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2026년 새해가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부를 새해의 이름은 병오년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부를 새해가 그 이름처럼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속과 겉이 똑같이 하나로 보이는 낱말이 생각났다. 등가개념(等價槪念)이란 낱말이다. 이를테면 아침 일찍 뜨는 샛별과 저녁에 보는 개밥바라기는 그 내포는 다르지만 바깥은 아주 똑같은 금성(金星)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금성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아주 재미있다. 특히 한국에서 일컬어지는 이야기와 서양에서 말하는 금성의 이야기는 아주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이 금성을 일컫는 이름들도 여러 가지다. 우리 한국에서는 초저녁에 나타나는 별을 개밥바라기 또는 태백성(太白星), 새벽에 볼 수 있는 샛별을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른다. 그런데 등가개념의 속성에 문제가 있다. 속이야 어떻든 바깥이 똑같기 때문에 바깥으로 보이는 것처럼 속도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국어 가운데 한문으로 인공(人工)이란 것이 있다. 자연물을 사람의 힘으로 다르게 바꿔 놓는 일 또는 아주 새로운 것으로 바꿔 놓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인공이란 말이 그냥 사물을 바꿔 놓는 뜻인지 또는 요즈음 Al 형태의 사람을 만드는 뜻인지 인공이란 낱말만 보고서는 그 속내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인공의 정의(定義)에 문제가 생긴다. 자연물을 사람의 힘으로 달리 바꿔 놓는 일이나 또는 새로운 것으로 바꿔 놓는 일이란 뜻은 맞지만 Al 형태의 사람을 만드는 뜻은 맞지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예수’를 ‘이에스’라고 적는다. 일본어로는 예수라고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어느 일본 학자는 한국어 인공의 정의 속내에 Al 형태의 종교적(이에스적?) 속성이 들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일본식 사고방식에 융통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특히 人工의 한문자를 일본어로 ‘이에’이며 여기에다가 한글의 ㅈ를 붙여 ‘이에스’라고 불러 종교적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금성을 비너스(Venus)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별빛을 바탕으로 개밥바라기와 샛별이 금성이란 이름으로 등가개념이 이뤄졌지만 미국에서는 금성과 지구가 크기가 비슷하여 금성을 ‘지구의 쌍둥이(earth’s twin)’이라 일컬는다. 금성은 그 크기가 직경 1만2100 킬로미터로 지구보다 644 킬로미터가 작다. 금성은 지구에서 바라봤을 때 다른 위성보다 그 빛이 밝다. 옛날 천문학자들은 아침에 뜨는 금성을 포스포루스(Phosphnerus), 저녁에 뜨는 별을 헤스페루스(Hesperus)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이 별들이 둘이 아니고 같은 별임을 알고 그 이름을 로마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을 사모해서 비너스라고 지었다고 한다. 금성이 한국에선 등가개념이란 철학적 산물을, 미국에선 우주과학의 무인항행을 선사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일컫는 등가개념의 속성이 금성처럼 유익한 선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윤경중 / 릿쥐크레스트한민교회 명예목사열린광장 등가개념 금성 한국어 인공 한국어 가운데 샛별과 저녁
2025.12.16. 20:25
미시간에 살던 로널드 리드(Ronald Read)는 늘 낡은 차를 타고 다니며 점심은 2달러짜리 샌드위치로 해결하던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유소와 자동차 정비소에서 평생을 일한 성실한 노동자였고, 시간이 나면 동네 도서관을 찾던 평범한 미국인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부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공개된 그의 주식 계좌 잔액은 무려 800만 달러가 넘었다. 그는 번 만큼 쓰지 않았고, 평생 미국의 우량주에 조용히 장기 투자를 했다. 아무도 모르게, 묵묵히 부를 키운 것이다. 생전에는 검소했지만, 2014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부자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는 브래틀버러 병원에 약 480만 달러, 자신이 늘 다니던 공공도서관에 120만 달러를 기부했다. 병원은 역사상 가장 큰 개인 기부를 받았고,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새긴 공간을 마련했다. 반면 리처드 퓨즈콘(Richard Fuscone)은 겉으로는 전형적인 ‘부자’였다. 노틀댐 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은 그는 대형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부회장까지 지냈다. 침실 12개에 욕실 12개, 실내 수영장에 극장까지 갖춘 호화 맨션에서 살았고, 이동할 때는 헬리콥터를 이용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그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과소비와 빚, 무리한 투자 탓에 그의 맨션은 압류되었고, 세금 문제와 법적 분쟁이 이어지면서 파산을 거쳐 감옥까지 다녀왔다. 엄청난 부자로 살았지만, 그의 가난한 죽음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모건 하우절(Morgan Housel)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Money)’에서 두 사람의 사례를 소개했다. 하우절은 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자는 ‘얼마나 많이 버는가’라는 ‘소득’이 아니라 ‘얼마나 절제하고, 꾸준히 오래 기다릴 수 있는가’라는 ‘습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로 죽은 로널드 리드의 검소함과 그가 남긴 재산, 그리고 그가 유언으로 행한 기부를 커다란 미덕으로 본다. 많은 사람이 로널드 리드의 검소함과 절약, 그리고 꾸준한 투자를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절약이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돈을 모으고 현명하게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누리고, 사는 동안 기쁨을 경험하는 것 역시 재산의 중요한 쓰임이기 때문이다. 저축을 아무리 잘해도, 정작 본인은 그 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은 비록 ‘부자로는 죽겠지만, 가난한 삶을 산’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내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이레를 굶는다더니 나중에 잘 살려고 아끼다가 굶어 죽는다더라.” 절약도 좋지만, 너무 아껴서 삶 자체를 즐기지도 못하고 놓치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다. 퓨즈콘처럼 빚으로 만든 성 위에서 허황된 삶을 사는 것도 피할 일이겠지만, 리드와 같이 재산을 늘리기만 하고, 자신은 즐겨보지도 못하는 삶 또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늘 그렇지만, 지혜는 중용에 있다. 미래를 위해 늘 조용히 준비하면서도, 행복을 위해 오늘을 누려야, ‘부자로 살고, 부자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부자 로널드 리드 대형 투자은행 하바드 경영대학원
2025.12.15. 19:27
올해는 시인 고원 박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외적으로 명망 있는 시인이며, 번역가이고 영문학자이셨으며 또한 민주화 운동가이시기도 했던 고원 박사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5년 12월 8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산골에서 태어나셨다. 그해 1925년은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라는 을축년 대홍수가 있었던 해였다. 일제의 식민지 만행이 극심했던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의 만주사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이어서 해방과 분단, 1950년대 한국전쟁-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원 박사는 전주로, 서울로, 런던으로, 뉴욕으로 장소를 넓혀가며 학업에 매진하셨고 뉴욕 NYU에서 비교 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공부를 마친 뒤에 선생은 뉴욕과 LA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시며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펴나가셨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김지하 시인을 구출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등 유신독재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인권, 민주화 운동을 벌이시기도 하였다. 내가 LA에서 고원 박사를 만나 길지 않은 세월 동안이나마 가깝게 교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원로 민주화 운동가로 존경했던 분이기도 했지만 충청북도 영동이 매체가 된 연유도 있었다. 내가 한국전쟁 때 피난을 떠나 중학교까지 다녔던 곳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이었는데 고원 박사의 출생지 영동군 학산면과는 매우 인접한 곳이었다. 2001년 ‘고향이 어딥니까?’라는 수필집을 만들어 출판 기념회를 하는 자리에 선생이 기꺼이 서평을 허락해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 고향은 영동”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모른다. 당시 LA문화원장으로 나와 있던 분도 마침 영동 출신이어서 세 분이 자주 만나 고향이야기와 세상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더해 갔었다. 선생은 평소 성품이 매우 친화적이며 유머가 많으신 분이었다. 2008년 1월, 83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뒤 정찬열씨 등 후배 문인들이 고원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해마다 고원 문학상을 선정하고 문학세계를 출판하는가 하면 영동에 고원 박사 시비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는 19일에는 LA에서 고원 박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연다고 한다. 인연은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지금 나는 선생이 LA로 옮기시기 전에 사셨던 뉴저지 리빙스턴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곳에 와서 살고 있다. 여기서 이곳의 친구로부터 선생이 이곳에 계실 때 교회와 커뮤니티에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셨으며 아드님은 미국교회 목사로, 따님은 주류 TV방송의 유명작가로 성공시키기는 등 자녀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셨는지를 전해 듣고 있다. 또 다른 100년이 되기까지, 고원 박사님이 품으셨던 고향과 고국에 대한 한없는 애정, 그리고 평생을 그리셨던 인간사회의 사랑과 정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채워져 나갈 것인지, 간절한 소원을 가져볼 뿐이다. 김용현 / 언론인열린광장 세월 고원 고원 박사 고원 문학상 충청북도 영동군
