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닛(Hamnet) 매기 오파렐 소설 ‘햄닛’ 원작 제시 버클리 ‘올해 최고의 연기’ 남성 서사, 여성 시각으로 접근
‘햄닛’은 올해 발표된 영화 중 가장 가슴 아픈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Focus Features]
영화 제목 ‘햄닛(Hamnet)'은 당연히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Hamlet)'을 연상시킨다. 영국의 대문호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에 대한 매기 오파렐의 2020년 소설 '햄닛(Hamnet)'이 원작이다.
슬픔, 기억, 예술을 매개로 인간 존재를 탐구한 소설은 실제와 작가의 상상이 혼재되어 있다. 2011년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이며 그해 거의 모든 비평가상을 받았던 '노매드랜드'의 감독 클로이 자오가 원작자 오파렐과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했고 연출한 작품이다.
아들의 죽음을 다루지만 영화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깊은 슬픔 뒤에 찾아오는 여운은 감동과 깨달음이다. [Focus Features]
'햄닛’은 셰익스피어가 아들의 죽음을 '햄릿’이라는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켰다는 오랜 문학적 가설을 핵심축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슬픔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고 어떻게 견디고 무엇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자오 감독은 이 비극적 감정의 흐름을 “예술은 슬픔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인간의 마지막 언어”라는 메시지로 확장하며 상실과 창작의 관계를 섬세하게 시각화한다. 이러한 깊이와 야심 덕분에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강력한 작품상 후보 중 하나로 꾸준히 언급되어 왔다.
1580년대 영국 워릭셔. 시골 외곽 숲에서 허브를 채집하며 혼자 살아가는 아그네스.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그녀는 투명한 영혼을 지녔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말 없는 따뜻함과 오래된 지혜가 머물러 있다.
한편, 청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글재주가 뛰어나지만 집안에서 무시당하고 아버지의 몰락으로 책임을 떠안으며 답답하게 살아간다. 숲의 고요를 닮은 여인과 단어의 불꽃을 가슴에 품은 청년. 그들은 아직 서로를 만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두 사람의 삶을 은근히 묶으며 언젠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게 만들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서로의 고독과 열망을 알아보고 빠르게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하게 되고 딸 수잔나와 쌍둥이 남매 햄닛과 주디쓰를 낳는다. 그러나 윌리엄은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지역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점차 더 큰 세계로 향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제시 버클리는 영화 공개 이후 올해 최고의 연기라는 평을 받아왔다. 아그네스는 자연과 연결된 직관적이고 신비한 존재로 묘사된다. [Focus Features]
윌리엄은 극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런던으로 올라간다. 이때부터 아그네스는 농장과 아이들, 집안일을 홀로 책임진다. 극작가로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윌리엄과 아그네스는 떨어진 거리만큼 감정의 거리도 멀어져 간다.
전염병이 마을에 퍼지고 주디쓰가 먼저 전염된다. 가족 모두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병은 갑자기 햄닛에게 옮겨간다. 햄닛은 조용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아그네스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아들의 생명 앞에서 무너지고 윌리엄은 런던에서 달려오지만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짓눌린다.
아들의 죽음 이후 아그네스는 아들의 흔적을 놓지 못한다. 윌리엄 역시 자신에게 창작으로 도망치고 치유하려는 방식으로 슬픔을 다루려 하지만, 현실의 고통이 너무 생생해 어떤 문장도, 어떤 대사도 떠오르질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고통 속에서도 서로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함께 있어도 고독이 가득할 뿐이다.
아그네스는 윌리엄이 햄닛을 떠올리기조차 두려워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어느날 결심하고 런던으로 남편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남편이 쓰고 있는 새로운 극의 조각들을 엿보게 된다. 그 작품이 바로 '햄릿'이다.
아그네스는 남편의 글을 읽으며 윌리엄이 슬픔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작품을 통해 아들을 되살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그네스는 이제 남편에게 진심으로 다가간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그네스와 윌리엄은 서로의 상실을 이해하면서 다시 하나가 된다. 둘은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공유하며 재결합한다.
‘햄닛’은 올해 발표된 영화 중 가장 가슴 아픈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Focus Features]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햄릿'의 공연 장면이다. 객석에는 아그네스가 앉아 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아들 햄닛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공연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아들을 떠나 보낼 수 있게 되고, 남편의 예술이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햄닛의 어린 시절을 짧게 스쳐 지나가며 고요한 자연 풍경 속에서 끝이 난다.
‘햄닛’은 내밀한 감정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드라마다. 근세 영국의 한적한 일상을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자연 풍광으로 담아내며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시간을 통해 두 인물의 사랑이 어떻게 뿌리내리고 어떻게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이 초반부의 조용한 진행은 이후 찾아올 감정적 균열을 더욱 깊고 날카롭게 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술과 삶, 상실과 치유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더해진 역사적·문학적 무게감은 이 영화를 단순한 시대극의 범주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이름이나 16세기라는 배경을 장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대의 정서를 사용해 상실 이후에도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지를 더 깊은 층위에서 탐구한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아내가 단순한 '영감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예술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오 감독은 기존의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셰익스피어 서사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뒤집으며, 그 뒤편에서 예술가의 내면을 지탱하고 움직여온 여성의 존재를 전면에 끌어올린다. 이 시도는 이 영화의 정체성과 주제를 결정짓는 핵심적 선택이며 그 중심에는 아그네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가 있다.
영화는 아그네스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버클리는 영화 공개 이후 올해 최고의 연기라는 평을 받아왔다. 아그네스는 자연과 연결된 직관적이고 신비한 존재로 묘사된다. 대사가 많지 않은 캐릭터임에도 눈빛과 호흡만으로 감정의 층위를 표현한다. 그녀의 연기는 ‘자연과 하나인 인물’이라는 설정을 위해 몸의 긴장과 동작을 매우 절제한다.
이러한 정교한 연기 조율은 버클리가 왜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 부문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아그네스를 비극의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예술을 탄생시킨 존재로 확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버클리의 연기는 한 시대와 한 예술가의 세계를 재해석하는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