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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사는 게 지옥 또는 천국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옥을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불교 잡지를 읽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이 있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그림까지 보니 더 아찔했습니다. 지옥은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옥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조금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지금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 많았습니다. 우울증이니 불안이니 공황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말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삶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을까요? 안타까운 선택이라는 말이 깊게 다가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람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느낌입니다. 잔인한 장면은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할 겁니다. 사지가 찢기고, 혀가 뽑히고, 눈알이 뽑히고, 소에게 짓눌리고, 칼에 찔리고 등등.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삶에서 느끼는 지옥은 엄살 같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면서 저런 일은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겪는 괴로움, 맛보는 지옥은 심리적인 게 많습니다. 우선 자식이 아프고, 가족이 아픈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예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은 지옥 그대로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많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 맞습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면 사는 게 천국이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지옥과 천국이 논리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고 천국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살면서 천국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소망입니다. 죽어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죽어서 천국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도 있겠죠. 지옥은 죽어서라도 갈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천국은 살아서 맛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꽃이 만발한 동산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즐거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남녀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정의가 참 어렵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꽃에 날아온 벌레를 끔찍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매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면 오히려 그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천국이 간단합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면 그게 천국입니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 곳은 죽어서 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어쩌면 죽어서는 못 가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이 가능하죠.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이 천국의 다른 말로 들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쁘고 즐거운 표정입니다. 꽃은 웃음꽃이 천국의 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가 늘 천국입니다. 예전에 천국 그림에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는 남편의 모습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천국 참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옥 천국 천국 그림 불교 잡지 우리 속담

2025.09.21. 18:37

[아름다운 우리말] 혼종과 혼종어

언어의 접촉에 관해 논의할 때 눈에 거슬리는 어휘가 있습니다. 바로 혼혈(混血)이라는 어휘입니다. 혼혈은 말 그대로 피가 섞였다는 뜻입니다. 혼혈아(混血兒)라는 표현도 합니다. 지금은 차별적인 어휘로 다루기도 합니다. 혼혈이라는 말을 칭찬의 경우보다는 비하의 의미로 쓰기 때문입니다. 혼혈은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의미합니다. 한편 혼종(混種)이라는 말은 종이 섞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굳이 보자면 인종 간의 출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혼혈이라는 말은 한국인과 중국인,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출생에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같은 종족이라고 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어에서 혼혈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종 사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습이 한민족과 달라지지 않으면 혼혈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는 겉모습을 강조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씁쓸합니다.     사실 세상에 단일민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면 남을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지금처럼 세계화 시대, 다문화, 상호문화 시대에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다른 문화를 다문화로 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다문화 가정이 있고, 국제결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국제결혼이라는 말도 어색할 수 있습니다. ‘국제’라는 말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라는 점이 전제인데, 실제로는 한국에서 자란 다른 민족, 인종의 결혼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문화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어색한 표현이 될 겁니다.   일본에서는 국제결혼 자녀를 ‘하프(half)’라는 용어를 써서 부르기도 합니다. 반반씩 섞였다는 의미일 겁니다. 하프라는 말에도 차별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하프가 아니라 ‘더블(double)’로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노코’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이에서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비하어죠. 저도 어릴 적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이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언어의 접촉에서 등장하는 용어는 혼종어(混種語)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유래한 말이 합쳐서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셋집’처럼 고유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이 대표적일 겁니다. 고유어와 유럽어가 합쳐진 어휘도 많습니다. ‘드럼통’처럼 유럽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도 많습니다. 깡통도 캔과 통이 합쳐진 말입니다만, 일본을 거쳐서 캔이 깡으로 변하고, 통과 합쳐졌습니다. 볼펜심도 비슷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서 변형된 볼펜과 심(心/芯)이 합쳐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혼종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성은 아마도 ‘비까번쩍’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은 화려하고 광이 나는 것을 표현하는 속어입니다. 사전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 ‘번쩍번쩍’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비까는 일본어입니다. 일본어에는 ‘비카비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번쩍번쩍,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 만화영화에 나오는 피카추의 피카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강렬한 빛을 내는 캐릭터입니다. 왔다리갔다리의 ‘-다리’도 일본어식 표현이 어미로 붙어있는 묘한 구성입니다. ‘-다리’는 ‘-거나’의 의미를 가진 일본어 표현인데 우리 용언 어간에 붙어있는 겁니다.   혼종어 중에는 고유어, 한자어, 유럽어가 모두 함께 섞인 혼종어도 있습니다. 순우리말로 보이는 어휘 중에도 유래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어휘가 많으니 순수한 고유어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혼종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원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혼종어는 언어 접촉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혼종 고유어 한자어 국제결혼 자녀 언어 접촉

2025.09.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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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창간호와 부적

여러분은 무엇인가 모으는 게 있습니까? 돈 말고 모으는 게 있습니까?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표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우표를 모았습니다. 하긴 저는 단순히 모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산 우표를 팔아서 다른 우표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표가 투자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모으는 사람은 가치가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 우표의 가치가 많이 하락했습니다. 아직도 꽤 갖고 있는데 말입니다.   친구 중에는 외국 동전을 모은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기가 어렵고, 외국 동전을 갖기가 힘들었으니 모으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죠. 저도 어릴 때 외국 동전을 꽤 모았습니다. 주로 일본 옛날 돈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몇 번의 이사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쉽네요. 때로는 친구끼리 희한한 나라의 희한한 동전을 모으면 서로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 나라에 가 본 사람처럼 말입니다. 동전이나 우표는 어린 시절 우리에게 새로운 곳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요즘 제가 모으고 있는 것은 창간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어 관련 학술지의 창간호를 모으고 있습니다. 국어학, 국어국문학, 문학지 등 학술지나 잡지의 창간호를 보이는 대로 모으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모은 것은 아니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창간호를 보면 마음이 뭉클합니다. 어떤 학술지는 제 나이보다도 오랜 것도 있습니다. 오래된 학술지에는 국어국문학계의 큰 선생님이 젊었을 때 쓴 논문이나 글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풋풋합니다.   창간호를 모으는 것은 창간호에 담긴 정성과 진심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첫 시작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창간호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창간호 속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창간호를 보고 있자면, 그런 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부적처럼 말입니다.   문학 작품 창간호 같은 경우는 더더욱이나 그 글을 실은 사람의 마음까지 담겨 있습니다. 신인의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부적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창간호를 모읍니다. 실제로는 놀라운 것은 창간호를 만든 사람이나 창간호에 글이 실린 사람들조차 그 창간호가 없는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경희대 국문과 학생회에서 만든 창간호도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편집에 참가하였던 친구들도 창간호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갖고 있는 창간호를 보고, 향수에 젖더군요.     앞으로는 다른 분야의 학술지나 잡지의 창간호도 최대한 모아볼까 합니다. 특히 미술 관련된 잡지나 박물관 관련 잡지도 모으면 어떨까 합니다. 옛 향기와 예술 감각이 좋아질 듯한 기대도 생깁니다. 헌책방을 더 다녀야겠네요. 창간호를 모으려면 다른 생활비도 아껴야겠습니다. 하지만 창간호를 모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저인 듯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창간호 부적 우표가 투자 외국 동전 국어학 국어국문학

