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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이념의 감염, 심리적 백신은

6·25 한국전쟁 때 미국 국방성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미국군이 중공에 의해 세뇌당해 포로교환에 응하지 않고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미국 의회는 특별조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어떻게 공산주의 선전 선동에 쉽게 넘어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군이 쉽게 세뇌당한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의식이 약했기 때문이라 결론짓고 미국 국민들에게 ‘아메리칸이즘(Americanism)’과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예일대학 매스커뮤니케이션(Masscom)학과의 윌리엄 맥과이어(1925~2007) 교수는 특별조사위원회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미군 포로들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쉽게 세뇌당하게 된 것은 바로 일방적인 아메리칸이즘과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미국 국민들이 공산주의라는 병균에 저항력이 없어서 쉽게 감염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아메리칸이즘과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하는 ‘지지 요법(Supportive Therapy)’ 보다 공산주의자들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도록 저항력을 길러주기 위해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과 간접 경험 교육 등 ‘심리적 예방치료(Inoculative Therapy)’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회는 맥과이어 교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시행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탈북해 온 국민도 많고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도 많지만 두 가지 치료법을 교육하거나 전해주기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부케(1729~1797)는 프랑스 혁명을 통렬히 비난하면서 “보수를 수용하는 혁신주의와 혁신을 수용하는 보수가 되어야 극한 대립을 피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공산당이 존재하지만 의회주의 공산당이라 극한 대립이 없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북에는 매우 도발적인 공산독재의 북한이 있고, 약탈적 패권국인 러시아와 중국으로 둘러싸여 자력으로는 헤어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인 시혜적 패권국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진리다.     외부 조력 이전에 우리는 지지 요법은 물론 심리적 예방치료로 정신무장을 강화해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이념 감염 감염 심리적 심리적 예방치료 자유민주주의 교육

2025.11.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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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기부금 공제, 따뜻해진 세법

2025년, 올해부터는 누구나 기부금에 대해 공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에서 기부금 공제를 훨씬 많이 인정해준 것이다.     지금까지는 항목공제(itemized deduction)를 선택한 납세자만 기부금 공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2025년부터 새로 시행된 세법은 표준공제(standard deduction)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금액의 현금 기부에 대해 공제받을 수 있게 했다.     이 공제는 ‘above the line’, 즉 조정총소득(AGI)을 계산하기 전에 차감된다. 이 말은 연방소득세뿐 아니라 주(州) 세금 계산에도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금년부터 기부를 하면 연방정부 소득세뿐만 아니라 주정부 소득세까지 줄이는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소득이 5만 달러인 근로자가 1000달러를 현금으로 기부했다면, 그 금액은 ‘above the line’ 공제로 먼저 빠진다. 따라서 과세소득은 4만9000달러로 줄어든다.     현재 이 사람의 연방소득 세율(약 12%)을 적용하면 연방세가 약 120달러 절감된다. 또 캘리포니아 주 소득세율(6%)을 적용하면 추가로 약 40달러 더 절감된다. 결국 1000달러 기부로 약 160달러의 세금 절약 효과가 생긴다. 이 말은 1000불을 기부하면 그중에 160불은 정부가 내는 것이고 본인은 나머지 840불만 부담을 한다는 말이다.   2026년, 내년부터는 기부금과 관련해서 새로운 기준이 하나 더 생긴다. 기부금이 조정총소득의 0.5%를 넘지 않으면 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연소득이 5만 달러라면 250달러 이하의 기부는 공제 대상이 안 되는 것이다. 기본공제 대상자까지 혜택을 확대하는 대신, 일정 금액 이하는 ‘사회적 기여의 기본선’으로 남겨둔 것이다.   법인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법인은 순이익의 1%를 넘는 기부금부터만 공제가 가능하다. 그 이하 금액은 기업의 철학과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기본 의무로 남는 것이다. 세법이 단순히 혜택을 주는 수준을 넘어, 기업이 ‘세금이 아닌 신념으로 기부’하도록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기부금 영수증 한 장은 더 이상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세금의 논리를 뛰어 넘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가 함께 담겨 있다. 세법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그 속에서 세금은 사람을 향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기부를 하는 사람을 존경만 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기부를 할 일이다.   기부는 마음의 일인 동시에, 세금이 인정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기부금 공제 기부금 공제 기본공제 대상자 기부금 영수증

2025.11.0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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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인술<仁術>을 베푸는 명의<名醫>

미국에 이민 온 지도 44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정착하느라 정신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과로로 독감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다. 어떤 의사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든 것이 생소해 어리둥절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의사를 찾던 중 신문에 의사 개업 광고를 보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집 근처에 그 병원이 있었다. 흉곽내과 전문의로 호흡기 계통 모든 질환을 치료한다는 광고였다. 아 참 다행이다.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독감이 걸렸으니, 내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의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전화로 예약하고 병원을 찾아갔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맞이하는 의사는 나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내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다짜고짜로 병세를 물어보아 답변을 하면서 치료받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개업한 후 제 1호 환자라며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의사의 치료와 사랑을 듬뿍 받는 기분이었다. 독감 치료가 끝난 다음에도 만성기관지염 치료에 두 달여 걸렸다.     의사는 내가 살고 있는 집까지 찾아와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보곤 했다. 내 평생 의사가 환자 집까지 찾아와 병세를 물어보고 인사하는 의사는 처음 보았다. ‘아 이 의사야말로 내가 평생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이 가는 의사구나’ 생각하니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44년 동안 이어져 왔다. 나의 주치의로 믿을 수 있는 인술을 베푸는 명의로 내 마음에 자리매김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이 물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 명의를 만나게 되었고 연약했던 내가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이 의사 덕분이라 생각하면 고마움이 북받쳐 오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의사를 찾게 되었는데 내년 1월에 병원 문을 닫고 은퇴한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통보에 당황스러웠다. 의사 선생님도 평생 환자들을 돌보느라 고생했기 때문에 은퇴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앞으로 어떤 의사를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물론 이 의사는 나의 건강을 돌보는 명의이지만, 인간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처음 이민 와서 남편이 비즈니스에 실패했을 때 내 사정을 듣고 난 후 생활비에 보태어 쓰라며 봉투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나만 보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지?”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내가 미국회사에 취직하여 좋은 보험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비를 다 지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년에 미수를 맞이하는 나이임에도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또한 인술을 베푸는 명의를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김수영 / 수필가열린광장 인술 의사 개업 의사 선생님 평생 의사

