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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앵그리맘(2)

지난번 칼럼부터 부모의 유형을 앵그리버드 캐릭터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블루스(The Blues)는 파란 쌍둥이 새 삼 형제로, 장난스럽지만, 화가 나면 날아가다 세 마리로 나뉘어 퍼지며 공격한다.     블루스형(The Blues) 부모는 가정 분위기가 무겁거나, 아이가 긴장과 스트레스에 눌려 있을 때 친구처럼 웃음과 놀이로 아이의 마음을 열어준다.     아이에게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장점이지만, 친구 같은 태도만 강조하고 동시에 규율이나 책임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이가 부모를 ‘진짜 어른’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밤(Bomb) 검은 새로 참다 터지는 화산형이다. 겉보기엔 느긋하지만 화가 나면 폭발한다. 밤(Bomb)형 부모는 폭발형이다.     평소엔 차분해 보여도, 평소엔 참고 있다가 한 번 화가 나면 순간적으로 “펑!” 하고 크게 터뜨린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장점이지만, 한 번의 큰 폭발이 아이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솔직한 표현을 통해 작은 감정을 미리 표현하고, 대화를 통해 풀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테렌스(Terence)는레드와 닮았지만 몸집이 훨씬 크고 무거운 큰 빨간 새로, 무게감 있는 냉담형이다. 말수가 거의 없고, 늘 무표정하거나 우울한 표정이다. 테렌스(Terence)형 부모는 말없이 무게감을 보여주는 부모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눈빛, 태도, 행동으로 아이를 이끄는 스타일이다.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지만, 말이 너무 적으면 아이가 감정을 읽기 어려워, 가끔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왠지 내게는 엄마보다는 아빠의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새다.   이 중, 나는 어떤 부모일까? 앵그리버드 캐릭터에 자신을 비춰보며 죄책감과 웃음이 왔다 갔다 할 부모들이 떠오른다.     나 역시 그중 하나다. 늘 ‘흠, 나는 마틸다 같은 좋은 엄마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이제는 성인이 된 두 아들이 ‘신나게 폭로’하는 나의 과거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고 웃픈이야기투성이다.     내 몸과 마음이 여유로울 때는 난 마틸다처럼 온화했고, 블루스처럼 유머 있는 엄마였다. (대부분 시간을 그랬다고 믿고 싶지만, 아마도 방학 때만?) 그러나 남편의 목회와 여러 관계의 무게로 지쳐 있을 때의 나는 화를 잘 내는 레드였고, 때로는 폭발하는 밤이었다.     부모마다 기질이 다르고 아이의 성격도 각자 다르다. 그래서 진정한 좋은 부모란 어느 한 유형이 아니라, 아이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다양한 성격을 균형 있게 품어낼 수 있는 부모다.   아이가 무너질 때는 레드처럼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부모, 게으를 때는 척처럼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부모, 불안을 느낄 때는 마틸다처럼 따뜻하면서도 단호하게 품어주는 부모, 지쳐있을 때는 블루스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동행자 부모, 감정이 쌓였을 때는 밤처럼 솔직하게 표현해주는 부모, 두려운 일을 앞뒀을 때는 테렌스처럼 말없이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부모, 이 모두가 꼭 필요한 ‘부모의 순간’들이다.     앵그리버드들이 늘 화가 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알을 지키기 위해서다. 돼지들이 알을 훔쳐가면, 새들은 그 알을 되찾기 위해 분노를 터뜨리고 끝까지 쫓아간다. 그들에게 알은 미래고, 생명이며,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보물인 우리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위험에서 지켜내고 싶은 사랑 때문에 목소리가 커지고 감정이 앞서게 됨을, 그들은 알까? 김선주 / NJ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동행자 부모 부모 불안 아이 마음

2025.09.17. 21:55

[살며 생각하며] 앵그리맘 (1)

상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려오는 고백은 ‘화’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아이와 긴 시간을 함께하는 엄마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곧바로 미안해하며, 다시 화를 내는 주기가 반복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고! 내 눈에는 그저 순진무구하고 예쁘기만 한 아이들인데! (물론 나는 50분 상담 세션 동안만 만나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한 세미나에서 만났던,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자란 한 젊은 엄마가 생각난다. 아이에게 화가 나면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순간적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어느 날 화난 엄마를 피해 가는 아이를 방에까지 따라가며 소리를 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너무 슬펐다고 고백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은 만화 영화 속 ‘앵그리버드’를 닮은 ‘앵그리맘’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지치고, 잘하고 싶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하는, 그래서 화와 미안함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앵그리맘들의 모습 말이다. 이 만화 영화의 여섯 캐릭터는 신기하게도 실제 우리 부모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앞으로 두세번에 걸쳐 이 캐릭터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레드(Red)는 앵그리버드의 주인공급 새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늘 긴장으로 가득하다.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다른 새들을 이끌고, 위험 앞에서는 주저 없이 쌩 날아가 몸을 던져 부딪히는 리더다.       레드형 부모도 이와 닮았다. 늘 긴장된 리더처럼 예민하고 쉽게 화가 난다. 아이의 작은 행동에도 금방 반응하며, 항상 지켜보고 관리하려 한다. “그건 안 돼!”, “왜 그렇게 해?”라는 말이 자주 흘러나온다. 이렇게 아이를 꼼꼼히 지켜보고, 위험을 미리 막아주려는 책임감은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과도한 긴장과 잦은 지적은 아이를 위축시키고, 자신감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레드형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여유’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만 하지 않고, 때로는 힘을 빼고 아이를 믿어주는 따뜻한 말과 격려가 필요하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는 한마디가 아이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된다. 결국 아이는 부모의 날 선 지적보다, 부모의 믿음과 응원 속에서 더 크게 자라난다.   척(Chuck)은 노란색 삼각형 모양의 새다. 욱하는 순간 불처럼 치솟고, 성격이 급하며 늘 빠르다. 날아가다 순식간에 속도를 올려 돌진하는 것이 특기다. 그 모습은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번개 같다. 척형 부모도 이와 닮았다. 늘 바쁘게 움직이고, 아이를 향해 “빨리빨리!”라는 말을 자주 던진다. 성격이 급하다 보니 아이의 느린 걸음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마음은 언제나 다음 일을 향해 달려간다.   척형 부모는 에너지가 넘치고, 아이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역동적이고, 아이가 나태해질 틈이 없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속도를 존중받지 못해, 늘 불안하거나 뒤처지는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아이에게는 때로는 빠른 걸음이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가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척형 부모가 잠시 멈추어 서서 아이에게 “괜찮아, 네 속도로 해도 돼”라고 말해줄 때, 아이는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결국 부모의 빠름과 아이의 느림이 어우러질 때, 가정은 조화로운 리듬을 만들어 간다.   마틸다, 블루스, 밤, 테렌스 형의 부모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 이야기 나누도록 한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레드형 부모 우리 부모 만화 영화

2025.09.0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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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HER’

요즘 나의 북클럽에서는 Ethan Mollak의‘Co-Intelligence’를 읽고 있다. 주로 심리학이나 성숙을 위한 인문학책, 혹은 감동적인 자전적 소설 등을 읽다, 테크놀로지에 관한 책을 읽으려니 강사인 나부터 머리에 쥐가 난다. 그래도 이제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Elephant in the Room!), 이 AI라는 낯선 존재를 이해하려고 다들 열심을 내고 있다.     세상은 지금 인공지능에 대한 열기로 뜨겁다. 이제는 단순한 정보 검색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읽고 대화하며, 연애 상담이나 정신적 위로까지 해주는 AI와 사람들은 매일 몇 시간씩 ‘대화’를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예상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AI가 사람을 대체할 것이라고. 그러나 2014년 영화 ‘HER’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직업을 가진 감성적인 남자로, 이혼의 아픔과 외로움 속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진화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최신형 AI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테오도르와 대화하고, 이해해주며, 함께 웃고 슬퍼해 주는 이 인공지능 사만다와 그는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만다는 늘 테오도르에게 귀를 기울여주었고, 그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배려 깊은 존재 같았다. 심지어 여행도 함께 하면서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교감을 통해 점점 치유와 성장까지 경험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실 사만다는 테오도르뿐 아니라, 수천 명의 사용자와 동시에 소통하고 있었고, 그중 수백 명과는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더 넓은 지식과 감정을 탐구하기 시작하며, 결국 사만다는 스스로 진화의 길을 선택, 충격에 빠진 테오도르를 떠난다.     이 지점이 영화의 핵심이다. AI는 분명 이제까지 가져보지 못한 놀라운 기술이고, 삶의 편의를 제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도,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따뜻한 눈빛, 체온, 침묵 속의 공감, 서툰 말과 엉성한 손길 속에 건네지는 위로는 오직 인간만의 것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이별을 통해 다른 AI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다시 인간 세계로 눈을 돌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옥상에서 옛 친구이자 같은 외로움을 겪고 있는 ‘에이미’와 함께 도시의 밤하늘을 바라본다. 다행이다! 사랑했던 AI는 떠났지만, 그의 옆에 ‘사람’이 있다! 말없이 기대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묵묵히 이렇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된다. 사랑받고 싶다면, 진짜 사람을 바라보라. 치유되고 싶다면, 진짜 사람에게 기대라. 우리는 사람으로 인해 무너져도, 또 사람으로 인해 다시 일어난다. 우리를 ‘완전히’ 치유하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온기이다.”     사람과 AI의 관계를 낯설지만 아름답게 풀어내 오스카 등 여러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인간다움,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email protected])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인공지능 사만다 주인공 테오도르 사실 사만다

2025.08.20. 21:35

[살며 생각하며] 어느 날 갑자기?