2025.09.07. 17:36

[아름다운 우리말] 하루 이야기

하루라는 단어는 특이한 말입니다. 사실 날짜를 세는 말은 구성이 특이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많습니다. 이틀, 사흘, 나흘, 열흘 등에서 ‘-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흘’은 날짜를 나타내는 말로 보입니다. 사흘을 ‘사 일’로 잘못 알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나흘’은 ‘서너’와 모음 교체된 말입니다. 며칠을 ‘몇 일’로 잘못 쓰는 사람이 있는데, 며칠에는 ‘일(日)’이 아니라 ‘흘’이 들어간 말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며칠의 옛말은 ‘며츨’이었습니다.   오늘은 날짜에 관한 우리말로 시작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저의 하루를 보여 드리고자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노후 준비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앞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예비편,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노후 준비는 당연히 노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하여야 하는 겁니다. 저의 하루를 보시면 저의 노후가 보일 겁니다.   저는 매일 아침에 사전을 봅니다. 주로는 방언 분류 사전을 보고, 일본어로 된 어원사전을 봅니다. 저의 머리를 휙휙 돌리는 시간, 즉 깨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말을 머릿속에 넣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알고 있는 어휘도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불교대사전이나고어사전을 보기도 합니다. 제 연구실에는 사전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제 손에 남아있을 책은 아마도 사전일 겁니다.   일본어 어원사전을 비롯하여 일본어로 된 책은 주로 아침에 보려고 합니다. 외국어공부는 지적 호기심을 일으킵니다. 또한 좋은 외국어 책은 심리적 치유에도 도움이 됩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주로 아침에 외국어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외국어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외국어 교육의 치유기능입니다.   오후에는 주로 옛글을 읽습니다. 요즘엔 번역소학을 봅니다. 1518년에 번역된 소학을 읽으면 옛 우리말의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초기 한글 성경을 읽기도 하고, 초기 한글 불경을 보기도 합니다. 물론 최근의 종교 서적도 읽습니다. 종교는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가르침이고, 나를 깨우는 가르침입니다. 어휘와 사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녁엔 주로 역사와 문화 책을 읽습니다. 언어에 사고를 더하는 순간입니다     날마다 제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귀합니다. 언어를 이야기하고, 교육을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합니다. 선생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자가 아니어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해외에서 온 분이나 멀리서 찾아주는 분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사람이 ‘말하는 동물’이라는 참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매주 한두 편의 글을 쓰고, 격주로 평화방송에서 우리말에 관한 방송을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특강을 하고, 매주 수요일 밤에는 두 시간씩 제자들과 연구모임을 같이 합니다. 7개국에서 연구자들이 참가하여 열띤 토론을 합니다. 매년 수십 편의 논문을 함께 씁니다. 책을 쓰는 시간도 집중의 시간입니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함께 쓰는 느낌입니다.   일요일에는 국악을 배웁니다. 민요를 배우고, 사물놀이를 배우고, 우리 춤을 배웁니다. 이렇게 배운 국악을 한 달에 한 번씩 요양원에서 국악치유공연을 합니다. 하는 이나 보는 이나 서로에게 치유의 시간입니다. 요즘에는 그동안 썼던 시를 가사로 바꾸어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제 감정이 여러분에게도 전달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보면 엄청 바쁜 것 같지만 사실은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공부할 게 많아 즐겁고, 배울 게 많음에도 스승을 찾지 않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루하루가 노후 준비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하루 이야기 시간씩 제자들 외국어 교육

2025.09.0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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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어휘교육의 미래

언어와 사고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부분으로 언어학자들은 주로 어휘를 이야기한다. 어휘는 언어의 구조 중에서 내용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인간의 사고와 관계된다. 친족어가 친족 형태를 추론하게 하고, 색채어가 색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반영한다. 유의어 간의 관계, 다의어의 범위 등은 언어마다 차이가 있다. 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의 의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휘교육은 개개의 단어가 아니라 묶음, 즉 단어와 단어의 관계에 주목한다. 또한 어휘와 문화, 사고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언어교육에서 어휘교육이 중요하게 평가된 것은 어휘의 관계성 때문이다.   언어교육, 특히 외국어교육에서 어휘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에 비해 어휘의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부족하다. 특히 한국어 교육에서는 어휘와 사고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어원에 관한 교육이나 유의어 교육, 다의어 교육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한국어의 어원은 한국인의 심리와 사고를 반영한다. 이는 유의어나 다의어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비슷한 말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하고, 다의어는 그 범위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붉다’는 ‘불’과 ‘푸르다’는 ‘풀’과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를 교육에 반영하면 색채어에 관한 한국인의 사고를 설명할 수 있다. ‘기쁘다’와 ‘즐겁다’를 구별하는 문제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대하여 논의가 가능하다. ‘먹다’는 ‘나이를 먹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놀다’의 다의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학습자에게는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긍정심리학에는 ‘자기 확언’, ‘웰빙 인지’의 개념이 있다.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말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반복하면 심리적으로도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타난다. 따라서 어휘교육과 긍정심리학을 연계하는 교육 방안에 관한 연구도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로 한국어 학습자에게 매일 긍정적인 표현을 암기하게 하거나 암송하게 하였을 때, 학기를 마쳤을 때 우울감이 감소하였다는 연구도 있다.   한국어 학습자는 영어 등의 학습자에 비해 차이점이 나타난다. 우선 대부분의 한국어 학습자는 성인 학습자이다. 반면에 영어 학습자는 대부분 유년 시절에 영어를 배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영어 학습자에게 영어는 필수 요소인 경우가 많다. 진학, 취업 또는 생존에도 영어가 필요한 곳이 많다. 하지만 한국어는 진학이나 취업 목적인 경우도 많지만, 취미 목적, 일반 목적 학습자인 경우도 많다. 최근의 한류에 대한 관심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언어로 자리하게 하였다. 한국어 학습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긍정감, 치유 효과 등이 있다는 설문 조사도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한국어 학습에 긍정 언어학을 접목시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인공지능시대에 언어교육의 필요성을 묻는 논의가 많다. 하지만 외국어교육은 진학이나 취업 등의 실용적인 목적 외에서 기쁨이나 즐거움, 치유 등의 효과도 나타난다. 향후 언어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하는 논의로 긍정언어교육이 주목받게 될 것이다. 긍정 언어교육을 위해서는 기존의 교수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을 중시하면서 실용성과 유창성을 강조하여, 실용성이 떨어지는 고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습자의 흥미가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긍정 어휘교육을 위해서는 교육 내용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실용적인 글도 중요하지만 학습자에게 마음의 치유를 주거나 긍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내용을 읽기, 쓰기 등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는 말하기, 듣기 등의 주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읽고, 듣고, 긍정적인 주제의 글을 쓰거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실 활동이나 학습 과제에도 긍정적인 내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교육과 긍정감을 연계하여 학습자의 불안이나 우울감을 감소시키려는 연구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교육 미래 어휘교육과 긍정심리학 긍정 어휘교육 한국어 학습자

