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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전 하원의원 "경제적 성공 안주 대신 사회 변화의 꿈 실천"

Los Angeles

2025.12.31 19:00 2025.12.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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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선구자' 김창준 전 하원의원
엔지니어로 성공 후 정치 입문 결단
아시아계 첫 3선, 다양한 '최초' 타이틀

많은 후배 정치 지망생들의 롤모델
정계 은퇴 후도 다양한 한미협력 활동
연방 하원의원 당선 확정 직후 승리를 축하하며 샴페인을 들어올린 김창준 전 의원. [중앙포토]

연방 하원의원 당선 확정 직후 승리를 축하하며 샴페인을 들어올린 김창준 전 의원. [중앙포토]

앤디 김 연방 상원의원이 지난해 한인 최초로 상원에 입성하면서 한인 정치력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현재 연방 하원에는 영 김·메릴린 스트릭랜드·데이브 민 등 3명의 한인 하원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의 출발점에는 한인 최초로 연방 의회의 문을 연 김창준(Jay Kim) 전 하원의원이 있다.
 
김 전 의원은 ‘한인 최초’라는 상징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아시아계 최초의 3선 연방 하원의원이자, 아시아계 최초의 공화당 소속 연방 의원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제는 한인 정치인들의 연방 진출이 점차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 그의 도전은 정치·사회적 환경 면에서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김 전 의원은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며 전쟁의 상흔 속에서 성장했다.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만 마쳤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61년, 23세의 나이에 미국행을 선택했다. 21살 때 미군 장교와의 인연으로 영어를 배우며 품었던 미국행의 꿈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단돈 500달러와 채피대 입학허가서 한 장을 들고 가주 땅을 밟았다.
 
그는 신문 배달과 식당 설거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학업을 병행했다. 결국 USC로 편입학해 토목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며 글쓰기와 현장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군중 앞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연설하던 유학생의 모습은 주변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
 
정치보다 먼저 자리 잡은 것은 엔지니어로서의 삶이었다. 1976년 설립한 토목 설계 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는 소규모 인력으로 출발해 10여 년 만에 직원 250여 명을 둔 가주 상위 500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설계 회사로 성장했다. 고속도로와 하수 처리 시설 설계 등 정부 프로젝트 공사들을 하며 기반을 다졌다. 1992년 LA 폭동 당시에는 피해 건물 철거 사업에 참여한 5개 소수계 기업 중 하나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기업인으로서의 성공에 머무르기보다 제도 변화를 통해 사회와 직접 맞닿는 역할을 고민했다. 그 결론이 정치였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회 선거에 출마해 9명의 후보 가운데 1위로 당선됐다. 이듬해에는 시장에 올랐다.
 
하원의원 재임 시절 자신이 속한 상임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김창준 전 의원. [중앙포토]

하원의원 재임 시절 자신이 속한 상임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김창준 전 의원. [중앙포토]

1992년 공화당은 김 전 의원에게 신설되는 연방 하원 캘리포니아 41지구 출마를 제안했다. LA·샌버나디노·오렌지 등 3개 카운티가 만나는 남가주의 핵심 지역구였다. 그는 감세와 정부 서비스 민영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불법체류자 사면에는 반대했지만, 낙태권에 대해서는 “여성의 생식권 문제에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30%의 득표율로 승리했고, 본선에서는 60%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꺾으며 연방 하원에 입성했다.
 
당선 직후 선거자금 관련 논란이 불거지며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회계 처리와 보고 누락 문제가 이어졌고, 언론 보도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1994년 재선, 1996년 3선에 성공했다.
 
재임 기간 그는 공공사업·교통위원회(후 교통·인프라위원회)와 중소기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정부 지출 축소와 행정 효율화를 강조했다. 민관 협력 방식의 인프라 투자, 지역 도로·하수 재활용 사업 등 지역구 현안 해결에도 관여했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그의 활동 무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워싱턴 DC로 근거지를 옮긴 그는 한미 간 가교 역할을 자임하며 민간 외교와 교류에 힘을 쏟았다. 북버지니아 자택을 1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공간으로 개조해 정치·문화·예술 모임을 열었고, 이곳은 워싱턴 일대 한인 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한덕수 당시 주미 대사와 황원균 북버지니아 한인회장 등이 모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발효를 논의한 자리도 이곳에서 마련됐다. 이 밖에도 한국 청년 인턴 초청 행사, 문화 공연 등이 이 공간에서 이뤄졌다.
 
2007년 워싱턴 한미포럼을 창립한 그는 전직 연방 상·하원의원 모임(FMC) 내 ‘코리아 스터디 그룹’ 신설을 주도했다. 독일·일본·EU에 이어 네 번째로 만들어진 이 연구그룹은 전·현직 연방 의원들과 한국 정·재계가 교류하는 공식 채널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19년 이후에는 매년 FMC 방한 프로그램을 이끌며 한미 민간 교류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래한미재단을 설립해 한국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장려했고, 2012년에는 김창준 아카데미를 설립해 한국의 정치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현재는 김창준한미연구원을 중심으로 후학 양성과 교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 전 의원의 이력은 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한인 이민사회가 연방 정치의 문턱을 처음 넘은 순간을 기록한다. 1998년 그의 퇴임 이후 2018년 앤디 김 당시 하원의원이 당선되기까지 연방 의회에는 20년 동안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 이 공백은 김창준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이른 시기의 도전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연방 의회에서 활동 중인 한인 정치인들의 존재는 그가 처음 찍어놓은 좌표 위에 있다. 미주 한인의 날 123주년, 이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다.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은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 1학년만 다녔으며, 군 복무를 마친 뒤 1961년 23세의 나이에 도미했다. USC에서 토목공학 학·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1976년 토목 설계 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를 설립해 10여 년 만에 가주 상위 500위 안에 드는 설계 전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듬해 시장으로 선출됐다. 김 전 의원은 1992년 연방 하원 가주 41지구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해당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정계 은퇴 이후 워싱턴 DC에서는 한미 양국 간 민간 외교와 교류를 지원했다. 현재 한국에서 김창준한미연구원을 중심으로 후학 양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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