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의 일이다. 마지막 가을걷이가 끝난 11월경, 텃밭에서 걷어온 가지가 한가득하다. 무슨 수로 수십 개의 가지를 다 먹나 궁리하다 말리기로 했다. 몽둥이처럼 곧게 자란 놈, 지팡이처럼 꼬부라진 놈, 생긴 것도 가지각색이다. 남편은 가지를 가느다란 손가락 길이로 착착 자른 후 기계에다 밤새도록 말렸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멸치 대가리처럼 잘 말라 있었다. 마트의 진열대에서 팔아도 될 만큼 완벽해 보였다.
엄동설한이니 월동 준비니 하는 말은 점점 옛날 말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말린 가지를 냉동고에 넣으면서 마음이 든든했다. 준비성이 대단했던 친정엄마를 닮아서인지, 나 역시 쟁여두는 습성이 있다. 작년 겨울, 어느 날, 말린 가지 한 봉지를 꺼내서 물에 불렸다. 두세 시간 불린 후, 씹어 보았더니 질겼다. 하룻밤을 넘겼다. 다음날에도 가지는 여전히 쇠심줄처럼 뻣뻣했다. 불려지기를 거부하는 가지를 물에 첨벙 넣고 아예 냉장고 구석에 넣어 버렸다. 며칠 후, 나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이 오른 팬에 가지를 꽉 짜서 한 움큼 넣고 볶았다. 부드럽고 쫄깃한 가지나물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가죽 껍데기였다. ‘그러게, 왜 나를 밤새도록 기계에 돌려서 화석을 만들어?’ 가지가 나를 보고 비웃는 듯했다.
작년의 참패를 교훈으로 올해는 내가 나섰다. 기계를 쓰지 말아야지. 극한으로 말라버린 가지는 아무리 물에 불려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아침 무렵이면, 잠에서 막 깬 가느다란 햇빛이 부엌에 내리쬔다. 나는 통가지가 담긴 커다란 쟁반 대여섯 개를 들고 덱으로 나간다. 해의 각도에 맞추어 쟁반을 나란히 놓았다. 점심때쯤이면 해는 이동해서 집 뒤 잔디밭에 가 있다. 거기에 연두색 나무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다. 나는 테이블을 끌어다 놓고 그 위로 가지를 이동시킨다. 하늘을 보며 해의 방향을 가늠한다. 해야 해야 잔뜩 내리쬐거라.
오후 무렵이 돼야 해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오후 2시경, 해는 집 앞에 가 있다. 현관 입구 계단 위에 판을 쫙 들어 놓았다. 허리를 펴고, 살펴보니, 앞집 개 두 마리가 창가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다. 나는 개의 응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해를 찾아서 뜰을 뱅뱅 도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클라라’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클라라는 노벨상 수상 작가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친구’ 로봇이다. 클라라는 몸에 힘이 달리면 태양을 향해 서서 에너지를 받는다. 가게 진열장에 서 있던 클라라는 몸이 약해서 홈스쿨링을 하는 소녀 조시의 친구로 팔려 간다. 조시는 엄마의 욕심으로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다. 다른 아이보다 우수하지만 동시에 후유증으로 죽어가고 있다. 클라라는 해를 만나기 위해 험한 벌판을 헤매고 다닌다. 언덕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해를 만난 클라라는 조시를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타는 듯한 강렬한 빛이 조시의 침대에 비추자 죽어가던 조시는 의식을 차린다.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치닫기만 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고를 하기도 한다. 남편이 편리한 기계에다 가지를 말리려다 실패한 것처럼 말이다. 가지와 나는 온종일 해를 따라다녔다. 보랏빛 가지는 잘 말라갔다. 가늘어지면서 난창난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