2025.08.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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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괜찮아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해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가 실수하거나 실패를 하는 경우에도 토닥여 주고, 공감해 주는 게 가족인데, 현실에서는 더 화를 내기도 합니다. 저도 늘 반성하는 일입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전에 일본에서 본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제목이 몰래카메라다 보니 황당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날의 내용도 역시 참으로 황당하였습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습니다. 결혼 후에 십여 년을 아껴가면서 착실히 살아온 남편이 아내 몰래 고급 자동차를 사서 집 앞에 주차해 놓는 설정이었습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집 안에 모든 촬영 장치를 마치고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내는 아무 눈치도 못 챈 채 집으로 들어오면서 묻습니다. 밖에 좋은 차가 있던데 누가 왔냐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주차한 것인지. 남편은 쭈뼛거리며 말합니다.     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차인데 맘먹고 샀다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러자 아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아직 돈이 나가야 할 곳이 너무 많았기에 황당하였을 겁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 돈 들어가야 할 곳이 끝이 없죠.   아내의 반응을 남편은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당장 차를 갖다 주라고 하기를 모두 숨죽이며 기다렸던 것이죠. 그때 아내가 말합니다. 괜찮다고. 얼마나 사고 싶었겠냐고.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 줘서 고맙다고. 다른 것에서 아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남편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웁니다. 내가 황당한 일을 했음에도 이해해 주는 아내를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그러고는 숨어있던 카메라들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몰래카메라였다고 말하죠. 아내와 남편은 이미 몰래카메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고맙고, 미안할 뿐이지요.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은 이렇게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저도 한참 동안 먹먹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겁니다. 그가 잘못했더라도 믿어주고, 이해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이 몰래카메라이기를 바라며 살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잘못이 그저 몰래카메라이기를 바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 삶은 몰래카메라가 아닙니다. 주어진 앵글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어주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너무나도 힘든 세상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더 화가 나는 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받아들여 주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실수에 칼을 댑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헤집기까지 합니다. 제발 그러지 않기 바랍니다. 이해와 믿음으로 조금은 이 세상이 살고 싶어지기 바랍니다. 오늘은 왠지 위의 몰래카메라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위로해 주고 싶은 아내의 마음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남편의 마음이 짠합니다. 괜찮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몰래카메라 이야기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그때 아내

2025.08.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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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욕망(欲望)이라는 말

왜 사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일 거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한이 없다는 말이나 더 살아서 뭐하겠는가 하는 말은 욕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욕망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삶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은 삶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끈다.   욕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욕구를 따라 행동하면 때로 동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동물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욕망은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절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욕망은 나의 가치가 되기도 한다. 종교에서는 욕망을 이겨내고, 벗어나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어릴 때는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깨니 괴로운 건 식욕뿐이다. 배고플 때 엄마가 젖을 주어야 하는데 엄마가 안 보이면 하늘이 무너진 듯 울어 재끼고 소리 지른다. 아기 때는 식욕이 제일 중요하다. 물론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 잠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때 배고픈 줄 잘못 알고 젖을 주면 난리가 난다.     자라면서도 식욕은 늘 왕성하나 아이가 먹는 것보다 노는 게 재미있을 때는 부모의 속이 탄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안달 나는데, 아이는 안 먹겠다고 도망을 다닌다. 어른들이 아이는 굶기면 저절로 먹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답인 줄을 알지만 굶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 놀고 나면 밥을 찾으니 노는 게 밥보다 먼저일 뿐 밥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사춘기는 욕망이 분출하는 시기이다. 식욕도 수면욕도 왕성하나 마음껏 잠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워야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자도 자도 부족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기가 바로 사춘기다. 물론 낯선 성욕에 어쩔 줄 모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욕망을 제어할 수도 없고, 욕망을 실현할 수도 없다. 욕망의 균형이 맞지 않은 괴로움과 궁금함의 시간이 바로 이 시기인데, 그래서 힘이 든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일이다. 특히 부모님과의 마찰이 심각하다.   청년이 되면 성욕이 가장 중요한 욕망인 것 같다. 좋은 이를 만나기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고 몸을 만들고 나를 꾸민다. 먹는 것도 줄이고 자는 것도 줄이니 삶의 재미가 참을성에서 온다. 좋은 짝을 만나는 게 모든 것의 목표는 아니겠으나 주요 원인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일찍 짝을 만나는 것이 안정을 줄 것이다. 짝을 찾는 시간은 재미있지만 힘든 시간이다.   갱년기는 몸에서 욕망이 떨어져 나가는 시기라고나 할까. 성욕이 귀찮고, 수면욕은 충족되지 않아 불면의 밤을 이루며, 작은 식욕만으로도 배의 둘레는 한없이 불어난다. 괴로움의 시간이다. 그렇게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데도 인간의 욕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앉으면 옛날 자랑, 돌아서면 자식 자랑이다. 쓰지도 않을 돈 자랑에, 다 늙은 몸 자랑까지 자랑은 그대로 집착이 되어 나 자신과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나이를 먹지만 여전히 음식에 집착을 보이고 아직도 이성에 눈과 몸이 향하니 괴로운 일이다. 잠을 못 잔다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그렇게 졸아대니 밤에 잠이 안 오는 게 당연하다는 말에 달리 변명할 말도 없다. 욕망이 욕구가 되고, 욕심이 된다 히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마지막이 왜 욕인지 알겠다. 욕이 사라지면 깨닫거나 죽는 거다. 내 욕망을 바라본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욕망 동물 취급 주위 사람 주요 원인