2025.12.11. 18:20
링컨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져있는 페니(1센트 동전)는 미국화폐의 최저 단위의 법정화폐로 1793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232년간 계속 생산, 유통되어 왔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무부에 내린 지시에 의해 지난 11월 12일, 마지막 페니가 제조됐고, 그 이후부터는 그 생산이 중단됐다. 이유는 페니의 제조비용이 액면가치보다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무부에 의하면, 1센트 페니의 제조 비용은 1.69센트라고 한다. 이 조치로 미국정부는 약 5600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게 되는 효과를 갖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페니는 여전히 미국에서 법정화폐 지위를 유지하며 마켓 등에서 계속 사용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는 약 3000억 개의 페니가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이 조치는 정부 차원의 예산 절감을 위한 개혁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반 시민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전 화폐에 대하여, 제조뿐만 아니라, 아예 통용을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동전을 휴대하고 다니기가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 동전을 사용할 필요가 거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자들 대부분은 물건을 살 때 크레딧카드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미국에 사는 성인들 중 크레딧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연준(Federal Reserve)의 2024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성인중 약 17~19%의 사람들이 크레딧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서류미비자 등 거주 신분 형편상 크레딧카드를 신청할 수 없는 이들이 많다고 본다면, 크레딧카드 없이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들의 지급수단은 현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동전은 휴대하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꽤 불편한 점이 많다. 나는 상점에서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받게 되는 경우, 계산대에 비치되어있는 ‘기부금(donation)’ 함에 넣는다. 하지만 기부금 함이 없는 상점도 많다. 자연히 주머니에 동전을 넣어 오게 되므로, 집안 어딘가에 동전이 쌓이게 된다. 제조비용이 액면가보다 더 높은 동전들을 계속, 발행, 유통, 사용케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하고 합리적일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나 혼자 만의 생각일까? 상품에 센트(cent) 단위의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 과연 필요하고 합리성이 있는 것일까? 또 ‘몇 달러 몇 센트’ 가격표, 그런 것이 지금도 물가에 영향을 끼칠까? 상품의 가격표에서 아예 ‘센트’ 단위를 없애 페니 사용을 없애는 것이 고객들의 불편을 없애는 방법일 수 있다. 센트 단위를 없애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물가가 센트 제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 않은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동전 및 센트 단위 가격표를 없앴다. 정부는 페니 제조를 없애는 소극적 개혁을 할 게 아니라 아예 센트 단위 가격제 및 페니 동전을 전면 폐지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김택규 / 전 서울 감신대객원교수열린광장 가격표 중단 중단 가격표 단위 가격표 동전 화폐
2025.12.10. 19:52
블랙프라이데이는 큰 연례행사였다. 목요일 신문을 사서 세일 품목을 검토하고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필요하면 가족이 분산하는 쇼핑계획까지 세우곤 했다.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매장을 찾으면 이미 긴 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라인 쇼핑 덕에 굳이 새벽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은 내가 포장을 하고 우체국까지 가는 번거로움 없이 배달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필요하면 카드도 동봉할 수 있다. 지난 블랙프라이데이와 사이버 먼데이에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세일을 한다. 가격을 올려놓고 할인해 주는 행사의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제 쇼핑을 그만두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일 년 12달, 거의 매주 쇼핑을 한다. 선물 때문이다. 내게는 야구팀을 구성할 수 있는 숫자의 자녀와 그들의 배우자가 있고, 9명 외에 지명 대타까지 넣을 수 있는 숫자의 손주들이 있다. 평균 한 달에 2명 정도의 생일이 있다. 여기에 어머니 날에는 딸과 며느리, 아버지 날에는 아들과 사위에게 선물을 보낸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면 가족 외에 친지, 교우 등과 나눌 선물을 마련한다. 잊지 않고 생일을 알려주는 스마트 폰과 쇼핑의 동반자 노트북이 있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내와 나는 선물에 대해 다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가능하면 자주 많은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반면, 아내는 자칫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한다. 손주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무엇이든 하나씩 선물을 준다. 이건 첫 손자를 낳았을 때부터 시작한 일이다. 자동차, 인형, 책, 레고 등 작은 것을 하나씩 주면 아이들은 그걸 가지고 노느라 크게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게다가 할아버지 집에 가자고 하면 무릇 기대감을 가지고 올 것이다. 선물을 고르다 보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취미가 있는 사람이거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좋은데, 아니면 그냥 내 취향대로 가게 된다. 나 역시 예상치 못 한 선물을 받고는, 뭐 이런 것을 주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언제 이런 물건을 쓰거나 먹어보겠나. 새로운 경험이다. 내가 아끼는 선물 중에는 10여 년 전에 받은 휠체어 장갑과 노트북 받침대가 있다. 내가 받아서 써 보기 전에는 편리함을 몰랐던 물건들이다. 굳이 따지자면 현금이나 선물권이 실용적이긴 하다. 하지만 선물에는 실용성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포장된 선물을 받는 즐거움, 그걸 열어보는 기쁨이 있다. 무엇보다 선물을 고르고 포장해서 건네주는 이의 따스한 마음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있는 12월, 산타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광장 산타 온라인 쇼핑 동반자 노트북 노트북 받침대
2025.12.09. 18:43
단잠에서 깬 이른 아침, 몸을 이리저리 틀어 하루의 창문을 엽니다. 잠든 동안 단 한순간도 심장이 멈추지 않게 하신 창조주가 계심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아신다”는 다윗의 시편(139:2)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생각의 가닥들을 천천히 넘기다 보니, 참으로 이상하게도 10대 시절, 철없던 때의 기억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호롱불을 켜놓고 놀고 있으면 할머니는 “야야, 기름 달겠다. 불 끄고 일찍 자거라” 하고 타이르셨습니다. 장작과 벼짚을 땔감으로 쓰던 시절, 눈 오는 날 들판에서 놀다 돌아오면 누나는 따뜻하고 통통한 두 손바닥으로 내 언 손을 감싸 녹여주곤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플까 국밥을 듬뿍 담아 건네던 어머니, 그리고 호롱불 아래에서 양말의 구멍을 꿰매던 모습도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머나먼 땅, ‘꿈이 있는 나라’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니 문득 믿기지가 않습니다. 어제는 교도소 사역 일정으로 연방교도소를 찾았습니다. 재소자들이 예배당으로 올 때까지 잠시 조용히 앉아 있는데, 문득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곳에 있는가.” 잠시 후 재소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를 좌우로 나누어 놓고 줄 맞춰 앉았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도 있고, 빈손으로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무 명 남짓의 재소자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앉았습니다. 