ‘은어’라고 합니다. 비밀스러운 언어 표현이 많습니다. 접촉을 피하는 언어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비밀을 유지해야 할까요? 대표적으로는 범죄 집단이 있을 겁니다. 조직폭력배, 갱단, 깡패 등은 자신만의 은어를 사용합니다. 경찰이 알지 못하게 표현하는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경찰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은어는 또 바뀌겠지요. 군인도 비밀이 생명이 조직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분리된 생활을 하다 보니 은어가 발달하였습니다. 군대용어가 군대 밖에서는 암호처럼 사용됩니다. 지금은 방송 등의 매체가 발달하고, 민주화로 계층, 계급의 구분도 적어졌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서는 계층 방언도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대 간의 차이는 훨씬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세대 간의 언어 접촉이 제한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계층보다는 세대 방언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입니다. 청소년 계층은 중장년의 언어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자 어휘에 약점을 보입니다. 반면에 중장년 등은 청소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어, 유행어 등 새로 등장한 어휘가 많습니다. 게임이나 SNS 등에서 사용되는 어휘나 표현은 기성세대에게 암호처럼 보입니다. 세대 간의 언어 차이를 문해력과 연관 짓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가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부분에 대한 문해력인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문해력은 관심 분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청소년의 문해력과 기성세대의 문해력은 범위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간에도 관심분야가 다르면 문해력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최근에는 세대의 간격이 매우 짧아지고 있습니다. 즉 예전에 비해서 여러 세대가 공존하고, 그래서 언어 차이가 점점 심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으로 세대 간의 언어 접촉이 적어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언어의 차이를 줄이려면 언어 접촉이 늘어나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언과 계층 계층 방언도 언어 접촉 언어 표현
2025.11.30. 16:09
요즘은 노자(老子)를 읽고 있습니다. 전에 혜거 스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은 왕필의 노자 주를 읽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습니다. 좋은 구절이 많고. 깨달음을 주는 글귀가 많습니다만, 다 기억은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몸과 마음 어딘가에 걸려서 오랫동안 자연스레 머물기 바랍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몸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왠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자연스러운 공부와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어색한 모순도 보입니다. 노자에서 제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구절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말입니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매일 더해야 하는 것이지만, 도를 위해서라면 날마다 덜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배움도, 학문도 생각해 보면 집착입니다. 배워서 드날리는 명예도 욕망입니다. 늘 그 점을 잊고 삽니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척하는 삶입니다. 도(道)라는 말은 ‘깨달을 각(覺)’으로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하나씩 떨어뜨리며 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마저도 집착이라는 선사(禪師)들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는 것은 더하고 빼는 일의 반복입니다. 계속 더하거나 계속 뺄 수 있다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지나면 무언가 더해져 있고, 무언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종종 내가 오늘 더한 것과 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것은 더해서 자랑스러웠고, 어떤 것은 더해서 부끄럽습니다. 어떤 것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어떤 것은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 욕망을 봅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이고, 무엇을 위한 깨달음일까요? 자랑스러움, 부끄러움, 다행, 아쉬움이 모두 욕망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쳐서 괴롭습니다.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경우에도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집착은 제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네요. 아니 온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눈을 부라리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리고 심장이 뜁니다. 이른바 편도체 활성화입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죠. 평생 살면서 편도체 활성화는 내게 괴로움으로 남았습니다. 먼 옛날 조상 때부터 내 몸속에 익숙해진 괴로움일 겁니다.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죠. 다만 배우는 목적이 문제일 겁니다. 더하기 위해서 배우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서 가려고 하면 숨이 차겠죠. 배우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찰 수밖에 없습니다. 더하여도 숨이 차오르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노자를 읽는 것도 배움이기는 하나 덜어내는 배움이 아닐까요?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까요? 아니 무엇을 더하려고 하고. 무엇을 빼려고 할까요? 저는 오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습니다. 더해지고, 굳어집니다. 어서 빼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빼내려는 생각은 오히려 그 생각을 곤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덜어내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저는 글을 씁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사람으로, 좋은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어느새 잡생각이 빠져나갑니다. 덜어지는 삶입니다. 위각일손(爲覺日損)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하기와 빼기 이야기였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빼기 편도체 활성화 부끄러움 다행 모두 욕망
2025.11.23. 17:12