2025.08.03. 18:17

[아름다운 우리말] 한글의 기원

한글 창제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글자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문자의 기원에 관하여 세종실록 25년 12월의 내용이나 정인지 서문,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옛 전자를 모방(模倣)하였다고 되어있어서 어찌 보면 결론은 간단해 보인다. (字倣古篆) 이 말대로라면 전자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을 두고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신하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방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한글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주장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하들이 당시에 전자를 알고 있고, 한글과 전자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글과 전자가 비슷하지 않았다면 ‘자방고전’이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다른 주장은 ‘방(倣)’을 닮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두 글자가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되,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닮았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 주장도 실은 한글의 독창성에 무게를 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방(倣)이라는 한자의 의미에는 다른 것을 본떴다는 의미도 있고, 닮았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방에는 ‘의거하다, 의지하다’ 등의 의미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자방고전의 의미를 ‘글자는 옛 전자를 참고하였다’ 정도로 보려고 한다. 전자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드는 방식이나 운용하는 방식이 전자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상형문자에서 출발하여 단순화된 글자이지만,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발음기관을 상형화하면서 글자의 모양은 옛 전자를 참고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최만리도 상소에서 한글이 옛글자를 참고한 것은 맞지만 그 운용이 전혀 다르기에 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이다.   사실 한글은 옛 전자만 참고한 것이 아니다. 세종은 수많은 언어와 문자를 보고, 공부하고, 연구한 후에 훈민정음을 창조한 것이다. 훈민정음에 대해 다양한 기원의 주장이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자면 훈민정음이 다양한 문자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글의 창제가 독창적인 점도 분명하다. 니은이 기역을 반대 방향으로 쓴 것은 명백해 보이지만 혀뿌리가 입천장에 닿은 모습을 상형화한 기역과, 혀끝이 잇몸에 닿은 모습을 상형화한 니은의 창제 원리는 명확히 다르다. 입의 모양을 입 구(口)의 글자 모양으로 쓴 것은 참조로 보이나, 미음이 입술소리를 나타내는 것은 명백한 창의성이다. 이는 이의 모양을 시옷으로 쓰는 과정도 유사하다. 이 치(齒)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시옷이 치음을 나타내는 것은 창의적 발상이다.   모음의 경우도 기존의 문자 체계를 참고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분류를 천지인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은 놀라운 발상이며, 우리 음운체계에 관한 과학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와 아는 하늘을 ‘땅의 위’와 ‘사람의 오른쪽’에 둠으로써 밝음을 나타내고, 우와 어는 하늘을 ‘땅의 아래’, ‘사람의 왼쪽’에 둠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를 새로 만들 때, 기존의 문자를 참고하지 않는 것이 좋은가? 기존의 문자와는 형태적으로 전혀 닮지 않은 문자를 만드는 것이 좋은가? 아니 가능하기는 한가? 기본적으로 한글의 기원을 논할 때는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훈민정음은 기존의 문자 체계에 관한 연구와 우리말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학문적 객관성과 창의성이 동시에 담겨있는 문자가 바로 한글인 셈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글 기원 한글 창제 사실 한글 글자 모양

2025.07.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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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귀하다는 말

귀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보통 목숨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숨이 여러 개 있었다면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귀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드물다, 희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잘것없는 곤충이어도 세계에 남아있는 게 몇 마리뿐이라면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석이 귀한 것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흔한 물건이고,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면 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귀해야 보석입니다.   인간이 창조해 놓은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선사시대에 돌을 깎아놓은 석기라면 귀하겠지요. 아마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누군가 깎아놓은 돌이라면 그야말로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전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현대에 만들어진 돌이라고 하여도 예술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라든지, 유명인이 애지중지하던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귀한 물건이 될 겁니다. 여러 개가 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사람이 있지요. 우선 내게 하나뿐인 어머니, 아버지라면 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자식이 있다면, 자식도 너무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저 역시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귀하다는 말의 뜻이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귀한 것은 드문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정말 귀한지 알고 싶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들을, 딸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고 보면 어쨌든 가장 귀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드문,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고, 그 사이에서 내가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기적이 다른 게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종교에서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라고 했을 겁니다. 내가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종교의 시작입니다.   내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이 귀하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겁니다. 동물도 귀하고, 나무도 귀하고, 꽃도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에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흔해 보이지만 사실 각각은 모두 귀한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 기적을 알기에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됩니다.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오늘이 한없이 귀합니다. 오늘은 내게 온 선물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역시 종교에서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것은 오늘을 귀하게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 한탄하고,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과거를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하거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겁니다.   지금, 여기, 오늘이 귀한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오늘이 변하면 과거가 변하고, 미래가 변하고, 내가 변합니다. 내가 더 귀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줄여야 합니다. 귀하지 않게 여기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귀찮다’라고 합니다. 귀하지 않다가 줄어든 말이 귀찮다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한심(寒心)하다고 합니다. 한심은 새로움에 감동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차가워진 겁니다. 오늘을 귀하게 여기고, 만남을 귀하게 여기는 삶이기 바랍니다. 또 귀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보통 목숨

2025.07.20. 17:54

[아름다운 우리말] 오늘의 어휘

오늘 아침,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나요? 나도 모르게 손전화로 손이 향하고, 온갖 복잡한 소식에 머릿속이 멍해진 채로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부터 나를 가라앉게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좋은 사람을 떠올리고, 좋은 어휘를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애쓰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좋은 어휘가 일상의 시작입니다.    어휘는 그냥 말이 아닙니다. 어휘는 세상을 잇고 있습니다. 단어와 단어를 잇고, 단어와 생각을 잇고, 단어와 사람을 잇습니다. 그러고는 기어코 사람과 사람을 잇습니다. 우리가 동물과 달리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말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을 담을 수 있고, 생각을 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말에는 그 에너지가 더욱 큽니다. 조상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은 우리 속 무형의 유전자이며, 문화입니다. 말이 곧 사람이고, 말이 곧 가치인 셈입니다. 말에서 힘을 느껴보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고, 듣고, 살아갑니다. 표면적인 뜻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표면적인 관심에 휘둘리게 됩니다. 드러나 있는 의미를 만나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위험한 어휘의 세상입니다.   어휘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다른 깊은 정신의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어휘를 공부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어휘를 통해서 내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종종 내 삶이 안쓰러워지기도 할 겁니다. 하루를 바둥거리면 살고 있음에 한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겁니다.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한참을 마주하고 나면, 자신이 더 귀하게 느껴질 겁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귀하다는 말은 드물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드물지 않으면 귀하지 않습니다.    어휘는 나를 깨우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토닥여주는 거죠.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순간 행복해집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기쁩니다. 기쁜 마음은 즐거운 마음과 통합니다. 그래서 짜증과 미움을 멀리해야 하고, 귀찮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서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서로 함께하는 삶이 좋아야 합니다. 같이 미리내도 바라보고, 어깨춤도 추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좋은 일이 많기 바라고, 슬픈 일이 적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닥친 힘든 일이라면 잘 넘길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곳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휘를 생각하며 행복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바라는 일이 많고, 궁금증이 많은 삶이면 좋겠습니다. 웃음꽃 피는 하루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날씨’처럼 오늘의 어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