앞에는 강단과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서너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정돈된 작은 예배실이었습니다. 책꽂이에는 우리 ‘푸른초장’에서 매달 보내는 성경책이 단정히 꽂혀 있었습니다. 나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혹시 기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한 재소자가 나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설교 원고에는 없는 질문을 불쑥 던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여기에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때 한 재소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하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참으로 좋은 질문이었지만,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을 위로 들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냥 웃주었습니다. 누군가 박수를 치자, 모두가 함께 박수를 치며 웃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때 문득, 내가 오래전부터 작은 메모지에 적어 성경책 속에 넣어 다니던 채희동 씨의 책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중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대화’라는 짧은 글인데, 중학교 교사와 ‘순이’라는 여학생의 대화가 소재입니다. “순이는 뭐가 되고 싶어?” “저는 아무것도 안 될 거예요. 정말.” “그래도 뭐가 될 텐데?” “정말 저는 아무것도 안 될 거예요. 저는 사람이 될 거예요. 선생님도, 하나님도 절대로 안 될 거예요. 저는 진짜로 사람이 될 거예요.” 참 짧지만 마음을 울리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말씀과 함께 재소자들에게 나누었습니다. 연말입니다. 마음도 몸도 분주한 나날입니다. 못 다한 일들이 떠오릅니다. 올해도 얼마나 많은 격려와 사랑, 기도를 받았는지. 다 갚지 못한 채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한 분 한 분을 기억하며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그 여학생의 말처럼 “나는 진짜로 사람이 될 거야”라는 고백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변성수 / 교도소 사역 목사열린광장 사랑 기도 순간 마음 중학교 교사
2025.12.08. 19:39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웬디스’는 내가 즐겨 찾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식당이다. 주로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자료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실내 공간이 넓고, 쾌적하며 카운터에서 직접 볼 수 없는 구조여서 부담 없이 오래 머물 수 있다. 간혹 햄버거가 먹고 싶을 때는 좋아하는 칼스 주니어 햄버거를 먹기 때문에 조금은 미안할 때가 있다. 그래도 직원들은 한결 같이 친절하다. 웬디스는 데이브 토마스가 1969년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에서 처음 매장을 연 햄버거 체인점이다. 그는 다른 햄버거 체인점들이 아직 주목하지 않았던 중서부 지역에 웬디스를 창업했다. 이는 당시 맥도날드나 버거킹의 체인점 비율이 낮았던 지역적 특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1932년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서 태어나 6주 만에 토마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5살 때 양어머니가 죽고, 직업을 따라 옮겨다니는 양부와 평탄치 않은 삶을 살며,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12살부터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양외할머니와 살기도 했다. 이때 양외할머니가 컨테이너에 살면서도 데이브에게 평생 지켜야 할 세 가지 교훈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데이브의 웬디스가 세계에서 맥도날드, KFC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매장을 가진 햄버거 식당이 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첫째, 옳은 일을 해라(Doing the right thing). 둘째,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라(Treating people well). 셋째, 질과 서비스를 중요시하라(Important lessons about quality and service)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모든 사업에 적용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리하고 있다. 식당에서 일하던 그는 30대 초에 주방장이 되었고, 이때 한참 가맹점을 늘려가던 KFC의 창업자 샌더스가 찾아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망해가던 KFC 4개를 맡아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매장을 살려내어 큰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웬디스를 창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웬디스를 중서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키워 내었다. 동북부를 대표하는 ‘파이브 가이즈’, 서부를 대표하는 ‘인 앤 아웃’과 더불어 지역별 대표 기업이 된 것이다. 그는 항상 새로운 개념을 사업에 적용하기 위해 애를 썼다. 패스트푸드라는 이름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간편 외식점(Quick Service Restaurant)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성공을 거둔 세계적인 부호임에도 “나는 그저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라며 겸손해 했다. 그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웬디스 TV 광고에 가장 오랜 기간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겸손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는 부의 사회환원 방법으로 입양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했다. 웬디스에 가면 여기저기 보이는 로고,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말괄량이 삐삐’는 그의 딸 멜린다의 어릴 때 모습을 본떴다. 딸의 애칭이 ‘웬디’다. 그는 딸 이름으로 상호로 삼고, 본인은 대표 햄버거 메뉴인 ‘Dave’s’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최성규 / 베스트 영어 훈련 원장열린광장 성공 철학 햄버거 식당 햄버거 체인점들 주니어 햄버거
2025.12.07. 18:00
오늘날 AI는 인간의 능력을 놀라울 만큼 확장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19세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은 오늘의 AI 시대를 예언한 듯한 작품이다. 지킬 박사는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다고 믿고, 실험을 통해 자신의 악한 본성을 따로 떼어내려 했다. 그가 만들어낸 악한 존재 하이드는 점점 지킬을 삼켜버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악에 의해 파멸한다. AI의 등장도 어쩌면 현대판 지킬 박사의 실험과 닮아있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AI를 통해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고, 감정을 계산하고, 판단을 자동화한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AI는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대신할 수 없다. 오히려 통제되지 않은 기술은 또 다른 하이드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지킬 박사도 처음엔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다. 인간의 선한 부분만 남겨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질서 밖에서 조작하려 한 오만을 범했다. 인간이 만든 약이 인간의 본성을 구원할 수 없듯, 인간이 만든 AI 역시 인간의 죄성은 구원할 수 없다. GPU는 방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계산하며 AI에게 빠른 판단과 예측 능력을 제공한다. 이미 AI는 인간의 노동, 사고, 창조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며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문제는 AI가 인간의 도구로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도구처럼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실제 사회에서도 GPU 기반 AI는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SNS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해 감정을 자극하고, 자율주행 차량과 무인 시스템은 인간의 판단 없이 결정을 내린다.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틀이 되어 버렸다. AI가 아무리 정밀해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양심과 영성이다. GPU와 AI는 도구일 뿐, 인간 존재의 핵심을 대체할 수 없다. 오히려 AI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을 증폭할 수 있다. 지킬 박사가 자신을 시험하며 하이드에게 지배당했듯이, 양심 없는 AI는 인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형상 안에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회피하며, 사랑과 회개로 성장하는 영혼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GPU가 아무리 빠르고 정확해도, 알고리즘은 기도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잘못을 회개할 수도 없다. 창의적 예술, 감성적 노동, 상담, 고도의 창의적 문제 해결이 필요한 분야는 AI로 대체되기 어렵다. 