우리말에서 ‘검다’와 ‘까맣다’는 색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비슷한 색이죠. ‘희다와 하얗다, 붉다와 빨갛다, 푸르다와 파랗다, 누르다와 노랗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다, 하얗다, 빨갛다, 파랗다, 노랗다’가 더 밝은 느낌입니다. 물론 밝고 어두운 모음의 차이가 큽니다. ‘검다, 희다, 붉다, 푸르다, 누르다’는 모두 음성모음의 어간입니다. 음성모음은 어둡고, 무겁고, 짙은 느낌을 나타냅니다. 빛과 색의 차이로도 보입니다. 까맣다는 빛으로, 검다는 색으로. 검은색은 모두 어두운 느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검은색에도 밝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쓰는 표현이 바로 까만색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색처럼 보여도 밝고 어두운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우리말입니다. 우리도 색을 표현할 때는 이런 느낌을 잘 골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같은 색처럼 표현하면 우리말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게 됩니다. 까맣다의 밝은 느낌에 주목해 보세요. 깜깜, 껌껌, 감감 등의 표현도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두움에도 차이가 있고, 안 보이는 느낌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앞이 깜깜하다는 말은 추상적일 때 쓰입니다. 눈앞이 껌껌하다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소식의 경우는 ‘감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감감 무소식이죠. 깜깜 무소식이나 껌껌 무소식은 특별한 의도가 담기지 않는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편 까마득하다는 표현도 합니다. 까마득하다는 말은 ‘까맣다’와 ‘아득하다’가 합쳐진 말로 보입니다. 아득하다는 말이 검은색과 관련이 됩니다. 한자에서 검을 현(玄)은 검은색이기도 하지만 아득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현(玄)’이라고 표현합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늘을 검다고 한 것은 색의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윽함이나 아득함이 있습니다. 블랙홀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까마득하다는 말은 검다는 의미보다는 아득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까마득한 높이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죠. 까마득한 산의 정상이라든지,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높이의 절벽을 까마득하다고 하는 거죠.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추상적으로 표현할 때도 까마득하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까마득하게’와 ‘까맣게’는 비슷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주로는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까맣게 잊었다고 할 때도 역시 검은 색과는 관계가 적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게 잊으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 아득해지고,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죠.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참으로 힘든 순간이죠.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때 놀라며 경험하는 일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잊는 일이 많아집니다. 괴로웠던 일이나 미운 사람을 잊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잊어서 집착이 옅어진다면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잊음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주면 큰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치매(인지증)를 제일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잊은 것조차 기억을 못 하게 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신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설렜습니다. 무슨 음식을 먹으면 좋을지, 어디에 가면 좋을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선생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 안 되어 이번에는 만나기가 어렵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메시지를 다시 보았더니 전에 선생님 연락에 제가 답을 안 한 겁니다. 설레기만 하고 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습니다.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후에 다시 미국에서 뵙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만,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참 묘한 일입니다. 까맣게,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선생님 연락 사실 검은색 모두 음성모음
2025.11.16. 18:00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힐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원래 글의 제목을 ‘자라는 생각하지 마!’라고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프레임 전쟁에 관한 책이죠. 저는 이 책을 악용한 수많은 정치가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환멸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극좌, 극우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튼 어떤 개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이 틀이 되어 그 속에 갇히게 됩니다. 레이코프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원래 제목은 잊으셨기 바랍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속담을 보면서 우리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했다고 느낍니다. 심리학 논문 제목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라에게 손가락을 물려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 겁니다. 저는 물려본 적이 없기에 자라 말고 다른 괴로운 상황을 상상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일이 생각만 해도 두려울까요? 한번 겪은 괴로운 상황은 오랫동안 고통으로 남고, 트라우마가 됩니다. 자라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자라와 그다지 비슷하지도 않은 솥뚜껑(제가 보기에)을 보고도 놀랐을까요? 아마도 심장이 두근거렸을 겁니다. 개에게 물려 본 사람은 멀리 개만 보여도 몸서리를 칩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실수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비슷한 상황만 닥쳐도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뜁니다. 공황 상태가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우울과 불안이 일상화됩니다. 새벽에 깨면 온통 자라 생각뿐입니다. 솥뚜껑을 생각하며,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라 생각으로 밤을 샙니다. 