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꼭 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 참 많다. 그런 꿈 중의 하나가 우리 코리아타운에도 ‘광화문글판’ 같은 것을 만들자는 시도였다.
한인타운의 잘 보이는 곳에 미주 시인의 아름다운 시 구절을 예술적으로 멋지게 써서 걸어놓아, 보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미주 한인 화가의 그림을 곁들이면 더 좋겠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그렇게 시를 생활 속으로 가져와 삶의 한 부분으로 정착시키면, 시인들도 좋고 한인타운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고 실천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분들을 여럿 만나 브리핑 비슷한 것도 했다. 그런데, 다 될 듯 될 듯하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돈이 꽤 드는 번거로운 일인데다가, 글판을 내걸 마땅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서울의 광화문글판처럼 걸어다니며 읽을 사람이 많은 환경도 아니었다.
글판의 시 읽느라고 머뭇거리다가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그런 낭패가 없을 터다.
더욱 서글픈 것은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누가 시 나부랭이를 읽을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현실이었다. 아무튼, 야무진 꿈을 이루지 못할 이유는 충분하고 남았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돼 올해로 35주년을 맞았다. 긴 세월 동안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문화의 창이자 시민들의 벗으로 자리 잡았다. 시가 삶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35주년을 기념하여 교보생명은 〈시민이 뽑은 최고의 광화문글판〉을 선정, 발표했다. 시민 2만2500명이 참여한 온라인 투표에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베스트 광화문글판’으로 선정되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시구가 담긴 광화문글판은 2009년 가을에 내걸려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받았다. ‘견디며 익어가는 인내와 회복의 메시지’가 시민의 일상에 다정한 위로로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나태주의 〈풀꽃〉, 문정희의 〈겨울 사랑〉, 정현종의 〈방문객〉 등이 큰 사랑을 받았고, 김규동의 〈해는 기울고〉, 유희경의 〈대화〉, 허형만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 이생진의 〈벌레 먹은 나뭇잎〉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혔다고 한다.
참고로, 광화문글판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 교보생명 사옥 외부에 내걸린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이다. 이곳은 하루 평균 통행객이 100만 명에 달하는 곳이다. 매년 계절마다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 한 글귀를 인용해 새롭게 꾸민다. 그동안 윤동주, 고은, 강은교, 정호승, 도종환, 김용택, 안도현, 공자, 헤르만 헤세 등 동서양의 현인과 시인의 작품이 인용됐다.
길에서 잠깐 읽고 지나가는 30자 남짓의 짧은 글이지만, 읽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구를 고르기 위해 시인, 소설가, 광고인, 언론인으로 구성된 ‘문안선정위원회’가 따로 운영되고, 대중의 감성도 고려하기 위해 교보생명 직원 투표를 거친다고 한다. 많은 품과 정성이 드는 일이다.
우리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같은 사업을 펼치기는 여러모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한인타운을 지나노라면 “아, 저기쯤에 멋진 시가 피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멋진 시가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은 ‘꿈꾸러기’의 이룰 수 없는 헛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