2025.11.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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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이민자의 가장 큰 축복, 친구

1세대 이민자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이곳까지 왔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적응의 전쟁터였다. 언어, 문화, 사회적 관계, 정체성 등 모든 것이 다시 배워야 할 과제이었기에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웃음으로 넘기던 대화 속에는 종종 외로움이 숨어 있었고, 익숙한 냄새와 음식은 그리움의 자극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민자의 고뇌는 외로움이나 불안이다. 이럴 때면 속 시원히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를 찾게 된다. 과연 이민자로 나에게 그런 친구가 얼마나 되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더해 가며 친구를 수치로 세곤 한다.   SNS의 팔로워, 단체 모임, 교회 모임에서 만나는 얼굴들. 이 중에 과연 나의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 생각하면 뇌에 지진이 난다. 진정한 친구란 단순한 친밀감이나 동료 의식이 아니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외로움과 결핍을 함께 견디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민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낯선 땅에서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간다.     옥스퍼드대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이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3~5명으로 제한한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 두뇌의 인지적 한계와 정서적 에너지의 한계를 통해, 친구는 양이 아니라 질로 측정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민자에게 이 수치는 더욱 제한적이다. 언어적, 문화적 장벽과 물리적 거리 속에서, 진정한 친구를 확보하는 일은 어렵다. ‘나는 누구와 함께 나의 존재를 이해받고,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가’하고 자문하게 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좋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실패나 외로움과 아픔을 함께 받아주는 친구는 정말 몇 명일까.   사실 SNS 친구, 사회단체 친구, 그 속에서 진정한 친구를 구분할 때 우리는 중요한 통찰이 필요하다. SNS 친구는 표면적 친밀감을 제공하지만,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단체 친구는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신뢰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그것도 전제 조건과 시간에 의해 제한된다.     진정한 친구란 결국 외로움, 아픔, 실패,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도 나를 지지하며,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친구다. 진정한 친구는 단순한 친목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 이민 생활 속에선 환경에서의 외로움과 불안을 견디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전망 역할을 한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한 ‘덕을 위한 우정’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이익을 위한 우정, 둘째는 쾌락을 위한 우정,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고귀한 형태인 덕을 위한 우정이다.   이익을 위한 우정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맺어지는 관계다. 사업 관계나 이해관계로 묶인 인연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익이 사라지면 관계도 끝난다.     쾌락을 위한 우정은 즐거움을 주는 관계다. 함께 있으면 편하고 즐겁지만, 즐거움이 사라지면 금세 멀어진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우정은 상황과 감정에 따라 변하기 쉬운 관계다.   반면, 덕을 위한 우정은 그 자체로 완전한 우정이다. 그것은 상대의 유용함이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선함을 사랑하는 관계다. 친구가 내게 무엇을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들은 서로를 덕 있는 사람으로서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친구는 ‘누가 더 많이 주었는가?’ 같은 계산이 없다. 오히려 서로가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긴다. 친구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친구의 고통을 내 일처럼 아파한다. 이익이 아닌 선을 기준으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이러한 친구는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한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보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친구가 인생의 큰 축복이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이민생활에 큰 자산이요 가장 고귀한 관계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이민자 축복 친구 사회단체 사회단체 친구 관계 정체성

2025.11.0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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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그리움을 적은 가족 소식지

소식지(뉴스레터) 2호를 만들어 이메일로 보냈다. 독자들은 ‘뜬금없이 무슨 소식지?’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지난 3~4개월 나의 근황을 정리해 가족들에게 소식지라는 표제로 보내기 시작했다.   고향이 함경도인 돌아가신 아버지는 해방 후 단신 월남하여 형제라고는 자매 하나뿐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가족이라는 작은 나무를 심었다. 그 사이에서 5남매가 태어났고, 한세대를 거치며 나무는 제법 커졌다. 그중 내게서 나온 가지가 가장 크다. 4남매에 입양한 조카들까지 자녀만 6명, 손주까지 더 하면 20명이 넘는다.   가족 모임을 해도 형제자매가 모두 다 모이기는 쉽지 않다. 떨어져 사는 가족 중에는 몇 년째 만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가족보다는 교우나 가까이 사는 이웃과 교류가 잦은 것이 현실이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부모님 생신, 아버지·어머니날, 명절 등,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가족 모임이 있었다. 형제자매의 관계는 부모님이 구심점이다. 구심점이 사라진 집단은 결속력이 없다.   어쩌다 가족들이 모인다 해도 마주 앉아 조곤조곤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떠들다 헤어지고 나면 막상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먼저 알리고 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자 시작한 것이 소식지를 만들게 된 배경이다.   지난 7월에 1호를 만들어 형제와 자녀들에게 보내 주었다. 며칠 후, 누이동생과 딸아이, 조카딸이 각기 자신들의 소식을 전해왔다. 묻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냈을 이야기, 만나서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나왔다. 글이 말과 다른 점이다. 말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기는 쉽지 않지만 글은 써서 다듬고 고쳐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정리된 사연을 전할 수 있다.   ‘이번 학기에는 미술 클래스를 듣지 않는다. 한 학기 쉬기로 했다. 대신 일주일에 두 번 시니어 센터에 간다. 그곳에서 막내의 장모를 만났다. 안사돈, 어려운 사이 아닌가. 그런데 시니어 센터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운전면허를 갱신했다. DMV서비스가 개선되어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얼마 전 부엌 천장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려 사람을 불렀더니 쥐가 들어온 흔적이 있다고 한다. 50년대 지어진 집이라 환기구 철망에 구멍이 생겼다. 구멍을 메우고 천장과 집 아래 공간에 쥐덫을 놓았다.’     ‘전동휠체어를 새로 장만했다. 이번 것은 좌석의 높낮이가 조절된다. 좌석을 올리면 서있는 사람과 눈도 맞출 수 있다.’ (소식지에 실린 내용들을 간추린 것이다.)   소식지를 보내고 이틀 후, 누이동생이 본인의 근황을 올렸다. 이번에도 나는 모르고 지내던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바라기는 손주들이 커서 내가 보낸 소식지를 읽고 그들의 소식을 전해 오기를 소망한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광장 그리움 소식지 가족 소식지 가족 모임 형제자매가 모두

2025.11.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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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단군의 얼, 한국 신앙의 뿌리

