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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이반 일리치가 남긴 마지막 질문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제 팔십을 갓 넘겼는데 이토록 갑작스럽게 떠날 줄이야. 슬픔보다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단지 지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부재를 통해 마주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삶이 얼마나 빠르게 황혼기에 다다르고 있는가. 고인의 영정 속 모습이 잔영으로 내 모습과 겹쳐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리에 언젠가 나도 누울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진다. 죽음은 말이 없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혼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나에게 되묻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애써 외면해 왔는데 말이다. 나에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묻는다. 평소에는 피하거나 미루기 바빴던 질문들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잊지 않게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회상했다. 당시에는 젊었기에 그 책에서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이반 일리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던 법관이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인생 경로를 충실히 밟아왔고, 남들도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그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모두 틀렸던 건가?” 이 단 한 문장은 그가 평생을 실속없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위세를 무너뜨리는 질문이었다. 그가 사회적 성공과 외적 체면에 매달려온 세월은, 죽음 앞에서 한순간에 허무로 변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내세워 인간의 진짜 비극을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야말로 참된 두려움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 순간에야 사랑과 용서, 겸손의 가치를 깨닫듯, 누구든 나이의 경계에서 그 질문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엔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가정, 사회, 교회에서도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삶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는가가 결국 인생의 성적표임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맞으며 비로소 진실을 본다. 그는 마지막 순간,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그 절규 속에는 역설적 평안이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본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바로 ‘부활의 문턱’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회심, 그것이 톨스토이가 던진 복음적 메시지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를 통해 말한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에 얻은 그 지혜, 즉 ‘삶은 유한하나, 그 유한 속에 영원이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소망은 단순하다. 더 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내 미소가 또 다른 이의 빛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나는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고백에 내 마음을 포개본다.   “죽음이 사라지고, 대신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바로 은혜이며, 나의 남은 생을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일리치 이반 이반 일리치 사회적 성공 인생 경로

2025.10.1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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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여론과 정치

근대 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행위는 여론을 기반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여론이란 무엇인가. 학자들은 여론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통된 관심사에 대해 가지는 집단적 의견, 곧 ‘공중의 의견(Public Opinion)’이라 정의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은 사회 속의 다수를 ‘군중(群衆)’이라 불렀고, 같은 시대의 사회학자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는 이를 ‘공중(公衆)’이라 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가치와 규범, 도구의 층화된 구조로 발전했기 때문이며, 매스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의 발달이 그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보의 확산과 지적 수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여론을 ‘공론(公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민은 여론을 존중하는 정치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에서는 과학적 여론조사라는 이름 아래 조사 방식을 조정하거나, 결과를 선택적으로 발표해 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보다 조작된 데이터를 통해 정당성을 포장하는 행위이며,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하는 일이다.   여론은 객관성과 정밀함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만약 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결과는 국민의 의지와 정반대의 정치적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일대 심리학자 칼 호블랜드(Carl Hovland, 1912~1961)는 정치적 설득이나 대국민 홍보의 방식을 ‘희망적 소구(Hope Appeal)’와 ‘위협적 소구(Threat Appeal)’로 구분했다. 희망적 소구는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의 긍정적 변화를 약속하는 접근법이다. 반면 위협적 소구는 공포와 불안을 자극해 복종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주로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 사용된다.   만약 자유민주국가에서조차 위협적 소구가 사용된다면, 국민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분열될 것이며,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영국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고메리(Bernard L. Montgomery, 1887~1976) 장군은 “머리가 나쁘고 부지런한 자는 가장 위험하므로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독일의 롬멜(Erwin Rommel, 1891~1944) 장군은 머리가 나빠도 부지런한 이들을 기용하다 패전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몽고메리의 통찰이다. 판단력 없이 부지런한 정치인은 국가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국민의 여론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용하는 지도자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여론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것, 그것이 진짜 리더십이며 민주정치의 출발점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여론 정치 위협적 소구가 정치적 행위 정치적 행동

2025.10.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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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장부 속 ‘A’, 그리고 오헤어 공항