혹시 다시 자라에게 물리면 어쩌나 겁이 나고, 왜 나에게만 자라가 나타나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은 실제로 내 앞에 자라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괜히 자라만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자라 생각이 날 때마다 솥뚜껑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노력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도 자꾸 자라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닥쳐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솥뚜껑은 절대로 내 손가락을 물지 않습니다. 저절로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오는 일도 없습니다.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속담에서 솥뚜껑은 아무런 해악이 아닙니다. 그저 닮은꼴일 뿐이죠. 솥뚜껑은 생각보다 뜻밖의 즐거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섣불리 괴로울 거라 단정 지을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솥뚜껑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요? 밥을 지을 때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생각날 수도 있겠네요. 요즘은 보기 어려운 모습이죠. 저는 솥뚜껑이라고 하면 ‘삼겹살’이 생각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갔습니다. 그 날은 모두 밥도 많이 먹고, 아이들도 신이 났습니다. 묵은지를 구워 먹는 재미도 좋았습니다. 솥뚜껑은 행복의 상징이고, 추억의 기억입니다. 솥뚜껑만 생각하자는 것은 달리 말하면 좋은 기억을 떠올리자는 의미기도 합니다. 자라와 같은 불안, 초조, 우울, 고통, 공포 등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그 속에 맴돌게 됩니다. 불안이 걱정을 낳고, 두려움이 고통을 낳습니다. 부정적 감정은 회오리바람처럼 내 주변을 감쌉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솥뚜껑만 생각하면 세상은 달라질 겁니다. 행복, 사랑, 추억, 기쁨, 웃음 등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갑니다. 긍정이 깊어지면 부정이 줄어듭니다. 솥뚜껑만 생각하세요. 이왕이면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모습과 함께. 솥뚜껑만.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솥뚜껑 생각 가슴 솥뚜껑 자라가 얼마 고통 공포
2025.11.09. 16:51
외국어를 배우는 지름길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그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한국어를 잘 배우려면 이왕이면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언어 접촉이 쉬운 게 아닙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수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을 물어보면 대부분 매우 적다고 대답합니다. 심지어는 한국에 유학 와 있는 외국인 유학생 중에는 한국 친구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인 친구의 유무를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한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수업을 1학년 수업이나 어학당의 수업이 아니라 국문과 4학년 수업입니다. 놀랍지요. 국문과를 다니려면 비교적 다른 전공에 비해서 한국어 실력이 높아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려운 한국어 문법을 배우고, 문학작품, 고전문학 그리고 옛말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응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긴밀한 언어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대로 외국인 유학생의 한국어 능력은 예상보다는 높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조별과제를 할 때 외국인 학생이 기피 대상이라는 한국인 학생의 인터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씁쓸합니다. 한국어 실력이 낮으니 발표 준비가 어려웠겠지요. 조별 과제 중에도 소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자 준비한 내용을 모으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저는 특히 수업에서의 언어 접촉은 공식적이고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어 접촉을 늘리는 일이 구상되어야 합니다. 제 수업에서는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단 발표 준비 진행을 정리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언어 접촉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발표는 주로 외국인 학생이 하게 하였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전체적으로 사회를 주로 보고, 외국인 학생 발표를 돕게 하였습니다. 발표 내용은 한국과 모국의 문화 비교에 관한 거였습니다. 제 수업의 과목명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입니다. 원래는 한국 학생이 듣는 전공과목입니다만, 지금은 외국인 학생이나 교환학생의 수강도 늘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물론 어색하거나 잘 안되는 조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학생은 직접 발표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안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인 학생은 한국 학생이 꼼꼼히 문장이나 발음까지 챙겨주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발표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발표 소감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주로 생각보다 외국 학생이 발표를 잘해서 놀랐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조금만 서로 도우면 외국 학생의 한국어 실력은 무섭게 성장할 겁니다. 한편 외국 학생의 반응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는 학생이 조별 발표를 통해서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발표 준비 과정에서 친해져서 앞으로 자주 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뜻하게 도와주는 한국 학생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수업의 풍경이 기적의 풍경처럼 보이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게 되었고, 발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사실 한국 학생은 외국인 학생을 도우면서 의외의 성과를 얻습니다. 일단 한국어 교육, 한국 문화 교육의 현장에 서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가르치는 경험을 한 겁니다. 외국인이 어떤 발음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문법을 자주 틀리는지 직접 알게 되어 한국어 교육에 관심이 깊어진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한 보통 각 조에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을 같게 배정하고, 외국인은 다양한 나라의 학생을 포함하였기에 다양한 언어문화를 이해하는 효과까지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졸업 후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큰 힘이 될 겁니다. 우리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 다른 것은 특별하고 좋은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학습자 한국 학생들 한국어 접촉 한국어 학습자
2025.11.02. 17:21