며칠 전 옛 사진첩을 꺼내 보다가 깜짝 놀랐다. 육군보병학교 장교 임관식 사진의 날짜가 ‘단기 4290년’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숫자를 보니 자연스레 개천절이 떠올랐다.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을 기념하는 날, 그리고 하늘의 뜻으로 시작된 이 나라의 뿌리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올해는 단기 4358년이다.   단군신화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다. 하늘의 신 환인(桓因)이 세상을 다스릴 뜻을 품고,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곧 하늘이 내린 세 개의 표지를 주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세우고 인간 세상을 열었다.   그 무렵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늘은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며 백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일렀다. 곰은 이를 지켜 여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했다. 여인이 된 곰은 신단수 아래서 남편이 나타나길 기도했고, 환웅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와 짝을 이루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단군이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우리 민족의 시조로 기록된 인물이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 적은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하늘의 뜻과 인간의 삶을 잇는 상징이다. 곰이든 여인이든, 중요한 것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작을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숭고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얼은 본래 무교(巫敎, Shaman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유교·불교·기독교 등 외래 종교가 더해지며 정신적 토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그 외래 종교들은 껍데기만 남은 경우가 많다. 유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보다 삼강오륜의 규범만 남았고, 불교는 해탈의 길이 아니라 현실도피로 오해되었다. 기독교 또한 서구식 형식주의와 자본주의적 윤리에 얽혀 한국적 얼과의 조화를 잃었다.   사실 기독교의 ‘하나님’과 우리 고유의 ‘한울님’ 사상은 서로 닮아 있다. 그래서 복음은 이 땅에 비교적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에는 단군의 얼, 곧 하늘과 인간이 하나로 이어진 조화의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와 학위 가운의 권위 속에 단군의 숨결은 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신앙이 진정한 한국의 신앙이 되려면, 다시 신시의 바람으로 돌아가야 한다. 환웅이 하늘의 뜻을 품고 인간 세상에 내려온 그 정신인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을 잇는 ‘한울림’의 울림이 오늘 우리가 되찾아야 할 단군의 얼이다. 윤경중 / 릿쥐크레스트 한민교회 명예목사열린광장 단군 한국 한국 신앙 한국 교회 외래 종교들

2025.10.3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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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인생 여백에 그릴 그림

‘여백’은 종이 전체에서 그림이나 글씨 따위의 내용이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을 뜻한다. 동양화에서는 그림을 그리다 공간을 남겨 두어 여백의 미를 즐긴다고도 한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인생의 여백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수 정동원의 노래에 인간은 버리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인생을 쫓기듯 여백에 그렸다는 가사도 있다.   라스베이거스로 이사 온 지 거의 2년이 돼간다. 그동안 나의 인생 여백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다. 노후에 건강을 챙기다 보니 우리 부부는 병원에 다니느라 바빴을 뿐 여행 한번 떠난다는 것조차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어디 나 뿐이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위로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 인생 여백의 그림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이곳에서는 일간지 한글 신문이 없다 보니 며칠에 한 번씩 LA에서 우편으로 보내 주는 신문을 뭉치로 받아 본다. 지면에는 반가운 소식보다 불안한 소식으로 꽉 차있다. 세상은 평온한 날이 없다. 평화공존, 공동성장, 세계 교류관계 정상화를 외쳐 대지만 적대와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국제 무역 거래는 관세 파동으로 요동을 치고 물가는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모든 기업들은 엄청난 타격들을 받고 있으며 중소 상인들은 폐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무모한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분쟁 역시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패권 야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권 문제로 국가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전쟁, 병마,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은 피를 말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쫓기듯 그림을 그리려는 인간의 욕심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불행하게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탐욕으로 독 안에든 게와 같은 존재가 되어 서로 올라오는 놈의 발목만 서로 끌어내리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그림만 그릴뿐 ‘너 살고 나 살자’는 생각은 전혀 없기에 늘 세상은 시끄럽고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이 기러기떼 모양 서로 협력할 순 없을까.   도둑은 잡지 말고 좇으라 는 말도 있다. 남과 원수를 맺으면 어느 때인가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제갈공명은 적에게도 퇴로를 열어 주라고 했다. 우리의 삶의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 아니다. 마음을 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남은 세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그리며 남의 사소한 실수라도 덮어주는 포용과 지혜를 나의 삶의 여백에 더 잘 그려 볼까 한다. 백인호 / 수필가열린광장 인생 여백 인생 여백 세월 욕심 팔레스타인 하마스

2025.10.2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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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언론의 자유없는 평화는 허상

자유민주주의 언론(Mass Communication: Mass Com.)과 공산주의 언론(일당독재 체제)은 태생부터 철학이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언론은 최소한의 통제와 최대한의 자유를 지향한다. 언론은 국가의 도구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자, 사회를 위한 공공 서비스로 존재한다. 반면 공산주의 언론은 당과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며, 언론의 본질이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니라 ‘체제 유지와 선전’에 있다. 자유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북한의 언론이 바로 그 전형이다. 김일성은 “언론은 혁명의 무기이며, 적과 싸우는 도구”라며 매스컴을 전쟁의 연장선으로 규정했다. 그의 손자 김정은 체제에 이르기까지 북한 언론은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을 앞세워 오직 수령을 찬양하고, 체제의 오류를 미화하는 선전용 기구로만 존재한다.   그곳에는 비판도, 진실도, 다양성도 없다. 모든 기사와 방송은 ‘최고존엄’을 신격화하는 도구로 쓰이며,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접한 주민은 중범죄자로 처벌받는다. 북한의 매스컴은 언론이 아니라 세뇌의 수단이다.   역사는 언론의 개방이 곧 자유의 시작임을 증명해왔다. 냉전 시절 동서독이 갈라져 있을 때,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 대통령이 개방개혁(페레스트로이카)을 선언하자 동독의 주석 에리히 호네커(1912~1994)는 극심한 경제난으로 서독의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1930~2017) 수상은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동서 간 매스컴을 완전히 개방하라.”   호네커 동독 주석은 이를 수락했고, 1987년 9월 서독을 방문한 직후 동독 내에도 서독 방송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서독의 현실을 본 동독 주민들은 체제의 거짓을 깨달았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평화적 흡수통일을 이뤘다.   언론의 개방이 분단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회복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매스컴을 개방하느냐, 폐쇄하느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요한 요결임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하고, 확성기를 스스로 철거하며, ‘불편한 언론’을 압박하는 행위는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정신과 배치된다. 언론은 정부의 시녀가 아니라 국민의 대리자다.   언론이 침묵하면 권력은 독주하고, 국민은 방향을 잃는다. 매스컴의 자유는 국가의 명예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선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상국가의 마지막 단계로 ‘우민정치’, 즉 권력자가 국민을 무지하게 하여 통치하는 참주정치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론이 정부의 비위를 살피며 스스로의 날개를 접는다면, 그 경고는 현실이 될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닫히는 순간, 민주주의의 문도 함께 닫힌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소장열린광장 언론 자유 자유민주주의 언론 공산주의 언론 평화적 흡수통일