복잡한 협상 및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일은 인간의 고유한 판단력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AI는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작업에서 강점이 보이지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작업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단순히 정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양심과 사랑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는 존재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정답’을 제시하지만, 그 ‘정답’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정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양심과 사랑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AI는 잘못된 명령을 받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인간은 잘못을 깨닫는다. AI는 감정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사랑과 공감할 수 없다.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 상처 입은 이웃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헌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희생이며, 관계의 깊이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이요 결단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알고리즘 기도 존재 하이드 인간 존재 예측 능력
2025.12.04. 19:07
인도 남부 도시 첸나이의 분주한 채소 시장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가득 찬다. 이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상인들은 아침에 장사를 시작하려면 그날 필요한 채소를 도매시장에서 사와야 한다. 문제는 이들에게 채소를 사 올 목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아침 평균 1000루피를 사채업자에게 빌린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1050루피를 갚는다. 하루 이자만 50루피다. 엄청난 고이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하루 장사를 마치고 손에 쥐는 순이익이 대략 200루피 정도 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50루피를 이자로 지불하고, 남은 150루피로 식비, 집세, 병원비 같이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충당하며 빠듯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팍팍한 일상 속에서, 만일 이들이 하루 10루피씩이라도 저축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열흘만 모아도 100루피가 된다. 그러면 이제 사채업자에게 900루피만 빌리면 되고, 이자 또한 매일 5루피씩 아낄 수 있다. 하루 10루피씩 100일을 모으면 1000루피가 되어 사채업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본으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매일 내던 50루피의 이자를 고스란히 절약해 하루 생활비를 200루피로 늘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사채업자에게 1000루피를 다시 빌린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들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터널링(tunneling) 효과’라고 부른다. 터널링은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눈앞의 급한 문제만을 보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만 처리하게 되는 현상이다. 자신이 처한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대충 버티며 살아왔던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의 한 유명 여성 코미디언이 유방암에 걸려 항암 치료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늘 바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잠깐 시간이 나면 여행 가방을 싸서 곧장 여행을 떠났단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또 다른 바쁜 여행 일정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더 큰 스트레스를 쌓아왔던 삶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픽업해 올 때가 있다. 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하겠다며 늦게 끝내고 늘 서둘러 커피를 픽업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운동을 일찍 마치고 조금 여유 있게 나왔다. 그날따라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천천히 여유있게 운전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천성이 못된 탓도 있지만, 늘 돈과 시간이 모자라다는 ‘결핍’의 마음가짐이 그동안 나를 조급하고 예민하게 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결핍은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판단을 흐리며, 내일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터널을 만든다. 결핍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단한 의지가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여유다. 약속시간에 조금 일찍 출발하고,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게임을 하거나 유트브를 보는 대신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넓게 보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돈과 시간이 많아도 누구나 결핍의 터널에 갇힐 수 있다. ‘Stay Hungry’라고 평생 외치다 간 스티브 잡스는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일상에서 작은 여유를 만들고, 그 여유를 지키려는 노력이 우리를 터널 밖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결핍 터널 심리적 터널 채소 시장 여행 일정
2025.12.03. 19:23
나와 또래인 일본 도쿄공업대학 교수 출신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 그의 저서 『인공 J(예수)』를 읽었다. 대학 시절 기독교인이 된 그는 예수의 언행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문학박사 학위를 지닌 저자가 기독교 조직신학의 깊은 내용을 풀어낸 대목에 감동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의를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지만, 기록 주체는 인간이다. 성서 대부분은 1세기 혹은 그 이전에 쓰였으며 그 시대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과 낱말이 적지 않다. 특히 성서의 용어들은 히브리적이거나 헬라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어, 그 문화권 밖에 있는 현대인에게는 신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주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 내려오시어 장막 어귀에 서시고”(민수기 12:5),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4:30)와 같은 구절들은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 표현은 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사람들에게 구름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유일한 매개였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동서남북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고, 해는 바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반대편에서 떠오른다고 믿었다. 그들의 세계는 하늘(천국), 땅(지구), 땅 밑(지옥)으로 이루어진 삼층적 구조였다. 이 틀 안에서 보면 천국은 물리적으로 ‘위’, 지옥은 물리적으로 ‘아래’에 존재했다. 만약 이 관념대로 LA에서 지옥을 향해 곧장 땅을 판다면, 결국 지구 반대편 티베트 땅을 뚫고 히말라야 산 정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1세기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성서의 몇몇 표현은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지, 오늘의 과학적 시각으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그렇기에 21세기의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는 신화처럼 들리는 표현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사실처럼 들리도록’ 해석해 주어야 한다. 이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서와 신화」에서 강조한 ‘비신화화(demythologizing)’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이 ‘하늘’은 유대인의 관념으로 보면 구름 위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의도한 의미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공간, 즉 시공을 초월한 ‘하늘’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하늘 나라를 설명할 때 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대와 다른 깊은 우주관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도 삼층적 우주관의 산물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신화처럼만 보이지만, 성서 기자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되도록 사용한 언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성서의 신화적 표현을 오늘 우리의 관점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바르고 건강한 성서 이해라고 나는 믿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추구한 방향에 나 역시 동의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세이이치의 통찰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사실 예수는 특별한 인간, 다른 누구와도 질적으로 격절한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더욱 진실하게 드러낸 사람이다.” 그의 이 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삶 속에서 드러난 깊은 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윤경중 / 명예목사·릿쥐크레스트 한민교회열린광장 하나님 구름 하늘 구름 신화적 표현 하늘 나라