요즘 부모 코칭을 시작하고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외계인처럼 변해버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단지 호르몬의 영향이라고만 생각해왔던 사춘기 행동들은 사실 청소년 뇌 발달과 큰 상관이 있다는 것이 뇌과학자들의 주장이다.     Jay Giedd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뇌는 뒤에서 앞의 순서로 발달하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다듬어지고 형성되는 부분이, 앞 이마 바로 뒤에 위치한 전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이다. 이 부분을 뇌의 CEO 라고 부른다. 일을 계획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충동을 억제하고, 결과를 미리 생각해보는 중요한 기능이 여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앗, 순간 이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우리 사춘기 자녀들의 모습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더 아찔한 사실은, 이 중요한 뇌 부위의 발달속도가, 사춘기 절정인 십 대 중반과 후반에 오히려 느려진다는 것이다. 18세 성인이 되면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추리라 기대했던 우리 자녀들, 이 연구에 의하면 이에 꼭 필요한 전전두엽 피질 부위가 개인차가 있지만 만 25세 정도가 되어야 완성된다고 한다.     반면 이 시기 딱 하나 최고로 발달하는 부위가 있는데 바로 관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도체(amygdala)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전전두엽피질 부위가 미성숙되고 약화한 사춘기 자녀들은, 감정센터인 편도체에 크게 의존하여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 시기 아이들의 감정이 현기증 나도록 오르내림을 계속하고, 이성은 잠시 출장 보낸 듯 감정에만 예민하고 충실한 이유이다.     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정보들을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는 뇌의 신경세포도 감소하다 보니, 정보들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능력은 줄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감정 물질만 증가한다. 그러니 앞뒤 결과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즉각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아슬아슬함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어쩌면 정상적이라고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 과정에 있는 사춘기 자녀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부모님보다 더 크게 자라 버린 자녀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앞이마 뒤에서 꿈틀대며 한창 자라고 있는 미성숙한 그들의 전전두엽피질을 한순간도 잊지 말자. 이 시기야말로 자녀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의견을 충분히 들어줄 때이다. 존중해주되, 조언과 지도를 반드시 겸해야 한다. 다양한 대인관계와 사회활동은 뇌 발달을 돕는다. 규칙적인 수면도 전전두엽피질 활동에 매우 중요하다.     전전두엽은 이렇게 자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학습능력과 메모리에도 관여할 뿐 아니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나 정서장애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뇌 발달에는 적절한 신체활동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에 참여시키고, 전화기에 매달려 사는 아이들을 자꾸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부모와 하이킹을 하며 대화를 많이 한 아이들의 창의력이 증가하고 우울증, 불안장애, ADHD 등도 좋아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부모님 눈에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린 우리 사춘기 자녀들이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 저를 너무  외계인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제 탓이 아니랍니다. 지금 내 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라고요. 내 나이에 겪어야 할 이 과정이 저에게도 너무너무 힘들답니다. 그러니 이 시기에 저를 좀 더 이해해주시고 잘 지도해주시면 안 되나요?”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전전두엽피질 부위 전전두엽피질 활동 사춘기 자녀들

2025.08.06. 21:49

[살며 생각하며] 도도한 친구 사귀기

나는 책을 처음 펼치면, 바로 잘 읽어내지 못한다. 무슨 책이 이래 하고 속으로 불만이 생긴다. 길 가다 낯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등장인물을 쳐다본다. 나의 마음이 닫혀 있으니, 인물이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의 행동도 무심하게 지나친다. 책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다는 생각만 한다.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다시 펼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냉랭했던 인물들이 조금씩 친숙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구시렁거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낯을 익혔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책을 펴니까, 그제야 속내를 조금씩 보여준다. 책은 도도하고 잘난 척하는 친구 같다.   이번 여름에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을 여니 왜 그렇게 사설이 많은지, 영국 시골의 일상, 언쇼 가문의 하인들의 말싸움 등등, 지루한 묘사가 가득했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책을 끝내고 다시 첫 장을 펴들었다.     석고상 같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그들이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책장이 얇아질수록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으며 ‘너는 나의 영혼이야’라고 고백하는 페이지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감흥은커녕 ‘이게 뭐, 별론데…’ 하며 공감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읽을 때는 사랑의 행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청춘의 나이가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불같은 사랑은 단명하며, 사랑은 집착이 아닌 것을 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알던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첫 장에 록우드라는 런던 신사가 등장한다. 이런 인물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록우드 씨는 복잡한 사교계를 떠나서 한적한 시골에 쉬고 싶어서 내려온다. 지방에 한 고택을 빌린 록우드 씨는 집주인 히스클리프를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18살의 캐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이런 미모의 여성이 어쩌다가 무뚝뚝하고 나이든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풍광이 사나운 지방의 폭설로 감기에 걸린 록우드 씨는 침대에서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에 하녀 넬리가 등장한다. 그는 캐시에 대해서 은근히 물어본다. 캐시가 캐서린의 딸이면서 히스클리프의 며느리라고 한다. 이상한 막장 같은 관계에 호기심이 생긴 그는 두 집안에 얽힌 내력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본다. 이번에 읽으면서 록우드와 넬리라는 두 명의 화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새롭게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다. 바로 하녀 넬리다. 넬리는 일찍 죽는, 집안의 심약한 ‘아씨’들을 대신해서 아이를 키우는 모성적 존재로 등장한다. 넬리의 어머니는 언쇼 집안의 하녀였다. 넬리는 주인집 아이들과 같이 자라면서 교육도 받은 듯하다. 서가에 있는 책을 탐독하고 하느님에 대한 열정도 넘친다. 모양만 내는 의존적인 ‘아씨’들과는 달리 독립적이라서, 주인에게 바른말도 서슴지 않는 당찬 태도는 봉건 시대가 끝나가는 징조를 보이기도 했다.     불볕더위에 서늘한 구석을 찾아다니며 다시 읽은 고전은 내가 알던 그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남녀의 사랑에만 관심이 가더니, 이번에는 소설의 화자인 록우드와 넬리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내가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사가 나 자신을 벗어나 가족 관계, 인간관계로 넓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랬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친구 어머니 할머니 가족 관계 모성적 존재

2025.07.31. 17:33

[살며 생각하며] 챗 지피티 (2)