장 자크 루소의 ‘인간 언어 기원론’을 보면 ‘고대인은 무엇이든지 가장 생생한 방법으로 말했다. 그들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고, 기호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이봉일 역)’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생생하다’는 표현에 마음이 갔습니다. 바로 몸짓과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몸짓언어는 생생합니다. 상형문자는 생생합니다.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언어는 구체적인 듯하나 생생하지는 않습니다.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는 겁니다. 상형문자의 생생함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자의 발달로 인해서 몸짓언어와 상형문자의 생생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상형문자는 해석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언어 접촉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게 몸짓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몸짓은 그야말로 몸이 하는 말입니다. 말은 근본적으로 입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이므로 몸이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움직임으로 말이 보여주는 느낌보다 깊은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므로 몸짓은 생생한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은 그대로 언어입니다. 바라보는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손은 어떻습니까. 손짓을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손도 그대로 언어입니다. 말없이 손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때로는 더 강력한 의미를 담습니다. 눈이나 손은 말 이상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 큰 힘이 있습니다. 그윽하게 바라보고, 말없이 쳐다보고, 노려보고, 째려보고, 훑어보고, 깔보고, 올려다봅니다. 손으로는 오라고, 가라고, 싫다고, 아니라고, 응원한다고 다양한 행위를 합니다. 손사래를 치거나, 박수를 치고, 잡아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말보다 강력한 의사전달입니다. 손짓발짓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우리는 보통 발짓은 잘 안 합니다. 오히려 발길질을 하죠. 여기에서 ‘짓과 질’은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몸짓언어는 본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문화적이기도 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습관이고 버릇이 굳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문화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접촉의 현장에서 몸짓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몸짓을 본능으로 받아들이면 수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물론 문화마다 비슷한 몸짓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화가 나면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리며, 가슴을 펴고, 씩씩댑니다. 하지만 어디서나 비슷할 것 같았던 행위가 다르게 해석되면 당황스럽습니다. 오라는 손짓이 문화마다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손짓 자체가 무례한 행위입니다. 아마 너무 직접적이어서 그럴 수 있겠습니다. 같은 문화권 사람끼리 살 때는 말도, 몸짓언어도 그렇고 크게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고맥락’이라고 합니다. 고맥락 문화는 상황이 중요합니다. 서로 상황에 대한 이해가 근본이 됩니다. 반면에 저맥락은 상황을 배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말이나 글이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말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사회는 저맥락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이동이 많을수록, 다른 문화권과 접촉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저맥락한 문화로 바뀝니다. 고맥락한 사회에서는 서로 상황을 이해하기에 ‘척하면 척’입니다. 부정확하게 말해도 이해하고, 눈빛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립니다.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 겁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할 때입니다. 감정의 전달은 몸짓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다른 문화의 사람이 섞여서 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눈빛이나 눈짓은 오해를 사기 딱 좋습니다. 많은 행위가 잘못 전해집니다. 몸짓언어가 언어 접촉에서 중요한 이유입니다. 몸짓언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접촉이고, 소통입니다. 당연히 귀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서로의 몸짓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가깝게는 가족이나 친구부터, 멀리는 다른 언어 사용자나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몸짓언어가 생생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말을 하더라도, 글을 쓰더라도 몸짓언어는 필수적입니다. 몸짓언어의 접촉이 언어 접촉 이해의 시작이기 바랍니다. 몸짓이 오해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와 배려의 언어이기 바랍니다.아름다운 우리말 몸짓언어 언어 언어 접촉 문법적인 언어 언어 사용자
2025.10.26. 17:17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혼잣말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삶을 풍요롭게 하죠. 저는 말 없는 세상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늘 제 직업이 고맙습니다. 모든 말은 제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물론이고, 혼잣말도 관심사입니다. 말은 물론이고, 글도 관심사입니다. 좋은 말뿐 아니라 욕도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중요하고 좋은 것인데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 정치, 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칫하면 분위기를 얼어붙게 하고, 싸움을 일으킵니다. 서로 기분이 좋지 않게 된다면 그런 주제는 피해야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종교나 정치나 성은 모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피하면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겁니다. 교육도 부족하고요. 종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가르침이 종교(宗敎)입니다. 대화를 피할 것이 아니라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죠. 그런데 종교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고집과 집착입니다. 그리고 가장 피해야 할 분노입니다. 종교의 목표는 평화인데, 종교가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잘못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깊어집니다. 그런 종교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과 종교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 기쁘고, 아름다운 시간이 없습니다. 