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처음 펼치면, 바로 잘 읽어내지 못한다. 무슨 책이 이래 하고 속으로 불만이 생긴다. 길 가다 낯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등장인물을 쳐다본다. 나의 마음이 닫혀 있으니, 인물이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의 행동도 무심하게 지나친다. 책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다는 생각만 한다.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다시 펼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냉랭했던 인물들이 조금씩 친숙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구시렁거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낯을 익혔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책을 펴니까, 그제야 속내를 조금씩 보여준다. 책은 도도하고 잘난 척하는 친구 같다.
이번 여름에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을 여니 왜 그렇게 사설이 많은지, 영국 시골의 일상, 언쇼 가문의 하인들의 말싸움 등등, 지루한 묘사가 가득했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책을 끝내고 다시 첫 장을 펴들었다.
석고상 같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그들이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책장이 얇아질수록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으며 ‘너는 나의 영혼이야’라고 고백하는 페이지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감흥은커녕 ‘이게 뭐, 별론데…’ 하며 공감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읽을 때는 사랑의 행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청춘의 나이가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불같은 사랑은 단명하며, 사랑은 집착이 아닌 것을 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알던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첫 장에 록우드라는 런던 신사가 등장한다. 이런 인물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록우드 씨는 복잡한 사교계를 떠나서 한적한 시골에 쉬고 싶어서 내려온다. 지방에 한 고택을 빌린 록우드 씨는 집주인 히스클리프를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18살의 캐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이런 미모의 여성이 어쩌다가 무뚝뚝하고 나이든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풍광이 사나운 지방의 폭설로 감기에 걸린 록우드 씨는 침대에서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에 하녀 넬리가 등장한다. 그는 캐시에 대해서 은근히 물어본다. 캐시가 캐서린의 딸이면서 히스클리프의 며느리라고 한다. 이상한 막장 같은 관계에 호기심이 생긴 그는 두 집안에 얽힌 내력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본다. 이번에 읽으면서 록우드와 넬리라는 두 명의 화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새롭게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다. 바로 하녀 넬리다. 넬리는 일찍 죽는, 집안의 심약한 ‘아씨’들을 대신해서 아이를 키우는 모성적 존재로 등장한다. 넬리의 어머니는 언쇼 집안의 하녀였다. 넬리는 주인집 아이들과 같이 자라면서 교육도 받은 듯하다. 서가에 있는 책을 탐독하고 하느님에 대한 열정도 넘친다. 모양만 내는 의존적인 ‘아씨’들과는 달리 독립적이라서, 주인에게 바른말도 서슴지 않는 당찬 태도는 봉건 시대가 끝나가는 징조를 보이기도 했다.
불볕더위에 서늘한 구석을 찾아다니며 다시 읽은 고전은 내가 알던 그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남녀의 사랑에만 관심이 가더니, 이번에는 소설의 화자인 록우드와 넬리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내가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사가 나 자신을 벗어나 가족 관계, 인간관계로 넓혀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