영화 ‘언터처블(Untouchable)’에는 알카포네가 배신한 부하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알카포네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부하 세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부하들은 두목이 아직도 자신들을 신임하고 있다고 믿고, 배부르게 먹고 술도 거나하게 취했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보니, 그들은 모두 의자에 꽁꽁 묶여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온통 알카포네의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중에 발견된 세 사람의 시체는 모든 뼈가 마디마디 전부 부서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잔인했던 알카포네는 이탈리아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의 뒷골목 건달로 출발했다. 스물한 살 무렵 시카고로 건너와 존 토리오가 이끄는 갱단에 들어간 그는, 토리오의 신임을 얻으며 세력을 넓혔다. 토리오가 습격을 받아 불구가 되면서 은퇴하자, 카포네는 자연스럽게 조직의 두목이 되었다. 때마침 미국 사회에는 금주령이 시행 중이었고, 그는 밀주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겉으로는 “중고 가구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술, 도박, 매춘을 아우르는 거대한 범죄 제국의 지배자였다.   당시 시카고 경찰의 절반은 카포네에게 매수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손대지 못했다. 살인과 폭력으로는 그를 법정에 세우기 어려웠다.     결국 연방정부가 찾은 돌파구는 소득세였다. 카포네는 엄청난 돈을 벌었음에도 세금을 내기는커녕 세금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의 수입만 입증하면 됐고, 이를 위해서는 내부자의 도움과 장부 기록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카포네 곁에 있던 에디 오헤어(Edward Joseph O’Hare)가 비밀리에 연방수사국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직의 장부와 내부 정보를 FBI에 제공했다. 특히 장부에는 ‘A’ 또는 ‘AL’로 표시된 항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오헤어의 증언과 내부 자료 덕분에 이 기호가 곧 알카포네 본인을 지칭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결정적 단서는 카포네가 실제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카포네가 배심원들을 돈과 협박으로 매수했다는 사실도 오헤어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알게 된 제임스 윌커슨 판사는 재판 당일 배심원단 전체를 다른 법정의 배심원들과 전격 교체하는 묘수를 썼다.     결국 카포네는 1931년 유죄 판결을 받고 11년형에 처해졌다. 카포네는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편의를 누렸지만, 알카트래즈로 이감되면서 모든 특권을 잃었다. 매독이 뇌까지 침범해 치매 증세를 보였고, 결국 48세의 나이로 병마 속에 생을 마쳤다.   한편, 카포네 몰락의 숨은 주역이었던 에디 오헤어는 1939년 시카고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신의 대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이름도 같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H. 오헤어(Edward Henry O’Hare)가 그 명성을 이어간다.     아들 오헤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해 수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해군 항공대 최초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 시카고의 오헤어 국제공항은 바로 이, 아들 오헤어의 희생과 용맹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오헤어 장부 에디 오헤어 알카포네 본인 카포네 몰락

2025.10.1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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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10월의 한, 잃어버린 통일의 꿈

1950년 가을, 10월의 하늘은 분명히 맑고 높았다. 그러나 그 푸른 가을빛은 전쟁의 비극과 함께 한국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천상륙작전의 대승리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의 발걸음이 평양을 넘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온 겨레의 가슴은 마치 통일의 문턱에 선 듯 벅찬 희망으로 차올랐다. 드디어 분단의 아픔을 끝내고 하나 된 조국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한국인의 가슴에 천추의 한을 새겼다. 수십만의 병력이 물결처럼 밀려 내려와 압록강변의 전황을 뒤바꾸었고, 마침내 국토통일의 꿈은 눈앞에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UN군과 한국군은 피할 수 없는 후퇴를 거듭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기적처럼 되찾은 국토의 절반이 다시 전장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그 후 이 땅의 분단은 굳어졌고, 남과 북의 철책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가슴에 깊은 못을 박아놓았다.   참전한 노병은 아직도 그날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한참 북쪽까지 전진했던 부대가 후퇴를 거듭하며 다시 그 끔찍한 낙동강의 그림자를 떠올려야 했을 때, 가슴 속 깊이 치미는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겨레가 하나 되는 순간이 눈앞에 있었지만, 통일은 한 줌의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10월의 한’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중공군의 참전은 단순한 전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겨레의 운명을 뒤흔들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근원을 굳건히 만들고 말았다. 그날의 후퇴는 전쟁에서의 물러섬이었을 뿐 아니라, 통일의 문 앞에서 무너져 내린 민족적 좌절이었다. 천년을 우리 조상에 몹쓸 짓으로 괴롭혀 온 이웃나라의 한 맺힌 악행의 역사가 되새겨지는 기억이다.   75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좌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값진 대가 위에 세워졌는지 깊이 깨달아야 한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토와 민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장에 몸을 던졌고, 이름 모를 고지마다 그들의 피와 땀이 스며들었다. 그 희생은 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남았지만, 자유 대한민국의 기틀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10월의 역사가 남긴 교훈의 하나는 평화와 통일은 결코 값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이 다시는 그날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굳건한 안보와 민족적 단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통일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그해의 경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자유를 지키는 힘이 없을 때, 희망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날의 비극을 다시 곱씹으며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 한다. 미완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을 넘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자유와 정의 위에서 하나 된 조국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1950년 10월, 통일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그때의 교훈은 오늘의 한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그때 어느 유명 시인은 ‘초토’란 시에서 ‘피 흘리며 누운 자리에/ 잡초가 자라고/ 통곡의 소리조차/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라고 전쟁이 휩쓸고 간 참상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짐해야 한다. 10월의 한을 역사적 교훈으로 새기되, 미래를 향한 희망의 발판으로 삼자. 통일의 길은 멀고도 험하나,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한, 한국인은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통일 자유 대한민국 민족적 단합 역사적 교훈