2025.10.2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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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늘이라는 산딸기

한때 여학생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유명 남자가수가 있었다. 그가 중년을 지나 이제 노년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이는 참 공평한 것 같아요. 아무리 예쁘고, 힘이 세고, 돈과 능력이 많은 사람도 시간 앞에선 모두 똑같이 한 살씩 먹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나이 드는 일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생일이 반갑지 않다. 올해 생일에도 사무실 벽에 젊은 직원들이 내 나이를 알리는 커다란 숫자를 붙여 놓았다. 내가 앞자리 숫자 ‘5’를 몹시 싫어한다는 걸 아는 그 친구들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숫자를 뒤집어 ‘2’로 만들어 걸어둔다. 덕분에 잠깐 웃는다.   나는 평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몇 가지 겹치면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말했다. “오늘 쓸 수 있는 ‘죽고 싶다’는 다 쓰셨어요. 오늘은 그 말 금지니까 그만 쓰세요.”     그렇게 자주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이를 먹고 언젠가 병이 들고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있을 날이 확실히 더 적게 남았다. 등산보다 하산이 중요하고 비행보다 착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쯤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사람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말한 ‘빅 브라더’가 이미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 같은 권력자가 영원히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혹은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아마 힘 있는 몇 사람이 세상을 끝없이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있기에 삶이 행복하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산중에서 한 수도승이 호랑이를 만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간신히 절벽 중턱의 나무뿌리를 붙잡고 매달렸는데, 위에는 자신을 쫓아온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 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올라가도 죽고, 내려가도 죽는 그때, 수도승은 옆을 바라보았다. 절벽 틈 사이로 피어난 꽃 한 송이. 그는 그 꽃을 한참 바라보며 그 순간을 온전히 맛보았다고 한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 같은데 어떤 버전은 수도승이 절벽에 난 산딸기를 따서 맛있게 먹었다고도 한다.   길어야 80~90년을 사는 우리 인생은, 어쩌면 그 수도승이 절벽에 매달려 꽃을 바라보던지 산딸기를 먹는 바로 그 순간과 같다.     위에도 아래에도 호랑이는 여전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피어난 하나의 꽃, 오늘의 공기, 한 사람의 미소, 오늘 나와 한잔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친구의 모습을 알아보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그렇기에 지금 살아 있음이, 더 또렷하고 더 귀하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산딸기 절벽 중턱 앞자리 숫자 그때 수도승

2025.10.2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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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꽃동네를 아시나요

테미큘라 꽃동네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5번 프리웨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테미큘라를 만나면 79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79번 남쪽으로 계속가면 워너 스프링스, 엘림 유황온천, 아구아 깔리엔떼 소금 온천이 있는 큰 리조트 공원 등이 있어 한인들이 많이 방문해 익숙한 길이다.   테미큘라를 지나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꽃동네’ 라는 작은 한글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오른쪽 산등성을 올라가다 산마루를 지나면 맞은편 큰 산과의 사이에 아늑히 자리 잡은 꽃동네 피정 센터가 나온다.   우거진 숲 속에 안기듯 자리하고 있는 센터는 가까운 곳에 연잎 가득한 호수도 있어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하고, 깊이 자신을 성찰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여러 동의 숙박시설을 깨끗이 관리하는 일은 한국에서 온 4명의 수녀가 모두 맡아 하고 있었다. 음식 또한 깨끗한 식당에서, 호텔 못지 않은 식사를 수녀들이 직접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꽃동네라고 하면 누구나 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버려진 사람들 하나하나를 모두 꽃이라고 생각하며 귀히 여기는 곳이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꽃동네를 태어나게 한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를 알게 되었다. 최귀동씨는 충북 음성군의 무주에 있는 부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너무 귀한 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귀동으로 불리었다. 일제 강점기, 징용에 끌려가 북해도로 갔다. 열악한 탄광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탈출하다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후유증으로 약간의 정신이상이 되고, 다리도 절뚝거리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끌려가 연락두절이 되자 낙심하다 마약에 빠졌고,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고무친이 되어 무극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지내며, 여기저기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다행히 한국이 산업화되기 전에는 인심이 후했다. 다 어려운 처지이니 서로 돕고 살자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병들어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얻어 온 밥을 같이 나누어 주고 다리 밑에 데려와 같이 살았다. 그렇게 데려와 돌 본 사람들이 18명까지 늘었다.     1976년 9월, 무주 성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가 이를 보게 되었다. 최씨의 삶에서 감동을 받은 오신부는 그를 돕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음성에 처음 만들어진 꽃동네이다. 병들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을 꽃같이 귀히 여기는 아름다운 동네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지금은 해외에도 꽃동네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어 현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한편, 사람들에게 스스로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려운 이웃에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돕는 수련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살아 보고 싶은 사람들,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를 사유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 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성규 / 베스트영어훈련원장열린광장 꽃동네 꽃동네 피정 오웅진 신부 프리웨이 남쪽

2025.10.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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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전쟁 영웅의 마지막 훈장, 기억

