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하고 자세한 여행기를 남긴 영국인 비숍 여사의 글을 보면 한국인은 매우 유쾌한 민족으로 나옵니다. 한국인에게 한이 많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신이 많고, 유머가 많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가장 우울해 보이는 시대 19세기에도 한국인은 외국인의 눈에 즐겁게 비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말하는 습관을 살펴보면 늘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코미디 방송 중에 ‘웃으면 복이 와요’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만나면 즐겁고, 좋은 방송이 모토이기도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올 거라는 믿음은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웃습니다. 누군가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해도 화를 내기보다는 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지금 웃음이 나와?’라고 물으면 ‘그럼 웃어야지, 울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때로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는 말도 합니다. 화를 내야 하는 장면인데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 겁니다. 물론 모든 순간에 웃지는 않겠지요. ‘일소일소일노일로’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사람의 가장 튼 소망은 아마도 늙지 않고 건강한 것일 겁니다. 그게 지극한 복이겠지요. 그래서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는 말은 큰 깨달음입니다. 웃으면 젊어집니다. 신체적 나이가 젊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심리적 나이는 젊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굴 표정이 미소를 따라 갈라집니다. 편해 보인다는 말은 웃는 이에게 드리는 찬사입니다. 화를 내면 그 모습대로 굳어 갑니다. 가만있을 때도 화를 내는 듯하여 다가가기조차 무섭습니다. 당연히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까이에 없으니 즐거울 일도 줄어듭니다. 한국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리 오므리고 자고, 맞은 놈은 두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속이 편한 속담입니다. 맞은 놈이 낫다니요? 때린 놈은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룹니다. 도둑이나 강도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마음은 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피해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억울한데, 가해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 힘이 들 겁니다. 최소한 가해자가 잠이라도 못 자기 바랍니다.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와 같은 속담도 실제로는 희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부 싸움은 화해가 쉬운 게 아닙니다. 어쩌면 싸운 후 곧바로 또 봐야 하기에 화가 더 쌓일 수도 있습니다. 이혼이 쉬워진 것도 아마 부부 싸움의 해결이 어려워서일 겁니다. 부부 싸움으로 물을 베는 것이 아니라, 몸을 베고 마음에 상처를 깊게 남기기도 합니다. 같이 살기 어렵겠지요. 부부 싸움의 화해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던지는 말이 칼로 물 베기입니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마음에 담아두면 부부는 헤어지는 게 정답처럼 됩니다. 그러나 빨리 화해하고, 미안하다고 먼저 툭 이야기하고 나면 부부는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이때 칼로 물 베기가 실현되는 겁니다. 한국 속담에 나타나는 긍정적 마음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행한 일이 없어서 긍정적인 게 아닙니다.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 어서 화해해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는 지혜가 모여서 속담이 된 겁니다. 지금은 이런 속담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과 계속 이렇게 싸우느니 이쯤에서 그만 갈라서자는 생각이 희망 없는 삶으로 귀결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속담 한국 속담 부부 싸움 한국어 긍정
2025.12.21. 18:26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은 심리학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셀리그만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 몰입,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의 행복뿐 아니라 외국어학습에서도 적용 가능합니다. 외국어 학습을 통해 언어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언어 학습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첫 번째 조건인 즐거움은 선천적인 조건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사교적인 성격은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삶 속의 다양한 장면은 즐거움의 조건이 됩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은 오늘 하루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런데 즐거움은 그 순간이 끝나면 함께 사라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원하기도 합니다. 도파민 중독이란 즐거움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언어교육은 근본적으로 즐거운 현장입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접하고, 배우는 현장입니다. 특히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학생과 일반인 간의 다양한 만남과 교류는 즐거움을 배가시킵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각각의 영역에서 즐거움을 줍니다. 문화 학습은 교실의 안과 밖에서 큰 즐거움을 줍니다. 단순히 학습자만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언어교육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합니다. 행복의 두 번째 조건은 몰입입니다. 즐거움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몰입은 개인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관계 속에서 즐거움 찾기가 어려운 사람도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에는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몇 시간이고 꿈쩍도 안 하고,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람은 책 읽기나 만들기에 집중합니다. 그림이나 음악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는 감상보다는 직접 실행하는 것에서 몰입의 강도가 커집니다. 언어의 학습은 몰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몰입이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고, 언어를 학습하면 몰입감이 커지기도 합니다. 외국어로 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몰입하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어휘를 암기하거나 문장을 외울 때도 몰입은 필수적입니다. 또한 외국어 글쓰기의 경우도 자신을 잊고 글을 쓰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국어의 글쓰기와는 다른 몰입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외국어 학습이 행복하였다면 몰입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수업, 재미있는 교육 내용이 몰입을 높일 겁니다. 세 번째 조건은 의미를 찾는 겁니다. 행복의 조건에 봉사나 종교가 들어가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나 자비, 인(仁)은 모두 의미를 찾는 과정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 평화에 대한 갈망은 의미의 정도를 높입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애씁니다. 어둡고, 낮은 곳을 찾아가서 봉사합니다. 의미를 찾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본주의 정신, 생태학적인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언어교육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외국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언어교육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서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학습자와 교사의 활동 속에서 수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언어교육은 대부분 의미교육이었습니다. 주로 종교 서적이나 고전이 주요한 학습의 자료이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의 언어교육도 시민성 교육이나 생태주의, 차별 없는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외국어가 권력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행복인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승진이나 진학을 위해서 외국어는 실력의 조건이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언어가 능력이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저는 긍정심리학을 바탕으로 행복한 언어교육의 미래를 제안합니다. 한국어 공부가 행복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긍정심리학 언어교육 외국어 학습 언어 학습 외국어 글쓰기
2025.12.14. 17:11
언어의 접촉에서 몇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접촉은 아마도 관광, 여행일 겁니다. 새로운 곳에 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언어의 접촉을 낳습니다. 외국어 학습자 중에는 여행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서 외국어로 대화하는 것은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관광보다 조금 더 접촉의 강도가 센 것은 무역 등 비즈니스의 목적일 겁니다. 무엇을 팔고 사는 과정, 교류를 나누는 과정에서 언어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비즈니스 영어, 비즈니스 한국어의 학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누군가의 직업이 외국인을 상대해야 하거나 그 나라에 가서 일해야 하는 경우라면 훨씬 높은 수준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언어 접촉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수 목적 언어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직업 목적입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른 나라에서 일합니다. 현재 한국에도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있습니다. 한국도 예전에는 독일, 중동, 미국 등지에서 노동자로 있었습니다. 광부, 간호사 등으로 파견되기도 하고, 단순 노무자의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도 역시 해당 언어를 학습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직업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온 노동자의 경우는 건설, 염색, 가구 등의 공장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농어촌의 일로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에 따라 배워야 할 어휘와 표현이 달라집니다. 직업 목적이라고 하여도 목표점이 다른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가 각 개인에게는 잘 맞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직업의 종류에 따른 세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직업 목적 한국어의 대상에 최근에는 사무직 노동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거나 본국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한 경우도 있지만, 한국어와는 무관한 전공을 졸업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대상자를 위한 교육도 직업 목적으로 개발되어야 합니다. 