2025.07.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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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흥미로운 숫자 세상

숫자는 그대로 스토리의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숫자 자체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상징도 되고, 비유도 됩니다. 그야말로 흥미로운 숫자 세상입니다.   우선 38이라는 숫자부터 살펴볼까요? 38이라는 숫자를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요? 혹시 삼팔선을 생각했다면 역사나 사회 현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삼팔 광 땡’을 생각했다면 화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뜻밖에 여성의 날을 떠올린 사람이 있다면 놀라운 일입니다. 여성의 날이 3월 8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삼팔’이 욕처럼 쓰인다고 하니 중국인 앞에서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마치 한국에서 18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삼팔선은 위도 38도와 관련이 있는 숫자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한을 분단시킬 때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삼팔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삼팔이라는 숫자가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자신이 사는 나라의 위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위도를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게 정상일 수도 있습니다. 위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오히려 안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편 우리는 숫자로 의사소통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삿짐센터의 전화번호는 거의 2424였습니다. 중고거래를 하는 곳은 4989가 대부분이었고요. 8282는 일을 빨리한다는 의미였고, 012는 ‘영원히’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0102는 ‘열렬히’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가 의사소통에 쓰였습니다. 숫자는 그 자체로 소통의 수단이 된 겁니다.   숫자 중에서 1004는 천사의 의미로 쓰입니다. 전화번호나 차량번호에 선호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화번호로는 최고의 번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9988은 노인이 좋아하는 숫자입니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666은 종교적인 이유로 기분 나쁜 숫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666은 중국에서는 좋은 숫자입니다. 중국사람 전화번호 중에는 666이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 친구의 번호를 살펴보세요.   아시다시피 7은 서양에서는 매우 선호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도 북두칠성과 관련지어 7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7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도 많습니다. 중국 남부의 경우도 7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저우에 갔을 때 엘리베이터에 4층과 7층이 없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4층은 병원 입원실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는 겁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선이 위도 38도라고 했는데, 위아래로 가르는 선은 경도 몇 도일까요? 숫자는 의외로 모든 게 관심사는 아닙니다. 관심이 있어야 숫자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경도와 관련이 있는 표준시간이 한국과 일본이 왜 같을까요? 북한은 왜 표준시를 30분 바꾸려고 했을까요? 경도가 다르면 시간도 달라져야 정상 아닌가요? 중국은 지역에 따라 시간이 변하지 않는데, 미국은 왜 지역마다 시간이 달라질까요? 궁금증 천지입니다.     오늘 글을 쓴 동기이기도 한 전화의 국가 번호는 어떻게 정한 걸까요? 한국의 국가 번호는 왜 82일까요? 누군가 농담처럼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빨리’와는 상관이 없겠지요. 아무튼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는 한국인이 ‘빨리 빨리’를 좋아해서 ‘팔이’라고 농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래 기억하겠네요. 하지만 일본이 81인 걸로 봐서 답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서울은 왜 국번이 02일까요? 왜 01은 없을까요? 03은 없는데 031, 032 등이 있는 이유는 무얼까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숫자들이 수수께끼이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911과 한국의 119도 궁금한 이야깃거리입니다. 숫자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숫자 숫자 자체 숫자 세상 사람 전화번호

2025.07.06. 18:14

[아름다운 우리말] 문해력과 바람

바람이 없다면 우리는 공기가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흔들고 깃발을 펄럭이기에 공기가 흐름을 알고 세상이 변해감을 압니다. 바람이 부니 그야말로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風景)이 변합니다. 풍경이라는 말에 바람 ‘풍(風)’이 쓰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렇듯 바람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왔냐는 말은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었냐는 의미가 됩니다. 바람이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니 변화의 상징이 되었을 겁니다.     바람에는 부정적인 바람도 많습니다. 부동산 바람, 조기 유학 바람 등 부정적인 유행을 바람이라고도 하고,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바람을 피운다고도 합니다. 부정적이죠. 바람이 났다는 말도 합니다. 바람을 연기처럼 피운다고 표현한 것도 재미있고, 바람이 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돈바람, 치맛바람 등처럼 합성어로 만들어 부정적인 느낌을 더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스타일을 한자어 바람 풍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럽풍이라는 말은 유럽 스타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풍조라는 의미에도 바람이 쓰입니다. 풍조(風潮)는 바람에 따라 바뀌는 조류라는 의미입니다. 풍속도 바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풍습도 바람이 들어가 있습니다. 풍습(風習) 풍속과 습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우리말 어휘와 한자 어휘에 많은 바람이 들어갑니다. 안 좋은 바람을 좋은 풍조로, 그것이 좋은 풍습으로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민요 군밤타령을 보면 연평 바다에 돈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풍어가 돈바람을 불러왔겠죠. 돈바람은 다른 바람으로 이어져 집안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가요 ‘바람이 분다’에는 쓸쓸함이 한가득입니다. ‘바람이 분다. 그리운 마음에’와 같이 허전함이 느껴지는 바람입니다. 바람은 하나가 아닙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바람 중에서 서글픈 바람도 있습니다. 그때 쓰는 표현은 바로 바람맞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이 말의 느낌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면 더 서글프고 화가 나겠지요. 헛바람이 가득 든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집에 붙어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의 바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희망을 나타내는 바람과 부는 바람이 형태가 같다는 점입니다. 바람을 바라는 것이죠. 한편 바람의 깊이는 음악에서 나타나는 듯합니다. 음악은 어쩌면 모든 것을 비운 후에 깊은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관악기의 깊은 소리를 들으면 몸속에서 비롯된 바람이 모든 마음을 담아 음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풍악, 풍물, 풍류, 풍류도, 풍월 등에 모두 바람 풍이 쓰이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람은 불지 말고, 시원하고 즐거운 바람이 불기 바랍니다. 바람이 가득한 세상에서 좋은 바람, 즐거운 바람이 불기 바랍니다. 여름입니다. 올해도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바람에 관한 어휘 이야기를 길게 풀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단어를 살펴보면 문해력도 늘어납니다. 문해력 바람도 붑니다. 행복한 바람이 붑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돈바람 치맛바람 풍습도 바람 풍속도 바람