2025.10.0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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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함께 읽고 쓴 30년

얼마 전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한인회관에서 뜻깊은 모임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문학 동호회인 ‘오렌지 글사랑’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고, 회원들의 작품을 모은 책 ‘오렌지 문학’의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회원들과 LA 지역의 문인 대표들이 모인 것이다.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모여 2시간씩 시와 수필을 공부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작품을 썼는지를 읽으며, 생각하고, 설명을 듣고, 느낌을 말한다. 자신이 직접 시나 수필을 써 와서 회원들과의 워크숍(workshop)을 통해 다른 회원들의 진솔한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운다. 이런 과정은 영어를 말하기 위해 input과 output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 이후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좋아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공부하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계속 성장하게 하고 충실해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유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해 왔을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생각의 세계를 작가의 세계까지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은퇴 후를 보람 있게 보내는 일이 글을 쓰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하고 이웃과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본다. 글을 쓰는 일도 그중의 하나이고, 책을 읽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AI의 의존도를 줄이고 어린이들에게 다시 독서를 장려한다고 한다. AI가 빠르게 정리된 기술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힘, 사고력을 기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사고의 깊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독서가 유일한 방법이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 덤으로 여러 가지 선물도 따라온다.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공부하면 뇌가 다시 활성화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스노든 박사는 미국의 수녀 295명을 연구했다. 85세 이상에서도 계속 공부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매 환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발표했다.   80세에 호주 멜버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로나 프렌더가스트도 “공부를 못 할 정도로 늙은 사람은 없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히 글을 쓰고 싶고, 자신의 생각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진다. 최성규 / 베스트영어훈련원장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오렌지 글사랑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오렌지 문학

2025.10.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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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후회로 남은 유품 정리