향후에는 새로운 직업 목적의 학습자가 늘어날 겁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종의 외국인 취업자가 늘어날 겁니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의 예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도 향후 외국인 요양보호사가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일본어 학교에는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2018년과 2019년에 5개월간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하였습니다. 그때도 일본어 학교에 요양보호사가 되려는 외국인 학습자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따라서 요양보호사를 위한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한 가사를 돕는 외국인 노동자도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류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K-뷰티 관련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서 관련 산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외국인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아이돌을 희망하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도 실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기를 원하는 스포츠 선수도 증가하고 있는데, 스포츠 관련 한국어 교육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경희대학교에서는 외국인 농구 선수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한 적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몽골 선수로 이루어진 고등학교 배구팀이 있어서 화제입니다.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의 내용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편지쓰기나 전화 받기가 중요한 교육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이메일이나 메신저 한국어가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직업 형태, 한국어의 새로운 의사소통 도구 등에 관한 관심을 계속 가져야 직업 목적 한국어 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들도 더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교육 한국어 교재 외국인 노동자
2025.12.07. 17:13
우리는 방언이라고 하면 주로 사투리를 떠올립니다. 방언에는 지역 방언과 계층 방언이 있지만, 주로 지역 방언이라는 인식이 있는 겁니다. 계층 방언은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상류층의 언어가 다르고, 중류층의 언어가 다르고, 하류층의 언어가 다릅니다. 계층을 상, 중, 하로 나누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네요. 계층 방언은 지역 방언보다 오히려 언어 접촉의 기회가 적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른 계층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어의 경우는 비교적 계층 방언이 덜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의 경우를 보자면, 왕실의 언어가 달랐고, 양반 계층의 언어가 다르고, 평민의 언어가 달랐을 겁니다. 물론 백정이나 심마니, 광대 등의 특수한 언어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의 권력층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평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황실이 남아있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될 터이고, 권력자들이 서민의 말투를 쓰는 것도 원인이 될 겁니다. 서민이 된 것은 아니나 서민과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고 일부러 계층의 말투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예전 양반의 언어는 아무래도 한자어나 고사성어의 표현이 많았을 겁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통감 등을 공부하면서 공유되는 언어 표현이 많았을 겁니다. 당연히 이러한 한자어 표현은 계층 방언의 중요한 요소였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표현이 서민에게 확산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판소리를 비롯한 민요에도 수많은 한자성어와 표현이 등장합니다. 춘향가나 적벽가 등은 양반 계급의 취향의 노래여서 더욱 한자성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게 서민의 언어 속에 담깁니다. 일반 민요에도 칠십 고래희(회심곡), 녹음방초승화시(사철가) 등등 수많은 한자성어, 고사성어가 담겨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계층간 언어접촉이 일어납니다. 계층 방언이 두드러지는 곳은 특정 직업을 바탕으로 한 집단입니다. 집단 안에서만 사용이 되기 때문에 ‘은어’라고 합니다. 비밀스러운 언어 표현이 많습니다. 접촉을 피하는 언어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비밀을 유지해야 할까요? 대표적으로는 범죄 집단이 있을 겁니다. 조직폭력배, 갱단, 깡패 등은 자신만의 은어를 사용합니다. 경찰이 알지 못하게 표현하는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경찰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은어는 또 바뀌겠지요. 군인도 비밀이 생명이 조직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분리된 생활을 하다 보니 은어가 발달하였습니다. 군대용어가 군대 밖에서는 암호처럼 사용됩니다. 지금은 방송 등의 매체가 발달하고, 민주화로 계층, 계급의 구분도 적어졌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서는 계층 방언도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대 간의 차이는 훨씬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세대 간의 언어 접촉이 제한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계층보다는 세대 방언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입니다. 청소년 계층은 중장년의 언어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자 어휘에 약점을 보입니다. 반면에 중장년 등은 청소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어, 유행어 등 새로 등장한 어휘가 많습니다. 게임이나 SNS 등에서 사용되는 어휘나 표현은 기성세대에게 암호처럼 보입니다. 세대 간의 언어 차이를 문해력과 연관 짓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가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부분에 대한 문해력인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문해력은 관심 분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청소년의 문해력과 기성세대의 문해력은 범위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간에도 관심분야가 다르면 문해력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최근에는 세대의 간격이 매우 짧아지고 있습니다. 즉 예전에 비해서 여러 세대가 공존하고, 그래서 언어 차이가 점점 심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으로 세대 간의 언어 접촉이 적어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언어의 차이를 줄이려면 언어 접촉이 늘어나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언과 계층 계층 방언도 언어 접촉 언어 표현
2025.11.30. 16:09
요즘은 노자(老子)를 읽고 있습니다. 전에 혜거 스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은 왕필의 노자 주를 읽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습니다. 좋은 구절이 많고. 깨달음을 주는 글귀가 많습니다만, 다 기억은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몸과 마음 어딘가에 걸려서 오랫동안 자연스레 머물기 바랍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몸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왠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자연스러운 공부와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어색한 모순도 보입니다. 노자에서 제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구절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말입니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매일 더해야 하는 것이지만, 도를 위해서라면 날마다 덜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배움도, 학문도 생각해 보면 집착입니다. 배워서 드날리는 명예도 욕망입니다. 늘 그 점을 잊고 삽니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척하는 삶입니다. 도(道)라는 말은 ‘깨달을 각(覺)’으로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하나씩 떨어뜨리며 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마저도 집착이라는 선사(禪師)들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는 것은 더하고 빼는 일의 반복입니다. 계속 더하거나 계속 뺄 수 있다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지나면 무언가 더해져 있고, 무언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종종 내가 오늘 더한 것과 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것은 더해서 자랑스러웠고, 어떤 것은 더해서 부끄럽습니다. 어떤 것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어떤 것은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 욕망을 봅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이고, 무엇을 위한 깨달음일까요? 자랑스러움, 부끄러움, 다행, 아쉬움이 모두 욕망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쳐서 괴롭습니다.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경우에도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집착은 제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네요. 아니 온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눈을 부라리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리고 심장이 뜁니다. 이른바 편도체 활성화입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죠. 평생 살면서 편도체 활성화는 내게 괴로움으로 남았습니다. 먼 옛날 조상 때부터 내 몸속에 익숙해진 괴로움일 겁니다.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죠. 다만 배우는 목적이 문제일 겁니다. 더하기 위해서 배우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서 가려고 하면 숨이 차겠죠. 배우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찰 수밖에 없습니다. 더하여도 숨이 차오르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노자를 읽는 것도 배움이기는 하나 덜어내는 배움이 아닐까요?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까요? 아니 무엇을 더하려고 하고. 무엇을 빼려고 할까요? 저는 오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습니다. 더해지고, 굳어집니다. 어서 빼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빼내려는 생각은 오히려 그 생각을 곤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덜어내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저는 글을 씁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사람으로, 좋은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어느새 잡생각이 빠져나갑니다. 덜어지는 삶입니다. 위각일손(爲覺日損)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하기와 빼기 이야기였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빼기 편도체 활성화 부끄러움 다행 모두 욕망
