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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훈 초대 한미은행장 “은행도 사회적 책무, 고객에 돌려줄 줄 알아야”

Los Angeles

2025.12.31 19:14 2025.12.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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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의 대부’ 정원훈 초대 한미은행장
한미은행 등 4개 은행의 초대 행장
끝없는 도전정신, 은행권 발전 토대

은행에 무료 법률상담 공간 마련도
은퇴 후 화가 활동, 제 2의 삶 개척
한미은행 설립 기념 행사에 참가한 정 전 행장의 모습.

한미은행 설립 기념 행사에 참가한 정 전 행장의 모습.

한인은행권의 ‘대부’이자 ‘산증인’.  
 
정원훈 전 한미은행 행장(1981~87년)에게 항상 붙어 다니는 수식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한인 금융권 인사들에게 은행가가 아닌 ‘개척자’로 남아있다. 단지 은행을 열고 자산과 예금을 늘리는 전통적인 뱅커의 일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커뮤니티 은행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매번 ‘도전’을 마다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한인은행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난 그는 1938년 서울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만주국 중앙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세기의 시작이었던 2001년 가주에서 아시아나 은행장을 끝으로 한인은행가를 떠나기까지 무려 60년을 금융과 함께 살아온 ‘영원한 뱅커’였던 그는 2014년 LA에서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70~80년대 초기 한인 경제권의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겪었던 그는 1974년 외환은행의 LA 현지법인인 가주외환은행(CKB) 초대 행장을 지냈으며, 1982년 한미은행, 1991년 새한은행, 1999년에는 샌호세에 아시아나 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행장을 맡았다. 4개의 한인은행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은행원으로서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새로 은행을 설립하면 많은 조명을 받았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 새로운 은행 문을 여는 데 열정을 바쳤다. 여러 은행에서 ‘내가 만들었다’는 지분을 주장할 만도 하지만, 필요하다 싶으면 짐을 싸고 사무실을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헌신 덕에 그가 초대 행장을 역임한 한미은행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한인은행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며 지금도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정 전 행장은 은행계의 대부로서 은행과 뱅커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했다.  
 
“비록 소규모 커뮤니티 은행이지만 고객들이 속한 커뮤니티에 주저 없이 돌려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사들도 개인적인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그는 공개적으로 강조했다.  
 
그가 80년대 중반 한인상공회의소 행사에서 인사말을 전하는 모습.

그가 80년대 중반 한인상공회의소 행사에서 인사말을 전하는 모습.

한인변호사협회가 1980년대 무료 법률 상담을 전개하도록 은행 문을 열어준 것도 정 전 행장의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법률 서비스에 목말라하던 한인들을 위해 은행 공간을 제공했다. 그는 은행에서 사회봉사 활동이 이뤄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변협을 이끌던 민병수 변호사(2023년 작고)가 당시 정 행장에게 많은 고마움을 표시한 것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다.  
 
28년 동안 한인은행가에서 일한 그는 지난 2001년 공식 은퇴했다.  더는 은행을 만들거나 은행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지런함은 그가 잊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캔버스를 열고 붓끝에서도 도전을 추구했다. 정 전 행장은 자신을 은행가 커리어와 별개로 ‘평생 화가’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는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와 미주한인서예협회 정회원으로 수차례 개인과 단체전을 여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정 전 행장은  평소 한인은행계가 한민족의 청빈 정신을 거울삼아 초심과 새로운 창업정신으로 제2의 도약을 이끌어내자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를 도전과 낭만을 겸비한 ‘선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1974년 이래 남가주한국미술가협회, 1991년 이래 미주서예협회에서 회원 및 이사로 활동해 온 그는 작품이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행가에서도 임원들이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언급도 이때 나온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오래도록 은행에 일하며 자신을 관리할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예술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그가 70대에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이어폰으로 독일어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조깅을 했던 이야기는 그의 도전 정신을 이야기할 때 아직도 예로 등장한다.  
 
정 전 행장은 자신의 자서전 격인 ‘은행 60년: 거울 앞에 돌아와’에서 신의주의 겨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한반도 북단의 가혹한 추위에서 고행을 이겨내고 서울로 입시를 보러 간 기억이 있다. 우리 세대의 고통이 후세의 영화로 이어진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고생이 아니겠나.”
 
한 한인은행 관계자는 “한인 사회가 더욱 커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을 바랐기 때문에 정 전 행장이 더 오래 활동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목표와 금전욕만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금의 한인은행 업계 종사자들이 다시 한번 새겨볼 부분이 아닐 수 없다”고 전했다.  
 
예술가로 잠깐 은행 일을 했다고 말하는 정 전 행장의 일생은 적어도 한인 사회에서는 두고두고 회자할 것이다.  
 
그가 토대를 닦은 한인은행권은 지금도 수많은 고객의 아메리칸 드림 실현을 돕고 있다. 
 

☞정원훈 전 행장은...

 
1920년 12월 평북 철산 출생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상대) 졸업
 
1967-72년 한국 외환은행 전무  
 
1973-79년 가주외환은행 행장  
 
1981-87년 한미은행 초대 행장  
 
1998-2001년 아시아나은행 행장

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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