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다양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일본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일본을 넘어섰다고 우쭐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 친일파 논쟁, 문화재 반환처럼 겉으로 드러난 문제들 외에도 정신적 문화적 문제들이 대단히 많다. 광복 80년 사이에 일제가 남긴 쓰레기를 열심히 치웠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갈등이 잔뜩 남아 있다. 이런 문제들을 들여다보면, 8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정말 제대로 광복이 된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 지경이다. 정치나 사회, 외교적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능력은 없지만, 우리 정신에 깔려있는 문화적 정신적 앙금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말과 글의 현실만 살펴봐도 일제 잔재가 아프게 드러난다. 자세히 볼수록 참담해진다. 다른 분야도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의 77%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한숨을 내쉰다. 본디 우리말인 줄로 알고 사용하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얼마 전 한국 정부는 ‘문화재(文化財)’를 ‘국가유산(國家遺産)’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문화재청장이 국가유산청장으로 바뀌었다. ‘문화재’라는 용어를 일본에서 들여와 공식적으로 쓴 지 62년 만이라고 한다. 이유는 재화적 성격보다 국가적 정체성을 앞세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처럼 일본말 쓰레기를 치우고 그 자리를 우리말로 채우는 노력이 끈질기게 이어져 왔지만, 아직도 쓰레기가 산더미다. 현대화 과정에서 서구 문명도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외래어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 민주주의, 대통령, 개혁, 법률, 정의… 철학, 예술, 문학, 낭만 등… 모두 그렇다. 거기에다 아직도 버젓이 쓰이고 있는 일본말도 무척 많다. 각 분야의 전문용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에서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일본말인지 모르고 쓰는 경우도 많다. 젊은 세대들은 멋부리기로 일본말을 쓰기도 한다. ‘간지’ ‘야마’ 등등…. 이런 잘못을 지적하면 “영어는 괜찮은데 일본말은 왜 안 된다는 거냐?”라고 항변한다. 어처구니없다. 낱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어구조나 말법, 문법에도 일본 잔재가 잔뜩 남아있다. 그 덕에 한국 사람들은 일본말을 쉽게 배운다. 사고방식이나 문법의 구조가 같고, 한자어의 77%가 같으니 배우기 쉬울 수밖에 없다. “아무려면 어떠냐?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잘살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라는 거냐? 까짓 일본놈들 뛰어넘어버리면 되지!” 이렇게 큰소리치며 인스턴트 라면을 예로 들기도 한다. 일본인이 처음 만든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 라면이 일본 것을 깔아뭉개고 세계인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다른 분야도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글쎄, 그럴까?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아무튼,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역사적 정신적 문화적으로 근본적인 갈등과 매듭이 가로놓여있다. 반드시 통찰하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점검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도 많다. 지나친 민족주의, 피해자 관점의 일방적 반일감정, 친일파 논쟁에서 드러난 이분법 등등…. 광복 8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짚어보고 반성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일본 우리말 논쟁 문화재 정신적 문화적 문화적 정신적
2025.08.14. 19:57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그것도, 영화감독과 배우, 소설가 등 영화 관련 예술인 500여 명의 투표 결과와 20만 명 넘는 독자가 참여한 설문조사 결과 두 부문에서 모두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소식을 몇 년 전에 들었다면 감격에 벅차서 축배라도 들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뻐근한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이미 한국문화가 더 올라가야 할 정상이 없을 정도로 세계 정상에 확실하게 올라섰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 문화예술은 각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찬사를 받고 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 수상작 기생충, 에미상 6개 부문 수상작 ‘오징어 게임’,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 등 6개 부문 수상작 ‘어쩌면 해피엔딩’, 최근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K팝 그룹 BTS와 블랙핑크는 물론 조성진과 임윤찬 등 젊은 클래식 음악가들도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김혜순 시인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독일 국제문학상, 김주혜의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등 고전적인 문화예술과 대중문화 모두에서 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미술 쪽에서도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내년 여름 개인전을 갖는 서도호 작가,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은 김수자 등 여러 작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감격스런 소식은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는데, 느닷없고 어이없는 계엄령 소동에 가려져 무척 섭섭했었다. ‘코리아니즘’이라는 낱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계속 정상을 지키며 세계문화를 이끌어가는 일일 것이다. 변방에서 조명받는 중심이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철학과 이론적 바탕이 필요하고, K-문화의 본질을 자세하게 살펴서, 그 저력의 뿌리를 밝혀내 발전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당당한 자신감이다. 최근에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은 거의 다 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들이다. 그 이전 세대는 배우 윤여정(1947), 정명훈(1953), 김혜순 시인(1955) 정도다. 달리 말하면, 일제 강점기, 전쟁, 분단, 지독한 가난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어느 정도 가신 시대에 성장한 세대들이다. 전 세대들이 빠져있던 열등감이나 패배의식, 자기 비하 같은 부정적 정신문화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키운 세대였다. 외국문화를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우리 것을 알려고 다양하게 노력하고 싸웠다. 결국, 우리 사회가 현대화, 민주화 과정에서 겪은 온갖 갈등과 좌절, 절망 등을 이겨내며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온 힘이 지금 K-문화의 저력인 셈이다. 월드컵 응원의 뜨거운 물결, 촛불 혁명….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 정신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정체성을 찾아 바로 세우는 노력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어령 선생 같은 눈 밝은 선구자가 그리워진다. 글로컬리즘, 즉 세계에 통하는 로컬리즘 같은 정확한 방향 제시, 인류 문화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련한 근원 정서를 찾아내 세계인이 공감할 언어로 재창조하는 일에서 그이는 정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88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 디지로그, 글로컬리즘, 생명자본론, 보자기론 등이다. 그런 한국 특유의 정서를 현대화한 성공사례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딱지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줄넘기, 줄다리기, 달고나 등 한국의 놀이문화다. 같은 맥락에서, 외국어로 바로 번역하기 어려운 우리말, 예를 들어 멋, 정, 한(恨), 신바람 같은 낱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어령 같은 창조적인 걸물이 우리 젊은 세대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코리아 개막 세계 정상급 부문 수상작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
2025.08.07. 18:32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지난 7월21일이 1주기였다. 세월 참 덧없이 빠르다. 고인의 뜻이 워낙 완강했던 탓인지, 요란한 1주기 추모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다만 김민기가 20살 때인 1971년에 발매되었다가 판금 조치를 당해, 희귀본이 되었던 첫 음반을 54년 만에 복각하여 LP판으로 다시 냈다. 또 김민기를 존경하는 후배 음악인과 과거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입주해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이 공동 개최하는 ‘김민기 뒤풀이’ 공연이 열리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김민기의 예술정신과 인간성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조용하지만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연계의 모판이었던 학전(學田) 소극장은 어린이 연극에 힘을 쏟았던 고인의 뜻을 살려 아동극 전용 ‘아르코 꿈밭극장’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학전김민기재단’을 올해 안에 설립하여 고인이 일생에 걸쳐 남긴 음악과 뮤지컬 작품과 작업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뒷것’ 김민기답다. 하지만,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다. 인간 김민기를 널리 알리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민기처럼 결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세상도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뒷것’ 정신에 대해서…. “‘뒷것’ 김민기 뒤에 장일순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장일순(張壹淳, 1928년-1994년) 선생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민주화운둥의 대부로 알려진 큰 어른이다.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 민중 속의 철학자로 김지하 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김지하 철학의 바탕인 생명사상은 장일순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랜 감옥살이로 생긴 정신의 상처를 먹그림 그리기로 치유하는 지혜를 가르친 분이기도 하다. 