2025.11.23. 17:12
우리말에서 ‘검다’와 ‘까맣다’는 색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비슷한 색이죠. ‘희다와 하얗다, 붉다와 빨갛다, 푸르다와 파랗다, 누르다와 노랗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다, 하얗다, 빨갛다, 파랗다, 노랗다’가 더 밝은 느낌입니다. 물론 밝고 어두운 모음의 차이가 큽니다. ‘검다, 희다, 붉다, 푸르다, 누르다’는 모두 음성모음의 어간입니다. 음성모음은 어둡고, 무겁고, 짙은 느낌을 나타냅니다. 빛과 색의 차이로도 보입니다. 까맣다는 빛으로, 검다는 색으로. 검은색은 모두 어두운 느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검은색에도 밝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쓰는 표현이 바로 까만색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색처럼 보여도 밝고 어두운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우리말입니다. 우리도 색을 표현할 때는 이런 느낌을 잘 골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같은 색처럼 표현하면 우리말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게 됩니다. 까맣다의 밝은 느낌에 주목해 보세요. 깜깜, 껌껌, 감감 등의 표현도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두움에도 차이가 있고, 안 보이는 느낌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앞이 깜깜하다는 말은 추상적일 때 쓰입니다. 눈앞이 껌껌하다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소식의 경우는 ‘감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감감 무소식이죠. 깜깜 무소식이나 껌껌 무소식은 특별한 의도가 담기지 않는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편 까마득하다는 표현도 합니다. 까마득하다는 말은 ‘까맣다’와 ‘아득하다’가 합쳐진 말로 보입니다. 아득하다는 말이 검은색과 관련이 됩니다. 한자에서 검을 현(玄)은 검은색이기도 하지만 아득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현(玄)’이라고 표현합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늘을 검다고 한 것은 색의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윽함이나 아득함이 있습니다. 블랙홀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까마득하다는 말은 검다는 의미보다는 아득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까마득한 높이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죠. 까마득한 산의 정상이라든지,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높이의 절벽을 까마득하다고 하는 거죠.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추상적으로 표현할 때도 까마득하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까마득하게’와 ‘까맣게’는 비슷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주로는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까맣게 잊었다고 할 때도 역시 검은 색과는 관계가 적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맣게 잊으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 아득해지고,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죠.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참으로 힘든 순간이죠.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때 놀라며 경험하는 일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잊는 일이 많아집니다. 괴로웠던 일이나 미운 사람을 잊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잊어서 집착이 옅어진다면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잊음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주면 큰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치매(인지증)를 제일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잊은 것조차 기억을 못 하게 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신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설렜습니다. 무슨 음식을 먹으면 좋을지, 어디에 가면 좋을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선생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 안 되어 이번에는 만나기가 어렵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메시지를 다시 보았더니 전에 선생님 연락에 제가 답을 안 한 겁니다. 설레기만 하고 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습니다.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후에 다시 미국에서 뵙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만,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참 묘한 일입니다. 까맣게,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선생님 연락 사실 검은색 모두 음성모음
2025.11.16. 18:00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힐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원래 글의 제목을 ‘자라는 생각하지 마!’라고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프레임 전쟁에 관한 책이죠. 저는 이 책을 악용한 수많은 정치가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환멸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극좌, 극우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튼 어떤 개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이 틀이 되어 그 속에 갇히게 됩니다. 레이코프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원래 제목은 잊으셨기 바랍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속담을 보면서 우리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했다고 느낍니다. 심리학 논문 제목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라에게 손가락을 물려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 겁니다. 저는 물려본 적이 없기에 자라 말고 다른 괴로운 상황을 상상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일이 생각만 해도 두려울까요? 한번 겪은 괴로운 상황은 오랫동안 고통으로 남고, 트라우마가 됩니다. 자라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자라와 그다지 비슷하지도 않은 솥뚜껑(제가 보기에)을 보고도 놀랐을까요? 아마도 심장이 두근거렸을 겁니다. 개에게 물려 본 사람은 멀리 개만 보여도 몸서리를 칩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실수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비슷한 상황만 닥쳐도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뜁니다. 공황 상태가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우울과 불안이 일상화됩니다. 새벽에 깨면 온통 자라 생각뿐입니다. 솥뚜껑을 생각하며,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라 생각으로 밤을 샙니다. 혹시 다시 자라에게 물리면 어쩌나 겁이 나고, 왜 나에게만 자라가 나타나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은 실제로 내 앞에 자라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괜히 자라만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자라 생각이 날 때마다 솥뚜껑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노력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도 자꾸 자라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닥쳐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솥뚜껑은 절대로 내 손가락을 물지 않습니다. 저절로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오는 일도 없습니다.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속담에서 솥뚜껑은 아무런 해악이 아닙니다. 그저 닮은꼴일 뿐이죠. 솥뚜껑은 생각보다 뜻밖의 즐거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섣불리 괴로울 거라 단정 지을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솥뚜껑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요? 밥을 지을 때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생각날 수도 있겠네요. 요즘은 보기 어려운 모습이죠. 저는 솥뚜껑이라고 하면 ‘삼겹살’이 생각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갔습니다. 그 날은 모두 밥도 많이 먹고, 아이들도 신이 났습니다. 묵은지를 구워 먹는 재미도 좋았습니다. 솥뚜껑은 행복의 상징이고, 추억의 기억입니다. 솥뚜껑만 생각하자는 것은 달리 말하면 좋은 기억을 떠올리자는 의미기도 합니다. 자라와 같은 불안, 초조, 우울, 고통, 공포 등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그 속에 맴돌게 됩니다. 불안이 걱정을 낳고, 두려움이 고통을 낳습니다. 부정적 감정은 회오리바람처럼 내 주변을 감쌉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솥뚜껑만 생각하면 세상은 달라질 겁니다. 행복, 사랑, 추억, 기쁨, 웃음 등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갑니다. 긍정이 깊어지면 부정이 줄어듭니다. 솥뚜껑만 생각하세요. 이왕이면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모습과 함께. 솥뚜껑만.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솥뚜껑 생각 가슴 솥뚜껑 자라가 얼마 고통 공포
2025.11.09. 16:51