2025.12.01. 18:25
금년도 어느새 훌쩍 흘러가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뱀띠 해가 지나가고 말띠 해가 다가오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움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과정이 송구영신 또는 근하신년이다. 연말연시가 되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지인이나 웃어른께 안부를 전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곤 했는데 그 문구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며’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요즈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든 손수 쓴 카드 인사는 거의 사라지고 대신 온기 없는 겉치레 인사가 휴대전화에서 불이 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이나 조국인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미국은 트럼프가 1월에 취임한 이후 관세폭탄과 불법 이민자 추방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여 편안한 날이 없었고 한국도 큰 소란으로 일 년 내내 떠들썩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판단 착오의 계엄령으로 지난해 12월 임기 중 그 직에서 탄핵을 당하였고 영부인마저 물의를 일으켜 영어의 몸이 되었다. 부귀영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란 것을 일깨워 주었고 또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지 좋은 본보기가 된 해였다. 나 역시도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척추관 협착증으로 단 1분을 서있기가 힘들었고 보행기에 의존하여 10미터 정도를 걷기가 괴로워 죽을 맛이었다. 지금까지도 정형외과에서 치료받고 있는 중인데 그 통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미국의 송구영신 행사는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동부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며 축포를 쏘아 올리고 환호하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한국은 제야의 행사로 보신각에서 사회 저명 인사들이 모여 33번의 타종으로 신년을 알린다. TV로 중계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새해에는 왠지 길조가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설렌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매년 해가 바뀌면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결심으로 옹골진 목표를 정했으나 작심삼일로 용두사미 꼴이 거듭하기만 하였다. 이번 새해에는 큰 각오보다는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 보리라 다짐한다. 나는 갑오년 말띠 생이다. 내 나이 70대 초반, 살아온 삶이 짧은 것 같은데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옛날 같으면 산에서 누워 있을 나이다. 남은 생은 덤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리라. 우리는 뱀을 사악한 동물로 여긴다. 지나가는 계사년의 뱀을 다가오는 병오년의 말이 잡아먹고 원기를 보충하여 힘차게 달려주는 한 해가 되어 주기를 소망한다. 새해가 되면 어르신께 세배 드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면 우리에게는 덕담이 돌아왔다. 지금은 그 세배가 그리운 추억이 되어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제 지나간 일은 ‘훌훌’ 다 털어버리자. 나에게 서운하게 해준 사람, 미워했던 사람도 모두 용서해 주고 그 사람의 복을 빌어 주기로 하자. 삼가 새해를 축하하며 내년엔 모든 소망 꼭 이루시길 간절히 기원하며 밝아오는 새 아침을 맞이하련다. 이진용 / 수필가열린광장 송구영신 용서 송구영신 용서 송구영신 행사 카드 인사
2025.11.30. 17:03
1950년 6월, 새벽을 찢고 터진 포성 앞에서 한반도는 순식간에 잿빛 폐허로 변했고, 국가는 절망의 끝자락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한국의 아들딸들은 맨주먹으로 총을 들었다. 열여섯의 소년이 학도병으로 전장에 섰고, 이름 모를 미국의 젊은 병사들도 유엔군으로 그 곁을 지켰다. 세월은 어느새 일흔다섯 해를 훌쩍 넘겼다. 전쟁을 견뎌낸 참전노병들은 이제 아흔을 넘은 노구로 삶을 붙들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 소원은 크지 않다. 젊은 날, 눈앞에서 스러져간 전우들의 이름을 이 세상 어딘가에 또렷이 남겨 달라는 것, 그 염원을 담아 우리 한인사회에 ‘참전 충혼비’ 건립을 조심스레 호소하고 있다. 얼마 전, 단 3500명의 한인이 사는 콜로라도 오로라시에 한국전 전몰 장병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작은 공동체가 보여준 그 귀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정작 22만여 명의 한인이 모여 사는 이곳 LA에는, 대한민국의 젊은 전사자 13만7000여 명을 기릴 충혼비 하나 없다. 정치·경제·문화 각계에 뛰어난 동포들이 포진한 이 땅에, 우리를 지켜낸 희생의 흔적만큼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가주, 그중에서도 LA는 미주 한인 이민의 중심이자, 대한민국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견뎌온 공동체의 터전이다. 이 땅에 6·25의 기억을 새길 상징물이 없다는 사실은, 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진 역사적 책무를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는 고요한 부름처럼 다가온다. 해마다 기념식이 열리고, 제복을 차려입은 노병들이 흐린 눈빛으로 국기를 바라보고 떨리는 손으로 경례를 하지만 그 헌신을 영원히 붙들어 둘 공간은 아직 비어 있다. 이곳 LA에 충혼비를 세우려는 뜻은 크지 않은 돌 하나를 조촐하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전우들의 넋을, 타국의 하늘 아래서라도 살뜰히 모시겠다는 마음이기도 하다. 전장을 함께 누볐던 생존 용사들의 절실한 바람을, 우리 동포사회가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 안아 주기를 고대한다.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살아남은 용사들은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기념비는 잊지 않는다. 돌은 침묵으로 말하고, 침묵은 오랫동안 기억을 품는다. 기념비는 후세에게 역사의 실체를 가르칠 것이며, 자유가 어떤 희생을 밟고 이 땅에 도달했는지를 조용히 증언할 것이다. 혹독한 겨울 산야에서, 끝없는 포연 속에서, 병사들이 남긴 마지막 외침은 “조국을 지켜야 한다”였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피 위에 대한민국은 세워졌고, 그들의 희생 덕에 우리는 이 자유의 땅에서 당당한 한인으로 살아간다. 사람은 잊지만, 돌은 잊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세울 충혼비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민족의 기억을 세우는 일, 한 시대의 자부심을 한 자리에 새기는 일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무관심 헌신 헌신 22만명 참전 충혼비 우리 한인사회
2025.11.27. 18:00
또다시 찾아오는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많은 것에 감사하는 시기다. 바쁘게 흘러간 일상을 잠시 멈추고, 올 한 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우리의 삶은 과연 행복했는가를 잠깐 짬을 내어 자신을 점검하는 ‘휴먼 도크(Human Dock)’ 시간이다. 한 해 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근심과 바람, 기쁨과 아쉬움을 조용히 꺼내어 들여다보는 아주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다. 이것은 보편적인 소망이자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인간의 꿈이다. 그래서 저마다 열심히 한 세상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돈을 행복의 기준이라 믿고, 어떤 이는 명예와 지위 속에서 안정과 만족을 찾으려 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재능과 성취를 통해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의심치 않기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성공 하나에 온 힘을 기울인다. 하지만 인생길은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사력을 다해도 성공하기가 쉽지않고, 성공한다 해도 행복이 보장되란 법도 없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길엔 분명 우리가 깨우치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무서운 ‘함정’이 숨겨 있는 건 아닐까? 신기하게도 성서 창세기에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이브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함정이야기가 등장한다. 바로 ‘비교 의식’. 비교는 인간의 마음에서 감사와 평화를 빼앗아가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저 먹음직스러운 금단의 과일을 따 먹으면 너도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는 사탄(뱀)의 유혹 말이다. 