종교 이야기는 더 좋은 가르침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마음을 열고 배우기 바랍니다. 저 역시 남은 시간 제일 많이 공부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종교입니다. 배울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종교만 공부하면 종교 공부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겁니다. 서양의 정치와 동양의 정치에 대한 관념이 조금씩 다릅니다. 일단 어원 자체가 다릅니다. 서양의 정치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데, 동양의 정치는 힘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정치(政治)의 한자를 가만히 보면 ‘올바름[正]’이 중심에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는 말로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머리를 맞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가 망가지는 것은 말을 함부로 하고,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우길 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정치적’이라고 비꼽니다. 저 사람은 정치적이라는 말만큼 기분 나쁜 표현이 없는 겁니다. 진짜 정치 이야기를 합시다. 듣는 귀와 내 마음을 전하는 말을 공부합시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일 겁니다. 한자 그대로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잘못 이야기를 꺼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성이 유머가 되고 해학이 되지만, 짓궂음이 되고 망신살도 됩니다. 따라서 성은 시간과 장소, 수위의 조절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청자가 듣기 싫어하면 무조건 하면 안 됩니다. 듣는 이가 좋아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겠지요.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인생이 어그러집니다. 저는 좋은 사람끼리 솔직하고 따뜻한 성 이야기는 환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이야기라면 더 좋을 겁니다. 얼어붙은 화제를 즐겁게 돌리는 이야기로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만 맞는다면 피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우리 이제 종교와 정치와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즐겁게 나눕시다. 고집과 집착과 분노와 모욕과 무시와 주책없음은 빼고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종교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 종교 정치
2025.10.19. 19:22
추석이 지났습니다. 추석이 지났으니 앞으로 가을이 깊어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작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점점 그저 휴일로만 여겨지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 추석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추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더 잘 보내면 좋겠습니다. 추석은 이름에서 어떤 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니 가을에 맞이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저녁 석(夕)이 들어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가을이면서 달이 중요한 날이라는 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추석을 달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는 가을 저녁 보름달의 날입니다. 한가위의 어원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가장 큰 보름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석과 비교할 수 있는 날로는 설날이 있습니다. 설날도 사실 이름만 봐도 무슨 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설은 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년을 우리는 한 해라고 합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기 때문에 설은 해의 의미를 갖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설이 나이를 나타낼 때는 ‘살’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옛말에서 설과 살은 같은 어원의 말입니다. 몇 살이냐는 말은 몇 설이 지났느냐는 뜻입니다. 태어난 지 몇 해가 되었냐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이라고 한다면 생일이 지난 것이 아니라, 설이 지난 수를 세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설날은 해의 날이고, 추석은 달의 날입니다. 해의 날과 달의 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해는 밝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침이 되면 그래서 우리는 새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해가 뜰 무렵을 새벽이라고도 하죠. 모두 해와 관련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해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새해 일출을 보고 소망을 빌기도 하지만, 평상시에 해를 보고 소원을 비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에게 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민족은 설날보다는 추석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전에 보면 설에는 고향에 못 가더라도 추석에는 꼭 가려고 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은 설보다는 추석이었습니다. 아마도 추석이 가을에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겁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추수(秋收)라는 말 자체에도 가을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가을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역시 추수하다의 의미입니다. 가을은 추수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당연히 넉넉한 시간입니다. 또한 추수는 감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추수라는 말 뒤에 감사라는 말이 붙는 예가 많습니다. 추석은 다른 말로 하자면 추수 감사절인 셈입니다. 추수를 하면 감사해야 할 사람 또는 대상이 생각납니다. 신이나 조상, 부모와 친척, 친구 등 감사해야 할 대상도 많습니다. 넉넉하기에 나누어야 합니다. 지금도 설보다는 추석에 훨씬 더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감사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추석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물을 나누는 날이기 바랍니다. 고마움을 전달하는데 물질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추석은 달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해보다 달이 좋습니다. 물론 태양의 역할이 크지요. 밝은 시간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은 어두운 거리를 비추어 주고,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게 합니다. 추석에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그리움을 나누고, 더 많은 고마움을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 있으면, 추석이 더욱 아련할 겁니다. 추석이 미국에서도 밤길을 비추는 고마움으로, 소원을 비는 날로, 감사의 날로, 축복의 날로 기억하고 이야기하기 바랍니다. 맛있는 송편도 서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번 추석 가을 저녁 설날도 사실