김민기는 김지하를 통해 장일순을 만난 이후에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며 모셨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김민기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늘 사무치게 그리운 자리였다. 장일순 선생 또한 민기를 지극히 아꼈고, 민기가 지은 노래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가사와 우리 정서를 담은 선율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의 독창성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에서 나오며, 공동체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해준다”면서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늘 부르던 노래가 ‘아침 이슬’이었고, 술 한잔 걸치고 원주천 뚝방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도 아침 이슬을 부르면서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김민기가 군사정권의 엄혹한 감시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 생산자인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1989년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혜성 등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살림모임’을 창립할 때 김민기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장일순 선생은 여러 가지 호를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무위당(无爲堂)’과 ‘좁쌀 한 알’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뒷전에서 할 일 다 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분의 주된 가르침은 “밑으로 기어라”였다. 앞에 나서서 떠들지 말고,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 김민기의 ‘뒷것’ 정신과 바로 이어진다. 장일순과 김민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뒷것’으로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장일순 선생의 말씀 한마디…. “사람이 보이는 것만 너무하면 재미가 없어. 안 보이는 가운데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민기 장일순 장일순 선생 김민기 뒤풀이 인간 김민기
2025.07.24. 19:29
제법 긴 세월 ‘생계형 글쟁이’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료가 매우 중요하다.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풍부하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바르고 깊이 있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되도록 다양한 관점, 많은 정보를 모아서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상 참 복잡하고 편해졌다. 예전처럼 자료수집을 위해 발품 팔고 땀 흘리며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컴퓨터에 부탁하면 너무 많은 관련 지식과 정보가 넘쳐흘러서 오히려 걱정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똑같은 정보를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있어, 독창성을 발휘하기가 한층 어려워진다. 그래서 글이나 논문들이 비슷비슷하다.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저 교묘한 짜깁기 재주 경쟁만 남을 위험성이 크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연암 박지원의 말씀을 꺼내기도 쑥스럽다. 글 내용의 질이나 수준 평가 이전에, 표절 여부를 가리기만도 바쁘니 말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의 진위, 엉터리 자료를 가려내는 판단 능력이다. 수집한 정보가 얼마나 믿음직한가라는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건 결코 간단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요즘처럼 가짜 뉴스, 불확실한 지식,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진위와 옥석을 가리기가 정말 어렵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걸러내고, 덫에 걸리지 않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정치적 꼼수가 숨겨져 있는 주장, 이념 갈라치기에서 비롯된 진영논리, 돈이 걸려있는 사안들에서는 혼란이 한층 날카롭다.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수결이 진리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인공지능이 더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대중화되면 어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언론의 기사나 보고서, 논문 등 실용적 글쓰기의 많은 부분에 인공지능이 자리 잡고 일을 더 잘하고 있어, 인간들의 밥줄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화두를 제시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언론과 기자들의 역할에서는 문제가 한층 심각해진다. 인공지능은 이미 언론계 글쓰기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급기야 ‘기자들의 노벨상’ 퓰리처상도 인공지능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기에 이르렀다. 생성형 AI를 취재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면서도, 보도 과정에 이를 활용했을 경우 그 사실을 밝히도록 한 것이다. 발품을 판 직접 취재를 으뜸으로 여기는 기존의 기자정신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부분이다. 천하의 퓰리처상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최종 후보에 오른 45개 기사 가운데 생성형 AI를 활용한 기사가 5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숙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기계의 종이 되는 현상이다. 원론적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는 없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자나 언론인 개인이 인공지능을 이기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공지능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가려낼 재간조차 없다. 상상력이나 창조력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공지능이 쓴 문학작품, 특히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어서, 인간 작가들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 예수, AI 붓다까지 이미 나와 있다고 하니 감히 종교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살상무기가 될 날도 머지않다는 걱정도 나온다. 끔찍한 일이다. 전문가들의 경고는 매우 구체적이다. AI 도구가 편리한 건 분명하지만, 이를 무비판적으로 남용하다 보면, 사고 능력이 급속히 퇴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는 똑똑해지는데, 인간은 점점 멍청해지고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인공지능 글쓰기 인공지능 예수 인공지능 시대 언론계 글쓰기
2025.07.21. 23:07
제법 긴 세월 ‘생계형 글쟁이’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료가 매우 중요하다.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풍부하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바르고 깊이 있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되도록 다양한 관점, 많은 정보를 모아서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상 참 복잡하고 편해졌다. 예전처럼 자료수집을 위해 발품 팔고 땀 흘리며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컴퓨터에 부탁하면 너무 많은 관련 지식과 정보가 넘쳐흘러서 오히려 걱정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똑같은 정보를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있어, 독창성을 발휘하기가 한층 어려워진다. 그래서 글이나 논문들이 비슷비슷하다.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저 교묘한 짜깁기 재주 경쟁만 남을 위험성이 크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연암 박지원의 말씀을 꺼내기도 쑥스럽다. 글 내용의 질이나 수준 평가 이전에, 표절 여부를 가리기만도 바쁘니 말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의 진위, 엉터리 자료를 가려내는 판단 능력이다. 수집한 정보가 얼마나 믿음직한가라는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건 결코 간단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요즘처럼 가짜 뉴스, 불확실한 지식,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진위와 옥석을 가리기가 정말 어렵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걸러내고, 덫에 걸리지 않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정치적 꼼수가 숨겨져 있는 주장, 이념 갈라치기에서 비롯된 진영논리, 돈이 걸려있는 사안들에서는 혼란이 한층 날카롭다.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수결이 진리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인공지능이 더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대중화되면 어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언론의 기사나 보고서, 논문 등 실용적 글쓰기의 많은 부분에 인공지능이 자리 잡고 일을 더 잘하고 있어, 인간들의 밥줄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화두를 제시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언론과 기자들의 역할에서는 문제가 한층 심각해진다. 인공지능은 이미 언론계 글쓰기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급기야 ‘기자들의 노벨상’ 퓰리처상도 인공지능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기에 이르렀다. 생성형 AI를 취재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면서도, 보도 과정에 이를 활용했을 경우 그 사실을 밝히도록 한 것이다. 발품을 판 직접 취재를 으뜸으로 여기는 기존의 기자정신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부분이다. 천하의 퓰리처상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최종 후보에 오른 45개 기사 가운데 생성형 AI를 활용한 기사가 5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숙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기계의 종이 되는 현상이다. 원론적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는 없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자나 언론인 개인이 인공지능을 이기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공지능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가려낼 재간조차 없다. 상상력이나 창조력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공지능이 쓴 문학작품, 특히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어서, 인간 작가들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 예수, AI 붓다까지 이미 나와 있다고 하니 감히 종교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살상무기가 될 날도 머지않다는 걱정도 나온다. 끔찍한 일이다. 전문가들의 경고는 매우 구체적이다. AI 도구가 편리한 건 분명하지만, 이를 무비판적으로 남용하다 보면, 사고 능력이 급속히 퇴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는 똑똑해지는데, 인간은 점점 멍청해지고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인공지능 글쓰기 인공지능 예수 인공지능 시대 언론계 글쓰기