만족을 모르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더 좋고 나쁜 것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면, 더이상 인간은 평화로워질 수도, 감사를 느낄 수도 없음을 교활한 사탄은 알고 무기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삶에 만족하다가도, 자신보다 더 좋아 보이는 친구나 이웃의 처지를 보는 순간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감사를 잃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SNS가 비교의식을 더 부추기며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비교는 행복을 앗아가는 가장 교묘하고도 오래된 유혹이다. 그러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보여준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크고 대단한 것에서 오지 않는다. 작은 것이라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 건강, 가족, 그리고 오늘 하루의 평범한 안정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다. 아마도 창조주께서 ‘비교의 과일’만은 금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성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라”(데살로니카 전서 5:16-18). 비교의 함정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현재 삶에 감사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 되게 하소서. 추수감사절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의 날이다. Happy Thanksgiving!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의사열린광장 추수감사절 행복 동안 마음속 아버지 하느님 순간 비교의식
2025.11.26. 20:16
지난 10월 남가주 동신교회 에서 ‘2025년 밀알의 밤’ 행사가 ‘돌보심’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집이 가난한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한 행사였다. 시간이 되어 교회로 들어서자 교회 문 앞에서 밝은 유니폼을 입은 젊은 청년들이 밝게 웃으며 참석자들을 맞이했다. 본당 로비에도 많은 청년들이 책상을 놓고 앉아 “하나님이 OOO님을 돌보십니다”라고 적인 예쁜 카드에 일일이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어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한글이 서툰 저 어린 청년들에게 밝게 웃으며 진심 어린 인사를 하게 누가 가르쳤을까?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큰 교회여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을 지나칠 일이 없는데, 어쩌다 만나는 어린이들이 밝게 웃으며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고 처음에는 깜짝 놀랬다. 주위를 돌아봤다. 분명 내게 하는 인사였다. 지금은 40대인 우리 자녀들이 교회 학생이었을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 학생들은 교회 어른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슬쩍 피했다. 누군가가 교회 학생들의 예의교육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집에서도 못하는 것을 교회 학교의 교사들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포기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교육은 사람을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까지도. 행사가 시작됐다. 오프닝 메시지에서 교회의 담임인 백정우 목사는 “지금까지 우리는 돌보심을 받으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이웃에 돌보심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세밀하게 돌아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행사 주제가 배우 오윤아와 함께하는 ‘돌보심’인 만큼 그녀의 간증이 ‘메인 이벤트’였다. 그녀는 학생 때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레이싱 모델로 선발되었다가 자연스럽게 탤런트가 되었다.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고, 연기 대상 최우수 조연상 드라마 부문 최우수 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인기를 얻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결혼을 하고 첫 아들을 얻기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아들이 발달 장애를 겪는 중증 자폐로 진단받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미칠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름이 알려진 성공한 배우였기에 그 고통의 무게도 더 컷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기로 했다. 그 후 그녀가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인격적으로 다시 만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하고 지금까지 돌보아 주셨는지를 이야기했다. 믿음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을 얻게 되자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사회가 그들을 좀 더 따뜻하게 보아 주도록 변하게 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처럼, 사회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통해 치유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간증을 마쳤다. 예쁜 카드에 적혔던 “하나님이 모두를 돌보십니다” 라는 성경 한 절은 모두를 위로했다. 최성규 / 베스트 영어 훈련 원장열린광장 오윤아 배우 배우 오윤아 교회 학생들 교회 학교
2025.11.25. 19:52
“사자가 이끄는 양 떼가 양이 이끄는 사자 떼보다 강하다”는 서양의 격언은 리더십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지도자의 능력이며, 2차 세계대전을 이끈 마셜(George Marshall), 맥아더(Douglas MacArthur),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패튼(George Patton) 장군 모두가 공통으로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들의 결론은 분명했다. 탁월한 리더십은 타고난 능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과 경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특히 실전 경험은 종이에 적힌 전술·전략을 넘어, 부대를 움직이게 하는 무형의 전투력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꼽혔다. 프랑스 군사(軍史)에는 실전 없이 행정적 승진만으로 육군 중장까지 오른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전투 한 번 해보지 않은 장군”이라는 낙인에 스스로도 큰 자괴감을 느꼈고, 결국 상부의 허락을 받아 직접 중령 계급장을 달고 베트남전에 보병 대대장으로 참전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투의 승패와 부하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지휘관에게 실전 경험이 갖는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어떤 지식도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고 했고, 고전학자 로저 애스컴(Roger Ascham)은 “경험으로 얻어진 것은 값진 지혜”라고 했다. 전쟁 지휘관에게 경험은 단순한 경력 항목이 아니라, 판단과 결단의 기준을 형성하는 절대적 토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6·25 참전 세대는 이미 80대 후반에서 90대 고령에 이르렀고,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 역시 대부분 생애 말년에 접어들었다. 사실상 전투 경험을 보유한 지휘관 세대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반면 북한군은 러시아의 침공 전쟁에 합류해 약 3만 명을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했고, 이 과정에서 200여 명 사망·2000여 명 부상이라는 대규모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실전 경험 없이 내몰린 결과가 어떤 참상을 초래하는지는 이미 확인되고 있다. 한국군 장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행정형 장군으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실제 전투가 어떤 것인지, 실전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체득해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분쟁은 분명 위험하고 복잡한 환경이지만, 동시에 동맹국 협력 혹은 파병 형태의 참여를 통해 실전적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 경험은 단순히 개인의 군 경력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군의 무형 전투력을 강화하고, 북한 정권과 이를 둘러싼 러시아·중국의 군사적 도발에 대비하는 데 본질적인 자산이 된다. 진짜 전투 경험을 갖춘 지휘관만이 나라의 존립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국군 장성들이 책상 위의 장군이 아닌, 실전을 이해하는 지휘관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위협 앞에서 대한민국이 흔들리지 않을 유일한 길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소장열린광장 전쟁 전쟁 지휘관 실전 경험 침공 전쟁
2025.11.24. 19:08
