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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평범의 미학

New York

2026.02.19 20:34 2026.02.1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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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의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과거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배우들이 반가웠다. 기업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던 시대,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를 가능케 한 시절의 이야기다. 시장에서 떡 장사부터 시작하여 중소기업을 이룬 창업주 할머니 역으로 배우 반효정 씨가 나온다. 할머니의 재력으로 살아온 철없는 며느리와 손주들, 그들에게 회사를 넘기지 않고 전체 사원에게 주식을 고루 배당한다는 내용이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현대 기업의 경쟁적인 시각에서 보면 거의 비현실적인 서사였다. SNS가 등장하지 않고 신박한 테크놀로지도 없다. 발로 뛰면서 영업하고, 남녀는 밀당하고 사랑한다. 익숙한 내용 전개에 나도 모르게 근육이 풀리면서 편안해졌다.  
 
옛날 드라마를 보고 나니 과거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애틋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이런 레트로 현상은 문학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몇십 년 전에 나온 한 소설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고 한다.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가 쓴 ‘스토너’라는 소설은 출판 당시인 1960년대는 인기가 없어서 절판되었다. 작가는 이 소설이 나중에 성공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예언 그대로 ‘스토너’는 돌연 2010년대에 부활했다. 작가도 죽고 없는데, 누가 마케팅을 한 것도 아닌데,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소설이 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는 미주리 대학의 영문과에서 제일 오래된 교수다. 새로 온 학과장은 스토너가 맡아왔던 대학원 세미나 대신에 초보적인 영어 과목을 가르치라고 한다. 스토너는 젊은 학과장과 맞서지 않고 학생들의 논문 지도와 수업에만 전념한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불행했다. 농부 집안의 스토너와 은행장 딸인 아내와는 첫 만남에서 사랑을 느끼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도 돌보지 않는다. 스토너는 아기 침대를 서재로 옮겨 놓고 학교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 부녀 사이가 좋아지자, 아내는 이를 질투한다. 이처럼 아내는 모든 일상에서 남편과 어긋나게 행동하지만,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고립되어 침묵으로 참아낸다. 소설은 이렇다고 할 클라이맥스도 없다. 우리 대부분의 삶처럼 시원한 해결도 없고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그는 조교수에서 은퇴를 종용받고, 암으로 쓸쓸히 죽어간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침묵하면서 오히려 내면은 단단해졌다. 동료와 경쟁하지 않고, 아내와 이혼하지 않고, 연구에 파묻혀서 살았다.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자신이 교수 시절, 출판한 두 권의 책을 손에 잡는다. 책장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찌릇찌릇하게 느껴졌다. 대단한 학문적 성취도 없었고 가정적으로 불운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마지막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내가 20년 전 드라마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젊은이들도 이 소설을 읽고 위로받는 것일까? 성공 신화, SNS, 인공지능이 위협하는 현실에서 젊은이들은 스토너가 실패하고 침묵하는 모습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이 소리소문없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힘겹지만 충실하게 살아간다. 평범한 나의 일상, 그것이 곧 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삶은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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