2025.07.17. 20:34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컸다. 만고의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서 ‘인간’이란 물론 ‘좋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 빼어난 인간, 성공한 사람, 완벽한 인간, 아름다운 사람을 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술가가 꼭 윤리적인 성인군자이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예술가와 세상의 윤리 도덕의 관계는 늘 골치 아픈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일반적 모범 인간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인, 괴짜, 별종,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예술가니까 그러려니 너그럽게 용서하며 지내왔다. 실제로 반듯한 모범생이 뛰어난 작가로 성공하는 예는 많지 않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예술가에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도덕군자이기를 요구한다. 그런 기대에서 빗나가면 가차없이 비판하고 냉엄하게 단죄한다. 그 단죄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준엄할 때도 많다. 예를 들어, 친일파, 미투, 공산주의자, 블랙 리스트 등 칼날은 정말 무섭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한번 찍히면 살아남지 못한다.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깝다던 고은 시인 같은 이도 한 방에 가는 걸 보면…. 물론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거물도 한 방 맞고 재기하지 못하는 걸 보면 미국에서도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예술세계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고, 옳고 그름을 무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비정한 단죄의 칼춤으로 날아가 버린 예술적 성취가 생각보다 많아 당황스럽다. 여기서 하나하나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인데, 제대로 거론하고 평가조차 하지 못하는 예들이 많은 것이다. 이건 정말 문제다. 단죄의 빌미가 되는 죄목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어느 한 시기의 잘못이거나, 한 인간의 극히 한 부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재수 없게(?) 들켰기 때문에 칼날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일부분의 허물로 한 인간 전체를 단죄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친일파 낙인이 찍힌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에서 일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운보 김기창의 바보 산수나 예수의 생애 그림에서 왜색을 느끼지 못한다. ‘한번 친일파는 영원한 친일파’라는 논리는 우습다. 친일파가 그린 영정이나 친일파가 만든 동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작품을 철거하고 새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새로 만든 것이 철거한 친일파의 작품만 못할 때의 허망함이란…. 그런데, 그 준엄한 단죄는 도대체 누가 하는가? 기준은 무엇인가? 미투의 경우는 피해자가 있으니까 그나마 납득할 만한 성토와 고발이 가능하겠지만, 친일파 단죄는?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하는가? 문득 떠오르는 성경 말씀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좀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국 현대의학계의 거목 장기려 선생이 창씨개명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창씨개명을 한 장 선생이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의사인 한, 장기려는 나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의사라면 장기려는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창씨개명을 거부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한 함석헌은 장기려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줄임)… 잠깐 욕됨을 참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길을 택하세요.” -손흥규 ‘청년 의사 장기려’에서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씀과 함께 용서와 관용에 대해서 생각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친일파 단죄 친일파 낙인 거목 장기려
2025.07.10. 18:46
어이쿠! 자유의 여신 마마, 그동안 기체후일양만강하옵신지요? 불초소생 엎드려 문안드리옵나이다. 이처럼 직접 만나 뵈옵다니 가문의 큰 영광이올시다. 소생, 이 나라에 산 지 그럭저럭 50년이 넘었는데도 문안 여쭙지 못하고 이제야 이렇게….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워낙 멀리 떨어져 계신지라…. 아이고, 실물을 뵈니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그런데,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 그 팔 좀 내리고 쉬시면 안 되나요? 그렇게 줄곧 무거운 횃불을 들고 계시니 팔이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벌 서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안 보는 한밤중에는 좀 내리고 쉬세요. 포도주라도 한잔 하시면서 푹 쉬세요. 그나저나, 무척 바쁘시죠? 독립기념일 무렵이라 정신이 한 개도 없으시겠어요. 네? 그런 것보다 세상이 워낙 어지럽고 요란하게 돌아가는 통에 많이 피곤하시다고요? 정말 그러시겠어요. 그건 그렇고, 소생이 좀 조사를 해봤더니, 자유의 여신 마마께서는 1876년 미국 독립기념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바다 건너오셨더군요. 그렇죠? 아니 뭐 대단한 뒷조사는 아니고요, 그냥 인공지능에 물어본 거예요. 요즘은 컴퓨터 몇 번 두드리거나 AI 시키면 좌르르 다 나옵니다. 그러니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반상식입죠. 정보랄 것도 없어요. 에, 그러니까, 키가 93.5m, 무게는 204톤이고, 머리에는 7개의 대륙을 나타내는 뿔 달린 왕관을 쓰고 있고, 오른손은 횃불을 치켜들고, 왼손으로는 독립선언서를 안고 있고, 발로는 끊어진 사슬과 족쇄를 밟고 있으시죠? 그러니까, 우파는 횃불을 휘두르고, 좌파는 책을 들고 공부하고 뭐 그런 겁니까? 에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알겠습니다. 바쁘실 테니, 간단하게 3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딱 3가지만! 먼저 여신 마마께서는 프랑스에서 바다 건너오셨으니, 이민인 셈이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민자들을 마구잡이로 쫓아내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법이민자 잡겠다고 총 든 군대를 동원하는 이 현실을? 이민의 나라가 이민을 내치다니, 이것이야말로 백인우월주의요 인종차별이라는 항변의 목소리가 높은데, 여신 마마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또, 이 나라는 신(神)의 나라지요? 그래서 지폐을 비롯해 사방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고 선명하고 크게 써놓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지금은 ‘우리는 돈을 믿는다(In Money We Trust)’로 바뀌었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500만 달러짜리 영주권 골드카드 신청한 사람이 7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게 말하자면 돈 받고 방 빌려주는 여인숙 주인과 뭐가 다릅니까? 안 그래요? 돈이면 단가요, 뭐! 어찌 생각하시는지? 말 좀 해보세요. 끝으로, 여신 마마께서는 왕조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 어떤 고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자기 생일날에 군대 동원해서 열병식 벌이고, 국민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들은 척도 않고…. 아, 물론 압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부를 미덕으로 여기고, 쇼를 진실로 아는 세상이 문제라는 거…. 그러니, 이런 세상을 바로잡을 지혜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빌며 사정하는 거 아닙니까! 아, 말씀 좀 해주세요! 뭐라고요? 좀 크게 말하세요, 크게! 뭐요? 저 강물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니, 잠시만 견디라? 에이, 여보시오! 그런 소리 누가 못해! 알고 보니 이 양반 순 엉터리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제발 손 좀 써주세요, 이렇게 빌겠습니다. 여신 마마는 신이니까 왕보다 높으시잖아요. 그러니 한 말씀만 해주세요, 한 말씀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자유 여신 여신 마마 독립기념일 무렵 독립기념 100주년
2025.07.03. 18:42