외국어를 배우는 지름길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그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한국어를 잘 배우려면 이왕이면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언어 접촉이 쉬운 게 아닙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수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을 물어보면 대부분 매우 적다고 대답합니다. 심지어는 한국에 유학 와 있는 외국인 유학생 중에는 한국 친구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인 친구의 유무를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한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수업을 1학년 수업이나 어학당의 수업이 아니라 국문과 4학년 수업입니다. 놀랍지요. 국문과를 다니려면 비교적 다른 전공에 비해서 한국어 실력이 높아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려운 한국어 문법을 배우고, 문학작품, 고전문학 그리고 옛말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응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긴밀한 언어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대로 외국인 유학생의 한국어 능력은 예상보다는 높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조별과제를 할 때 외국인 학생이 기피 대상이라는 한국인 학생의 인터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씁쓸합니다. 한국어 실력이 낮으니 발표 준비가 어려웠겠지요. 조별 과제 중에도 소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자 준비한 내용을 모으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저는 특히 수업에서의 언어 접촉은 공식적이고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어 접촉을 늘리는 일이 구상되어야 합니다. 제 수업에서는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단 발표 준비 진행을 정리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언어 접촉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발표는 주로 외국인 학생이 하게 하였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전체적으로 사회를 주로 보고, 외국인 학생 발표를 돕게 하였습니다. 발표 내용은 한국과 모국의 문화 비교에 관한 거였습니다. 제 수업의 과목명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입니다. 원래는 한국 학생이 듣는 전공과목입니다만, 지금은 외국인 학생이나 교환학생의 수강도 늘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물론 어색하거나 잘 안되는 조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학생은 직접 발표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안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인 학생은 한국 학생이 꼼꼼히 문장이나 발음까지 챙겨주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발표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발표 소감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주로 생각보다 외국 학생이 발표를 잘해서 놀랐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조금만 서로 도우면 외국 학생의 한국어 실력은 무섭게 성장할 겁니다. 한편 외국 학생의 반응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는 학생이 조별 발표를 통해서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발표 준비 과정에서 친해져서 앞으로 자주 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뜻하게 도와주는 한국 학생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수업의 풍경이 기적의 풍경처럼 보이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게 되었고, 발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사실 한국 학생은 외국인 학생을 도우면서 의외의 성과를 얻습니다. 일단 한국어 교육, 한국 문화 교육의 현장에 서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가르치는 경험을 한 겁니다. 외국인이 어떤 발음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문법을 자주 틀리는지 직접 알게 되어 한국어 교육에 관심이 깊어진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한 보통 각 조에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을 같게 배정하고, 외국인은 다양한 나라의 학생을 포함하였기에 다양한 언어문화를 이해하는 효과까지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졸업 후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큰 힘이 될 겁니다. 우리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 다른 것은 특별하고 좋은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학습자 한국 학생들 한국어 접촉 한국어 학습자
2025.11.02. 17:21
장 자크 루소의 ‘인간 언어 기원론’을 보면 ‘고대인은 무엇이든지 가장 생생한 방법으로 말했다. 그들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고, 기호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이봉일 역)’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생생하다’는 표현에 마음이 갔습니다. 바로 몸짓과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몸짓언어는 생생합니다. 상형문자는 생생합니다.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언어는 구체적인 듯하나 생생하지는 않습니다.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는 겁니다. 상형문자의 생생함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자의 발달로 인해서 몸짓언어와 상형문자의 생생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상형문자는 해석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언어 접촉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게 몸짓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몸짓은 그야말로 몸이 하는 말입니다. 말은 근본적으로 입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이므로 몸이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움직임으로 말이 보여주는 느낌보다 깊은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므로 몸짓은 생생한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은 그대로 언어입니다. 바라보는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손은 어떻습니까. 손짓을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손도 그대로 언어입니다. 말없이 손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때로는 더 강력한 의미를 담습니다. 눈이나 손은 말 이상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 큰 힘이 있습니다. 그윽하게 바라보고, 말없이 쳐다보고, 노려보고, 째려보고, 훑어보고, 깔보고, 올려다봅니다. 손으로는 오라고, 가라고, 싫다고, 아니라고, 응원한다고 다양한 행위를 합니다. 손사래를 치거나, 박수를 치고, 잡아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말보다 강력한 의사전달입니다. 손짓발짓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우리는 보통 발짓은 잘 안 합니다. 오히려 발길질을 하죠. 여기에서 ‘짓과 질’은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몸짓언어는 본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문화적이기도 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습관이고 버릇이 굳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문화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접촉의 현장에서 몸짓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몸짓을 본능으로 받아들이면 수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물론 문화마다 비슷한 몸짓도 많습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화가 나면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리며, 가슴을 펴고, 씩씩댑니다. 하지만 어디서나 비슷할 것 같았던 행위가 다르게 해석되면 당황스럽습니다. 오라는 손짓이 문화마다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손짓 자체가 무례한 행위입니다. 아마 너무 직접적이어서 그럴 수 있겠습니다. 같은 문화권 사람끼리 살 때는 말도, 몸짓언어도 그렇고 크게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고맥락’이라고 합니다. 고맥락 문화는 상황이 중요합니다. 서로 상황에 대한 이해가 근본이 됩니다. 반면에 저맥락은 상황을 배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말이나 글이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말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사회는 저맥락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이동이 많을수록, 다른 문화권과 접촉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저맥락한 문화로 바뀝니다. 고맥락한 사회에서는 서로 상황을 이해하기에 ‘척하면 척’입니다. 부정확하게 말해도 이해하고, 눈빛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립니다.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 겁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할 때입니다. 감정의 전달은 몸짓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다른 문화의 사람이 섞여서 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눈빛이나 눈짓은 오해를 사기 딱 좋습니다. 많은 행위가 잘못 전해집니다. 몸짓언어가 언어 접촉에서 중요한 이유입니다. 몸짓언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접촉이고, 소통입니다. 당연히 귀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서로의 몸짓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가깝게는 가족이나 친구부터, 멀리는 다른 언어 사용자나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몸짓언어가 생생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말을 하더라도, 글을 쓰더라도 몸짓언어는 필수적입니다. 몸짓언어의 접촉이 언어 접촉 이해의 시작이기 바랍니다. 몸짓이 오해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와 배려의 언어이기 바랍니다.아름다운 우리말 몸짓언어 언어 언어 접촉 문법적인 언어 언어 사용자
2025.10.26. 17:17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혼잣말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삶을 풍요롭게 하죠. 저는 말 없는 세상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늘 제 직업이 고맙습니다. 모든 말은 제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물론이고, 혼잣말도 관심사입니다. 말은 물론이고, 글도 관심사입니다. 좋은 말뿐 아니라 욕도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중요하고 좋은 것인데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 정치, 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칫하면 분위기를 얼어붙게 하고, 싸움을 일으킵니다. 서로 기분이 좋지 않게 된다면 그런 주제는 피해야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종교나 정치나 성은 모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피하면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겁니다. 교육도 부족하고요. 종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가르침이 종교(宗敎)입니다. 대화를 피할 것이 아니라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죠. 그런데 종교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고집과 집착입니다. 그리고 가장 피해야 할 분노입니다. 종교의 목표는 평화인데, 종교가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잘못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깊어집니다. 그런 종교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과 종교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 기쁘고, 아름다운 시간이 없습니다. 종교 이야기는 더 좋은 가르침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마음을 열고 배우기 바랍니다. 저 역시 남은 시간 제일 많이 공부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종교입니다. 배울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종교만 공부하면 종교 공부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겁니다. 서양의 정치와 동양의 정치에 대한 관념이 조금씩 다릅니다. 일단 어원 자체가 다릅니다. 서양의 정치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데, 동양의 정치는 힘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정치(政治)의 한자를 가만히 보면 ‘올바름[正]’이 중심에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는 말로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머리를 맞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가 망가지는 것은 말을 함부로 하고,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우길 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정치적’이라고 비꼽니다. 저 사람은 정치적이라는 말만큼 기분 나쁜 표현이 없는 겁니다. 진짜 정치 이야기를 합시다. 듣는 귀와 내 마음을 전하는 말을 공부합시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일 겁니다. 한자 그대로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잘못 이야기를 꺼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성이 유머가 되고 해학이 되지만, 짓궂음이 되고 망신살도 됩니다. 따라서 성은 시간과 장소, 수위의 조절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청자가 듣기 싫어하면 무조건 하면 안 됩니다. 듣는 이가 좋아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겠지요.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인생이 어그러집니다. 저는 좋은 사람끼리 솔직하고 따뜻한 성 이야기는 환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이야기라면 더 좋을 겁니다. 얼어붙은 화제를 즐겁게 돌리는 이야기로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만 맞는다면 피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우리 이제 종교와 정치와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즐겁게 나눕시다. 고집과 집착과 분노와 모욕과 무시와 주책없음은 빼고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종교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 종교 정치