사촌 동생이 “다 쓰레기들 이네(They are all Garbages)”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러 앉았다. 그리고 10여 전 전 내가 한 행동들이 어제일 인양 눈앞에 펼쳐졌다. 후회의 아픔이 밀려왔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정리할 걸….   우리 집안의 요셉과 같은 분인 숙부님과 숙모님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집과 양로시설과 병원을 오가시며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 때가 되었는지 자식들이 부모님을 가까이서 돌보겠다고 모시고 간다. 아들 둘이 숙부님 집에 와서 이사 준비를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실 때 당신들께서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 이제 자식들이 부모의 거주지를 옮기고 있다. 그 살림살이를 보며 사촌동생이 한 말이 “They are all garbages”였다.   13년 전 부모님이 7주 간격을 두고 사이좋게 귀향하셨다. 텅 빈 집을 정리해야 했다. 며칠 동안 큰 박스를 옆에 두고 부모님의 흔적들을 쓰레기처럼 던져 넣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받은 모범직장인 상패도 있었고 매일 생활을 기록한 손때 묻은 수첩도 있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교직원으로 살아오신 어른의 미국 첫 직장은 맥도날드 밤 청소였다. 영업시간이 끝난 후 밤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혼자서 청소하셨다.     곧은 성격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정리한 것이 보스에게 전달되어 ‘Employee of the month’, 이달의 종업원으로 선정되어 작은 선물과 상패를 받으셨다.     사실 그 상패는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아온 아버지의 존재와 생활의 증거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버렸던 그 상패가 내 가슴에 남아 생각만 하면 아버지 모습과 겹쳐져 가슴이 꽉 메인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하며 정리했어야 했는데….   숙부님은 6.25의 화약 냄새가 없어지기 전 유학을 오셨다. 첩첩산중에서 태어나 대구라는 도시로 중학교 유학을 가고 대학은 미국으로 이어졌다.     유학시절의 미국 생활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흑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요구를 받기도 하였으니 지금 이민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행이 숙부님을 후원하신 닥터 밀러라는 분은 영향력이 있어 한국인으로는 처음 법대에 입학하도록 도와 주셨고 이후 뉴욕 변호사가 되었다.     대법관 고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고문이 되기도 하셨다. 그래서 작은집에는 공로패들과 프레임 되어있는 증서들이 많다.   한 생을 마감하며 살아온 자취들이 남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촌 동생의 말 “They are all garbages”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맥도날드 식당의 모범 종업원 상패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가 그립고 추모할 때에, 그리고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전해줄 때 귀한 유품이 될 텐데 버린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아쉽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무교병을 먹는다. 그들은 4000년 전 조상의 출애굽과 어려웠던 삶을 오늘도 잊지 않으려고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는다고 한다.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계획하는 추진력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 집안의 어른이시고 우리 가족 모두가 이 미국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 숙부님이 저물어 가신다. 남기고 가는 증거들은 대체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쓰레기는 절대 아닐 터다. 사촌 아우들이 내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효섭 / 동서장례 대표열린광장 후회로 유품 후회로 유품 모범직장인 상패 할아버지 얘기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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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

‘숲 속의 두 갈래 길(The Road Not Taken)’이란 명시를 남긴 로버트 프로스트의 다른 시에 ‘돌담 손질(Mending Wall)’이 있다. 이 시에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 Makes Good Neighbors)’ 라는 말이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이웃은 소를 키우고 있었다. 소의 주인이 누군지, 소들이 서로 놀다가 섞이고 달아나다 보면 구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이웃은 울타리를 만들어 자기 소를 보호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은 더는 소를 키우지 않았다. 그래도 울타리는 허물지 않았다. 두 집 사이에는 여전히 경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다니엘 디포우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혼자 외딴 섬에 고립된 주인공은 큰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동물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큰 벽을 쌓았다. 섬에는 사람은 없었으나 야생동물은 살았다. 그는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잡아서 먹었다.   불과 150~200년 전만 해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국경 개념이 약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의 땅을 빼앗아 말뚝을 막고는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인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 따르면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을 빼앗았다. 전쟁에서 이긴 후 백인 지배계급은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고는 자기 땅이라고 우겼고, 나중에 자기들끼리 만든 법으로 이를 합법화했다.     지주들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등지에서 이주 노동자를 모아 캘리포니아 농장에 데려다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서부 개척 시대,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포도, 목화 농장은 불쌍한 노동자들이 흘린 ‘분노의 눈물’로 재배한 것이었다. 요즘 같이 외국 노동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뭄으로 농토를 잃은 동족을 울린 수치스러운 노동력 착취였다. 미국은 당시 군사적 위협으로 여러 섬나라를 합병하고 루이지애나, 알래스카를 각각 프랑스와 러시아로부터 사들였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허무세요” 하고 선언했다. 이후 소련연방 사이의 벽이 하나 둘 무너지고 소련연방은 붕괴하였다. 세계사에 남는 ‘가장 큰 벽’이 없어진 것이다.   프로스트는 그의 시에서 사람과 사람, 이웃 사이의 장벽은 임의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은유하고 있다. 자연은 사람이 만드는 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벽을 높이 쌓고 허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철조망을 넘어온 사람들은 검거돼 낯설고 무서운 나라로 추방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행정부 시절, 너무 많이 들어왔다. 뉴저지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밀입국했고 그중에는 범죄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두 나라 간의 울타리는 튼튼하지 못하고 구멍이 많았다. 좋은 울타리가 아니었다. 두 이웃 나라가 사이좋게 만든 좋은 울타리였다면 좋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울타리(경계)는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개인 정보를 훔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벽을 쌓고 이중 삼중으로 보호망을 구축해야 한다. 울타리는 단단한가. 자주 점검해 구멍이 발견되면 보수해야 한다. 울타리가 필요 없는 시대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최복림 / 시인열린광장 울타리 이웃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사람 이웃 캘리포니아 농장