세계적인 인공관절 전문의이자 통일운동가 오인동 박사가 지난 6월19일 오후 9시 40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집에서 아들, 딸과 함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 없이 평안한 표정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라는 유가족의 연락을 받고,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침 6.25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앞두고 통일에 관한 글을 쓰던 중이어서 한층 상실감이 컸다. 고인께서는 지난 몇 년간 되풀이되어온 남북 간의 극한 대립을 얼마나 아파하셨을까.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을 부담스러운 단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 3명 중 1명이 북한과 통일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했다. 2030세대는 절반 가까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젊은 세대일수록 세월이 갈수록 통일과 멀어져가고 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고인께서 생전에 강조하던 말씀이 아프게 떠오른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분단의 멍에를 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책임감이 있다. 이 멍에를 내려놓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부정하려 해도 달아날 길 없는 우리의 숙제다. …남과 북이 한발씩 굳게 딛고 균형을 이루어 서면 모국의 앞날이 창창하리라 믿는다.” 오인동 박사의 삶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의사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실천적 통일운동가의 삶이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와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고쳐보려 애쓰는 통일운동가의 삶은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다. 그 바탕은 진한 사랑과 평화다. 그이는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오인동 박사는 1939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1970년 미국으로 와서,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큰 성공을 거두며, 하버드대학 조교수, MIT 강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인공고관절 수술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한편,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방문단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열악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꼈고, 이를 계기로 의료기술 교류와 통일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헌신하기 시작했다. 2009년 이후 여섯 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자신이 고안한 값비싼 인공고관절 기구들을 건네주었고, 현지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등의 실천적 활동을 이어왔다. 오인동 박사의 통일운동은 감정이나 이념논쟁에 치우치지 않고, 깊은 연구를 통해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남북한과 해외동포 8000만이 힘을 모으면 세계 5위의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식이다. 그가 제안한 ‘통일대박론’이나 ‘남북연합방 Corea’ 등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 대표적인 일들로 평가된다. 오 박사는 많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주목받았고, 실천을 공유했다. 그런 공로로 ‘한겨레통일문화상’ ‘윤동주 민족상’ ‘늘푸른청년상’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특히 통일운동에 있어서 해외동포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남과 북, 해외동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큰 자산을 잃었다. 오인동 박사의 마무리도 ‘좋은 의사’다웠다. 장례식을 따로 거행하지 않고, 시신을 로마린다대학병원에 기증했다. 연구 실습이 끝나면 화장하여, 유해는 고인이 생전 즐겨 다니던 산에 뿌릴 예정이라고 한다. 아름답다. 사랑받는 훌륭한 의사이자 실천적 통일운동가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고인의 영전에 머리 숙인다. “조국 통일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다”던 소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통일운동가 의사 통일운동가 오인동 실천적 통일운동가 재미한인의사회 방문단
2025.06.26. 20:52
LA강의 중요성과 생태적 복원 가능성과 미래 등을 미술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기획전 〈우리의 강: 물길의 회복과 미래(OUR RIVER: Floodplain and Future)〉는 매우 반갑고 고마운 전시회다. 지난 202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이 전시회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작가 16명이 참여하여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설치미술 등 다양한 매체의 개성적인 작품을 통해 로스앤젤레스 강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 속에서 강의 지속적인 복원과 보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우리 인류의 문명은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흐르는 강은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생명의 노래와 이야기와 색깔이 있었고, 삶과 죽음이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세계의 많은 대도시들이 강을 끼고 발전했다. 서울의 한강을 비롯해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LA에도 강이 있나? 있기는 있다. 샌퍼낸도밸리 지역에서 시작하여 LA 다운타운 등 17개의 도시를 거치며 롱비치 하류로 흘러 태평양 바다에 이르는 51마일의 물길을 우리는 LA강이라고 부른다. 이 중 32마일이 LA의 도심구간을 흐른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강의 현재 모습은 콘크리트로 쌓은 벽채 같은 물길(水路)이다. 이 거대한 콘크리트 수로는 미군 공병대가 동원되어, 홍수 방지용으로 만든 것이다. 1938년에 시작해 1960년에 완성한 대공사였다. LA강은 일 년에 8개월은 말라 있는 건천(乾川)이다. 물이 흐르지 않는 콘크리트 수로는 삭막하다. 아무것도 살 수 없다. 물고기와 물새도 다 떠나고, 사람 발길도 끊겨버렸다. 과거에는 송어가 헤엄치던 강이 이렇게 변해 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강에서 송어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것은 1948년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LA카운티는 나름대로 강 복원 사업을 추진했다. 서울 청계천을 벤치마킹하자는 목소리도 나왔고, 일부 지역에서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제거되기도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친수성 식물과 나무가 자랐고, 콘크리트 틈 사이로 풀이 뿌리를 내렸다. LA카운티가 지난 2022년 발표한 LA강 복원을 위한 최종 계획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도 참여하여 관심을 모은다. 환경운동가들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이자 기자였던 맥애덤스(MacAdams)로 1985년 환경단체 'LA강의 친구들'을 설립하여, 강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직접 과격한 행동도 감행했다. 이에 주민이 호응하고 정치인이 움직였다. 맥애덤스는 2020년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가들이 뜻을 모아 LA강을 살리자는 취지의 전시회를 연 것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이 세상도 아름다워질 것이다. 작가들의 꿈은 LA강을 자연 상태로 살리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물길을 고치려들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하길 바란다.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뛰놀고 새들 노래하는 그런 생명의 강으로 만드는 일…. 강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다. 아무튼, 미술가들과 갤러리의 합심으로 뜻깊은 전시회가 꾸려졌다. 아무쪼록 많은 이들이 작품을 감상하며, LA강의 오늘과 내일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건강한 공론의 마당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예술과 함께 아파하고 꿈꾸는 동안 우리들 마음속에 맑은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삭막한 사막 도시이기에 더욱 시원한 강이 필요하다. 전시회는 오는 6월28일까지 ‘샤토 갤러리’에서 열린다. 장소현 / 미술 평론가·시인문화산책 미술가 la강 la강의 중요성 콘크리트 수로 콘크리트 구조물
2025.06.19. 19:00
아이들이 주말 한글학교에 다닐 때의 이야기 한 토막.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의 입술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오늘 시험을 봤는데 선생님이 맞게 쓴 답을 틀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엄청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아이가 내미는 시험문제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이름을 한글로 쓰라는 흔한 문제였다. 틀렸다고 빨간 줄로 표시한 낱말은 ‘버내너’, ‘피애노’, ‘애플’ 등이었다. 이게 왜 틀린 거냐고 항의하는데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 미국에서는 ‘버내너’지만 한글로는 ‘바나나’라고 써야 한다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건 애플이 아니라 사과라고 써야 맞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당당한 반문에 말문이 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럼 파인애플은 ‘파인사과’라고 써야 맞는 거야? 애플 컴퓨터는 사과 컴퓨터고?” 이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세다. 미국에서 ‘버내너’라고 부르는 과일을 우리는 ‘빠나나’라고 부른다.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그 물질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버내너와 빠나나는 맛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나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틀렸다고 빨간 줄로 냉정하게 표시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정신문화를 내포한 것이 되면 문제가 한층 복잡해진다.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서양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낭만, 로맨스, 로망스 모두 같은 말이지만, 말 맛이나 속내용은 다르다. 우리말에서 낭만과 로맨스는 그 쓰임새가 많이 다르다. ‘내로남불’ 같은 신조어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보면, 민주주의, 정치, 사회, 정의, 자유, 평등, 상식, 철학, 미학 등등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서양식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의 가치관을 고집할 것인가,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고 절충한다면 어느 정도가 알맞는가. 새롭게 살펴봐야 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역사적으로 외래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 왕조시대에는 중국에 전적으로 기대었고, 근대는 식민지였고, 현대는 해방과 전쟁에 이어 밀려 들어온 서양 문물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다. 한국사회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다. 서구의 것을 따라하기도 바빴고,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나 전통은 무시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외래문화를 우리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소화하고 새롭게 재해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부대찌개나 콩글리시, 한국적 민주주의, 번안가요 같은 정도가 고작이었다. 복잡한 주제는 접어두고, 다시 한글학교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버내너’라고 쓰면 틀렸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좀 번거롭지만, ‘버내너’와 ‘바나나’ 두 가지를 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일은 참기 어렵다. 가령, 누가 내 이름을 영어 발음대로 ‘쏘히언 치앵’이라고 부르면 매우 불쾌하고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참기는 하지만, 기분이 몹시 나쁘다. 그런 갈등이 이름의 발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관이나 철학, 또는 역사 인식 등에서도 생기는 것이 문제다. 디아스포라 타국살이의 서러움 중의 하나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바나나 한글학교 이야기 주말 한글학교 사과 컴퓨터