미국 하원의 첫 여성 의장이자 민주당의 상징적 인물인 낸시 펠로시(Nancy Pelosi)가 40년 정치인생을 마치고 2027년 1월, 현 임기 종료와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진보적 가치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외쳐왔지만, 동시에 막대한 부와 특권층의 삶을 누려왔다는 이유로 “리무진 좌파(Limousine Liberal)”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리무진 좌파는 본인은 비싼 리무진을 타고다니면서 대중들에게는 “환경을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외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가리킨다. 미국에서는 ‘라떼 좌파(Latte Liberal)’라고도 부르고, 한국에서는 ‘강남좌파’라 부른다. 낸시 펠로시는 2024년 기준으로 2억 3000만 달러 가량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NVIDIA와 Apple 주 등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리무진 좌파와 같은 표현을 ‘Oxymoron’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모순어법이다. 앞뒤가 서로 안 맞는 표현이라는 뜻이다. Oxy는 ‘똑똑한’ 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Moron은 ‘바보’라는 말이다. ‘똑똑한 바보’다. 이렇게 반대되는 표현이 함께 붙어 있는 단어를 Oxymoron이라고 한다. ‘점보 새우’나 ‘소리없는 아우성’ 같은 표현이다. ‘강남 좌파’는 20년쯤 전에 고국의 강준만 교수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알려져 있다. 강남 좌파는 잘 산다. 하지만 자신들은 약자의 편이고 의식은 깨어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고급식당에서 1인분에 10만 원에 육박하는 고기를 먹지만, 소셜미디어에는 후식으로 나오는 된장찌개 사진만 올린다.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강남 좌파는 학생시절에 운동권이었다. 정반합의 변증법도 배우고, 마르크스를 학습했다. 그래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외치지만, 재산은 몇백 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죽창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외친다. 권력자든 민중이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극단적인 평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자신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 강준만 교수는 강남 좌파를 비판한다. 이유는 첫째, 권력에 재력까지 누리면 됐지, 거기에다가 좋은 양심을 가지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도덕적인 우월감까지 갖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진보’라는 가치를 자신들이 더 많은 권력이나 재물,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는 실천 없는 주장으로 진정한 진보의 실천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강남좌파에게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고 말한다. 엘리트가 진보적인 가치를 역설하면 하층민에게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 때문이다. 또한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상류층이면서도 하위층을 생각하는 ‘강남좌파’들의 천성은 그래도 착하긴 하다는 것이다. 보수는 자유를 외친다. 자본주의를 믿으니 개인이 잘사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억지로 착한 척하는 것 같지도 않다. 반면에 진보는 평등을 외친다. 평등의 실현을 위해 때로는 혁명도 옹호한다. 이 틈에 끼어있는 리무진 좌파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주식계좌를 들여다 본다. 주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강남에 똘똘한 아파트를 몇 채씩 가지고 있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죽창 명품 리무진 좌파 명품 좌파 강남 좌파
2025.11.23. 18:00
한 대학 교수가 제자와 수영시합을 했다. 교수는 원래 꾸준히 혼자 수영 연습을 하던 사람이었다. 제자와의 경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평소에 혼자 수영 연습을 했을 때보다 기록이 안 좋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옆에서 물도 튀기고, 제자의 숨소리도 들리고 여러 가지로 신경이 많이 쓰였던 게다. 그런데 이 교수는 수영 경주가 끝나고 제자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교수님께서 제 옆에서 수영을 하셔서 제가 긴장도 많이 되고, 교수님 신경을 쓰느라 평소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수는 느꼈다. ‘아, 내가 상대방을 부담스러워하고 어렵게 느끼는 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상대방은 나를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나는 가끔 체육관 벽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른 회원인 줄 착각하면서 움찔할 때가 있다. ‘저런 돼지 같은 녀석이 내 옆에 있으니까 저 녀석이 내 옆을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조금 피해 주자.’ 그런데 자세히 보면 거울에 비친 ‘돼지 같은 녀석’은 사실 나 자신이다. 나의 몸뚱아리는 내가 봐도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개체인데, 남이 보면 오죽하랴. 평생을 비염 때문에 하루에도 백번씩 ‘힘차게’ 코를 푸는 소리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서울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코를 세차게 풀 때, 옆자리 고객은 ‘한숨’이라도 쉬면서, 나에게 불만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시하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분들은 Boss라는 이유로 한숨마저도 참고 있지 않던가.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어왔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고정해버리는 순간, 나는 고정된 틀 안에 갇혀버린다. 누군가가 ‘너는 이기적이야’라고 규정해버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 대한 규정은 조심해야 하고 웬만해서는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이 말은 동시에 내가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자유는 없어지고 나 자신은 지옥에 빠진다는 말로도 해석되어왔다. 인간은 서로 ‘상대방의 지옥’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서로의 거울’이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는 순간, 나는 불편하고 위축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타인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다. ‘지옥’은 ‘나를 비추는 시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들이 합쳐져서 온전한 사회적인 ‘나’를 만드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내 자유를 뺏는 ‘지옥’인 동시에 ‘나’라는 존재를 완성하는 ‘거울’인 것이다. 슬프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가 타인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눈까지 흐려져 사회적인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마저 볼 수 없게 된다. 남이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아도 계속 내 이야기만 하고, 상대방은 이미 내 상황을 이해했는데도, 더 명확하게 내 상황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젊은 사람에게 열 번, 스무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있다. 먼저 내가 타인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갇힌 타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옥에 갇힌 분들이 내는 소리를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옥’이 뭔지 ‘거울’이 뭔지 아직 생각도 못해본 사람들에게 내가 속한 지옥의 맛을 보지 않도록 그들을 나의 지옥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매일 거울을 보고 성찰할 일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지옥 교수님 신경 대학 교수 수영 연습
2025.11.18. 18:27
삶의 여정은 얼핏 서로 비슷해 보인다. 생노병사의 과정과 일상 수고와 애씀도 그러하다. 생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상실과 슬픔을 계속해서 마주함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슬픔을 맞이하는 아픔과 애도의 깊음은 서로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임상원목 업무에서 ‘슬픔돌봄(Grief Care)’과 ‘노년학(Gerontology)’의 분야는 더욱 소중히 다루어지게 된다. 여러 모양의 슬픔을 돌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도 아파하게 될 때가 있는데 환자돌봄을 위한 임상이론과 영적케어 테두리를 넘어 실존의 거울 앞에 비친 우리 모두의 모습을 마주보게 된다. 생의 과정 가운데 사별이 주는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은 다른 아픔에 비할 바 아니다. 아픔의 정도 역시 당사자가 애도하는 대상과의 관계와 당시의 사별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어린 시절 슬픔(Childhood grief)은 정서적 이성적 성장과정에 있어서 아직 자신의 아픔을 적절히 표현 못 하는데 기인한다. 부모로서의 슬픔(Parental grief) 또한 특별한 상실과 아픔을 겪는다. 큰 이유는 상실한 자녀는 부모의 생애 동안 계속 마음에 존재하는 데 있다. 다른 의미에선 그 연속적 동행관계는 노년이 된 후 에도 계속되는 아픔 가운데 안위를 주기도 한다. 장년이 되어 배우자를 잃는 슬픔(Spousal grief)을 겪는 경우도 있다. 결혼 기간의 다양한 요소에 따라 사별의 아픔과 애도 기간의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사별은 깊은 애도의 시간을 준다.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날 때도 갖가지 추억과 작별하며 아파하는데 하물며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던 삶의 반쪽을 잃은 아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슬픔(Disenfranchised grief)도 있다. 