2025.10.12. 18:06
한국에서 우리는 한국어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이미 수많은 언어가 들어와 있습니다. 비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지만, 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습니다. 많은 곳에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이 섞여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길의 표지판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작은 표지판에 네 언어가 쓰여있는 게 답답해 보이지만 친절함이나 배려의 상징으로도 보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늘 여러 언어의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간판의 경우는 훨씬 심각한 접촉의 현장입니다. 예전에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보였던 영어 간판이 도시를 뒤덮은 지 오래입니다. 최근에는 급속도로 일본어 간판도 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약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는 중국어 간판이 아주 많습니다. 중국인 유학생이 많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외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는 오히려 한국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때로는 한 간판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언어 접촉의 현장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는 방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홈쇼핑과 같은 채널에서는 수많은 외국어와 외래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패션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외국어가 한국어보다 더 많은 듯합니다. 모르는 말투성이입니다. 화장품이나 미용에 관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와 관련된 드라마를 보면 아예 자막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대부분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입니다. 뉴스, 스포츠, 드라마, 피디 등의 단어가 다 순우리말이 아니니 외국어 범람의 현상은 놀랄 일도 아닐 겁니다. 케이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가끔 들어갔던 외국어 가사가 이제는 주를 이룹니다. 오히려 한국어 가사가 맛보기처럼 들어갑니다. 사실 케이팝의 정의 자체가 어렵습니다. 작곡가, 가사, 가수, 기획사 등에 한국적이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도 많고, 심지어 팀원 중에 외국인도 여럿입니다. 어쩌면 케이팝 자체가 접촉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점을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본에 가면 지하철에서 한글 안내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마다 한국어 안내가 있어서 종종 여기가 어디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간판에도 한글이 보입니다. 미국 등의 한인타운에는 그야말로 영어가 드뭅니다. 한동안 한국어 간판에 영어를 같이 써 달라는 현지의 요구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무슨 가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항의였습니다. 외국인은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에 열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한글을 접합니다. 자연스러운 언어 접촉의 현장입니다. 한국어로 된 간판이 드라마에 나오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고, 케이팝에 한국어로 된 가사가 나오면 뜻을 찾아보고 따라 부릅니다. 이제 한글과 한국어는 더 이상 외국인에게 낯선 문자, 낯선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외국어가 엄청나게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어도 세계 속으로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언어 접촉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언어 접촉은 쌍방향이고, 다방향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한 언어가 여러 언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시대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한자어가 한국과 일본, 베트남, 태국 등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에는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가 역으로 한국이나 중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어가 일본어나 중국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앞으로 베트남어나 태국어가 우리말 속으로 더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궁금함의 현장이어야 하고 배려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생깁니다. 혹시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배려가 생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상호 문화교류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촉의 현장에서 문화적으로 더 성숙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현장에서 한글날 언어 접촉 한국어 영어 한글날 언어
2025.10.05. 16:40
저는 이불을 꿰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느질도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잠깐 형식적으로 해 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지겹고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최근에 춤 공연 때문에 한복을 맞추면서 바느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복이 비싸지는 이유라는 말씀도 덧붙였고요. 실제로 한복 전문가 중에도 디자인만 할 뿐 바느질은 안 하는, 또는 못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느질이 필수였고, 그래서 참 고역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이라는 표현에서 오는 아릿함이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대학생 시절 충격이었던 시인이었습니다. 