2025.06.12. 18:34
바야흐로 질문을 잘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면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잘하는 요령과 기술을 설명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에도 그런 정보가 넘쳐난다. 기계 때문에 사람이 고생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판에서는 질문의 기술이 묘하게 악용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양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론조사라는 것인데,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요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정치가들이 조작하고 악용하고픈 유혹에 빠져 못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인류의 문명이나 철학 등도 모두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은 궁극적으로 질문이다. 해답이 아닌 진지한 질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자신의 글쓰기를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춘기 이후로 늘 질문이 많았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왜 태어나서 왜 죽는 걸까, 고통은 왜 있나, 나는 뭐 할 수 있지, 인간이란 건 뭐지, 이런 질문들이 늘 괴로웠고요. 그걸 질문을 하는 방식이 글을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죠. 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 등단 후 근 30년 동안 작품을 통해 제기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상실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런데, 사실은, 우리네 인생 자체가 질문의 연속이다.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의 저자 모기 겐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질문이란 자신에게 맞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 행동과 사고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기분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문을 잘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리다. 학문 연구나 공부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고,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진심 어린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반대다. 상대방을 떠보는 질문, 은근히 무시하는 무례한 질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악성 질문들이 난무한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성장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같은 거창하고 철학적인 질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잘한 질문들도 의미가 있다. 어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좀 더 다정하게 정성껏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오늘 읽은 책이나 들은 음악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등등 일상생활을 되돌아보는 질문들…. 바람직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얼렁뚱땅 속이려 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과 솔직히 대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인공지능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 할 판이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은 제대로 되었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네 인생 노벨문학상 수상 학문 연구
2025.06.09. 21:43
바야흐로 질문을 잘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면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잘하는 요령과 기술을 설명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에도 그런 정보가 넘쳐난다. 기계 때문에 사람이 고생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판에서는 질문의 기술이 묘하게 악용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양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론조사라는 것인데,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요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정치가들이 조작하고 악용하고픈 유혹에 빠져 못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인류의 문명이나 철학 등도 모두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은 궁극적으로 질문이다. 해답이 아닌 진지한 질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자신의 글쓰기를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춘기 이후로 늘 질문이 많았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왜 태어나서 왜 죽는 걸까, 고통은 왜 있나, 나는 뭐 할 수 있지, 인간이란 건 뭐지, 이런 질문들이 늘 괴로웠고요. 그걸 질문을 하는 방식이 글을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죠. 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 등단 후 근 30년 동안 작품을 통해 제기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상실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런데, 사실은, 우리네 인생 자체가 질문의 연속이다.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의 저자 모기 겐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질문이란 자신에게 맞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 행동과 사고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기분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문을 잘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리다. 학문 연구나 공부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고,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진심 어린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반대다. 상대방을 떠보는 질문, 은근히 무시하는 무례한 질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악성 질문들이 난무한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성장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같은 거창하고 철학적인 질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잘한 질문들도 의미가 있다. 어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좀 더 다정하게 정성껏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오늘 읽은 책이나 들은 음악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등등 일상생활을 되돌아보는 질문들…. 바람직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얼렁뚱땅 속이려 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과 솔직히 대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인공지능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 할 판이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은 제대로 되었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네 인생 노벨문학상 수상 학문 연구
2025.06.05. 18:57
노장 피아니스트 몇 분의 연주를 계속해서 듣고, 보았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메나헴 프레슬레,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노인네들의 연주다. 연륜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음악에서는 소리에 나잇값이 어떻게 담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되도록 널리 알려진 곡, 단순한 곡을 찾아서 들었다. 그래야 내 나름대로 비교가 가능할 것 같았다. 나 같은 초보자가 감히 거장들의 연주를 분석하고 비교하려 들다니 어불성설이지만, 자꾸 들어보면 어디가 다른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고른 곡이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명곡이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우선, 백전노장인 노인네 피아니스트가 교과서 읽듯 또박또박 치는 정직하고 엄격한 연주를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젊은 스타 피아니스트가 현란하게 연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와 비교하면서 다시 들어본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깊이나 느낌, 울림, 향기가 다르다. 삶의 연륜이 소리 하나하나에 진하게 묻어나는 느낌이다. 음악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가 주는 감동도 있다. 말년의 루빈스타인이 한 인터뷰에서 했다는 고백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무대에 나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 이분들은 이 곡을 평생 몇 번이나 쳤을까. 정식 연주가 아니고 연습까지 합하면… 매번 연주 때마다 최선을 다했을 텐데…. 몸의 한 부분처럼 익숙한 음악일 텐데,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니 아직도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는 말씀인가. 종교를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손놀림과 진지한 얼굴 표정은 손끝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으로 하는 연주다. 말년의 호로비츠가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면서 눈물 흘리는 영상을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런 것이 연륜의 향기인가.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노년의 농익은 작품이 반드시 더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많은 작가의 경우 대표작은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추사 말년의 속기(俗氣) 뺀 붓글씨 같은 깊은 경지는 흔하지 않다. 이에 비해, 연주자나 영화배우, 연극배우, 판소리 명창, 춤꾼, 장인 등의 숙련이 요구되는 예술에서는 완숙미, 연륜의 아름다움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젊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 단순히 숙련된 기교가 아닌 영혼의 떨림 같은 것….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꾸 이어졌다. 답답해서, 평생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위진록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명쾌하게 답을 주셨다. “아, 내 생각에는, 그건… 비교의 문제가 아니고, 그저 다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요. 젊은이의 패기와 싱싱함은 그것대로 좋고, 노장의 원숙한 향기는 또 그것대로 좋은 거지요. 우리네 인생이나 마찬가지예요. 청춘의 매력과 노년의 매력의 다른 것처럼 음악도 그런 거지요. 나는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연주를 좋아해요.” 아, 그렇다! 자꾸 비교해서 높낮이를 따지려 드는 평론가적(?) 고약한 심사가 문제였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버리고, 같은 피아니스트가 같은 곡을 젊었을 때 연주한 것과 노년에 연주한 것을 들으니, 당연히 둘 다 좋다. 마음을 여는 훈련이 턱없이 모자란다. 알량한 얼치기 지식인의 슬픔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장 연륜 노장 피아니스트 정식 연주가 노인네 피아니스트