2025.10.19. 19:22
추석이 지났습니다. 추석이 지났으니 앞으로 가을이 깊어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작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점점 그저 휴일로만 여겨지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 추석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추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더 잘 보내면 좋겠습니다. 추석은 이름에서 어떤 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니 가을에 맞이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저녁 석(夕)이 들어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가을이면서 달이 중요한 날이라는 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추석을 달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는 가을 저녁 보름달의 날입니다. 한가위의 어원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가장 큰 보름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석과 비교할 수 있는 날로는 설날이 있습니다. 설날도 사실 이름만 봐도 무슨 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설은 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년을 우리는 한 해라고 합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기 때문에 설은 해의 의미를 갖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설이 나이를 나타낼 때는 ‘살’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옛말에서 설과 살은 같은 어원의 말입니다. 몇 살이냐는 말은 몇 설이 지났느냐는 뜻입니다. 태어난 지 몇 해가 되었냐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이라고 한다면 생일이 지난 것이 아니라, 설이 지난 수를 세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설날은 해의 날이고, 추석은 달의 날입니다. 해의 날과 달의 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해는 밝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침이 되면 그래서 우리는 새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해가 뜰 무렵을 새벽이라고도 하죠. 모두 해와 관련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해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새해 일출을 보고 소망을 빌기도 하지만, 평상시에 해를 보고 소원을 비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에게 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민족은 설날보다는 추석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전에 보면 설에는 고향에 못 가더라도 추석에는 꼭 가려고 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은 설보다는 추석이었습니다. 아마도 추석이 가을에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겁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추수(秋收)라는 말 자체에도 가을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가을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역시 추수하다의 의미입니다. 가을은 추수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당연히 넉넉한 시간입니다. 또한 추수는 감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추수라는 말 뒤에 감사라는 말이 붙는 예가 많습니다. 추석은 다른 말로 하자면 추수 감사절인 셈입니다. 추수를 하면 감사해야 할 사람 또는 대상이 생각납니다. 신이나 조상, 부모와 친척, 친구 등 감사해야 할 대상도 많습니다. 넉넉하기에 나누어야 합니다. 지금도 설보다는 추석에 훨씬 더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감사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추석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물을 나누는 날이기 바랍니다. 고마움을 전달하는데 물질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추석은 달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해보다 달이 좋습니다. 물론 태양의 역할이 크지요. 밝은 시간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은 어두운 거리를 비추어 주고,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게 합니다. 추석에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그리움을 나누고, 더 많은 고마움을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 있으면, 추석이 더욱 아련할 겁니다. 추석이 미국에서도 밤길을 비추는 고마움으로, 소원을 비는 날로, 감사의 날로, 축복의 날로 기억하고 이야기하기 바랍니다. 맛있는 송편도 서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번 추석 가을 저녁 설날도 사실
2025.10.12. 18:06
한국에서 우리는 한국어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이미 수많은 언어가 들어와 있습니다. 비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지만, 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습니다. 많은 곳에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이 섞여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길의 표지판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작은 표지판에 네 언어가 쓰여있는 게 답답해 보이지만 친절함이나 배려의 상징으로도 보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늘 여러 언어의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간판의 경우는 훨씬 심각한 접촉의 현장입니다. 예전에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보였던 영어 간판이 도시를 뒤덮은 지 오래입니다. 최근에는 급속도로 일본어 간판도 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약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는 중국어 간판이 아주 많습니다. 중국인 유학생이 많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외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는 오히려 한국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때로는 한 간판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언어 접촉의 현장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는 방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홈쇼핑과 같은 채널에서는 수많은 외국어와 외래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패션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외국어가 한국어보다 더 많은 듯합니다. 모르는 말투성이입니다. 화장품이나 미용에 관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와 관련된 드라마를 보면 아예 자막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대부분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입니다. 뉴스, 스포츠, 드라마, 피디 등의 단어가 다 순우리말이 아니니 외국어 범람의 현상은 놀랄 일도 아닐 겁니다. 케이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가끔 들어갔던 외국어 가사가 이제는 주를 이룹니다. 오히려 한국어 가사가 맛보기처럼 들어갑니다. 사실 케이팝의 정의 자체가 어렵습니다. 작곡가, 가사, 가수, 기획사 등에 한국적이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도 많고, 심지어 팀원 중에 외국인도 여럿입니다. 어쩌면 케이팝 자체가 접촉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점을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본에 가면 지하철에서 한글 안내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마다 한국어 안내가 있어서 종종 여기가 어디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간판에도 한글이 보입니다. 미국 등의 한인타운에는 그야말로 영어가 드뭅니다. 한동안 한국어 간판에 영어를 같이 써 달라는 현지의 요구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무슨 가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항의였습니다. 외국인은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에 열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한글을 접합니다. 자연스러운 언어 접촉의 현장입니다. 한국어로 된 간판이 드라마에 나오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고, 케이팝에 한국어로 된 가사가 나오면 뜻을 찾아보고 따라 부릅니다. 이제 한글과 한국어는 더 이상 외국인에게 낯선 문자, 낯선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외국어가 엄청나게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어도 세계 속으로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언어 접촉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언어 접촉은 쌍방향이고, 다방향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한 언어가 여러 언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시대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한자어가 한국과 일본, 베트남, 태국 등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에는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가 역으로 한국이나 중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어가 일본어나 중국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앞으로 베트남어나 태국어가 우리말 속으로 더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궁금함의 현장이어야 하고 배려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생깁니다. 혹시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배려가 생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상호 문화교류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촉의 현장에서 문화적으로 더 성숙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현장에서 한글날 언어 접촉 한국어 영어 한글날 언어