2025.06.2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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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긍정 문화교육에 대하여

언어교육은 문화교육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언어교육의 역사에서 문화교육이 중심으로 들어온 시기는 오래이지 않다. 이는 한국어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한국어 교재를 보면 어휘, 문법, 대화문, 연습문제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대화문의 설명이나 어휘의 설명에서 문화적 요소의 설명이 일부 이루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 내용 중에 문화를 본격적으로 들여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교육이 언어교육에 들어온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교육이 이루어졌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문화 내용을 각과의 뒤에 싣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5과 정도에 한 과 정도로 특별과를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목표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국 문화와의 대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즉 학습자의 문화에 대한 관심 부족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는 상호문화교육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교육이 단순히 목표 언어의 문화 습득 또는 이해만 목표로 하지 않음을 자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습자는 목표 언어의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비교, 대조하면서 문화에 대한 관점을 공고히 한다. 단순히 목표 문화를 동경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문화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 등을 학습하는 것이다.   이제 상호문화교육은 시민교육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언어교육은 문화교육이고, 동시에 가치교육이며, 시민교육이다. 언어교육과 문화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탐색하고, 차별 없는 세상과 배려의 세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장애, 인종, 국적, 성별, 경제력, 정치적 입장 등에 의한 차별을 해소하고 배려를 일상화하는 노력을 언어문화 교육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이는 미국 중심 교육에서는 DEI(다양성, 공평, 포용)로, 유럽중심 교육에서는 상호문화 시민교육으로 나타난다.   문화교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식의 측면이다. 예를 들어 한국문화의 특징, 한국문화와 다른 문화의 차이점 이해 등은 지식의 측면에서 가능하다. 이는 인공지능의 시대 이전에도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교재의 문화캡슐 등은 지식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식 전달을 위해서 때로는 학습자의 모국어로 문화를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체험의 측면이다. 문화는 지식 이상의 행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어를 배운 사람이 해당 국가나 지역에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것은 직접 체험의 욕구를 반영한다.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의 촬영 장소를 찾아가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하는 것은 체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가상 현실이나 챗지피티를 활용한 문화의 간접 경험은 결국 한계점에 이를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이나 다른 인공지능의 활용은 직접 체험을 위한 마중물의 역할 또는 동기 유발의 기능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동기 유발의 기능도 매우 필요하고, 훌륭한 것이다.     외국어교육의 필요성과 문화교육의 필요성을 유지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접 경험의 중요성과 한계도 있다. 직접 경험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간접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즉, 직접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간접 경험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나의 말하기, 쓰기, 문화 능력을 높일 수는 없으나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체험 준비를 위한 인공지능 활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교육은 점점 직접 체험 학습의 시대로 발전해 갈 것이다.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고,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직접적인 체험이다.     이러한 문화교육이야말로 감정을 움직이는 문화교육이다.  문화교육은 치유다. 새로운 문화교육은 긍정언어교육을 통한 문화교육의 세계이며 우리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치유의 세계가 될 것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교육 상호문화 시민교육 언어문화 교육 특징 한국문화

2025.06.2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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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미움에 대하여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도 웁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웃으면 나도 웃음을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다르다면 충돌이 생깁니다. 함께 살기가 어려울 겁니다. 같은 감정을 지니고, 드러내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건 미운 감정 때문입니다. 미움은 받는 것도 힘이 들지만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언어적으로 보자면 힘이 들어갔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미운 감정은 ‘헛된 힘’을 쓴 겁니다. 의미 있는 에너지 소비가 아니니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나쁜 감정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한자가 보여 줍니다. 미울 오(惡)라는 한자의 다른 독법은 나쁠 악(惡)입니다. 한자가 같습니다. 나쁜 것을 미워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미워하는 것은 나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증오(憎惡)라고 할 때 미울 오의 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한자를 자세히 보면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다른 말로는 ‘싫어하다’가 있습니다. 미워하다에 비해서는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말 ‘싫다’와 ‘슬프다’는 어원이 같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싫은 게 많은 건 슬픈 것이고, 슬픈 게 많은 건 싫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은 모두 싫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기도 하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인 것도 맞습니다. 반면에 싫은 일이 많은 것도 생각해 보면 슬픈 일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싫은 일 속에서 산다니 정말로 슬픈 일이지요. 우울한 인생입니다.   살면서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미워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 역시 그를 싫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나를 싫어하는 이를 내가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것도 슬픈 일이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미움은 거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차갑게 대하는데 따뜻한 반응을 하기는 힘듭니다. 반면에 내가 차갑게 대하는데 나를 따스하게 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감정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종종 어둠이 어둠을 낳는다는 말이 감정에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감정은 어두운 감정을 부릅니다. 미움이 미움을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거죠.   내가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도 인사하기가 싫습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활을 바꾸려면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미소 짓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상대가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감정은 거울입니다.   내 감정이 그대로 그에게 비춥니다. 길을 걷는데 나를 슬쩍 피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만난 게 아니라 스쳐 지나간 거네요. 사는 게 참 그렇습니다. 나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미움 에너지 소비

2025.06.1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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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꿈을 바꾸는 방법