자신의 상실을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나누고 함께 의식을 가지는 것이 제도화되지 않은 경우가 그것이다. 산모가 새 생명을 기다리는 중 출산을 못하고 잃은 아픔과 슬퍼함은 당사자에겐 깊은 비탄을 가져오지만 공개적으로 함께 나누는 아픔이 아니다. 또는 질병으로 몸의 부분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공개적으로 아픔을 나누는 의식이 제도화되지않은 슬픔이다. 필자는 최근 여자 형제를 잃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임에도 곁에 있을 때 더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아픔이 오래 지속된다. 약한 체력임에도 항공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이민자의 삶을 살아 낸 모습이 생생하다. 아내 역시 침묵 중에 슬퍼한다. 시누관계로 처음에 기선잡기 하던 때가 그립고 수십 년간 새로 맺어진 가족으로서의 이민 여정에서 나눈 추억의 시간이 상실을 더 아프게 한다. 여동생의 예상하지 못한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작별이 더 아픔을 가져오지만 함께 걸어온 광야 여정의 시간은 소중하기만 하다. 상실 가운데 성서에서 위로의 언약을 읽는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이민의 여정을 가는 동안 만나는 온갖 상실과 슬픔 중에도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약속안에 넉넉히 이기는 위로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경험되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원목협회 디렉터열린광장 슬픔 시절 슬픔 childhood grief 애도 기간
2025.11.17. 18:59
우리는 우주의 물질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생명과 정신이라는 기적을 품고 살아간다. 단세포 생명체는 35억 년간의 진화 속에서 추상적 사고와 사회적 협력을 통해 문명을 일구는 존재로 성장했다. 이 놀라운 여정은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공동체를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는 존재로 자리 잡게 했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공동체와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밝힌다. 세상의 모든 것, 돌, 나무, 새, 그리고 사람들 겉모습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안에는 같은 숨결이 흐른다. 원자와 분자가 모여 각기 다른 결을 만들고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그 모든 길은 결국 하나의 생명력으로 이어진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양자의 얽힘이나 모든 생명체의 공통 유전 물질(DNA)은 모든 존재가 연결된 이치를 증명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대립의 통일이라는 조화를 이룬다. 인간은 이 땅에서 가장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존재이며, 그 힘은 모든 생명과 연결된 우주의 질서 속에서 빛난다. 인간 관계는 정의와 사랑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정의는 인권을 침해하는 자에게 단호히 맞서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개인이 평등한 권리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랑은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내 마음처럼 여기고 적극적으로 돕는 자세다. 그러나 선과 사랑만을 내세워 현실의 악과 싸우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타며 나아간다.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사람은 문제를 넘어설 수 있지만, 휩쓸리는 사람은 그 속에 잠긴다. 정신은 감정의 파동을 따라 흔들린다. 긍정의 습관은 낙천적인 삶을 이끌고, 부정의 습관은 잠재력과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확신을 집중해 행동으로 옮기면 길이 열린다. 단련과 인내심으로 보람찬 목표를 향해가는 그 여정 자체가 행복이다. 우리는 전 인류를 하나의 생활 공동체로 결합시키려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 지금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인력을 대량 대체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벽정신과 세상을 바꾸는 영성이 있어야겠다. 과학은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도구다. 이제는 생명과 공동체를 향한 윤리가 과학의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 지상낙원은 먼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성실히 살아가며 서로를 돕고 진리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 있다. 인류문명은 현재의 시설에서도 세계인구의 3배 이상이 넉넉하게 쓸 수 있는 필수품을 생산할 수 있게 발전했다. 의식주와 의료의 걱정 없는 삶 속에서, 우리의 수명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세계의 각계각층에서 성스러운 노동에 임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지금, 탐욕과 국가 이기주의가 대량살상무기로 전쟁을 준비하며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무역장벽을 높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권이 억압받는 곳이 여전히 존재하며, 인간의 존엄성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우리 생명의 모태인 인류는 물질과 정신, 사회적 협력의 생명력을 대를 이어 발전시킨다. 이제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그 바람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우리 자신이 먼저 주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자. 우리 모두는 우주가 빚어낸 기적이다. 저마다 빛을 품고 태어난 존재이기에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세상은 더 밝아진다. 김용 / 한울 운동대표열린광장 우주 기적 단세포 생명체 생활 공동체 정신과 의지
2025.11.16. 18:00
지난 10월 25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Korea Defense Veterans Association(KDVA)’ 즉, ‘주한 미군전우회’ 연례총회는 과거 한반도에서 함께 피와 땀을 흘린 전우들이 미국 땅에서 다시 모여 한미동맹의 오늘을 기리고, 다가오는 도전에 맞서 단단한 결속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전 주한미군사령관인 로버트 에이브람스 장군과 한국 측에서 전 합참의장인 정승조 예비역 대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옛 전우들의 눈빛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그 속에는 숱한 전투에서 함께 흘린 피가 남긴 책임감과 함께 만들어갈 평화에 대한 굳건한 결의가 있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미국 내 향군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아 매번 함께 행사하고, 전우의 손을 잡고 서로 격려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미동맹의 살아 있는 증거다. 오늘(11일)은 미국의 ‘Veterans Day’이자, 전우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특별한 날이다. 이날을 통해 우리는 전우애가 단순한 기억을 넘어, 한미 양국이 공유하는 전략적 가치로 이어지고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이어진 세월 속에서 미국과 한국의 군사동맹은 늘 시험에 들었다. 하지만 이날 전우들의 만남은 과거의 전투가 남긴 상흔을 넘어, 미래를 향한 연대로 전환되는 상징이다. 이 우정이야말로 서해 · 동해의 바다와 태평양을 넘어 양국 국민과 병사들의 심장을 연결하는 등불이 된다. 행사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했다. 중국과 북한이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는 현실 속에서, 한미동맹은 단순한 규모나 시설이 아니라 예약된 약속, 전우가 전우를 지키는 거룩한 약속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우들이 있었기에 ‘지키는 힘’은 생겼고, 지금은 그 위력이 동맹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그 힘은 바로 한국과 미국 시민이 함께 누리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든든한 기둥이다. 실제로 한미동맹은 단순히 군사적인 협력 관계가 아닌, 미래지향적이며 상호 신뢰에 기초한 전략동맹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전문가의 논평도 있다. 전국적인 향군의 날을 앞두고 지역 향군 단체들이 준비하는 전우 초청 행사에 참가할 우리 한국전 참전유공자들은 단지 과거를 기리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 6.25참전 노병들은 한미동맹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현재진행형 동반자다. 우리가 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할 때, 그 감사는 과거로 멈추지 않고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가 된다. 그 다리를 통해 한미 양국은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피의 연결이라는 사실을 맞들 수 있다. 전우의 손을 잡고 나누는 한마디가 얼마나 묵직한가를 오늘 다시 생각해 본다. “함께였다”는 기억이 “함께한다”는 현실이 되고, 그것이 “함께할 것이다”는 신념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동맹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다지며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며 전우들께 존경의 경례를 드린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약속 전우가 주한 미군전우회
2025.11.11.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