2025.05.29. 18:21
글을 쓰다 보면, 문장부호 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꼼꼼하게 챙기게 된다. 문장부호는 ‘문장 각 부분 사이에 표시하여 논리적 관계를 명시하거나,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표기법의 보조수단으로 쓰이는 부호’라고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즉, 문장의 뜻을 돕거나 문장을 구별하여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여러 가지 부호를 말한다. 문장부호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장부호는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 따옴표, 줄임표, 괄호, 화살괄호, 겹낫표, 홑낫표, 쌍점, 빗금, 줄표, 붙임표, 물결표, 드러냄표, 숨김표, 빠짐표 등 7가지 항목 25가지나 된다. 하지만, 문장부호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장부호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부록으로 실린 것을 원안으로,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근대화와 함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옛 글은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없이 내리쓰기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마치 요새 시인들이 쓰는 문장부호 없는 시(詩) 같다. 아니, 오늘의 시인들이 옛 문장을 흉내 낸 것이겠지….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온고지신이요 법고창신이다. 문장부호를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네 인생이 보인다. 되도록 뻐근한 느낌표가 많고, 적절한 때에 느긋한 쉼표가 있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골치 아픈 물음표, 애매하게 머뭇거리는 말없음표, 남의 말이나 생각을 빌리거나 훔쳐온 따옴표로 가득한 삶이기 쉽다. 내 생각과 믿음으로 한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다. 인생을 글의 종류에 비유해보면 어떤가? 시적(詩的)인 삶, 산문적인 삶, 학술논문 같은 인생, 보고서나 결재서류 같은 생활, 광고문구 같은 삶… 내 인생은 어떤 삶이었고, 지금은 어떤가? 어쩌면, 카톡이나 SNS의 짧고 건조한 토막글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부호는 어떤 것일까? 마침표일까? 물음표일까? 말없음표일까? 아니면? 내 인생에는 느낌표가 얼마나 있었을까? 설익은 물음표 범벅은 아니었을까? 죽음은 생을 마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저 문득 멈춰버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온전한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고, 쉼표나 말없음표 또는 물음표로 멈춘 글…. 어수선하게 살던 자리 뒷마무리도 못 하고,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숨을 거두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데 죽어야 하기도 하고, 정말로 아깝고 아까운 사람이 먼저 가는데 쓰레기 같은 인간은 만수무강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죽음이 그런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자다가 죽은 이가 여러 명 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앞날이 창창하고 건강하고 할 일도 많은, 정말 아까운 이들이 그렇게 황망하게 갔을 때의 허전함이란. 김수영 시인이나 미술사학자 오주석 씨처럼 교통사고로 졸지에 떠난 이도 있다. 멋지게 써나가다가 갑자기 멈춰버린 문장을 읽는 느낌이다. 인생이란 쓰다 만 미완성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인가? 생각해보면, 온전한 마침표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스코트 니어링처럼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사랑하는 아내의 보살핌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죽음을 두려워 말고 미리 준비하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요즈음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문장부호 인생 띄어쓰기도 문장부호 문장부호 하나 마지막 문장부호
2025.05.22. 19:12
김장하 어른이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게 던진 질문이 화제다. “다수결이 민주주의 꽃이라 그러는데…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문형배 전 권한대행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인사차 진주로 김장하 선생을 찾아간 자리였다. 온 국민이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던, 대통령 탄핵 심판의 선고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이 질문과 대답도 관심을 모았다. 문 전 권한대행은 한참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요란한 소수를 설득하고 다수의 뜻을 세워나가는 지도자가… 그런 게 가능한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저는 생각하고, 이번에 탄핵도 그런 연장선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가….” 질문이 참 깊고 멋있다. 짧은 말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질문,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다. 현실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의 관계는 무엇이냐?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같은 식의 상투적 질문과는 결이 다르다. ‘지배당하고 있는 조용한 다수’인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적절하게 대변하면서, 일그러진 우리의 민주주의를 질타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고스란히 담은 질문이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선생님은 답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니, 김장하 선생은 대답한다. “답을 몰라서 물어본 것”이라고…. 대화는 일단 거기서 끝났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고픈 다음 질문은 아마도 “이번 선거에서 그런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그 장면을 마음으로 뜻깊게 본 모든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하며 절망적으로 어두워지는 표정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라는 간절한 바램…. 진정성 있는 질문이 좋은 답을 이끌어내는 법이다. 김장하 선생의 소박한 질문이 묵직한 울림을 갖는 것은 질문 안에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져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걱정을 대변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다. 그래서 진정성이 전해지는 것이다. 현재로는 최선의 제도라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와 약점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현실의 시련을 매우 혹독하게 겪은 것이 한국이다. 그러니, ‘요란한 소수와 조용한 다수’라는 표현이 큰 울림을 줄 수밖에. 결국 조용한 소수가 이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과 자부심도 깔려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다수결도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가진 제도다. 선거에서 무슨 수를 쓰건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승리자가 되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의 폭력이 무섭지만, 그걸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오직 대화와 타협만이 슬기로운 해결책인데 그게 참…. 바람직한 대화와 소통은 진지한 질문과 건강한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내세우기에 앞서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생각을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핵심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진심 어린 신뢰와 정말로 좋은 대답을 듣고 싶은 열린 마음이다.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전 재판관이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은 그런 대화다. 오늘날의 정치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인데, 안타깝게도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물론, 한국 정치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선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그건 어디서 배우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요란 소수 다수결도 실제 다수결 원칙 대다수 국민
2025.05.15. 19:06