2주 전,  LA 근교 리돈도비치의 한 미국 천주교회에서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의 장례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94세의 한국전 참전 미군 노병이다. 그는 스무 살이던 1952년,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마지막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의 고지’라 이름하였으리.   그 전투는 미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적 중공군 1만5000여 명이 쓰러진 치열한 격전이었다. 그 고지를 지켜 세운 결과가 오늘의 휴전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전쟁 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묵묵히 생을 마쳤지만, 그 젊은 시절의 상흔은 평생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그의 희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그의 젊음은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불태워졌다.   장례식에는 그 지역 미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정중한 예식 속에 조총이 발사되고, 미 성조기가 그의 관 위에 덮였다. 엄숙한 묵념 속에서 군악이 흐르고, 조객들은 숨죽여 고개를 숙였다. 몇 사람의 조사가 낭독되는 순서 중, 한 한국 참전용사도 전우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영어로 낭독했다. 조객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로 화답했다. 피로 맺어진 우정과 전우애가 세월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장례식 후, 주재 영사가 뒤늦게 도착해 종이봉투에 담긴 기념 메달을 유가족에게 건넸다. 종이봉투에 담긴 ‘전쟁영웅’ 기념메달을 개봉도 안 한 채 그냥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그 모습은 마치 아이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처럼 초라하고 쓸쓸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가 형식적 절차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그들이 사라지면 전쟁의 기억도, 자유의 의미도 함께 희미해질까 두렵다. 전쟁의 참혹함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그 희생과 헌신의 의미만큼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들이 흘린 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음을, 그들의 청춘이 자유의 충혼탑을 세웠음을, 이 나라의 자유와 오늘의 번영은 그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서 이름없이 떠나가는 참전용사들이 아직 많다. 그들의 마지막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감사하며,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 젊은 병사들이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싸웠음을, 그리고 그들의 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음을 감사와 존경으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훈장이다.   그들이 지켜낸 ‘단장의 능선’ 고지 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여전히 한미 양국의 우정을 이어주는 가장 숭고한 다리로 남아 있다. 세월은 영웅의 육신을 데려가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의 이야기는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경의일 것이다. 모든 전쟁영웅들에게 마지막 경의를 바친다. “우리는 당신들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전쟁 영웅 한국전 참전용사들 전쟁 영웅 한국 참전용사

2025.10.2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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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

아마 삼사 년 전인가 보다. 어떤 총장이 65세에 은퇴했다. 그리고 이럭저럭 살다 보니 어느새 95세가 되었다. 은퇴 전에 총장은 인생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일했다. 그래서 총장까지 되었다. 그런데 은퇴하고 나서, 아무 일도 뚜렷하게 해놓은 게 없이 95세가 되어버렸다.   지난 30년을 허송했다고 그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면서, 우리더러는 은퇴하거든 즉시 무언가 목적을 세우라고 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번에, 10명 이상의 시니어 노인들이 시를 공부하겠다고, ‘뉴욕 중앙 시문학’에 참여했다. 장한 일이다. 여생을 허송하지 않고, 그 대신,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욕이 좋다.   대부분의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즐겨 시를 읽었고 어려서부터 시를 써오고 있다. 하지만 늙은 나이에 시 공부를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다.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하고 싶어서, 그리고 깊이 쌓인 원한과 분노를 시로 노출해 승화시키자는 것이다. 시를 써서 유명해지고 싶겠지만, 유명해지려고 일부러 애를 쓰면 좋은 시는 써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쓰고 싶어서, 좋아서, 시를 쓰다 보면 좋은 시가 저절로 써지는 것이다. 하지만, 늙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유명해지지 않으란 법은 또한 없다.   일본의 ‘100세 시인’으로 유명한 시바타 도요(1911~2012)는, 아들의 권유로, 92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들은 문학인이었다. 아들은 매주 토요일에 어머니를 방문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써놓은 시를 놓고, 둘이서 토론을 해가면서 시를 수정했다. 그녀가 죽으면 장례비용으로 쓸 그 돈으로, 98세에 첫 시집을 발간했다. 그게 일본에서 100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라고 그녀는 힘차게 말했다.   나도 80세에 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85세에 첫 시집을 발간했다. 그래, “인생이란 지금부터야”라는 말은, 아무리 늙었어도, 지금이라도 시를 쓰겠다고 마음을 즐겁게 먹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시 공부를 시작할 때, ‘왜 내가 시 공부를 해야 하나?’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목표가 뚜렷하면, 시를 쓰다가 괴로울 때 중단하지 않는다. 계속 시를 쓸 가능성이 크다.   시작부터 자기 마음에 드는 시를 쓴다는 게 쉽지는 않다. 자기 마음에 드는 시가 안 써질 때는 고민이고 고통이다. 어떻게 처음부터 좋은 시가 써지겠는가. 시간이 걸린다.   나부터도,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지? 그만둬버릴까’하고 여러 번 고민했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면 내 생각이 달라진다. ‘이전에 내가 시를 썼지 않았나, 전에 내 마음에 드는 시를 썼으니까, 좀 기다리면 다시 쓸 수가 있겠지’하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모든 창조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고통은 오래가지 않다. 하나의 시를 완성하고 나면 그만한 기쁨이 꼭 따라오게 마련이다. 조성내 / 전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열린광장 인생 인생 목표 자기 마음 원한과 분노

2025.10.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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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게으름 권하는 사회