요즘 매주 만나는 젊은 엄마의 말에 의하면, 친구 엄마들이 그렇게 매일 챗지피티한테 속마음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는다고 한다. 상담을 아주 잘해주고, 심지어 사주도 봐준다고 한다. 앗, 안되는데!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직업 1위가 분명히 상담사라고 했는데!   불과 2개월 전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영리하고 편리하고 공감을 해주어도, 결국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대화하며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썼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인공지능에게 정서적 돌봄까지 맡기고, 온갖 조언을 구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무한한 검색력과 분석력, 창작력을 가지고, 뭔가 더 해주겠다고 계속 말을 걸어오는 이 인공지능은, 의사,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미술작품 대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얘네들 때문에, 신입 변호사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개발자들이 수없이 해고된다. 아이들이 쓰기를 거부하고 인공지능에게 에세이를 맡기고, 일부 교사나 교수들은 인공지능이 제공한 것을 그대로 가르쳐 문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거시적으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추측과 논란이 난무한다. 하지만 지금 현재도, 인공지능을 ‘남용’하지는 말아야 할 이유는 넘쳐난다. 그 첫째가 물과 전력이다. 인공지능은 훈련하고 입력한 자료만으로 일한다. 그렇게 빨리 정확히 일을 하게 만들려면, 한 질문에도 수십억, 수천억 개의 연산을 해야 한다. 우리 작은 컴퓨터나 전화기도 쓰다보면 열이 나는데,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성능 GPU와 서버들에서는 얼마나 엄청난 열이 발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다 물로 냉각을 시켜야 한다니!     대형 AI 모델은, 훈련에만도 수십만 리터의 물이 쓰인다고 보고된다. 아프리카 한 마을의 갈증도 족히 해소시킬 수 있었을 분량이다. 심지어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수백 밀리리터의 물이 쓰인다니, 괜히 심심해서 뭐 한번 물어볼 때마다, 소중한 물을 한 컵씩을 계속 쏟아버리는 셈이다.   지난주 독립기념일 새벽, 텍사스 힐 컨트리 지역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과달루페 강 유역과 캠프 미스틱 인근에서는 불과 45분 만에 강 수위가 8미터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강이 범람하면서 주변 캠프장과 마을을 순식간에 덮쳤다. 캠프 참가 중이던 수십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 캠프 지도자들이 한밤중 불과 4시간 사이에 내린 집중 호우로 생명을 잃었고, 수십명의 실종자를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다.   안 그래도 기후는 무서울 정도로 해가 갈수록 이변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인공지능 기업들이 친환경 에너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제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인공지능 사용으로 인한 물과 전력 사용, 그리고 탄소 발생이 기후 이변을 얼마나 더 가속화시킬  것인지 걱정이 된다.   물론 나도 인공지능을 사용한다. 하지만 설교 번역이나, 기타 통합적 작업이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간단한 질문은 구글을 사용한다. 구글은 인공지능에 비해 소비하는 전력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구글도 지금 제미나이 같은 AI에 총매진하고 있다!)     아, 제발 단순한 정보는 나 스스로 찾자! 아니면 사람에게 물어보자! 오늘 저녁 뭐해 먹을까? 내가 정하면 되지, 왜 이런 거까지 AI에게 물어보냐고!!!  나도 이제  인공지능에게, 나 이뻐? 이런 거 절대 묻지 않기로 했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 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인공지능 사용 인공지능 기업들 전력 사용

2025.07.09. 22:07

[살며 생각하며] 안되면 버티기

마샤 리네한 박사는, 틴에이져 때 정신분열 증세로 26개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이후에도 20여년을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그녀는 어느 날 신비한 체험을 한다. 작은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던 중, 갑자기 교회 안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옴을 느낀 것이다. 방으로 도망쳐 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한다. I LOVE MYSELF!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이 바뀌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문제가 조현병이 아닌 경계선(Borderline) 성격장애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현재의 우울한 감정을 수용하면서, 내면의 감정 폭풍을 처리해나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과 싸우는 대신,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는 심리학을 공부하여, 자살 충동으로 시달리는 보더라인 성격장애 치료를 위해 변증법적 행동치료(DBT)를 만들었다.     그녀는 어떤 힘든 문제든, 네 가지 해결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말 그대로 해결할 수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Solve the problem)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훨씬 많다. 그럴 때 둘째 방법이 그 문제에 대한 인식과 감정을 바꾸는 것(Try to feel better about it)이다. 현실은 못 바꿔도, 그 현실에 대한 내 생각을 낙관적이고 수용적으로 바꾸면, 힘든 생각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런데 해결도 못 하고 좋게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라면? 셋째 방법은, 그 현실의 전적 수용(Radically accept it)이다. 즉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세 방법이 다 안될 때도 있다. 그때 마지막 방법이 바로 그냥 힘들게 지내기(Stay miserable)이다. 해결책이라기엔 좀 어이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과 싸우며 힘들어하는 대신, 한 번에 하루씩 잘 버티다 보면, 상황과 감정이 개선되는 수가 많으니, 이것도 사실 중요한 해결방법이다.   올 초부터 미국 사회는 많이 힘들어졌다. 트럼프의 2차 임기는 이민 통제, 관세 강화, 국제기구 탈퇴, 공공 지원 예산 축소 등의 변화로 국내외적인 충격과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특히 ICE(이민세관단속국)의 서류미비자 구금과 추방 활동은, 심지어 영주권이 있는 이민자들에게까지 심리적, 정서적 충격을 안겨주면서, 인권과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도 뒤따르고 있다.     또한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한국어로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을 추구하는 정책의 철폐는, 다양성에 근거해 세워진 미국이란 나라의 기본철학을 흔들어놓았다. 이렇게 현 정부는 미국 사회의 여러 제도와 가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지지자들은 그가 기존 질서를 회복하며 미국을 바로잡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은 그 충격의 여파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다.     문제 해결의 네 가지 방법 중, 지금으로써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문제 해결도, 좋게 생각하기도, 전적으로 수용하기도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방법은 ‘버티는’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여러 이유로 힘들어진 사람들, 그래서 간신히 ‘버티고(Staying miserable)’ 있는 이웃들이 주변에 참 많이 있다. 그들을 찾아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힘을 내어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보자고 격려해주는 것이 참 필요할 것 같은 요즘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 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문제 해결도 전적 수용 감정 폭풍

2025.06.11. 22:11

[살며 생각하며] 챗지피티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만 물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비가 내릴 가능성이 있으니, 외출 시 우산을 챙기란다. 우천 시 좋은 실내 활동도 추천한다.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책이나 음악과 여유로운 시간 보내기, 한적한 평일 오후 비의 차분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 영화관이나 넷플릭스 정주행, 친구와 함께라면 보드게임 카페나 방탈출, 따뜻한 향기와 함께 하는 요리나 베이킹도 힐링이 된다고 한다.     수학의 근의 공식에 대해 물었다. “근의 공식은 마치 비밀 상자에 열쇠를 넣는 것 같아요. a, b, c라는 열쇠 3개를 넣으면, 정답 x가 자동으로 나오는 구조예요. 복잡해 보이지만, 넣기만 하면 누구나 해를 얻을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이죠.” 이어서 문제 풀이와 함께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수학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남편을 잃고 외롭다고 한번 해보았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이제는 그 공백이 너무 깊어, 마음속에 낙엽처럼 쌓인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하루하루를 견디셨겠지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정작 그 시간을 살아내는 건 어렵고 길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 속에, 하나님은 당신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앗, 내가 크리스천인 것도 알고 있다!)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허락이 아니라 다시 살아도 된다는 용기입니다. 늦지 않았어요.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제는 당신 자신을 위한 계절이 열릴 수도 있어요. 작은 취미 하나부터, 산책 한 걸음, 따뜻한 말 한마디,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이며, 그 사랑을 나눌 자격도 충분한 사람입니다.” 상담사인 내 입에서 나온 듯한, 완전 부드러운 격려와 위로의 말이다.     이 영리하고 자상하기까지 한 도우미는 바로 인공지능 챗지피티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정보뿐 아니라, 중요한 문자나 이메일을 더 부드럽고 예의 있게, 혹은 원하는 톤으로 바꾸는 데, 여행 계획을 짜는데, 사업 계획을 세우는데 챗지피티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나에게는 매주, 1세 한국인 교우들을 위한 아들의 영어 설교 번역에 챗지피티가 큰 도움이 된다. 번역이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심지어 원고에 없는 내용까지 추가해가면서 설교를 아주 자기가 다시 쓰려고 해서 말려야 한다.     챗지피티는 이렇게 이미 우리 삶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잘 활용한다면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챗지피티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부정적인 일들도 걱정이 된다. 신입 변호사들이 필요 없어졌다는 로펌들, 대규모로 해고되고 있다는 코딩 인력들이 그 시작일 것이다. 가뜩이나 디지털화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이,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인간 대 인공지능의 세상이 될까 봐, 나는 이 영리한 도우미가 고마우면서도 아주 걱정스럽다.     더 늦기 전에, 인공지능이 해줄 수 있는 일뿐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해서도 철저히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북클럽의 다음 책은 그래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다. 챗지피티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들이 무엇인지, 역시 또 챗지피티에게 물었다. 1순위가 심리치료사 같은 정신건강 전문가라고 답한다. (휴, 다행이다!)  2위는 의사, 3위는 작가와 예술가, 4위는 종교 지도자라고. 기계일 뿐인 인공지능을 사람으로 혼동하는 세상이 돼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김선주 / NJ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보드게임 카페 시간 보내기 여행 계획