2025.10.05. 16:40
저는 이불을 꿰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느질도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잠깐 형식적으로 해 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지겹고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최근에 춤 공연 때문에 한복을 맞추면서 바느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복이 비싸지는 이유라는 말씀도 덧붙였고요. 실제로 한복 전문가 중에도 디자인만 할 뿐 바느질은 안 하는, 또는 못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느질이 필수였고, 그래서 참 고역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이라는 표현에서 오는 아릿함이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대학생 시절 충격이었던 시인이었습니다. 국문과생이었던 저는 자연스레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국어학이 전공이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중학교 때부터 비 오는 날이면 왠지 낭만적이 되어 시를 썼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 시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시인은 국문과를 나오거나 대학을 나오는 사람이어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사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박노해는 이름 자체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위한다는 의미여서, 공장에 취업한 대학생이 썼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아예 저 정도 실력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공동 창작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늘 궁금했던 시인 박노해를 다른 글에서 만나게 된 것은 ‘노동해방문학 복간호’에서였습니다. 수배 중이던 박노해 시인과의 대담 기사였습니다. 목숨을 건 노동해방투쟁. 낯선 구호 속에서 저는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긴 수감 생활을 하였습니다. 체포되었을 때의 표정과 석방되던 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맑은 얼굴이었습니다. 박노해의 여러 시를 읽으면서, 저는 뜻밖의 시에 마음이 갔습니다.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였는데, 밖에서 노동운동가며 혁명가로 살고 있는 자신이 집에서는 시키는 자로, 남자로 군림하고 있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부끄러운 마음에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이불 홑청을 꿰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담담함, 선명함보다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저는 이 시를 한지에 써서 방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긴 시였기에 방문을 완전히 덮는 크기였습니다. 지금도 그 시는 제 가슴 속에 반성문처럼 남아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에 학원에서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방학 때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가르쳤습니다. 그 중 한 편이 바로 ‘이불을 꿰매면서’였습니다. 중학생에게는 좀 어려운 시였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 설명하고, 느끼게 하면 오히려 쉬운 시였습니다. 그때 그 시를 용인해준 학부모께 지금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기 바랍니다. 얼마 전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하는 카페를 지났습니다. 요즘에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진에도 뒷모습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전에도 가본 곳이라 이번에는 따로 들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지나친 권위입니다. 강약약강입니다. 제 삶에 이런 감정을 강하게 심어놓은 시는 바로 박노해 선생의 시였습니다. 그 외에도 박노해 선생의 시집을 여러 권 갖고 있습니다만, ‘나 그곳에 서 있다’라는 시도 가슴으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가을 시를 읽고, 시가 쓰고 싶어지는 하루이기 바랍니다. 박노해 선생의 이불을 꿰매며 첫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박노해 이불 시인 박노해 박노해 시인 박노해 선생
2025.09.28. 17:03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옥을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불교 잡지를 읽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그림까지 보니 더 아찔했습니다. 지옥은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옥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지금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 많았습니다. 우울증이니 불안이니 공황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말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삶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을까요? 안타까운 선택이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람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느낌입니다. 잔인한 장면은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할 겁니다. 사지가 찢기고,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고, 소에게 짓눌리고, 칼에 찔리고 등등.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삶에서 느끼는 지옥은 엄살 같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면서 저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겪는 괴로움, 맛보는 지옥은 심리적인 게 많습니다. 우선 자식이 아프고, 가족이 아픈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예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은 지옥 그대로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 맞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사는 게 천국이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옥과 천국이 논리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고 천국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살면서 천국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소망입니다. 죽어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죽어서 천국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도 있겠죠. 지옥은 죽어서라도 갈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천국은 살아서 맛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꽃이 만발한 동산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남녀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정의가 참 어렵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꽃에 날아온 벌레를 끔찍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매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면 오히려 그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천국이 간단합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면 그게 천국입니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 곳은 죽어서 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죽어서는 못 가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이 가능하죠.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이 천국의 다른 말로 들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쁘고 즐거운 표정입니다. 꽃은 웃음꽃이 천국의 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가 늘 천국입니다. 예전에 천국 그림에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는 남편의 모습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천국 참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옥 천국 천국 그림 불교 잡지 우리 속담
2025.09.21. 18:37
언어의 접촉에 관해 논의할 때 눈에 거슬리는 어휘가 있습니다. 바로 혼혈(混血)이라는 어휘입니다. 혼혈은 말 그대로 피가 섞였다는 뜻입니다. 혼혈아(混血兒)라는 표현도 합니다. 지금은 차별적인 어휘로 다루기도 합니다. 혼혈이라는 말을 칭찬의 경우보다는 비하의 의미로 쓰기 때문입니다. 혼혈은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의미합니다. 한편 혼종(混種)이라는 말은 종이 섞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굳이 보자면 인종 간의 출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혼혈이라는 말은 한국인과 중국인,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출생에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같은 종족이라고 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어에서 혼혈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종 사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습이 한민족과 달라지지 않으면 혼혈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는 겉모습을 강조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씁쓸합니다. 사실 세상에 단일민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면 남을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지금처럼 세계화 시대, 다문화, 상호문화 시대에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다른 문화를 다문화로 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다문화 가정이 있고, 국제결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국제결혼이라는 말도 어색할 수 있습니다. ‘국제’라는 말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라는 점이 전제인데, 실제로는 한국에서 자란 다른 민족, 인종의 결혼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문화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어색한 표현이 될 겁니다. 일본에서는 국제결혼 자녀를 ‘하프(half)’라는 용어를 써서 부르기도 합니다. 반반씩 섞였다는 의미일 겁니다. 하프라는 말에도 차별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하프가 아니라 ‘더블(double)’로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노코’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이에서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비하어죠. 