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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 도로 위에서 와인이 말을 걸다

Los Angeles

2026.01.01 17:00 2026.01.0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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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빛과 프레임 사이에 여행을 담다]
사이드웨이(SIDEWAYS)
영화 사이드웨이 따라 걷는 샌타바버라
덴마크풍 마을에 내려앉은 영화의 숨결
포도밭 사이로 영화의 장면이 스친다
서두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
샌타이네즈 밸리 밭에서 와인용 포도가 태평양의 바람과 햇살을 품으며 익어가고 있다.

샌타이네즈 밸리 밭에서 와인용 포도가 태평양의 바람과 햇살을 품으며 익어가고 있다.

캘리포니아 101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에서 묘한 설렘이 피어오르는 지점이 있다.
 
LA의 소음이 뒤로 멀어질수록 풍경은 느슨해지고, 바람에는 포도밭이 펼쳐질 것만 같은 향이 스며든다.
 
처음 이 길을 지날 때 나는 2005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영화 〈사이드웨이·포스터〉의 두 주인공, 마일스와 잭을 떠올렸다. 그들이 몰던 붉은 컨버터블의 열기가 아직도 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두 남자의 우정과 상실, 그리고 와인이 발효시키는 기억의 향기를 따라 산타바바라 카운티로 향했다.
 
와이너리, 여행의 출발점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던 시절, 주말이면 자연스레 나파밸리와 소노마의 와이너리를 찾곤 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와인의 스펙이나 점수보다도, 시간이 만들어내는 깊이였다. LA로 이주한 뒤에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산타이네즈 밸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본 〈사이드웨이〉 이후, 이 지역의 풍경은 더 이상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게 됐다.
 
포도밭은 풍경이 아니라, 기억을 익히는 장소가 되었다.
 
덴마크풍 건물들이 늘어선 솔뱅은 와인 여행의 첫 관문이다.

덴마크풍 건물들이 늘어선 솔뱅은 와인 여행의 첫 관문이다.

솔뱅, 여행의 첫 향
 
샌타이네즈 밸리의 관문, 솔뱅에 들어서면 덴마크식 지붕과 풍차가 여행자를 맞는다.
 
영화는 이 작은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나지만, 나는 이곳에서 여행의 첫 페이지를 연다.
 
벤치에 앉아 풍차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일스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Day after day, I'm grinding away writing, hoping someday I’ll pick up a bottle and taste those years again.”
 
여행에서 우리가 찾는 것도 결국 사람의 향기다.
 
와인 속에 남아 있는 숨결을 이해해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완만한 구릉을 따라 펼쳐진 샌타이네즈 밸리는 영화 〈사이드웨이〉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완만한 구릉을 따라 펼쳐진 샌타이네즈 밸리는 영화 〈사이드웨이〉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와이너리 숙성고에 늘어선 오크통 속에서 와인은 시간과 함께 깊이를 더한다.

와이너리 숙성고에 늘어선 오크통 속에서 와인은 시간과 함께 깊이를 더한다.

 
피노 누아르, 이 땅을 닮은 포도
 
샌타이네즈 밸리가 ‘피노 누아르의 성지’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얇고 섬세한 껍질 탓에 재배가 까다로운 이 포도는, 토양과 기후의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품는다.
 
테이스팅룸에서 잔을 돌리면 붉은 체리와 석류, 라즈베리 향이 피어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숲속의 흙내음과 장미잎의 향이 따라온다.
 
이는 화학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향이다.
 
서늘한 아침 안개, 뜨거운 낮의 태양, 밤마다 불어오는 태평양의 찬 바람.  
 
그 모든 시간이 와인 속에 녹아 있다.  
 
마일스의 말처럼, “잘 키우기 정말 힘든 포도야.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하지.”
 
카베르네 소비뇽이 강하게 말한다면, 피노 누아르는 늘 속삭인다.
 
가장 좋은 순간은 오래 기다린다
 
와인을 마실 때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향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려야, 와인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속에서 마일스가 애지중지하던 1961년 샤토 슈발 블랑은 단순한 빈티지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살고 싶었던 시간의 이름이었다.
 
그 병을 패스트푸드점에서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장면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감동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다 너무 많은 시간을 놓쳤다는 깨달음.
 
그래서 지금, 열어버리는 선택.
 
와인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는 순간이다.
 
와인은 기억을 깨운다
 
포도밭을 걷다 보면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스며든다.
 
트랙터 소리, 흙 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코요테의 울음까지.
 
이 모든 풍경은 영화의 장면과 겹쳐진다.
 
한 와인메이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간을 만듭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와인을 마신다는 건, 누군가의 여름과 가을, 그리고 기다림을 마시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길 위에서, 그리고 남겨진 향
 
다시 101번 도로로 돌아온다.
 
엔진이 깨어나고, 포도밭이 창밖으로 천천히 흐른다.
 
나는 오늘도 와인이 아닌 시간을 마셨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내가 만드는 여행 코스들 역시 이 길을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나파와 소노마에서 시작된 와인 여정은 샌타이네즈 밸리에서 또 한 번 향이 열렸고, 손님들에게 건네는 여행 일정 속에도 이 영화의 와이너리들이 조용히 숨어 있다.
 
주말에 뭐 하지
 
푸른투어의 ‘샌타바버라·솔뱅 & 와이너리 당일 여행’을 통해 이 길을 달리는 손님들 또한, 각자의 속도로 자신만의 향이 열리는 순간을 만나게 되길 바란다.
 
와인을 마시듯 서두르지 않고, 기다림을 견디며 시간을 음미하는 여행. 오늘도 삶은, 그렇게 발효 중이다.
 
▶문의: (213) 739-2222
 
▶웹사이트: www.prttour.com

 

박태준
 
푸른투어 서부본부의 박태준 이사는 25년째 여행 현장을 누비며 가이드, 해외 인솔자, 상품 기획자, 여행컨설턴트로 활동해온 여행 전문가다. 다년간의 현장 경험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고객 맞춤형 여행은 물론 미국 전역과 해외를 아우르는 고품격 여행 서비스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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