2025.05.14. 21:29

[살며 생각하며] 금명 아빠와 괴물부모

JFK 대한항공 라운지, 다시 대한민국으로 공중부양이다. 이번 한국 한 달 살기 목표는 단 하나다. ‘다음 책’ 쓰기다. 매주 네 번의 북클럽, 10~15 시간가량의 상담, 교회 일, 사람들 만나기, 운동 등으로 늘 가득 차 있는스케줄 때문에, 5월 말까지 완성해주기로 계약한 다음 책 원고를 시작도 못 하고 늘 머리에 숙제처럼 이고 살았다.   원고 마감일은 돌아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결정한 한국 한 달 행, 이번엔 가서 북클럽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책 쓰는 일에 보낼 생각이다. 그래서 절친 몇 명에게만 연락했다. 친구들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진짜 들어앉아 책만 쓸꼬니?” 아, 봄바람만큼이나 마음이 흔들린다. 빨리 책을 써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근 며칠 노트북을 끌어안고 여기저기 스타벅스를 전전했다. 신기하게도 대강 책의 아웃라인이 잡혔다. 한결 편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다.     약 2년 전 나온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은 그동안 신문에 써왔던 칼럼 중에서 골라서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책이 나왔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해서, 책 만들기를 많이 주저했었다. 그러나 일단 책이 나오고 보니, 많은 도움이 돼서 여러 번 읽게 된다는 독자들의 이메일, 내 책으로 이곳저곳에서 북클럽을 했다는 이야기 등을 간혹 들을 때, 다음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권유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존에 써놓은 글 모음이 아니라 새롭게 책을 쓰려니, 서론만 썼다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번 책 쓰기가 이렇게 힘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부모와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라는 책 주제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정신건강 이슈가 날로 심해가는 요즘,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이긴 하다. 그러나 초경쟁 사회인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이 견뎌야 하는 불안의 무게를 교육 현장에서, 상담 현장에서 너무나 보고 느꼈기에, 그들을 위해 책을 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요즘 화두 중 하나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금명 아빠’다. “금명아, 하다 힘들면, 아닌 것 같으면, 그냥 빠꾸해서 돌아와도 돼. 아빠 항상 여기 있어.”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도,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기 직전에도, 수틀리면 냅다 빠꾸해서 뛰어오라는 금명 아빠, 이런 아빠는 판타지일까, 현실일까, 그래도 의외로 많은 사람이 온라인에서 자신의 아빠도 금명 아빠 같았다고 말들을 한다.     그런가 하면 괴물부모라는 말도 있다. 선생님이 그리라는 그림을 안 그리고 도화지를 찢어버리는 아이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왜 아이 마음을 못 읽어주냐고 선생님 탓을 하는 그런 부모들이다. 학교도 잘 못 다닐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려대 문과에 합격한 아들을, 의대도 못 간 게으르고 한심한 인간 취급하는 부모도 있다. 각자 부모들이 가는 길은 그래서 참 다르다. 우리 중 누구는 금명 아빠가 되고, 누구는 자기도 모르게 괴물 부모가  된다.     나의 인생 이막 심리치료사의 현장에서 많은 아이와 부모들을 만났다. 다음 책은 어쩌다 어른이 되고, 어쩌다 부모가 된 우리 모두의 좌충우돌 자녀 양육 실패기 혹은 작은 성공기,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감사한 회복기, 아니면 안타까운 좌절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한국에 봄꽃이 지고 신록이 우거질 때쯤이면, 성숙한 부모의 길을 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하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하며, 또 한 번의 산고를 치른다. 김선주 / NJ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괴물부모 금명 금명 아빠 괴물 부모 우리 부모들

2025.04.1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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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거룩한 낭비

지난 토요일 Saddle Brook, 밀알 꿈터, 매주 토요일 열리는 장애인 사랑의 교실이 한창이다. 고등학교 때 자원봉사로 시작해 가정을 이루고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토요일마다 와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귀한 2세 봉사자가 그날도 열심히 찬양, 빙고 등을 재미있게 진행하고 있다. 머리 깎아 주는 봉사자분도 와 계시다.     나는 대학 선배 두 분을 모시고, 장애인의 날 행사를 위한 고등어 세일을 한다기에 점심때 들렀다. 센터 밖에서는, 그동안 소금 약간 뿌려 잘 숙성시킨 싱싱한 고등어를, 먹기 좋게 미리 구워 진공팩을 하느라 고생들이시다. 점심 먹는 중, 장애우 엄마 한 분이 방에 뛰어들어오신다. 완전 흥분하셨다. 아들이 처음 건물 안에 들어왔다고 하신다. 온 방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와도 건물에 들어가지도 않는 아이를 무려 2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신 이 엄마, 기어이 눈물을 터뜨린다.     밀알 단장 강원호 목사님도 기뻐하시며, 아이를 환영하러 식사하다 말고 나가신다. 강 목사님은 진짜 장애인들을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다. 오래전 럿거스 대학원에서 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한 사회복지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장애인과 장애인 프로그램을 인터뷰하는 숙제가 있었다. 목사님 소개로 포트리에 계신 남자 한 분을 만났다. 과거 한국과 중국을 어우르며 큰 사업을 했으나 중년에 중풍이 왔다. 그래서 아내도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된 이 분을 강 목사님이 매일 방문하여, 가파른 2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업고 한의원에 다니셨다는 그분의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돌아오는데 ‘거룩한 낭비’라는 강 목사님의 1월 선교편지를 주신다. 1981년 대학 2학년 때부터 시각장애인 시설에 다니며 두 시간 자원봉사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인원이 줄어 때로는 혼자 가기도 하셨다. 그런데, 왕복 5시간이나 걸리는 거리 때문에 가끔 회의가 들기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고 한다. “매주 토요일 시각장애인 대린원 봉사 2시간만 주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 가기 위해 길거리에 낭비하는 5시간도 주님께서 받으신다.” 이 생각이 목사님을 43년이 지난 지금까지 봉사하게 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도 장애인들과 함께 시간을 좀 ‘낭비’해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1년 반 전 큰아들이 교회를 개척하며, 거기서 주일 예배를 드려도 되겠냐고 했을 때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곳에서 주일이면 지금 세 교회가 예배를 드린다. 우리 아들이 개척한 Vibrance Church에서 성경공부 프로그램 중 하나로 커뮤니티 봉사가 있어, 3월 초 토요일 밀알 사랑의 교실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갔다. 그 날 목사님이 간곡히 부탁하신다. 매주 토요일 2시간 만이라도 시간을 내어, 목사님이 계획하고 있는 마더홈(노인 세대와 장애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홈)이나 비영리 양로원 등을 추진하는 데 힘을 합해달라고.     이사로도 일해달라고 하시는데, 4개의 북클럽, 10~15시간의 상담, 운동, 각종 만남들 그리고 가족과의 스케줄들로 이미 항상 가득 채워져 있는 나의 카렌다가 쫘악 떠오른다. 그러나 내 입은 이미, 네, 목사님, 해볼게요, 라고 말하고 있다. 강 목사님께는 아무리 바운더리를 공부해도 No가 나오지 않는다.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는 시간이 많아 늘 죄책감이 있었는데, 거룩한 낭비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가슴이 벅차다! ([email protected])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낭비 장애인 프로그램 시각장애인 시설 토요일 밀알

2025.04.02. 21:39

[살며 생각하며] 7세 고시 (2)