국문과생이었던 저는 자연스레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국어학이 전공이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중학교 때부터 비 오는 날이면 왠지 낭만적이 되어 시를 썼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 시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시인은 국문과를 나오거나 대학을 나오는 사람이어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사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박노해는 이름 자체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위한다는 의미여서, 공장에 취업한 대학생이 썼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아예 저 정도 실력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공동 창작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늘 궁금했던 시인 박노해를 다른 글에서 만나게 된 것은 ‘노동해방문학 복간호’에서였습니다. 수배 중이던 박노해 시인과의 대담 기사였습니다. 목숨을 건 노동해방투쟁. 낯선 구호 속에서 저는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긴 수감 생활을 하였습니다. 체포되었을 때의 표정과 석방되던 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맑은 얼굴이었습니다. 박노해의 여러 시를 읽으면서, 저는 뜻밖의 시에 마음이 갔습니다.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였는데, 밖에서 노동운동가며 혁명가로 살고 있는 자신이 집에서는 시키는 자로, 남자로 군림하고 있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부끄러운 마음에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이불 홑청을 꿰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담담함, 선명함보다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저는 이 시를 한지에 써서 방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긴 시였기에 방문을 완전히 덮는 크기였습니다. 지금도 그 시는 제 가슴 속에 반성문처럼 남아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에 학원에서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방학 때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가르쳤습니다. 그 중 한 편이 바로 ‘이불을 꿰매면서’였습니다. 중학생에게는 좀 어려운 시였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 설명하고, 느끼게 하면 오히려 쉬운 시였습니다. 그때 그 시를 용인해준 학부모께 지금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기 바랍니다. 얼마 전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하는 카페를 지났습니다. 요즘에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진에도 뒷모습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전에도 가본 곳이라 이번에는 따로 들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지나친 권위입니다. 강약약강입니다. 제 삶에 이런 감정을 강하게 심어놓은 시는 바로 박노해 선생의 시였습니다. 그 외에도 박노해 선생의 시집을 여러 권 갖고 있습니다만, ‘나 그곳에 서 있다’라는 시도 가슴으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가을 시를 읽고, 시가 쓰고 싶어지는 하루이기 바랍니다. 박노해 선생의 이불을 꿰매며 첫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박노해 이불 시인 박노해 박노해 시인 박노해 선생
2025.09.28. 17:03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옥을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불교 잡지를 읽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그림까지 보니 더 아찔했습니다. 지옥은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옥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지금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 많았습니다. 우울증이니 불안이니 공황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말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삶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을까요? 안타까운 선택이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람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느낌입니다. 잔인한 장면은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할 겁니다. 사지가 찢기고,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고, 소에게 짓눌리고, 칼에 찔리고 등등.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삶에서 느끼는 지옥은 엄살 같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면서 저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겪는 괴로움, 맛보는 지옥은 심리적인 게 많습니다. 우선 자식이 아프고, 가족이 아픈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예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은 지옥 그대로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 맞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사는 게 천국이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옥과 천국이 논리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고 천국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살면서 천국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소망입니다. 죽어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죽어서 천국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도 있겠죠. 지옥은 죽어서라도 갈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천국은 살아서 맛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꽃이 만발한 동산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남녀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정의가 참 어렵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꽃에 날아온 벌레를 끔찍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매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면 오히려 그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천국이 간단합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면 그게 천국입니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 곳은 죽어서 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죽어서는 못 가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이 가능하죠.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이 천국의 다른 말로 들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쁘고 즐거운 표정입니다. 꽃은 웃음꽃이 천국의 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가 늘 천국입니다. 예전에 천국 그림에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는 남편의 모습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천국 참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옥 천국 천국 그림 불교 잡지 우리 속담
2025.09.21. 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