“실업급여 받으니까 출근 안 해요.” 한 취업 포털에 올라온 댓글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이 섞여 있다.     실업급여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제도가 너무 ‘따뜻하면’, 사람들이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고국에서는 같은 직장에서 21회 퇴사와 재입사를 반복하면서 실업급여를 1억 원씩이나 타낸 사례를 적발했다고 한다. 회사와 짜고 ‘퇴사한 척’ 하며 실업급여를 반복적으로 챙긴 것이다. 그가 받은 실업급여는 누군가의 세금이다.   미국에서도 COVID 팬데믹 시기에 정부는 실업수당을 마구 퍼 주었다.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뿐 아니라,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자영업자들이나 독립사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을 두둑이 주고, 심지어 평상시에는 6개월 동안 지급하던 실업수당을, 1년 반 동안이나 지급하다 보니 일하러 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도 생겼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때를 “공짜 돈이 만든 대퇴사 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고 불렀다. 정부는 국민을 지켜주려 했지만, 그 돈이 ‘일할 이유’를 앗아간 셈이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65세 이상 일하지 않는 은퇴자의 평균 소득이 일하는 젊은 근로자의 평균소득보다 높다고 한다. 은퇴자들은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소득에, 가지고 있는 집값은 오르고, 대출은 다 갚았다. 반면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가진 집에 세를 얻어 비싼 월세를 낸다. 어디 월세뿐이랴. 학자금 대출금과, 노인들 은퇴연금 지급을 위해 높아진 세금을 내느라 허덕인다. 일해도 남는 게 없고, “일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사회 전체에 퍼진다. 복지의 선의가 게으름의 합리화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의 역설’이다.   복지의 역설은 선진국의 경고를 넘어, 실패한 나라들의 비극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판 돈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상 복지를 약속했지만, 재정이 고갈되자 물가가 폭등하고 국가는 무너졌다. 국민을 돕겠다는 ‘선의’가 결국 국민을 굶주리게 한 것이다.     스리랑카는 감세와 무리한 보조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포퓰리즘을 택했다가 2022년 국가부도와 식량난을 맞았다.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공공요금과 생활비를 억누르며 복지를 유지했지만, 통화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폭등했다. 그리스 역시 연금과 공공임금을 무리하게 확대한 끝에 재정위기를 맞고, 실업의 수렁에 빠졌다.   이들 국가들은 공통으로 “복지의 목적이 보호가 아닌 유혹으로 바뀌는 순간, 제도는 실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민을 지키려는 제도가 국민의 근로의지를 갉아먹고, 결국 세금을 낼 사람도, 복지를 유지할 돈도 사라졌다.     복지는 산소다. 공기가 부족해서 헐떡거리는 사람이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도록 임시로 산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업급여는 ‘쉬게 하는 돈’이 아니라 ‘다시 일하게 하는 돈’이어야 한다. 연금은 ‘나이 들어 편하게 받는 보상’이 아니라, ‘평생 성실하게 일하며 납부한 은퇴자금을 돌려받는 결실’이어야 한다.     교활한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적인 인기만을 노리고 만든 그릇된 복지정책이 젊은이들에게 ‘게으름을 합리화’하거나, 일하고 싶어지지 않게 하는 순간, 그 사회는 무너지는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게으름 사회 무상 복지 사회 전체 학자금 대출금

2025.10.20. 19:34

[열린광장] 이반 일리치가 남긴 마지막 질문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제 팔십을 갓 넘겼는데 이토록 갑작스럽게 떠날 줄이야. 슬픔보다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단지 지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부재를 통해 마주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삶이 얼마나 빠르게 황혼기에 다다르고 있는가. 고인의 영정 속 모습이 잔영으로 내 모습과 겹쳐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리에 언젠가 나도 누울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진다. 죽음은 말이 없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혼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나에게 되묻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애써 외면해 왔는데 말이다. 나에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묻는다. 평소에는 피하거나 미루기 바빴던 질문들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잊지 않게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회상했다. 당시에는 젊었기에 그 책에서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이반 일리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던 법관이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인생 경로를 충실히 밟아왔고, 남들도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그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모두 틀렸던 건가?” 이 단 한 문장은 그가 평생을 실속없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위세를 무너뜨리는 질문이었다. 그가 사회적 성공과 외적 체면에 매달려온 세월은, 죽음 앞에서 한순간에 허무로 변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내세워 인간의 진짜 비극을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야말로 참된 두려움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 순간에야 사랑과 용서, 겸손의 가치를 깨닫듯, 누구든 나이의 경계에서 그 질문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엔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가정, 사회, 교회에서도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삶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는가가 결국 인생의 성적표임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맞으며 비로소 진실을 본다. 그는 마지막 순간,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그 절규 속에는 역설적 평안이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본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바로 ‘부활의 문턱’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회심, 그것이 톨스토이가 던진 복음적 메시지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를 통해 말한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에 얻은 그 지혜, 즉 ‘삶은 유한하나, 그 유한 속에 영원이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소망은 단순하다. 더 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내 미소가 또 다른 이의 빛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나는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고백에 내 마음을 포개본다.   “죽음이 사라지고, 대신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바로 은혜이며, 나의 남은 생을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일리치 이반 이반 일리치 사회적 성공 인생 경로

2025.10.1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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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여론과 정치

근대 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행위는 여론을 기반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여론이란 무엇인가. 학자들은 여론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통된 관심사에 대해 가지는 집단적 의견, 곧 ‘공중의 의견(Public Opinion)’이라 정의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은 사회 속의 다수를 ‘군중(群衆)’이라 불렀고, 같은 시대의 사회학자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는 이를 ‘공중(公衆)’이라 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가치와 규범, 도구의 층화된 구조로 발전했기 때문이며, 매스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의 발달이 그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보의 확산과 지적 수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여론을 ‘공론(公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민은 여론을 존중하는 정치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에서는 과학적 여론조사라는 이름 아래 조사 방식을 조정하거나, 결과를 선택적으로 발표해 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보다 조작된 데이터를 통해 정당성을 포장하는 행위이며,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하는 일이다.   여론은 객관성과 정밀함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만약 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결과는 국민의 의지와 정반대의 정치적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일대 심리학자 칼 호블랜드(Carl Hovland, 1912~1961)는 정치적 설득이나 대국민 홍보의 방식을 ‘희망적 소구(Hope Appeal)’와 ‘위협적 소구(Threat Appeal)’로 구분했다. 희망적 소구는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의 긍정적 변화를 약속하는 접근법이다. 반면 위협적 소구는 공포와 불안을 자극해 복종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주로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 사용된다.   만약 자유민주국가에서조차 위협적 소구가 사용된다면, 국민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분열될 것이며,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영국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고메리(Bernard L. Montgomery, 1887~1976) 장군은 “머리가 나쁘고 부지런한 자는 가장 위험하므로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독일의 롬멜(Erwin Rommel, 1891~1944) 장군은 머리가 나빠도 부지런한 이들을 기용하다 패전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몽고메리의 통찰이다. 판단력 없이 부지런한 정치인은 국가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국민의 여론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용하는 지도자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여론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것, 그것이 진짜 리더십이며 민주정치의 출발점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여론 정치 위협적 소구가 정치적 행위 정치적 행동

2025.10.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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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장부 속 ‘A’, 그리고 오헤어 공항