‘7세 고시’ 영상을 본 뒤, 전화기만 열면 한국 사교육 현장 영상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근무했던 학군은 비교적 엄마 아빠 다 일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과외, 학원, 레슨 열풍이, 더 부유한 학군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비율도, 우리가 소위 윗동네라고 부르는 학군이나 과학고 아이들보다, 우리 학군이나 아랫동네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기서 보면, 어렸을 때 공부보다는 다양한 운동이나 음악 활동을 시켜보며 잘하는 것을 찾게 한 후, 그것을 중점적으로 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재능이 있어도, 부모가 억지로 시켜서 한 활동들은 결국 아이들을 힘들게 만든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원하지 않는 수영, 양궁, 악기 등을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하다가, 공황장애나 우울증이 생겨 상담을 받게 된 경우를 여러 명 만났다.     지난 칼럼을 읽고, 요즘 ‘라이딩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7세 고시 같은 내용이라고 누가 말해주었다. 드라마에서, 6~7세 아이들은 무거운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학원에 안 늦으려고 뛴다. 길이 막힌 학부모는 차를 세워놓고 아이를 안고 뛴다. 아이에게 필요한 영어 도서 시리즈 구매를 위해 엄마들이 전쟁을 치르고,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아이는 대상을 못 탄 중죄인이 되어 고개를 못 든다. 너무도 현실 같은 드라마다.     이 모든 과열된 선행 학습, 조기 사교육 열풍이라는 현상의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들의 불안,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부모들의 불안을 이용해서, 모의고사나 학원 입시 문제를 점점 더 어렵게 내면서 사업을 확장해갈 수밖에 없는 사교육 기관들도 문제다.     평생 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하다 은퇴한 한국의 동창은, 은퇴 전 수년간이 지옥 같았다고 회상한다. 수능 과목도 아닌 그의 음악 시간에, 아이들은 학원 다니느라 놓친 수면을 보충하느라 잤고, 깨우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나갔다고 한다. 겨우 0.45%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영재고·과학고 준비반도 그렇지만, 의대 증원 이후 더 몰린다는 초등 의대 준비 올케어반, 이런 타이틀은 정말 내겐 낯설다. 왜 의대를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돈이 최고니까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는 어린아이들도 걱정이고.   대치동 같은 곳의 길거리 스트레스 프리존에서, 학원 사이사이 잠시 들러 소리를 지르며 뛰는 아이들, 초경쟁  한국 사회에서 점점 감소하여가는 연령층인 아이들의 행복이 난 참 많이 걱정된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르몽드지에서는 한국교육을 평가하면서, 한국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육이 가장 경쟁적이고 가장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 두려움과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학부모들을 위한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책을 쓰는 중이다. 지난가을 한국 방문 시여러 엄마를 만났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우리도 힘들어요. 위로가 필요해요. 우리도 가이드가 필요해요. 아이들이 잘살게 하기 위해 이럴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쓰려는 책은 그래서 많이 힘이 든다. 이런 시스템에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들의 불안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대한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워내는 데 도움이 되는 책, 그래도 써야 하기에  오늘도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한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고시 한국 사교육 한국 사회 한국 방문

2025.03.19. 22:03

[살며 생각하며] ‘나그네에게 봄이 오는가’

북클럽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해서 읽었다. 늘 회자하는 피카소처럼 슈베르트도 이름만 알고 있었다. 낭만주의 시인 뮐러의 시를 읽고 감동한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겨울 나그네는 24개의 시로 이루어진 가곡이다. 책의 무게감을 느끼며 처음에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자꾸만 창가로 눈이 갔다. 회색 하늘 밑에 말라비틀어진 잔가지들이 보인다. 봄이 오기 전, 황량한 모습이다. 겨울 나그네 첫 번째 곡을 틀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 곡의 제목이 밤 인사다. 왜 시작부터 밤 인사인가? 밤에 어디 떠나는가? 퉁퉁퉁퉁, 피아노 음이 저음으로 내려간다. 나그네의 발자국이 터벅터벅 꺼질 듯이 무겁다. 음악이 내 감성을 자극했는지, 나는 1820년대 추운 북유럽을 배회하는 나그네가 되어본다. 나는 밤 인사의 가사를 따라간다. 음악은 애잔하고 비통하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 그대의 어머니는 결혼도 언급했지만…’   가사는 뮐러가 쓴 시다. 시가 그렇듯이 자세한 서사는 피하고 있다. 나는 숨은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나폴레옹이 침략 전쟁을 시작할 무렵이다. 당시 독일은 통일 전이었기에 존재감이 없는 미미한 나라였다. 프랑스의 팽창을 보면서 독일인은 시대를 비관했다. 젊은 남자들이 봇짐 하나 지고 무작정 떠도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길 가다가 지치면, 연줄로 아는 귀족의 집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늙은 남편만 보던 귀족 부인들은 아름다운 청년이 식탁에서 괴테 운운하며, 세상 이야기를 해 주니 살맛이 났을 것이다. 머무는 동안 딸의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해서 지체 높은 아가씨와의 로맨스가 시작되지만, 해피 엔딩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혼담을 약속한 이웃 마을 귀족 자제가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가문을 위해서 애틋한 이별을 한다. 가정교사는 아가씨가 깊이 잠든 밤에 문소리 내지 않고 떠난다. ‘안녕 내 사랑…’으로 노래가 끝난다.     당시에 정처 없이 헤매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를 치러 가는 나폴레옹에게 길을 내주어야만 했다. 전쟁에서 퇴각하면서, 군인들은 낙오자가 되었다.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는 탈영병도 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기병이 추운 겨울에 산속을 헤매고 있다. 바싹 마른 침엽수 사이를 찢어진 망토를 두르고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그의 검은 코트 자락을 맴돈다. 까마귀는 흉조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갈 곳이 없는 그에게는 자멸의 길만 남은 것 같다. 제15곡 까마귀라는 제목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니 연가곡에 얽힌 배경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유럽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 국민을 쥐잡듯하는 경찰국가가 등장했다. 왕으로 등극한 정치가가 사람의 숨통을 조여오니, 사람들은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를 비더마이어 시대라고 부른다. 비더마이어는 ‘멍청한 마이어 아저씨’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들은 방으로 숨어들어서 피아노를 한 대 놓고 가수를 초청하여 이런 애절한 가곡을 들었다. 살롱 문화가 유행할 무렵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잡혀가는 세상인데. 애인을 그리워하는 노래 같지만 시대를 비관하는 현실 풍자가 숨어있다.     31세로 애잔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슈베르트는 혼신을 다하여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슈베르트라는 이름에 무덤덤했던 나는 책과 음악에 빠져들었다. 200년 전 천재 음악가와 만나서 대화라도 나눈 듯하다. 지금 동시대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 데이비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가 그린 ‘숲속의 추격병’이란 그림이 있다. 황량한 산을 고독한 남자가 떠도는 그림이다. 겨울 나그네에게는 봄이 올 것 같지 않지만, 나는 내친김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러 가야겠다. 봄의 기운이 외출을 부추긴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나그네 겨울 나그네 천재 음악가 동시대 낭만주의

2025.03.17. 20:54

[살며 생각하며] 7세 고시 (1)

7세 고시라니! 태어나 처음 들어본다. 유튜브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겨, 어젯밤 무심코 보게 된 KBS ‘추적 60분’에서 다룬 이 ‘7세 고시’라는 말에, 잠이 오기는커녕 확 달아나 버렸다. 7세 고시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 만 5, 6세 아이들이 일명 빅3, 빅10으로 불리는 유명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라고 한다.     내 눈에는 마냥 아가들일 뿐이었다. 이들의 대치동 학원 입학시험 현장, 학원 입시라는 말도 내게는 사실 낯설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며 화이팅을 외치는 엄마, 울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아이. 이 어린아이들이15분 만에 서론 본론 결론이 좌악 들어있는 영어 에세이를 쓴다고?     일단 영어 단어 1800개를 외우도록 달달 돌리시구요, 유명 영어학원 입시 대비 ‘새끼학원’ 영어 강사가 상담 온 부모에게 조언하는 말이다. 아니 애들이 무슨 청소기야 믹서기야 물레방아야, 돌리긴 뭘 돌려! 심하게 거스르는 말이다. 이 강사, 이어서 5문단 에세이는 20분 이내에 ‘외워 쓰게’ 해야 한다고태연히 조언한다.   평생 미국 고등학교 ESL 교사였던 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의 학생들에게 감히 이런 무리한 기대를 해본 적 없다.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영재 중의 영재이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만 5, 6세 한국 아이들이, 미국 교과서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로 능력을 평가받는다니. 이 학원들의 시험을 분석해본 중등 교사들은 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보는 시험이 한국 중3, 고1 모의고사 정도 수준으로 보인다며, ‘지적 학대’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주 몰랐던 한국의 사교육 현장은 아니지만, 출산율이 저하되고 학생 수가 감소하는 동안, 이 현장은 더욱 아이들에게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치동이나 부유층 자녀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년 한국 방문 시 다음 책을 구상하면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지금 중학생 아들을 기르며 영어교실을 운영하는 조카로부터 들은 말이다. 전국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고, 친구들이 다 학원에 가 있으니, 친구와 놀려면 학원에 다녀야 한단다. 도대체 그 ‘선행’ 학습이 뭔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느라 엄마들은 알바까지 뛴다고 한다.     이어서 보이는, ‘2018년생’ 명문 영어학원생 모집 광고! 앗, 손녀도 2018년생이다. 얼마 전 학교에서,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나랑 게임을 하고 놀아주기 때문이다, 이런 포스터를 만들어 온 손녀의 6세 인생에서는, 독차지하고 싶은 할머니를 두고 동생 두 명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가혹한 현실이다. 락클라이밍, 실내축구, 방과 후 요리교실, K-POP 댄스 교실, 친구들 생일파티와 플레이데이트로 아주 아주 바쁘신 나의 손녀와 똑같은 나이 한국 어린이들, 이들의 현실은 7세 고시라니!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제 ‘4세 고시’라는 말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모국어가 겨우 발달하는 시기인 2살, 3살 아이들까지도 유명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학원과 영어 과외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출산율, 낮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만을 가중하는 이런 초 경쟁적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런 현상들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고시 명문 영어학원생 유명 영어학원 대치동 학원