불교에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말을 합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다는 의미로 잠들었을 때도 깨달음의 경지가 한결같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놀랍고도 부러운 경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꿈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폭력을 쓰기도 합니다. 꿈속의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꿈은 내 무의식의 경지 혹은 숨기고 싶었던 세계일 겁니다. 난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는 자각에 마음이 쓰립니다.     오매일여라는 말을 하면서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표어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오매의 순우리말 번역으로는 ‘자나 깨나’가 딱 맞습니다. 자나 깨나 임 생각뿐이라는 구절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보면 잔다고 삶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나 깨나 나는 늘 같은 사람입니다. 꿈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잠들었을 때 내 모습을 맑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잠은 죽음의 비유로 쓰입니다. ‘여기에 잠들었다.’는 묘비명이 죽음을 의미하고, 눈을 감았다는 말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말은 직접적인 비유네요. 하긴 잠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예전에 본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에서 잠들면 죽는다고 잠들지 못하게 계속 말을 거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잠든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해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경우도 실제로 많습니다.   하지만 잠이 죽음인 동시에 삶인 것은 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많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낮 동안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앞일을 예측해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현실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꿈속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때가 많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면 서서히 떠오르는 꿈입니다. 꿈속에서 집착을 버리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편 꿈은 고통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꿈은 집착과 욕망입니다. 안 그런 척했던 수많은 일이 꿈속에서는 현실이 됩니다. 베개가 식은땀으로 젖는 이유죠. 자고 일어났는데도 맑지 않은 이유입니다.   잠들기 전에 오늘 있었던 감사 일기 쓰기나 고마운 사람 떠올리기는 좋은 꿈에 도움이 됩니다. 잠들기 전에 단전 호흡을 하거나 몸을 이완시키는 것도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새벽에 깨었을 때도 삶을 돌아보고 꿈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도 삶을 바꿉니다. 밤에 좋은 꿈을 꾸려면 낮을 잘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자기 바로 전이라도 생활을 바꾸어야 꿈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하루가 달라지고, 그렇게 한 달이 달라지고, 그렇게 1년이 달라지고, 그렇게 한 생애가 변해갑니다.   오매일여의 경지는 꿈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겁니다. 늘 감사하고, 집착을 버리고, 내 몸을 유연하게 바꾸면 꿈도 바뀝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면 오매일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한 경지가 성인의 경지고 성자의 경지고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다시 무너지지 않을 경지가 되는 겁니다. 꿈이 편안해질 겁니다. 어쩌면 꿈조차 꾸지 않는 편안함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만 늘 새롭게 태어나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가 새롭게 맞고 싶습니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사실은 이 글도 꿈속에 헤매다 새벽에 깨어 쓰는 글입니다. 정말 아직 멀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법 경지가 성인 죽음인 동시 감사 일기

2025.06.08. 17:08

[아름다운 우리말] 부여에서 왕 노릇 하기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하는 건 어떨까요? 부여라고 하면 충청도에 있는 도시 이름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충청도 부여에서는 왕 노릇을 할 수는 없겠죠, 나라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한다고 하면, 옛 만주 벌판에 있었던 나라를 떠올려야 할 겁니다. 저는 역사가 전공이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역사책을 봅니다. 그중에 최근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나라는 바로 부여입니다.     그런데 부여라고 하면 한 나라가 아닐 수 있겠습니다. 역사책에도 부여는 다양하게 나옵니다.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가 모두 등장합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천제가 용을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세우고, 이름을 해모수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해 쪽으로 나라를 옮겨 세운 나라가 바로 동부여였습니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부여에서 나온 주몽이 졸본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성왕이 도읍을 사비 즉, 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여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여러 부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이야기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직과 사출도에 관한 이야기는 윷놀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관직명으로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나오는데, 이는 윷놀이의 도, 개, 윷, 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는 돼지, 개는 개, 윷은 소, 모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어원을 살펴볼 때 특별히 이견을 달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걸’에 있습니다.   걸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이라는 주장이 제밀 많고, 가끔 코끼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개윷모가 가축명이고, 우리와 가까운 동물이라는 점에서 ‘양’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 같습니다. 코끼리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발음의 유사성에 끌리는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양을 ‘걸’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다른 동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여를 공부하다가 사출도(四出道)를 다시 찾게 되고, 부여의 도읍을 둘러싼 지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맡았다는 논의를 보고, 도읍에 해당하는 동물을 찾으면 ‘걸’의 비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자치통감에 부여가 처음에 도읍을 ‘녹산(鹿山)’에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슴이 가운데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논의는 추론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사슴에 해당하는 우리말에는 ‘노루’와 ‘고라니’가 있음은 추론의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사슴의 방언에도 고라니의 유형이 나타납니다. 고라니는 ‘걸’과 음운적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걸이 사슴의 의미였을 수 있습니다. 사슴은 뿔이나 고기, 가죽 등 우리에게 매우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사슴의 뿔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편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부여는 체격이 크고 굳세지만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 들어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쫓겨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릇 노릇 하기 걸이 사슴 관직과 사출도

2025.06.0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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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나잇값을 하자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를 먹습니다. 언어표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번역소학을 봐도 나이는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랜 표현이죠. 대부분의 언어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나이가 내 몸속에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나이에 따라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저의 배 둘레를 살펴보게 되네요.   나이를 먹으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일단 많이 듣는 말대로 어린아이처럼 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해서 참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특히 소변은 큰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소변 생각만 해도 조건 반사로 화장실을 찾게 됩니다. 이때 주변에 화장실이 없으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주변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어릴 때 참지 못하고 옷에 실례를 하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처럼 눈물도 많아집니다. 특히 누가 울면 나도 따라 웁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아이가 우니까요.’라는 귀여운 대답을 하더군요. 나이 먹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귀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타인의 슬픔에 내 몸이 공감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남이 울면 나도 울어야 합니다. 남이 슬픈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드라마가 점점 곤욕이네요. 우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입니다.   한편 신체 기능의 약화는 세월 탓이려니 하면서도 서글프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가까운 게 안 보이고 먼 게 잘 보입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고 옛일은 또렷합니다. 눈앞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멀리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빨리 변하는 현실 속의 역할보다는 오랜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정말 그러한가요? 신체는 그렇게 변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눈앞에 일에 집착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점점 실수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미안한 사람이 늘어갑니다. 글을 쓰면서 지난번에 기억나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니 아직도 망각 속이네요.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 좋아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남의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 반면에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안 좋은 일이죠. 여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나이 들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은 내가 옳다는 생각과 고집이죠. 집착이 늘어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좋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남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적게, 작게 들어야 합니다. 순하게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귀가 순해져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논어에서는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60세를 의미하는 나이죠. 만약 나이를 먹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고집이 세어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이 먹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문제인 겁니다. 자꾸 남에 대한 욕이 나온다면 내 집착이 늘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나를 말려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 사람 말은 꼭 들어야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좋다면 죽은 다음의 내 모습도 좋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이 천국이어야 죽어서도 천국입니다. 주변 사람과 못 지내고, 자녀와 못 지내고, 화가 많고, 욕심이 늘어난다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일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하게 됩니다. 나잇값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올라가는 나의 가치입니다. 나이를 먹었는데 값이 떨어졌다면 나는 잘못 산 겁니다. 우리 모두 나잇값을 하고 살기 바랍니다. 저부터 나잇값을 해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고 맑은 제 모습이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나잇값 소변 생각 주변 화장실 신체 기능

