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며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화려한 여성 스타로 군림했던 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사진)가 지난 7일 오전 4시30분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200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자녀들과 함께 아주사 지역에서 거주해왔다. 평소 심장 질환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인은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로 전해졌다.
장례는 오는 13일 오전 11시 LA한국장의사에서 치러진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고인은 1990년대 초까지 스크린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수십 년간 ‘미(美)의 대명사’, ‘은막의 여왕’으로 불리며 대체불가한 존재감과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수놓았다.
자신이 제작까지 겸한 ‘명자 아끼꼬 쏘냐’(1992·이장호 감독)를 포함해 출연작은 700여 편에 달한다. 당시 충무로에서는 “모든 시나리오는 김지미를 거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고인은 덕성여고 2학년이던 시절, 명동 다방을 방문했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황혼열차’(1957)로 데뷔했다. 예명 ‘지미(芝美)’는 난초를 닮은 청초한 아름다움을 뜻한다.
‘별아 내 가슴에’(1958·홍성기)의 흥행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박종호), ‘장희빈’(1961·정창화)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19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활약했다.
고인은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영상자료원이 2017년 개최한 ‘매혹의 배우, 김지미 특별상영전’ 기자간담회에서 “60년간 어림잡아 70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700가지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닌데 요즘 들어 내 자신도 기특하다는 생각을 간혹 한다. 영원히 여러분 가슴 속에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계의 ‘여장부’로 통했던 고인은 제작자로서도 왕성히 활동했다. 1986년 영화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티켓’(1986·임권택),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장길수) 등 7편을 제작했다. 이 밖에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1995),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1998), 영화진흥위원회 위원(1999) 등을 역임하며 영화 행정 분야에서도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