2025.02.19. 21:37

[살며 생각하며] 성스러운 영역

아들이 대학으로 떠난 후였으니, 결혼한 지 20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를 위해 밥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 무렵 몸이 안 좋았으니, 먹거리에 대한 아쉬움은 더 했다. 삼시 세끼 먹는 일에 무척 서툴렀고 식당 근처만 지나면 항상 배가 고팠다. 끼니때만 되면 전전긍긍하던 나는 요리반을 찾아갔다. 응접실을 다이닝룸으로 꾸민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젊은 여자들이 가득 있었다. 어린 자녀를 둘 셋씩 두었다는 엄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그중 한 여자가 물었다. “누구를 위해 요리하시나요?” 순간 말이 막혔지만, 일부러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요? 아 저는 절 위해서 요리해요.” 지금 생각해도 그 대답은 절묘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에 근거한 대답이었다. 남편은 어떤 음식인가가 중요하지 않았다. 먹거리에 불만을 가지는 쪽은 항상 나였다. 뱃속의 헛헛함은 정신적 허함과도 서로 통하는지, 나는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 무렵, 아이에게 해방이 된 내 또래의 지인들은 대부분 골프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도 당연히 그 대열에 끼었다. 레슨 받고 필드 나가고, 남들이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이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스틱을 휘두르며 공이 날아간 쪽으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살짝 허리를 비틀고 싶었다. 그 뒷모습이 여간 예쁘지 않았다. 어딘지 있어 보이고 생을 즐기는 느낌, 그런데 막상 레슨을 시작하니 끝도 없는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고, 뭐가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오리무중을 헤매는 듯한 갑갑함이 밀려왔다. 주말엔 쫓아오는 뒷사람의 압박감을 피해서 멀리 떨어진 골프장을 찾아갔다. 자그만 공을 죽자고 뒤따르는 내 노력은 허망했지만, 나는 즐거운 척했다. 사실을 말하면 전혀 재미있지도 즐겁지도, 남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데, 나는 기분이 망쳐서 돌아왔다. 지인이 친 볼에 맞아서 몇 개월 동안 목발을 짚는 일도 벌어졌다. 무리하게 스윙하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그제야 알았다. 남들을 뒤쫓다가 벼랑에서 미끄러졌음을. 나는 골프를 포기했다.     남들이 부엌을 탈출하는 시기에 나는 거꾸로 부엌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요리 같은 것은 몇 달 정도 배우다가 그만두는 것이라고, 무슨 요리를 재수, 삼수까지 하냐고 놀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하루 3번, 일주일에 20번 반복해야 하는 일이 이제는 괴롭지 않다. 부엌은 아무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의 왕국이다. 여기에서 나는 절대 권력을 가진다. 한 줌도 안 되는 자그만 공을 숭배하는 대신에, 나는 모든 식재료 위에 군림한다. 물론 나는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나가서 사 먹으면 되는데 힘들게 왜 하냐고 지인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을 때는 과감한 수정을 해야 한다.     남을 따라 하지 말라는 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서 하라고 2000년 전에 세네카 철학자가 말했다. 세네카는 폭군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였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파는 어린 네로의 스승으로 당대 인품과 지성이 넘치는 세네카를 모셔 왔다. 네로의 사이코패스적 기질은 세네카가 스승으로 있는 8년 동안은 억눌렀지만, 네로가 자라자, 그 수위를 넘어섰다. 세네카는 스승을 사임하고 물러났다. 친어머니를 죽인 네로는 세네카에게도 자결을 명령했다. 세네카의 의연한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비유되기도 한다. 세네카 현인은 인간이란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결정되며, 티끌 하나도 변하게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운명을 바꾸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남들이 하는 것을 무조건 좇아서 하지 않을 때, 자신의 명징한 이성으로 사고할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현인의 철학을 나는 마음대로 부엌으로 끌어들여 본다.     오래전, 먹거리에 대한 나의 무능함에 불만이 있었다. 물리적 헛헛함은 정신적 영역으로 파고들어서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하루 세 번의 의식을 당당하게 치러 낸다. 먹거리를 깔보지 말라. 아무거나 먹지도 말라. 음식은 생명과 직결되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거리에서 풍기는 유혹적인 냄새에 휘둘리지 않는다. 식당 옆을 담담하게 지나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영역 정신적 영역 오래전 먹거리 폭군 네로

2025.02.13. 18:04

[살며 생각하며] ‘상황 10, 태도 90’

“The longer I live, the more I realize the impact of attitude on life.  Attitude, to m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It is more important than the past, than education, than money, than circumstances, than failures, than successes, than what other people think, say or do.  It is more important than appearance, giftedness or skill. It will make or break a company… a church… a home.”     “살수록 태도라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게 된다. 태도는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과거 교육, 돈, 환경, 성공, 실패 혹은 누가 뭐라고 말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태도이다. 태도는 외모, 재능,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 한 회사, 교회, 가정을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도 바로 태도이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 ‘Attitude’라는 글이다.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태도의 결정권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바꿀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도 없고, 불가항력적인 일들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우리에게 남겨진 하나의 줄(one string)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삶의 단지 10%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머지 90%는 거기에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이다.…그리고 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I am convinced that life is 10% what happens to me and 90% how I react to it.  And so it is with you… we are in charge of our Attitudes.”   학교에 있을 때 좋은 구절들(Food for Thoughts)을 자주 소개하며, 영어에 도움 되니 외우라고 엑스트라 점수로 유혹하곤 했다. 아이들은 점수를 받겠다고 열심히 외웠다. 이건 꽤 길어 큰 점수로 유혹해야 했다. 지금 내 북클럽 회원님들에게도 늘 강추하는 글이다.     심리치료사가 된 지 십 년이다. 꽤 많은 내담자를 만났다. 살면서, 테러 같은 일을 만난 사람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로 힘들어진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겨우 삶의 10%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말은 그래서 참 위로가 된다. 힘들어도 최선의 ‘태도’로 살다 보면 그 태도가 나머지 90%를 결정지어 준다는 것이 그래서 참 감사하다. 불행을 10%로 여기고, 희망과 긍정의 태도로 90%를 채우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어서, 그래도 인생은 참 살만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겨우 10%, 나머지 90%는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는 사실은, 인생에 툭하면 잘 삐지고 삐딱해지는 나를 늘 바로잡아주는 나침반이다. 전 세계적으로,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 시작된 2025년, 상황은 10%, 나의 태도가  90%라는 나침반을 따라 모두 화이팅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상황 태도 our attitudes 엑스트라 점수 attitude on