세상이 변하면서 예술작품 감상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요새는 음악을 듣기보다 보게 된다. 유튜브 탓이다.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독주자, 지휘자의 모습을 보면서 듣는다. 그렇게 감상하면서 어쩐지 음악에 미안해진다. 멋지게 표현하면, 시청각 입체적 감상이지만, 음악의 본질인 소리에 집중하고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각적 요소가 중요해지다 보니, 연주자의 패션이나 지휘자의 몸동작 같은 2차적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가령, 최소한의 옷만 입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유자왕이나 기도 드리듯 눈감고 지휘하는 카라얀 선생, 춤추듯 온몸을 휘두르는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튜브나 휴대전화기 덕에 많은 것이 크게 바뀌었다. 글은 자꾸만 짧아져만 가고, 미술작품은 영상을 통해 축소판으로 보고 감상했다고 착각한다. 이건, 대형영화를 작게 축소해서 손바닥에 놓고 보거나, 음악을 연주회에서 듣지 않고 기계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술에서 작품의 크기나 질감은 결정적 조형요소다. 무엇을 그렸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뻐근한 감동의 울림도 거기서 나온다. 작게 줄인 영상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는 것으로는 압도적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할 때, 축소된 영상으로도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의 발언과 제작의도 등은 대충 알 수 있지만, 원작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과거 해외여행 같은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우리는 화집을 보면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것도 조잡하게 인쇄된. 그러다가 세월이 좋아져서, 화집에서만 보던 작품의 원작을 마주하는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란…. 그리고 그동안 헛알았다는 자괴감 부끄러움, 낭패감…. 언젠가, 우연히 왕년의 명화 ‘벤허’를 유튜브로 봤다. 보다가 짜증이 나서 꺼버렸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70미리 시네마스코프 대형 스크린으로 봤던 그 감동, 박진감 넘치는 전차 장면의 감동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건 장난감 같은 작은 화면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잘 안 간다.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를 안 느낀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다 있으니까…. 라고 생각한다. 점점 작게 축소되는 세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작아지려는 걸까? 그래도 여행은 부지런히 다니고, 유명 관광지마다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뉴 노마드 시대’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자연이나 역사 유물은 당연히 찾아가서 직접 봐야 하는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예술작품은 실물을 안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방식은 편리할지는 몰라도, 예술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같은 돌이지만 바위와 자갈은 다르다. 자꾸만 작아지다 보면, 인간의 크기와 마음마저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첨단 과학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옛날 영화 ‘ET’의 주인공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다. 눈은 크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란 모습…. 요즘처럼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만사가 해결되는 생활이 이어지면, 인간들이 그런 모양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AI시대가 본격화되면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장엄함, 웅장미, 숭고함, 깊이와 넓이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도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다. 큰마음, 깊은 울림, 향기로운 깨달음마저 쪼그라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예술감상 예술감상 방식 예술작품 감상 지휘자 카를로스
2025.05.08. 20:33
새해 초 남가주 일대를 휩쓴 큰 산불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고, 사람들 가슴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만한 인간들에게 준 큰 교훈이기도 했다. 병든 지구, 파괴된 생태계의 신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인간들은 무관심하게 살아왔다. 예를 들어, 매해 4월22일이 ‘지구의 날’이며, 올해 55주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 강풍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 산불은 그런 인간들에게 보낸 엄중한 경고이다. 지금처럼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는 경고…. 자연보호나 환경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 모두가 힘과 마음을 모아야 한다. 예술계라고 예외일 수 없다. 산불을 계기로 예술계에서도 구체적인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한인사회에서도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한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반갑다. 55번째 지구의 날에 즈음하여 ‘우리의 지구: 아티스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는 주제의 미술전시회가 5월16일까지, TAG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 주선희 씨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지구사랑의 간절한 메시지를 담은 회화, 사진, 조각, 설치미술 등의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진다. 참가작가는 초대작가인 유니스 김, 수 박, 수잔 황을 비롯해 최성호, 샘 리, 션 양, 척 홍, Evan Nie, Gary Polonsky 등 9명이다. “전시회를 위해 작가들이 뜻과 힘을 모아 서로 배우고 협력하면서 지구에 대한 사랑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가진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많이들 오셔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지구사랑의 마음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선희 작가의 초대의 말이다. 참고로 ‘지구의 날’은 1969년 1월 산타바바라에서 있었던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비롯된 기념일이다. 대규모 행사가 열리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행사에는 무려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해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개최하며,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전개했다고 전한다. 지구의 날 선언문은 인간이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로 인해 자연과 조화롭게 살던 전통적 가치가 파괴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의 생활문화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이어서, 6월에는 LA 강을 살리자는 주제의 기획전시회 ‘우리의 강: 물길 살리기와 미래’가 6월7일부터 28일까지 ‘샤토 갤러리’에서 열린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자연과 인간의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LA 강과 생태계가 직면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환경적 과제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리로 기획되었다. 참여작가는 한인작가 박다애, 사진작가 수 박을 비롯해 데이비드 에딩턴, 미셀 로빈슨 등 16명의 다국적 작가들로,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각 작가는 LA 강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작품을 통해 강의 생태적 온전성 유지의 중요성, 서식지와 생물다양성의 원천, 문화적 시금석으로서의 강의 역할을 조명한다. 또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강의 변화와 도시 개발과 환경 보존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되짚어 보는 기회로도 기대를 모은다. 아무쪼록 이런 의미 있는 전시회의 선한 영향력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도한다. 각자 자리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길이다. 그래서 환경운동가들은 강조한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생각으로 실천하는 것이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지구사랑 자연보호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환경 문제 환경 파괴
2025.05.01. 19:08
해마다 4월 하순이 되면 사이구(4.29) 폭동의 악몽이 검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타오르는 불길과 시커먼 연기, 약탈자들의 난동, 부자동네만 지키는 경찰, 이른바 지붕 위의 총 든 사나이들, 그리고 평화의 대행진…. 미주 한인 이민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기억이다. 올해는 한층 더 아프게 되살아나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로 이어질 위험이 큰 불법체류자 단속과 추방 때문이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의 화약고인 인종 갈등, 그것이 화산처럼 폭발한 사이구는 이민 예술작품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폭동을 다룬 많은 글과 연극, 영화 등이 발표되었다. 폭동 30주년이었던 지난 2022년에는 미주한국문인협회와 LA한국문화원이 힘을 모아 사이구 폭동 주제 문학작품을 묶은 〈흉터 위에 핀 꽃〉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을 낼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문학작품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을 꼽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고원 시인의 시를 꼽고 싶다. 고원 시인의 〈검은 눈물로 거듭나〉, 〈L.A. 애가(哀歌)〉, 〈빛깔이 많은 노래〉와 〈줄넘기〉 등의 작품들은 단연 돋보인다.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헤치는 예리한 시각, 절제되고 울림이 큰 시어(詩語)와 품격이 조화를 이룬 예술성으로 긴 생명력을 갖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폭동의 빌미가 된 두순자 사건을 주제로 한 〈검은 눈물로 거듭나〉는 1992년 2월에 발표된 작품으로,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아메리카 합중국의 구조적 갈등을 고발한다. 다섯 토막으로 구성된 ‘짧은 서사시’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비극적인 총격 사건을 통해 한국 여인, 이민자의 갈등과 한을 안타깝게 노래하며, ‘눈물로 비는’ 모습으로 화해와 용서를 호소한다. 이 시는 영문으로 L.A.의 한인/흑인 시인 합동 시낭송회에서 시인 자신이 낭독한 바 있다. 폭동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L.A. 