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에게, 이런 일이?” 세상을 제법 살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터다. 대상도 특정할 수 없고 메아리도 있을 법하지 않은 원망의 말이다.
빌리 필그림이라는 44세의 미국인. 딸 결혼식 날 밤, 외계인들에게 잡혀간다. 영문을 모르는 채 그들의 비행접시 안으로 끌려들어 가며 그는 말한다.
“Why me?” “나를, 왜?”
트랜스팔마도르라는 먼 별에서 온 외계인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한다. “지구 놈들이나 하는 질문이지. 왜 너냐고? 왜 우리냐고 물어보지. 왜, 왜냐고 물어? 이 순간은 그저 이렇게 있을 뿐이야.(… this moment simply is.) 자네는 호박(amber) 속에 갇혀서 박제된 곤충을 본 적이 있나?”
“본적이 있죠.” “바로 그거야. 이 순간이라는 호박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 (그저 그럴 뿐) ‘왜’ 라는 질문은 성립이 안 되지 (There is no why.)”
빌리라는 사내는 22살 때, 2차대전 말 독일 드레스덴 공습 때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 극심한 트라우마로 가끔 헛것을 보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잘 살아가는 검안전문의(optometrist)였다.
그는 그렇게 끌려가서 트랜스팔마도르의 동물원에 지구인의 표본으로 전시된다. 비슷하게 잡혀온 여자 지구인과 합방해 아이까지 낳고 그저 그렇게 ‘몇 년’ 살다가 지구로 돌려보내 진다.
그의 시간으로는 몇 년이지만 외계인의 시간으로는 ‘한 순간’. 그는 잡혀간 그 순간 그곳에서 다시 지구로 온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라는 미국 소설가가 1966년에 출간한 ‘5호 도살장(Slaughterhouse Five)’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자신이 겪은 생지옥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보네커트는 22세에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전쟁 말기 드레스덴 폭격 당시 죽은 독일인 시체 발굴 처리반원이었다.
빌리가 그의 온 세상이 뒤집히는 그 순간에 내뱉은 두 마디 탄식, “Why me?”
그것이 이 지구별에서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난 중생들의 ‘전도몽상(顚倒夢想)’, 세상을 거꾸로 보고 꾸는 꿈이다. 우선 ‘나(me)’라는 존재가 의심할 여지 없는 주체이며 가장 소중한 주제이다. 또 ‘왜(why)’라는 물음 속에는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이 나 바깥의 어떤 존재 또는 힘의 탓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인간보다 한 차원이 높은 외계인의 눈으로 보면 지구인이 그렇게 집착하는 ‘나’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다 인연 따라 생겨서 한 시도 그대로 머물지 않는 무상(無常) 그 무엇일 뿐. 그리고 세상의 흐름을 누군가의 탓으로 이해하려는 본능적 습성이 뜬금없다.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까지 훤히 보이는 외계인에게는 빌리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분명해서 “왜”라는 질문은 필요가 없다.
“그저 이렇게 있을 뿐(… this moment simply is)”이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여여 (如如)하다’고 한다. 우리가 읽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여리실견(如理實見)’,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생각이 만든 나를 꼭 붙잡고 있는 한, 중생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리한 대로 본다. 그래서 나에게서 나를 씻어내는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말 대로 ‘눈 녹은 물이 또 눈을 씻어내는 것처럼(wash yourself of your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