영화 ‘언터처블(Untouchable)’에는 알카포네가 배신한 부하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알카포네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부하 세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부하들은 두목이 아직도 자신들을 신임하고 있다고 믿고, 배부르게 먹고 술도 거나하게 취했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보니, 그들은 모두 의자에 꽁꽁 묶여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온통 알카포네의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중에 발견된 세 사람의 시체는 모든 뼈가 마디마디 전부 부서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잔인했던 알카포네는 이탈리아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의 뒷골목 건달로 출발했다. 스물한 살 무렵 시카고로 건너와 존 토리오가 이끄는 갱단에 들어간 그는, 토리오의 신임을 얻으며 세력을 넓혔다. 토리오가 습격을 받아 불구가 되면서 은퇴하자, 카포네는 자연스럽게 조직의 두목이 되었다. 때마침 미국 사회에는 금주령이 시행 중이었고, 그는 밀주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겉으로는 “중고 가구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술, 도박, 매춘을 아우르는 거대한 범죄 제국의 지배자였다.   당시 시카고 경찰의 절반은 카포네에게 매수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손대지 못했다. 살인과 폭력으로는 그를 법정에 세우기 어려웠다.     결국 연방정부가 찾은 돌파구는 소득세였다. 카포네는 엄청난 돈을 벌었음에도 세금을 내기는커녕 세금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의 수입만 입증하면 됐고, 이를 위해서는 내부자의 도움과 장부 기록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카포네 곁에 있던 에디 오헤어(Edward Joseph O’Hare)가 비밀리에 연방수사국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직의 장부와 내부 정보를 FBI에 제공했다. 특히 장부에는 ‘A’ 또는 ‘AL’로 표시된 항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오헤어의 증언과 내부 자료 덕분에 이 기호가 곧 알카포네 본인을 지칭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결정적 단서는 카포네가 실제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카포네가 배심원들을 돈과 협박으로 매수했다는 사실도 오헤어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알게 된 제임스 윌커슨 판사는 재판 당일 배심원단 전체를 다른 법정의 배심원들과 전격 교체하는 묘수를 썼다.     결국 카포네는 1931년 유죄 판결을 받고 11년형에 처해졌다. 카포네는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편의를 누렸지만, 알카트래즈로 이감되면서 모든 특권을 잃었다. 매독이 뇌까지 침범해 치매 증세를 보였고, 결국 48세의 나이로 병마 속에 생을 마쳤다.   한편, 카포네 몰락의 숨은 주역이었던 에디 오헤어는 1939년 시카고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신의 대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이름도 같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H. 오헤어(Edward Henry O’Hare)가 그 명성을 이어간다.     아들 오헤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해 수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해군 항공대 최초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 시카고의 오헤어 국제공항은 바로 이, 아들 오헤어의 희생과 용맹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오헤어 장부 에디 오헤어 알카포네 본인 카포네 몰락

2025.10.1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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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10월의 한, 잃어버린 통일의 꿈

1950년 가을, 10월의 하늘은 분명히 맑고 높았다. 그러나 그 푸른 가을빛은 전쟁의 비극과 함께 한국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천상륙작전의 대승리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의 발걸음이 평양을 넘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온 겨레의 가슴은 마치 통일의 문턱에 선 듯 벅찬 희망으로 차올랐다. 드디어 분단의 아픔을 끝내고 하나 된 조국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한국인의 가슴에 천추의 한을 새겼다. 수십만의 병력이 물결처럼 밀려 내려와 압록강변의 전황을 뒤바꾸었고, 마침내 국토통일의 꿈은 눈앞에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UN군과 한국군은 피할 수 없는 후퇴를 거듭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기적처럼 되찾은 국토의 절반이 다시 전장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그 후 이 땅의 분단은 굳어졌고, 남과 북의 철책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가슴에 깊은 못을 박아놓았다.   참전한 노병은 아직도 그날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한참 북쪽까지 전진했던 부대가 후퇴를 거듭하며 다시 그 끔찍한 낙동강의 그림자를 떠올려야 했을 때, 가슴 속 깊이 치미는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겨레가 하나 되는 순간이 눈앞에 있었지만, 통일은 한 줌의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10월의 한’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중공군의 참전은 단순한 전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겨레의 운명을 뒤흔들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근원을 굳건히 만들고 말았다. 그날의 후퇴는 전쟁에서의 물러섬이었을 뿐 아니라, 통일의 문 앞에서 무너져 내린 민족적 좌절이었다. 천년을 우리 조상에 몹쓸 짓으로 괴롭혀 온 이웃나라의 한 맺힌 악행의 역사가 되새겨지는 기억이다.   75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좌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값진 대가 위에 세워졌는지 깊이 깨달아야 한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토와 민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장에 몸을 던졌고, 이름 모를 고지마다 그들의 피와 땀이 스며들었다. 그 희생은 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남았지만, 자유 대한민국의 기틀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10월의 역사가 남긴 교훈의 하나는 평화와 통일은 결코 값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이 다시는 그날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굳건한 안보와 민족적 단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통일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그해의 경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자유를 지키는 힘이 없을 때, 희망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날의 비극을 다시 곱씹으며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 한다. 미완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을 넘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자유와 정의 위에서 하나 된 조국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1950년 10월, 통일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그때의 교훈은 오늘의 한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그때 어느 유명 시인은 ‘초토’란 시에서 ‘피 흘리며 누운 자리에/ 잡초가 자라고/ 통곡의 소리조차/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라고 전쟁이 휩쓸고 간 참상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짐해야 한다. 10월의 한을 역사적 교훈으로 새기되, 미래를 향한 희망의 발판으로 삼자. 통일의 길은 멀고도 험하나,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한, 한국인은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통일 자유 대한민국 민족적 단합 역사적 교훈

2025.10.0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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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함께 읽고 쓴 30년

얼마 전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한인회관에서 뜻깊은 모임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문학 동호회인 ‘오렌지 글사랑’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고, 회원들의 작품을 모은 책 ‘오렌지 문학’의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회원들과 LA 지역의 문인 대표들이 모인 것이다.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모여 2시간씩 시와 수필을 공부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작품을 썼는지를 읽으며, 생각하고, 설명을 듣고, 느낌을 말한다. 자신이 직접 시나 수필을 써 와서 회원들과의 워크숍(workshop)을 통해 다른 회원들의 진솔한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운다. 이런 과정은 영어를 말하기 위해 input과 output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 이후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좋아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공부하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계속 성장하게 하고 충실해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유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해 왔을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생각의 세계를 작가의 세계까지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은퇴 후를 보람 있게 보내는 일이 글을 쓰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하고 이웃과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본다. 글을 쓰는 일도 그중의 하나이고, 책을 읽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AI의 의존도를 줄이고 어린이들에게 다시 독서를 장려한다고 한다. AI가 빠르게 정리된 기술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힘, 사고력을 기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사고의 깊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독서가 유일한 방법이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 덤으로 여러 가지 선물도 따라온다.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공부하면 뇌가 다시 활성화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스노든 박사는 미국의 수녀 295명을 연구했다. 85세 이상에서도 계속 공부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매 환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발표했다.   80세에 호주 멜버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로나 프렌더가스트도 “공부를 못 할 정도로 늙은 사람은 없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히 글을 쓰고 싶고, 자신의 생각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진다. 최성규 / 베스트영어훈련원장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오렌지 글사랑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오렌지 문학