애가(哀歌)〉는 1992년 5월, 그러니까 폭동 바로 직후에 쓴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아우성이나 생경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구원과 희망을 노래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바다와 잿더미 속에서도 ‘서로의 눈을 간절히 보라’고 호소하며, 폭동의 유일한 사망자인 이재성 군을 통해 한인사회의 단결과 희망을 역설하고,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펼친 추모의 평화행진에서 희망을 읽는다. 이 작품은 꽤 큰 규모의 서사시로 시극(詩劇)으로 공연해도 전혀 무리가 없고, 장엄한 칸타타의 가사로 쓰여도 좋을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폭동 1주년에 발표한 시 〈빛깔이 많은 노래〉와 〈줄넘기〉는 마치 순수한 동시나 어린이 그림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빛깔의 무지개와 어린이들의 즐거운 놀이인 줄넘기를 통해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는 소박하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양함의 아름다움과 놀이를 현실 극복의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폭동의 원인, 실상, 극복의 지혜를 노래한 이 작품은 미주 한인이민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원 시인은 1925년 12월 8일,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올해 탄신 100주년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여, 남가주 한인문단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에서는 문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학행사가 흔히 열리고 있지만, 미주에서는 처음이라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 세기의 세월 동안 시인의 시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특히 디아스포라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우고 지켜 왔는지, 긴 세월 꾸준히 뿌려온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등을 종합적이고 폭넓게 고찰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되살핌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직접적인 교훈이 될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원 시인 고원 시인 미주 한인이민사 흑인 시인
2025.04.24. 18:12
‘어른 김장하’의 선한 영향력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는 역사적인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김장하 장학생’이었다는 사연도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면서, 그분의 삶이 재조명되고 영화가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이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김장하 선생은 이미 TV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으로 관심을 모았고, 문형배 재판관의 발언도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김장하 바이러스’가 열풍처럼 번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수선하고 험상궂은 세상을 힘겹게 살면서 참다운 어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답답한 시대 상황이 엇물리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파면당한’ 그 사람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전혀 결이 다른 어른이기에 한층 울림이 큰 것이 아닐까. 닮고 싶은 어른은 보이지 않고 낡은 꼰대들의 잔소리만 난무하는 세상…. 잘 알려진 대로,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공부를 많이 못 하고, 한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주경야독해서 19세의 나이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약방을 개원하고는 질 좋은 약을 매우 저렴하게 처방해 입소문이 나고, 큰 돈을 벌어들인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기부했고, 천 명이 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문형배 재판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언론계, 차별 철폐나 여성인권, 환경보호 같은 사회 문제, 문화예술 교육 등 지역사회 발전을 전폭 지원했다. 많은 단체를 후원하면서도 감투를 쓰지 않았고, 모임에서도 가운데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번 돈이니,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다시 환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작 본인은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젊은 시절에는 자기 집도 안 가질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오래된 옷을 입고, 해외여행 한 번 못했다고 한다. 사실, 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은 많다. 가령, 경주 최부자도 있고, 풍운아 채현국 선생도 있고, 노점상으로 평생 모은 돈을 대학교에 기탁한 할머니 등등…. 그런 분들 덕에 세상이 이만큼 이나마 굴러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김장하 선생이 특히 존경받는 것은 그분의 생활철학과 겸손함, 베풀고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어른다움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대통령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선생의 미담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 같은 중생은 흉내 낼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닮고 싶어한다.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 이른바 ‘김장하 바이러스’의 힘이다. 나도 이런 어른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생의 많은 가르침 중,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평범한 사람들의 중요성, 줬으면 그만이지…”라고 했던 세 가지 말씀을 되새기며, 실천해보려 애를 쓴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은 등산하는 자세를 말한 것인데, 인생도 거창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착실하게 살면 된다는 교훈이다. 선생의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자 선생의 말씀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다.” 한 마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것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자세다. 아무런 대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마음, 50년이나 베풀며 살았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올곧은 자세, 선생은 장학생들에게 “나에게서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대신 사회에 갚으라”고 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장하 선생 어른 김장하 김장하 장학생
2025.04.17. 18:37
‘대통령 파면’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선고는 끝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다음 대통령이 정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혼란과 대결, 반목, 질시의 거친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고, 한층 더 심해질 것이라는 염려가 매우 크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성장통치고는 너무 크고 아픈 고통이다. 정치적, 법적으로는 일단 결론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국민들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마땅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엉뚱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詩) 정신을 치유약으로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좋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시를 비롯한 예술의 기능이라고 믿는 것이다. 시가 더럽고 살벌한 세상을 정화하는 일에 한몫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물론, 한국 정치판에는 이미 시가 들어와 있다. 실제로, 좋은 시(詩)들이 어지러운 정치판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걱정스러운 소식도 들려온다. 뜬금없이 등장한 “호수에 뜬 달그림자를 쫓는 격”이라는 시 낭송이 화제가 되는가 싶더니, 지난 3.1절에는 정치인의 기념사에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꽃’, 홍준표 대구시장은 ‘절정’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이들의 일이라서 눈길을 끈다.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꽃’의 한 구절 ‘매운 계절(季節)의 챗죽(채찍)에 갈겨 /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절정’의 한 구절 이 시들은 암울한 일본강점기의 절망적이고 극한적인 상황을 끝끝내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시인의 절창으로 3.1절에는 썩 잘 어울리는 시다. 이 시를 빌려다 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시에 빗대어 호소하려 한 모양이다. 하지만, 평소에 시와는 별 관계없이 싸움질만 일삼던 사람이 뜬금없이 멋진 시 구절을 읊어대니, 영 생뚱맞다. 물론, 시나 문학이 정치에 건강하게 참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문학이 정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 옛 벼슬아치들은 기본적인 시적,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선비들이었다. 이방원과 정몽주처럼 시로 정치적 신념을 주고받는 멋을 알았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이다. 한국에서도 실제로 정치 무대에서 활약한 문인이 많다. ‘꽃’의 시인 김춘수, ‘겨울공화국’의 양성우 시인, ‘인간시장’으로 유명한 김홍신 소설가 등이 금배지를 달았고,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은 의원에 장관을 지냈다. 소설가 김한길은 국회의원, 당 대표, 장관 등 여러 개의 감투를 쓴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식 등단한 수필가로 대접받았다. 결국 문제는, 현란한 미사여구나 겉치레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시, 문학, 예술의 긍정적 힘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린 것이다. 즉, 절실한 진정성의 문제다. 시심(詩心)을 소중하게 받드는 정치지도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사항이 너무 거창한가. 다 접어두고, 아주 작고 소박한 부탁 하나만 하고 싶다. 제발 막말, 험한 말, 헛소리, 욕지거리, 삿대질… 좀 그만하시라! 제발, 거짓말은 하지 마시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정치가 사랑 한국 정치판 정치적 상황 이육사 시인
2025.04.10.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