저도 어릴 적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이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언어의 접촉에서 등장하는 용어는 혼종어(混種語)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유래한 말이 합쳐서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셋집’처럼 고유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이 대표적일 겁니다. 고유어와 유럽어가 합쳐진 어휘도 많습니다. ‘드럼통’처럼 유럽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도 많습니다. 깡통도 캔과 통이 합쳐진 말입니다만, 일본을 거쳐서 캔이 깡으로 변하고, 통과 합쳐졌습니다. 볼펜심도 비슷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서 변형된 볼펜과 심(心/芯)이 합쳐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혼종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성은 아마도 ‘비까번쩍’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은 화려하고 광이 나는 것을 표현하는 속어입니다. 사전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 ‘번쩍번쩍’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비까는 일본어입니다. 일본어에는 ‘비카비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번쩍번쩍,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 만화영화에 나오는 피카추의 피카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강렬한 빛을 내는 캐릭터입니다. 왔다리갔다리의 ‘-다리’도 일본어식 표현이 어미로 붙어있는 묘한 구성입니다. ‘-다리’는 ‘-거나’의 의미를 가진 일본어 표현인데 우리 용언 어간에 붙어있는 겁니다. 혼종어 중에는 고유어, 한자어, 유럽어가 모두 함께 섞인 혼종어도 있습니다. 순우리말로 보이는 어휘 중에도 유래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어휘가 많으니 순수한 고유어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혼종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원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혼종어는 언어 접촉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혼종 고유어 한자어 국제결혼 자녀 언어 접촉
2025.09.14. 16:21
여러분은 무엇인가 모으는 게 있습니까? 돈 말고 모으는 게 있습니까?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표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우표를 모았습니다. 하긴 저는 단순히 모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산 우표를 팔아서 다른 우표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표가 투자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모으는 사람은 가치가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 우표의 가치가 많이 하락했습니다. 아직도 꽤 갖고 있는데 말입니다. 친구 중에는 외국 동전을 모은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기가 어렵고, 외국 동전을 갖기가 힘들었으니 모으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죠. 저도 어릴 때 외국 동전을 꽤 모았습니다. 주로 일본 옛날 돈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몇 번의 이사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쉽네요. 때로는 친구끼리 희한한 나라의 희한한 동전을 모으면 서로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 나라에 가 본 사람처럼 말입니다. 동전이나 우표는 어린 시절 우리에게 새로운 곳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요즘 제가 모으고 있는 것은 창간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어 관련 학술지의 창간호를 모으고 있습니다. 국어학, 국어국문학, 문학지 등 학술지나 잡지의 창간호를 보이는 대로 모으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모은 것은 아니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창간호를 보면 마음이 뭉클합니다. 어떤 학술지는 제 나이보다도 오랜 것도 있습니다. 오래된 학술지에는 국어국문학계의 큰 선생님이 젊었을 때 쓴 논문이나 글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풋풋합니다. 창간호를 모으는 것은 창간호에 담긴 정성과 진심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첫 시작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창간호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창간호 속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창간호를 보고 있자면, 그런 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부적처럼 말입니다. 문학 작품 창간호 같은 경우는 더더욱이나 그 글을 실은 사람의 마음까지 담겨 있습니다. 신인의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부적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창간호를 모읍니다. 실제로는 놀라운 것은 창간호를 만든 사람이나 창간호에 글이 실린 사람들조차 그 창간호가 없는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경희대 국문과 학생회에서 만든 창간호도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편집에 참가하였던 친구들도 창간호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갖고 있는 창간호를 보고, 향수에 젖더군요. 앞으로는 다른 분야의 학술지나 잡지의 창간호도 최대한 모아볼까 합니다. 특히 미술 관련된 잡지나 박물관 관련 잡지도 모으면 어떨까 합니다. 옛 향기와 예술 감각이 좋아질 듯한 기대도 생깁니다. 헌책방을 더 다녀야겠네요. 창간호를 모으려면 다른 생활비도 아껴야겠습니다. 하지만 창간호를 모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저인 듯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창간호 부적 우표가 투자 외국 동전 국어학 국어국문학
2025.09.07. 17:36
하루라는 단어는 특이한 말입니다. 사실 날짜를 세는 말은 구성이 특이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많습니다. 이틀, 사흘, 나흘, 열흘 등에서 ‘-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흘’은 날짜를 나타내는 말로 보입니다. 사흘을 ‘사 일’로 잘못 알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나흘’은 ‘서너’와 모음 교체된 말입니다. 며칠을 ‘몇 일’로 잘못 쓰는 사람이 있는데, 며칠에는 ‘일(日)’이 아니라 ‘흘’이 들어간 말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며칠의 옛말은 ‘며츨’이었습니다. 오늘은 날짜에 관한 우리말로 시작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저의 하루를 보여 드리고자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노후 준비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앞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예비편,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노후 준비는 당연히 노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하여야 하는 겁니다. 저의 하루를 보시면 저의 노후가 보일 겁니다. 저는 매일 아침에 사전을 봅니다. 주로는 방언 분류 사전을 보고, 일본어로 된 어원사전을 봅니다. 저의 머리를 휙휙 돌리는 시간, 즉 깨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말을 머릿속에 넣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알고 있는 어휘도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불교대사전이나고어사전을 보기도 합니다. 제 연구실에는 사전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제 손에 남아있을 책은 아마도 사전일 겁니다. 일본어 어원사전을 비롯하여 일본어로 된 책은 주로 아침에 보려고 합니다. 외국어공부는 지적 호기심을 일으킵니다. 또한 좋은 외국어 책은 심리적 치유에도 도움이 됩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주로 아침에 외국어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외국어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외국어 교육의 치유기능입니다. 오후에는 주로 옛글을 읽습니다. 요즘엔 번역소학을 봅니다. 1518년에 번역된 소학을 읽으면 옛 우리말의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초기 한글 성경을 읽기도 하고, 초기 한글 불경을 보기도 합니다. 물론 최근의 종교 서적도 읽습니다. 종교는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가르침이고, 나를 깨우는 가르침입니다. 어휘와 사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녁엔 주로 역사와 문화 책을 읽습니다. 언어에 사고를 더하는 순간입니다 날마다 제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귀합니다. 언어를 이야기하고, 교육을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합니다. 선생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자가 아니어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해외에서 온 분이나 멀리서 찾아주는 분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사람이 ‘말하는 동물’이라는 참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매주 한두 편의 글을 쓰고, 격주로 평화방송에서 우리말에 관한 방송을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특강을 하고, 매주 수요일 밤에는 두 시간씩 제자들과 연구모임을 같이 합니다. 7개국에서 연구자들이 참가하여 열띤 토론을 합니다. 매년 수십 편의 논문을 함께 씁니다. 책을 쓰는 시간도 집중의 시간입니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함께 쓰는 느낌입니다. 일요일에는 국악을 배웁니다. 민요를 배우고, 사물놀이를 배우고, 우리 춤을 배웁니다. 이렇게 배운 국악을 한 달에 한 번씩 요양원에서 국악치유공연을 합니다. 하는 이나 보는 이나 서로에게 치유의 시간입니다. 요즘에는 그동안 썼던 시를 가사로 바꾸어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제 감정이 여러분에게도 전달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보면 엄청 바쁜 것 같지만 사실은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공부할 게 많아 즐겁고, 배울 게 많음에도 스승을 찾지 않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루하루가 노후 준비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하루 이야기 시간씩 제자들 외국어 교육
2025.09.01. 17:03
