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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의 선물

New York

2025.12.25 16:04 2025.12.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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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16, 2025, monoprint, 10 x 8 inches.

here 16, 2025, monoprint, 10 x 8 inches.

나는 일주일에 나흘 정도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출근한다. 평생, 직장이라고는 거의 다녀 본 적이 없는 내가 12년 전에 맨해튼으로 이사 오면서 그린포인트에 놔두고 온 스튜디오에 판화 작업하러 가는 것이다. 정오부터 6시까지 작업하고 늘어진 몸을 질질 끌며 집에 온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아직도 기운이 있어 출퇴근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결혼하고 첫해 크리스마스였다. 시아버지가 보내온 비행기 표를 들고 LA에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할 돈이 없어 판화를 액자에 넣어서 가져갔다.
 
“아버님, 선물로 제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판화가 아니냐?”
 
“네 저는 뉴욕에 와서는 판화 공부했어요. 학교 다닐 때 만든 작품이에요.”
 
“판화기가 있어야겠구나.”
 
1990년 어느 봄날, 시아버님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동봉한 큰 금액의 체크를 받았다.
 
“판화기를 사라. 공부한 것을 썩여서야 하겠니.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일에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꼭 판화기를 사서 작품에 전념해라. 난 너의 시어머니가 걱정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니. 나이 들어 소일거리 없이 자식만 바라보고 살 것이 걱정이다.”
 
그 해 따스한 봄날, 필라델피아 근교 판화 프레스기 판매하는 곳으로 향하는 시골길 여정은 아마도 내 생애에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님 감사해요. 열심히 작업할게요.’  
 
나는 그린포인트에 살면서 작업실 마련하고 아이들 키우며 화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다. 그린포인트만 생각하면 암울한 기억으로 외면한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우리의 첫 작업실이었던 시커먼 팔각형 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버티고 있는 옛 염색공장 부근은 얼씬도 안 했다. 추위에 떨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판화에 손을 놓아서 잘되지 않더니 며칠 지나자 신나게 찍었다. 다시 예전,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연판을 닦고 문지르면서 몸은 고달프지만, 삶의 활력을 느낀다. 판에 그림을 그리고 판화기를 돌릴 때는 팔심 좋은 남편이 거들어 준다. 아이들도 가끔 들여다보며 작업이 잘 나왔다고 응원한다.  
 
“할아버지가 사준 판화기야.”
 
“알아요.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수임 / 화가·맨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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