2025.05.26. 16:53

[아름다운 우리말] 제자의 날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때로 반대말이나 반의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반대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서로를 밀어내는 듯합니다. 상대 또는 짝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서로 짝을 이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실에서도 짝이 있었는데 점점 혼자 앉는 책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지만 예전에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머니날만 있고, 아버지날이 없다고 하여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어머니날도 있고, 아버지날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자기 나라에서는 어머니날은 중요한데 아버지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덩달아 대우를 받는 나라입니다.    한편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스승의 날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은 좋은 날입니다. 제가 선생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스승께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날이 있음은 다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늘 부끄럽고 어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스승의 날이 있다면 ‘제자의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학생의 날’이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생의 날은 제자의 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교사의 날의 반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정말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스승이 있습니까? 스승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운 사람이지요.      저는 제자의 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승이 되기도 힘들지만 사실은 제자가 되기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옛 사극을 보면 제자로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수업료 내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스승의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입니다. 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기를 원했겠지만 제자는 한정적입니다. 공자의 제자도, 부처의 제자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승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저 사람은 내 제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자의 뜻을 보면 ‘덕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이’라고 하는 정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이 덕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내 제자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누구의 스승이 되고 싶다면, 덕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의 날이 있다면, 스승의 날처럼 제자에게도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날이 될 겁니다. 누가 나를 제자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자신의 그릇을 생각하면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은 찾으면 되지만, 제자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막상 제자의 날에 고마운 제자가 없다고 부끄러워하는 선생님도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날이나 제자의 날이나 모두 귀한 날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제자 제자도 부처 자기 나라 기독교 성경

2025.05.18. 19:39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의 하루

하루의 일과를 정리해 보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하루는 늘 어휘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어휘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합니다. 언어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어휘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어휘는 말의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어휘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휘는 인간이고, 삶이고, 우리의 생각입니다. 어휘의 하루를 살펴볼까요?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해가 일찍 뜨는 하지가 가까워지니 새벽에 눈을 뜨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새벽’이라는 말은 해와 관련이 있는 말로 보입니다. 햇빛이 창틈으로 들어오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해가 밝아지는 때가 새벽입니다. 새벽의 ‘새’는 해와 관련이 됩니다. ‘새롭다’는 말도 해와 관련되는 말로 보입니다. 해가 뜨면 모든 게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롭습니다. 날이 밝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새다’라는 표현에서 ‘새’도 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해는 새와도 관련이 됩니다. 새롭다는 의미로 해를 쓰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햅쌀, 햇곡식, 햇것’은 모두 올해 새로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햇병아리’라는 표현에서도 ‘해’는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해가 흰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희다’라는 말도 ‘해’에서 온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해오라기’라는 새는 흰 새입니다.   아침이라는 말도 재미있는 말입니다. 아침밥이라고 하지 않고, ‘아침을 먹는다’고 표현하면 놀라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해 보면 어색함을 알 겁니다.     저녁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낮은 안 먹는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습관을 반영한 게 아닌가 합니다. 낮이라는 말 대신에 점심이라고 하는데, ‘점심(點心)’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로 불교에서는 배고플 때 조금 먹는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딤섬’을 한자로 쓰면 점심인 점도 흥미롭습니다. 딤섬으로 배부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이 사이에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을 참이라고 합니다. 사이에 먹는다고 해서 새참이라고 합니다. 일을 많이 하면 새참을 여러 번 먹기도 합니다. 저녁을 먹고도 배가 고프면 밤에 군것질을 하게 됩니다. 그때 먹는 것을 ‘밤참’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야식’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밤참이나 야식이나 배 둘레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혹 그 자체입니다.   잠자리에서는 특별히 먹지는 않습니다만, 물을 마시기는 합니다. 어른들은 자다 깨면 물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준비해 두는 물을 ‘자리끼’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잠자리에 자리끼를 준비해 드리는 것은 효도의 시작입니다. 효도는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효도는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어휘 이야기로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놀라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외래어, 외국어가 정말로 많이 쓰인다는 점입니다. 하루 종일 외래어 홍수 속에서 삽니다.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샤워를 합니다. 물론 샴푸와 린스가 필요하죠. 드라이를 하고, 티셔츠를 입고, 간단하게 토스트와 커피를 마십니다. 티브이를 보고, 노트북을 들고,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갑니다. 외래어의 홍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어휘로 시작해서 어휘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어휘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하루가 참 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어휘 어휘 이야기 사실 어휘 외래어 홍수

2025.05.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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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

어떤 말은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거나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삶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다루고자 하는 낱말은 우리말에서 매우 중요한 어휘입니다. 아니, 인간의 언어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화 없는 하루하루는 상상하기 어렵죠. 정치가 없다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과 마음의 평화는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라는 말이나 정치, 종교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 듯합니다.     말의 원래 의미와 사용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라는 말은 결국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화(文化)의 방향은 글이고, 정치(政治)의 방향은 올바름이고, 종교(宗敎)의 방향은 높음입니다. 한자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각각 다른 방향이 아닙니다. 같은 방향을 달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자로 보면 글로 하는 게 문화고, 바르게 다스리는 게 정치이고, 가장 높은 가르침이 종교입니다.      문화는 근본적으로 동물과 달라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겁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Culture’가 ‘재배, 경작’과 ‘교양’의 의미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말’입니다. 인간은 말로 서로 소통합니다. 그야말로 말을 하며 울고 웃습니다. 강하게 말하자면 말이 곧 인간입니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것은 폭력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겁니다. 문화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폭력이 아닙니다. 폭력을 부추기는 문화, 싸움으로 가득한 화면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두 번 놀랐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잘못 알고 인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 좋은 의미라는 점입니다. 하도 우리말 표현에서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폭력이 아닌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는 겁니다. 폭력을 벗어나야 비로소 정치가 시작됩니다. 야유가 아닌 설득이 정치의 기본입니다. 멋진 수사학과 연설의 기법이 정치의 묘미인 셈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우리 정치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네요. 소리 지르고, 야유하고, 비꼬는 낮은 수준의 언어 구사력입니다.    종교는 사실 좀 어려운 영역입니다. 분명 가르침을 좇아야 하는데 의외로 믿음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믿음이 시각을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은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됩니다. 다른 종교의 책은 읽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하게는 버리거나 불태우거나 금서로 만들기도 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서로의 믿음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은 폭력과 폭언, 악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교를 떠올리면 폭언과 악담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 종교 현실이 또 떠오르네요.      문화와 정치, 종교가 향하는 곳은 평화입니다. 원래 이 세 어휘는 모두 평화를 향하고 조화를 향합니다. 싸우지 않아야 하고 서로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폭력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설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종교는 평화입니다. 종교는 사랑입니다. 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말대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 정치 정치 종교가 종교가 우리 우리 정치

2025.05.0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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