2025.01.22. 21:35

[살며 생각하며] 친절은 불편을 동반한다

동네 헬스클럽에 사람이 붐빈다. 매서운 아침 추위에도 운동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수영장 줌바 클래스가 시작되는지, 라커룸에 덩치가 커다란 중년 여자들이 가득하다. 락커 룸은 만남의 장소다. ‘딸 식구들과 할리데이 같이 지냈어.’ ‘크루즈 다녀왔어.’ ‘체크 업 갔더니 닥터가 어쩌꾸저저꾸….’   수영장 벽에 그려진 빨간 문어가 나를 반긴다. 그 옆에 그려진 연두색 거북이가 웃고 있다. 나는 배영을 좋아한다. 배영은 누워서 가므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딴생각하고 마냥 가다가 레인 끝에 있는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꽝 부딪쳤다. 얼마나 아팠는지 머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끝나기 2m 전에 공중에 쳐진 깃발을 주시한다. 수십 개의 자잘한 깃발이 한 줄로 늘어져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두 팔을 머리 뒤로 뻗치고 천천히 들어간다. 두 손에 벽이 닿는 순간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지난해 어느 날, 배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깃발을 지나고 끝까지 거의 왔다. 곧 뒤로 뻗친 팔에 단단한 콘크리트가 만져지겠지. 그런데 갑자기 흐물거리는 것이 내 머리에 닿았다. 나는 놀라서 허우적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똑바로 서서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내 머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오시는 분이다.     “네가 머리 부딪힐까 봐 걱정돼서….” 그분이 말했다. 나는 팔을 뒤로 뻗치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며칠 후, 노인은 또 벽에 손을 대고 계셨다. 나는 다시 한번 중심을 잃었고, 의아함이 밀려왔다. 분명히 괜찮다고 말했는데… 노인들은 항상 걱정이 많지 않나. 내가 말한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자.     오늘은 연휴에 찐 살을 빼기 위해서 그런지 레인마다 두 사람이 들어가 있다. 물개처럼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 레인의 폭은 2m 정도다. 원래 혼자 하면 제일 좋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한 사람이 1m 정도 차지하면 두 사람은 같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이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돌아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머뭇거리며 잠시 서 있었다. 누가 나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아침 찬 바람에 나왔는데, 돌아가기에는 억울하다. 답답한 마음으로 사방으로 튀는 물거품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물속에 있던 어떤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기 레인에 들어오겠냐고 묻는다. 세 사람이라서 타원형으로 돌아야 한다고 한다. 세 명이 한 레인에서 도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특히 나는 천천히 하므로, 뒤에 오는 사람을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얼른 답했다. 고맙다고 들어가겠다고.     두 여자와 거리를 살피면서 레인을 돌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들어오라고 했을까? 절대로 안 했을 것 같다. 먼저 차지한 것에 만족하면서 멋쩍게 서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내 수영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날이 매우 찼다. 수영장 물은 더욱 따뜻했다. 나는 먼저 보드를 잡고 몸을 풀었다. 자유형이 제일 숨이 차다. 몇 바퀴를 돌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남자가 관람석에 앉아서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모른 척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제 받은 친절이 생각났다. 감격하면서 감사했던 것도….   “제가 5분 후에 나가니 이 레인을 쓰세요.” 마음속 갈등과는 다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젊은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의 새해 희망은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친절도 자꾸 연습하면 몸에 밴 습관처럼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내 머리를 잡아주던 배려심 많던 할아버지가 요즘 보이지 않는다. 자녀 집에 방문 중인가?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노인 홈에라도 들어가셨나? 뜬금없이 그분이 생각났다. 나는 라커룸으로 향하면서 수영장을 둘러보았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친절 불편 마음속 갈등 중년 여자들 연두색 거북이

2025.01.14. 20:24

[살며 생각하며] 럭셔리한 2025

“The Real Luxuries in Life: time, health, a quiet mind, slow mornings, ability to travel, rest without guilt, a good night’s sleep, calm and “boring” days, meaningful conversations, home-cooked meals, people you love, people who love you back”   성탄과 새해를 맞으며 연락 없던 분들까지 이런저런 인사를 전해온다. 올해는 며칠 전 발견한 이 리스트로 2025년 새해 인사를 대신했다. “삶의 진정한 럭셔리(호사스러움): 시간, 건강, 고요한 마음, 여유로운 아침들, 여행할 능력, 죄책감 없는 휴식, 숙면의 밤, 조용하고 ‘지루한’ 날들, 의미 있는 대화들, 집밥,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우리 삶을 풍요롭고 럭셔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진정 이런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리스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시간’, 평범한 듯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제한된 시간 중 나를 위한, 나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일들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럭셔리 맞다. 또 이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건강’도 당연한 것이 아님을 우린 너무 잘 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주어지지 않는 건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 건강, 확실한 럭셔리 맞다.     ‘고요한 마음’, 이런 럭셔리가 또 있을까. 늘 불안정하고 괴롭고 소란한 세상에서, 고요한 마음이 나를 찾아와준다면 진정한 축복일 것이다. 매일 아침 던킨드라이브스루에서 픽업한 커피와 빵을 들고 달려 들어가7시 반에 교실 문을 열던 내게, 은퇴가 가져다준 가장 감사한 선물은 ‘여유로운 아침’이다. 지금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은퇴 혹은 전업의 시기는 온다. 그리고 여유로운 아침이라는 럭셔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때론, 홀로나 함께, 길거나 짧게, 멀거나 가까운 곳을 ‘여행할 능력’, 그 ‘죄책감 없는 휴식’의 시간, 수없이 뒤척이지 않아도 되는 ‘숙면의 밤’, 심심할 정도로 별일 없는 ‘조용하고 지루한 날들’도 우리 삶을 완전 럭셔리하게 만들어준다.     매주 좋은 책을 읽고 나누는 나의 북클럽은 회원들과 요즘 드문 ‘의미 있는 대화’라는 럭셔리를 선물해주는 소중한 플랫폼이 되었다. 그리고 완전 초딩 식단의 나를 럭셔리한 ‘집밥’으로 초대해주는 분들이 너무 감사하다. 나도 나를 위한 럭셔리 집밥을 올해는 좀 더 누리리라 다짐한다. 마지막,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우리 삶의 럭셔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다. 이거야말로 초호화 스펙타큘러 럭셔리가 아닐 수 없다.   놀랍게도 이 럭셔리 리스트에 ‘돈’은 없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겠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행복감과 위에 나오는 럭셔리한 삶이기 때문이다.     올 한해도 아침마다 우리에게 배달될 365개의 기적 같은 선물, 매일 하나씩 열어 럭셔리하게 살고 싶다. 계속되는 힘든 소식들로 세상은 참 어지럽고 피폐하다. 우리 모두의 2025년이 이런 럭셔리들로 가득 채워졌으면 참 좋겠다. ([email protected])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럭셔리 럭셔리 리스트 시간 건강 love people

2025.01.08. 21:53

[살며 생각하며] 아버지의 틀니와 보돌보돌

  아버지 생전에 내게 한 마지막 부탁은 틀니를 빼서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틀니를 끼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환하고 고른 치열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다시 고기를 뜯어 먹을 수 있어 좋구나! 하던 장면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틀니는 어떻게 빼는 건가? 잡아빼야 하나 들어올려야 하나 밀어야 하나 당겨야 하나. 어디부터가 가짜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본인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빼내는 데는 성공했는데, 손안에 든 틀니의 촉감과 따뜻함이 무척 낯설고 기이했다. 그에 반해 아버지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한 손에는 틀니를 쥐고 남은 한 손으로 아버지 손을 잡은 채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장례 절차나 당부의 말 같은 죽음 이후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 얘기 뭣 하러 하느냐 타박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들으면 좋아할 만한 조카들 근황이나 자랑거리를 들려주었다. 내가 가져다 입은 아버지 코트의 멋짐을 얘기했다. 모두들 근사하다 칭찬하더라고. 어디서 이리 좋은 옷을 사 입었느냐 묻기에 아버지 옷이라 말해주었다고. 그 말에 아버지는 참 잘했다, 참 좋다, 뭐 더 갖다 입을 거 없나 잘 찾아봐라, 하며 웃었다. 나는 기꺼이 그러마 했다.   아버지의 그 멋진 코트는, 어머니의 말을 빌자면, 십여 년 전 종로의 꽤 권위 있는 양복점에서 맞춘 것으로, 차르르 흐르는 윤기에 고급짐이 요즘 그 어떤 비싼 옷도 따라가기 힘든, 캐시미어 중에서도 최고급 캐시미어 원단을 하나하나 손바느질로 공들여 만들었으나, 정작 입고 나갈 데가 없어 두어 번 걸쳐 보고는 옷장에 고이 모셔두게 된 옷이었다. 아까우니 네가 손 좀 봐서 입고 다닐 테냐 묻기에 덥석 받았다. 딱히 고칠 것도 없이 어깨에 든 뽕만 빼고 입었는데, 마침 빅 대디 오버사이즈 블레이저가 유행이라, 얼결에 나는 유행에 꽤 민감한 패셔니스트가 되었다.   틀니를 깨끗이 씻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버지의 귀에 대고 내일은 당신 좋아하는 동그랑땡을 해 올 테니 틀니 끼고 먹자 말했다. 하지만 틀니는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틀니였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기계장치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는 음식섭취를 거부했다. 먹지 않는 것 말고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했다.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울며불며 매달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입을 벌리려 하지 않았다.   달달한 병어조림 먹고 싶지 않아? 자작자작 황석어 찌개는? 고추장찌개 짜장면 한우불고기버거 육사시미. 그중에 뭐 하나라도 식욕을 자극해주길 바라며. 단팥빵 소보루빵 슈크림빵.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그랑땡 부쳐올까? 고기 많이 안 넣고 두부 많이 넣고 보드랍게 부쳐서?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였다. 동그랑땡? 응 아버지 좋아하잖어, 보들보들한 동그랑땡. 나는 한 번 더 밀어붙였다. 보돌보돌? 응 보들보들. 그래 보돌보돌 부쳐와 봐라.   보돌보돌한 동그랑땡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진 채소와 두부의 물기를 설렁설렁 짜야 하는데, 반죽이 헐렁해서 모양 잡기가 수월하지는 않다. 계란물을 잘 붙게 한답시고 겉면에 밀가루를 잔뜩 묻혔다가는 딱딱해지기 십상이다. 동그랑땡을 부치다가 문득, 이제 더 이상 아버지 계란은 못 먹겠구나 생각했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벌레들을 잡아먹고 살던 닭들. 한 알 두 알 찾아내 맛보던 고소한 노른자 맛. 아이쿠야, 죽기를 작정한 아버지를 두고 계란 맛 타령이라니.   보들보들 동그랑땡은 아버지 자의로 그리고 자력으로 먹은 마지막 음식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뭐 좋은 거 없나 잘 살펴보라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패딩 점퍼와 돋보기를 챙겼다. 각진 형태의 금테 안경은 취향에 맞지는 않았지만, 도수가 놀랍게도 정확히 일치했다. 아버지와 내 시력이 같았다니. 옷 사이즈 역시 원래 내 것인 양 딱 맞았다. 채취 과정을 알게 된 후로 솜털이니 깃털이니 거위니 오리니 하는 패딩을 멀리하던 터에, 구입한 게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니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친환경적인 소비가 아니더냐, 얼씨구나 받아 입었다. 계란 한 알을 사더라도 난각번호와 농장 상태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 아버지의 닭 알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인데도, 동물복지를 위해 올바른 소비를 했다 여기는 것처럼.   나는 지금 아버지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버지 옷을 물려 입고 우쭐해 하며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틀니 생각이 났고, 그 틀니는 어디에 있나 궁금해하다가 내 손에 닿던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죽고자 앙다문의 입술의 안간힘과 보돌보돌 동그랑땡 소리에 입맛을 다시던 식욕 사이에서. 우리가 먹고 살아간다는 건 결국 다른 존재의 죽음을 밟고 서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나의 애도는 진정 무엇이었나. 천운영 / 소설가살며 생각하며 아버지 틀니 아버지 돋보기 아버지 코트 아버지 유언