2025.10.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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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후회로 남은 유품 정리

사촌 동생이 “다 쓰레기들 이네(They are all Garbages)”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러 앉았다. 그리고 10여 전 전 내가 한 행동들이 어제일 인양 눈앞에 펼쳐졌다. 후회의 아픔이 밀려왔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정리할 걸….   우리 집안의 요셉과 같은 분인 숙부님과 숙모님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집과 양로시설과 병원을 오가시며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 때가 되었는지 자식들이 부모님을 가까이서 돌보겠다고 모시고 간다. 아들 둘이 숙부님 집에 와서 이사 준비를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실 때 당신들께서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 이제 자식들이 부모의 거주지를 옮기고 있다. 그 살림살이를 보며 사촌동생이 한 말이 “They are all garbages”였다.   13년 전 부모님이 7주 간격을 두고 사이좋게 귀향하셨다. 텅 빈 집을 정리해야 했다. 며칠 동안 큰 박스를 옆에 두고 부모님의 흔적들을 쓰레기처럼 던져 넣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받은 모범직장인 상패도 있었고 매일 생활을 기록한 손때 묻은 수첩도 있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교직원으로 살아오신 어른의 미국 첫 직장은 맥도날드 밤 청소였다. 영업시간이 끝난 후 밤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혼자서 청소하셨다.     곧은 성격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정리한 것이 보스에게 전달되어 ‘Employee of the month’, 이달의 종업원으로 선정되어 작은 선물과 상패를 받으셨다.     사실 그 상패는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아온 아버지의 존재와 생활의 증거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버렸던 그 상패가 내 가슴에 남아 생각만 하면 아버지 모습과 겹쳐져 가슴이 꽉 메인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하며 정리했어야 했는데….   숙부님은 6.25의 화약 냄새가 없어지기 전 유학을 오셨다. 첩첩산중에서 태어나 대구라는 도시로 중학교 유학을 가고 대학은 미국으로 이어졌다.     유학시절의 미국 생활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흑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요구를 받기도 하였으니 지금 이민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행이 숙부님을 후원하신 닥터 밀러라는 분은 영향력이 있어 한국인으로는 처음 법대에 입학하도록 도와 주셨고 이후 뉴욕 변호사가 되었다.     대법관 고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고문이 되기도 하셨다. 그래서 작은집에는 공로패들과 프레임 되어있는 증서들이 많다.   한 생을 마감하며 살아온 자취들이 남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촌 동생의 말 “They are all garbages”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맥도날드 식당의 모범 종업원 상패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가 그립고 추모할 때에, 그리고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전해줄 때 귀한 유품이 될 텐데 버린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아쉽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무교병을 먹는다. 그들은 4000년 전 조상의 출애굽과 어려웠던 삶을 오늘도 잊지 않으려고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는다고 한다.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계획하는 추진력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 집안의 어른이시고 우리 가족 모두가 이 미국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 숙부님이 저물어 가신다. 남기고 가는 증거들은 대체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쓰레기는 절대 아닐 터다. 사촌 아우들이 내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효섭 / 동서장례 대표열린광장 후회로 유품 후회로 유품 모범직장인 상패 할아버지 얘기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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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

‘숲 속의 두 갈래 길(The Road Not Taken)’이란 명시를 남긴 로버트 프로스트의 다른 시에 ‘돌담 손질(Mending Wall)’이 있다. 이 시에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 Makes Good Neighbors)’ 라는 말이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이웃은 소를 키우고 있었다. 소의 주인이 누군지, 소들이 서로 놀다가 섞이고 달아나다 보면 구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이웃은 울타리를 만들어 자기 소를 보호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은 더는 소를 키우지 않았다. 그래도 울타리는 허물지 않았다. 두 집 사이에는 여전히 경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다니엘 디포우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혼자 외딴 섬에 고립된 주인공은 큰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동물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큰 벽을 쌓았다. 섬에는 사람은 없었으나 야생동물은 살았다. 그는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잡아서 먹었다.   불과 150~200년 전만 해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국경 개념이 약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의 땅을 빼앗아 말뚝을 막고는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인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 따르면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을 빼앗았다. 전쟁에서 이긴 후 백인 지배계급은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고는 자기 땅이라고 우겼고, 나중에 자기들끼리 만든 법으로 이를 합법화했다.     지주들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등지에서 이주 노동자를 모아 캘리포니아 농장에 데려다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서부 개척 시대,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포도, 목화 농장은 불쌍한 노동자들이 흘린 ‘분노의 눈물’로 재배한 것이었다. 요즘 같이 외국 노동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뭄으로 농토를 잃은 동족을 울린 수치스러운 노동력 착취였다. 미국은 당시 군사적 위협으로 여러 섬나라를 합병하고 루이지애나, 알래스카를 각각 프랑스와 러시아로부터 사들였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허무세요” 하고 선언했다. 이후 소련연방 사이의 벽이 하나 둘 무너지고 소련연방은 붕괴하였다. 세계사에 남는 ‘가장 큰 벽’이 없어진 것이다.   프로스트는 그의 시에서 사람과 사람, 이웃 사이의 장벽은 임의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은유하고 있다. 자연은 사람이 만드는 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벽을 높이 쌓고 허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철조망을 넘어온 사람들은 검거돼 낯설고 무서운 나라로 추방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행정부 시절, 너무 많이 들어왔다. 뉴저지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밀입국했고 그중에는 범죄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두 나라 간의 울타리는 튼튼하지 못하고 구멍이 많았다. 좋은 울타리가 아니었다. 두 이웃 나라가 사이좋게 만든 좋은 울타리였다면 좋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울타리(경계)는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개인 정보를 훔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벽을 쌓고 이중 삼중으로 보호망을 구축해야 한다. 울타리는 단단한가. 자주 점검해 구멍이 발견되면 보수해야 한다. 울타리가 필요 없는 시대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최복림 / 시인열린광장 울타리 이웃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사람 이웃 캘리포니아 농장

2025.10.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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