언어와 사고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부분으로 언어학자들은 주로 어휘를 이야기한다. 어휘는 언어의 구조 중에서 내용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인간의 사고와 관계된다. 친족어가 친족 형태를 추론하게 하고, 색채어가 색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반영한다. 유의어 간의 관계, 다의어의 범위 등은 언어마다 차이가 있다. 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의 의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휘교육은 개개의 단어가 아니라 묶음, 즉 단어와 단어의 관계에 주목한다. 또한 어휘와 문화, 사고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언어교육에서 어휘교육이 중요하게 평가된 것은 어휘의 관계성 때문이다. 언어교육, 특히 외국어교육에서 어휘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에 비해 어휘의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부족하다. 특히 한국어 교육에서는 어휘와 사고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어원에 관한 교육이나 유의어 교육, 다의어 교육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한국어의 어원은 한국인의 심리와 사고를 반영한다. 이는 유의어나 다의어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비슷한 말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하고, 다의어는 그 범위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붉다’는 ‘불’과 ‘푸르다’는 ‘풀’과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를 교육에 반영하면 색채어에 관한 한국인의 사고를 설명할 수 있다. ‘기쁘다’와 ‘즐겁다’를 구별하는 문제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대하여 논의가 가능하다. ‘먹다’는 ‘나이를 먹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놀다’의 다의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학습자에게는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긍정심리학에는 ‘자기 확언’, ‘웰빙 인지’의 개념이 있다.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말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반복하면 심리적으로도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타난다. 따라서 어휘교육과 긍정심리학을 연계하는 교육 방안에 관한 연구도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로 한국어 학습자에게 매일 긍정적인 표현을 암기하게 하거나 암송하게 하였을 때, 학기를 마쳤을 때 우울감이 감소하였다는 연구도 있다. 한국어 학습자는 영어 등의 학습자에 비해 차이점이 나타난다. 우선 대부분의 한국어 학습자는 성인 학습자이다. 반면에 영어 학습자는 대부분 유년 시절에 영어를 배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영어 학습자에게 영어는 필수 요소인 경우가 많다. 진학, 취업 또는 생존에도 영어가 필요한 곳이 많다. 하지만 한국어는 진학이나 취업 목적인 경우도 많지만, 취미 목적, 일반 목적 학습자인 경우도 많다. 최근의 한류에 대한 관심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언어로 자리하게 하였다. 한국어 학습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긍정감, 치유 효과 등이 있다는 설문 조사도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한국어 학습에 긍정 언어학을 접목시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인공지능시대에 언어교육의 필요성을 묻는 논의가 많다. 하지만 외국어교육은 진학이나 취업 등의 실용적인 목적 외에서 기쁨이나 즐거움, 치유 등의 효과도 나타난다. 향후 언어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하는 논의로 긍정언어교육이 주목받게 될 것이다. 긍정 언어교육을 위해서는 기존의 교수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을 중시하면서 실용성과 유창성을 강조하여, 실용성이 떨어지는 고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습자의 흥미가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긍정 어휘교육을 위해서는 교육 내용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실용적인 글도 중요하지만 학습자에게 마음의 치유를 주거나 긍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내용을 읽기, 쓰기 등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는 말하기, 듣기 등의 주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읽고, 듣고, 긍정적인 주제의 글을 쓰거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실 활동이나 학습 과제에도 긍정적인 내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교육과 긍정감을 연계하여 학습자의 불안이나 우울감을 감소시키려는 연구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교육 미래 어휘교육과 긍정심리학 긍정 어휘교육 한국어 학습자
2025.08.24. 17:42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해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가 실수하거나 실패를 하는 경우에도 토닥여 주고, 공감해 주는 게 가족인데, 현실에서는 더 화를 내기도 합니다. 저도 늘 반성하는 일입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전에 일본에서 본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제목이 몰래카메라다 보니 황당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날의 내용도 역시 참으로 황당하였습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습니다. 결혼 후에 십여 년을 아껴가면서 착실히 살아온 남편이 아내 몰래 고급 자동차를 사서 집 앞에 주차해 놓는 설정이었습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집 안에 모든 촬영 장치를 마치고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내는 아무 눈치도 못 챈 채 집으로 들어오면서 묻습니다. 밖에 좋은 차가 있던데 누가 왔냐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주차한 것인지. 남편은 쭈뼛거리며 말합니다. 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차인데 맘먹고 샀다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러자 아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아직 돈이 나가야 할 곳이 너무 많았기에 황당하였을 겁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 돈 들어가야 할 곳이 끝이 없죠. 아내의 반응을 남편은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당장 차를 갖다 주라고 하기를 모두 숨죽이며 기다렸던 것이죠. 그때 아내가 말합니다. 괜찮다고. 얼마나 사고 싶었겠냐고.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 줘서 고맙다고. 다른 것에서 아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남편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웁니다. 내가 황당한 일을 했음에도 이해해 주는 아내를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그러고는 숨어있던 카메라들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몰래카메라였다고 말하죠. 아내와 남편은 이미 몰래카메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고맙고, 미안할 뿐이지요.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은 이렇게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저도 한참 동안 먹먹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겁니다. 그가 잘못했더라도 믿어주고, 이해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이 몰래카메라이기를 바라며 살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잘못이 그저 몰래카메라이기를 바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 삶은 몰래카메라가 아닙니다. 주어진 앵글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어주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너무나도 힘든 세상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더 화가 나는 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받아들여 주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실수에 칼을 댑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헤집기까지 합니다. 제발 그러지 않기 바랍니다. 이해와 믿음으로 조금은 이 세상이 살고 싶어지기 바랍니다. 오늘은 왠지 위의 몰래카메라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위로해 주고 싶은 아내의 마음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남편의 마음이 짠합니다. 괜찮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몰래카메라 이야기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그때 아내
2025.08.10. 18:31
왜 사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일 거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한이 없다는 말이나 더 살아서 뭐하겠는가 하는 말은 욕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욕망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삶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은 삶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끈다. 욕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욕구를 따라 행동하면 때로 동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동물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욕망은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절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욕망은 나의 가치가 되기도 한다. 종교에서는 욕망을 이겨내고, 벗어나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어릴 때는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깨니 괴로운 건 식욕뿐이다. 배고플 때 엄마가 젖을 주어야 하는데 엄마가 안 보이면 하늘이 무너진 듯 울어 재끼고 소리 지른다. 아기 때는 식욕이 제일 중요하다. 물론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 잠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때 배고픈 줄 잘못 알고 젖을 주면 난리가 난다. 자라면서도 식욕은 늘 왕성하나 아이가 먹는 것보다 노는 게 재미있을 때는 부모의 속이 탄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안달 나는데, 아이는 안 먹겠다고 도망을 다닌다. 어른들이 아이는 굶기면 저절로 먹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답인 줄을 알지만 굶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 놀고 나면 밥을 찾으니 노는 게 밥보다 먼저일 뿐 밥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사춘기는 욕망이 분출하는 시기이다. 식욕도 수면욕도 왕성하나 마음껏 잠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워야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자도 자도 부족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기가 바로 사춘기다. 물론 낯선 성욕에 어쩔 줄 모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욕망을 제어할 수도 없고, 욕망을 실현할 수도 없다. 욕망의 균형이 맞지 않은 괴로움과 궁금함의 시간이 바로 이 시기인데, 그래서 힘이 든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일이다. 특히 부모님과의 마찰이 심각하다. 청년이 되면 성욕이 가장 중요한 욕망인 것 같다. 좋은 이를 만나기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고 몸을 만들고 나를 꾸민다. 먹는 것도 줄이고 자는 것도 줄이니 삶의 재미가 참을성에서 온다. 좋은 짝을 만나는 게 모든 것의 목표는 아니겠으나 주요 원인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일찍 짝을 만나는 것이 안정을 줄 것이다. 짝을 찾는 시간은 재미있지만 힘든 시간이다. 갱년기는 몸에서 욕망이 떨어져 나가는 시기라고나 할까. 성욕이 귀찮고, 수면욕은 충족되지 않아 불면의 밤을 이루며, 작은 식욕만으로도 배의 둘레는 한없이 불어난다. 괴로움의 시간이다. 그렇게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데도 인간의 욕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앉으면 옛날 자랑, 돌아서면 자식 자랑이다. 쓰지도 않을 돈 자랑에, 다 늙은 몸 자랑까지 자랑은 그대로 집착이 되어 나 자신과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나이를 먹지만 여전히 음식에 집착을 보이고 아직도 이성에 눈과 몸이 향하니 괴로운 일이다. 잠을 못 잔다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그렇게 졸아대니 밤에 잠이 안 오는 게 당연하다는 말에 달리 변명할 말도 없다. 욕망이 욕구가 되고, 욕심이 된다 히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마지막이 왜 욕인지 알겠다. 욕이 사라지면 깨닫거나 죽는 거다. 내 욕망을 바라본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욕망 동물 취급 주위 사람 주요 원인
2025.08.03. 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