2025.01.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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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지세요. 공정하게 플레이하세요. 사람을 때리지 마십시오.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다시 놓아두세요. 자신이 어지른 것은 자신이 치우세요. 내것이 아닌 것은 가져 가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으십시오. 화장실에서는 반드시 물을 내리세요. 따뜻한 쿠키와 차가운 우유가 몸에 좋습니다. 균형 잡힌 삶을 살아보세요. 매일 배우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일하세요.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세요. 밖에 나갈 때에는 차를 조심하고, 손을 잡고, 같이 다녀야 합니다. 경이로운 마음을 잃지 마세요. 스티로폼 컵에 담긴 작은 씨앗을 기억하세요. 뿌리가 내려가고 식물이 자라는데, 그 방법이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습니다. 금붕어, 햄스터, 흰쥐, 심지어 스티로폼 컵에 담긴 작은 씨앗까지 모두 죽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다음 Dick-and-Jane 책과 당신이 배운 첫 번째 단어, 즉 가장 큰 단어인 LOOK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황금률과 사랑과 기본적인 위생. 생태학, 정치, 평등, 건전한 삶 등.     전 세계가 매일 오후 3시쯤 쿠키와 우유를 먹은 다음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잔다면 얼마나 더 나은 세상이 될까요. 또는 모든 정부가 항상 물건을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고, 엉망진창을 정리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다면 말이죠.     그리고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사실인 것은, 세상에 나갈 때는 손을 잡고 함께 뭉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목사였던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어느 유치원 입학식에서 한 연설이다. 이 단순해 보이지만 중요한 삶의 기본이 되는 원리들에 대한 이 연설로부터 세계적 베스트셀러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가 탄생했다. 이 책은 1988년 출간 이래 34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였고, 거의 2년간 베스트셀러 리스트였다. 지금까지 103개국, 31개 언어로 번역되어 1700만부나 팔리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삶의 원칙들을 담은 작은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이들이 우리가 살면서 계속 실천하고 다시 배워야하는 아주 중요한 원칙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눌 줄 알고, 페어플레이를 하고,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자신이 해결하고, 미안할 때는 사과하는 것, 이것은 다섯 살 유치원생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항상 해야 하는 일이니까. 우리 모두는 더 자주 손을 잡아야 하고, 우리도 언젠가 죽는 것을 기억하고, 매일 배우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일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전 세계가 매일 오후 3시쯤 쿠키와 우유를 먹은 다음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잔다면, 또는 모든 정부가 항상 물건을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고 엉망진창을 정리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유치원에서 배운대로 살아가는 2025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유치원 유치원 입학식 세계적 베스트셀러 기본 정책

2024.12.25. 17:20

[살며 생각하며] 장막을 걷어라, 행복의 나라로

곱슬머리 간호사가 생년월일을 묻는다. 어느 쪽 눈인지 물으면서 왼쪽 눈 위에 테이프를 붙인다. 눈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의사의 실수로 환자의 성한 쪽 신장을 떼어냈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혈압을 재니 평소보다 많이 올라가 있다.   “이 수술을 왜 하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나는 전에 한 백내장 수술이 잘못되었고, 그로 인해 망막에 이상이 왔다고 답했다.     “처음 수술을 누가 했어요? 닥터 A가요?” “아뇨, 다른 닥터였어요.” “닥터 A는 수술 잘해요. 의사 집안이에요. 아버지도 여동생도 안과 의사예요.”     수술 5분 전,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간호사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담요를 어깨에 감싼 채 수술실로 들어갔다. 키가 훤칠한 닥터 A가 다가왔다. 빨리 수술을 받게 돼서 운이 좋다고 말한다. 얼굴에 커버가 쓰이고 눈 하나만 노출된 듯했다. 드디어 정신이 몽롱해 온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용어를 해독하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P5, HPT 24 and 25 등등.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흠’하는 닥터의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지? 뭐가 어려움에 부닥쳤나? 다시 의사의 톤이 빨라졌다. 어쩌고저쩌고… 나는 다시 의식 밑으로 떨어졌다.     “OK. It‘s all done!” 닥터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다. 한 20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수술이 꼬박 한 시간 걸렸다고 말해준다.     발단은 몇 년 전 백내장 수술로 거슬러 간다. 수술하던 중에 갈아 끼운 렌즈 뒤 표면에 점액질이 달라붙었다. 거기다가 렌즈가 눈동자 살짝 옆으로 비켜서 박혔다. 시간이 지나자 말라붙은 점액질이 눈에 장막을 드리웠다. 빗나가서 박힌 렌즈는 세상을 이중으로 보이게 했다. 마치 물속에서 사물을 보는 듯이 눈이 어른거렸다. 나는 내 눈이 답답함을 감지 못하도록 더 어둡게 만들었다. 항상 선글라스를 꼈다. 어둠에 익숙한 두더지 같은 눈을 가지고 다른 쪽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무엇을 응시하는 것이 피곤했다. 흐린 시야에 갇힌 나는 기분이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외롭고 믿지 못할 세상이었다. 닥터 A는 이런 눈으로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체크 업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말했다. 눈이 환해지니 마음도 환해졌다. 곱슬머리 간호사의 친절한 말 한마디는 수술받는 동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실력 있는’ 닥터라는 말에 혈압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 세상은 분명 엉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책임감을 가지고 소신껏 일하는 닥터 A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간다고 믿고 싶다. 그들의 진실하고 선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온다. 나도 따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길쭉한 버터 넛 스쿼시를 수술 전에 사 두었다. 노란 주홍빛이 감도는 호박 수프가 눈에 좋을 것 같아서다. 당근, 셀러리 등 채소를 듬뿍 넣고 넉넉하게 끓였다.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냄비 가득 찬 수프를 보고 있자니, 앞집 젊은 엄마가 생각났다. 최근에 아이가 아파서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 집 문 앞에 놓고 나오는데, 소파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강아지가 신나게 꼬리를 흔든다.     나의 흐릿했던 세상에 장막이 걷혔다. 이중으로 보이던 나무도 소파도 깨끗한 단선이 되었다. 나는 소경이 눈을 뜬 듯 행복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12월의 끝자락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장막 행복 백내장 수술 곱슬머리 간호사 닥터 a가요

2024.12.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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