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조이며 손꼽아 기다리는 즐거운 날이 있는가 하면, 듣거나 말하는 것은 물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아 가슴속 깊이 숨겨두는 구슬픈 날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머니 날’은 누구에겐 온 가족이 기다리는 즐거운 날이지만, 다른 누구에겐 마음이 찢어질 듯 아린 슬픔의 날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내 마음은 후자에 더 가깝다.
어느덧 내 나이도 9학년 2반(92세)이 됐지만 여전히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조국에 어머니와 가족을 남겨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장장 70년이란 세월을 이 땅에 살면서 어머니를 한번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 마음 한구석에 한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전쟁으로 모든 국민이 허덕이는 판국에 어찌 우리가 은수저로 호식할 수가 있겠느냐며 모든 가족의 은수저를 팔아 내 유학비용을 마련해 주셨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오른 만큼 훌륭한 인재가 되어 돌아와 조국 발전에 이바지하라고 당부하신 장엄한 교육자셨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나 자신을 늘 책망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은수저에 새겨진 어머님의 교훈은 평생의 가치관이 되었고, 소신과 철학이 됐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가족이란 소중한 인생 철학을 주신 어머님의 별세를 지켜본 것도 어언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내 생일이 되면 혹시라도 어머님이 보내신 생일카드가 있지 않을까 우편함에 슬쩍 손을 넣어보곤 한다. 어머님이 보내신 생일카드가 있을 리 없지만 부끄럽게도 서글픈 마음에 돌아서 눈물을 훔친다. “생일카드 기다렸어, 엄마”하며.
아무리 좋은 생일선물을 받은 들 엄마의 카드 한장에 비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내 아들아, 굶지 않고 잘 있었느냐. 오늘은 네 생일이구나…”라는 문구가 담긴 엄마의 카드는 내게 가장 소중한 생일선물이었다.
반세기 동안 매년 보내주신 그 사랑의 말씀은 내 삶의 큰 부분이 되었다. 내 몸이 흙으로 돌아가면 그 위에 만인을 위한 ‘사랑 길’이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다.
고국 땅에 아버님과 함께 안장되신 어머님을 그리며 공원을 산책하다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을 만났다. 아들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는 콘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불현듯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엄마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아이스케키’ 상점마다 들렀다. 아이스케키를 실컷 먹고 싶어 엄마 앞에서 재롱부리던 그 순간이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와줬으면 좋으련만….
“엄마,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이 불효자는 ‘잊어버린 30년’을 부르며 오지 않는 ‘엄마의 생일카드’를 늘 마음속으로 받아본답니다. 엄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