2025.10.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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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텃밭 가꾸기

시니어 센터에서 고추와 토마토 씨앗, 모종을 낼 수 있는 흙과 용기 등을 나누어 주었다. 집에서 채소를 키우면 자칫 운동이 부족할 수 있는 노인들이 몸을 쓰게 되고 영양가 높은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며 텃밭 가꾸기를 권했다. 여느 때 같으면 집에 와서 아내에게 던져 주었을 텐데 마침 아내가 한국여행 중이었다.   아내는 십수 년째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있다. 마당 한쪽, 잔디 반, 잡초 반, 풀을 걷어내고 땅을 일구어 봄이면 이런저런 씨앗과 모종을 심는다. 상추를 심고, 고추, 오이, 호박, 가지, 토마토 등을 번갈아 가며 심는다. 농사일이라는 것이 묘하다. 어느 해에는 호박이 잘 되어 이웃에 나누어 주고도 남아 잘라 말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오이가 잘되기도 한다.   경제성을 따지면 뒷마당 텃밭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흙이며 거름, 그늘막, 물주는 호스며 물값까지 따지면 시장에서 사다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게다가 잡초도 뽑아주어야 하고, 아침저녁 물주며 모기들에게 물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가 즐거워하는 일이니 뭐라 말은 하지 않는다.   시니어 센터에서 받아 온 씨앗을 보다가 문득 내가 심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깔고 받아 온 모종 키트를 펼쳐 씨앗을 심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고 어색하다. 그물에 싸인 흙에 물을 부어 불린 다음 씨를 심으라 했는데, 어느 정도 불려야 하는지, 어떻게 씨를 심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물을 찢고 흙을 꺼내 용기에 담아 씨를 심었다. 흙은 촉촉하게, 햇볕이 드는 곳에 두라고 했다. 아침이면 30분가량 해가 드는 거실 유리문 옆에 놓아두었다. 3~4일이 지나니 토마토 화분에서 파아란 싹이 돋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런 재미에 주말 농사를 짓는구나.   토마토 싹은 햇빛뿐 아니라 모든 빛에 반응한다. 한나절 지나고 나면 빛이 오는 쪽으로 몸을 틀고 있어 한 번씩 화분을 돌려준다. 1주일쯤 지났는데, 벌써 5~6센티 정도 자랐다.   고추는 3종류를 심었는데, 아직 싹이 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1~2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하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텃밭 가꾸기는 노인들에게 가벼운 운동을 하게 해 주고, 햇빛을 보니 비타민D 가 생성된다고 한다. 정신건강에도 좋아 스트레스와 걱정이 줄어든다. 채소 가꾸기는 계획과 실천, 채소에 발생하는 이런저런 문제 등을 (벌레가 생기고, 물을 주는데도 잎이 마르고, 꽃은 피는데 열매는 맺히지 않는 등의 문제) 해결해야 하니 머리를 쓰게 하여 치매 예방이 된다. 결실을 보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고, 목적의식이 생기며,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가 나의 작은 거실 텃밭을 보더니 분무기에 물을 담아 준다. 그걸로 물을 주라고 한다. 써보니 편리하다. 농사 선배라 안목이 다르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광장 텃밭 뒷마당 텃밭 거실 텃밭 텃밭 가꾸기

2025.10.0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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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국군의 날에 담긴 역사적 의미

우리에게 익숙한 10월 1일 국군의 날은 단순히 군의 위용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이 날짜에는 대한민국 육·해·공군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역사와 그 속에서 빛난 한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50년 10월 1일, 6·25 전쟁의 격랑 속에서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기 위해 국군의 날이 제정됐다.   사실 육·해·공군은 제각기 다른 날에 창설됐다. 육군은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1946년 1월 15일, 해군은 해병 병단 창설일인 1945년 11월 11일, 공군은 육군에서 독립한 1949년 10월 1일이 각각의 창설일이었다. 그러나 1956년 대통령령 제1173호에 따라 10월 1일로 통합되면서, 각 군의 정체성을 넘어 대한민국 군 전체의 상징적인 날로 자리 잡게 됐다.   38선 돌파는 군사적인 판단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결정이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과 중국, 인도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대통령 등을 설득해 “38선을 넘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맥아더는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38선을 넘지 말 것을 엄격히 지시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맥아더에게 위임한 작전권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는 것이라며, 심지어 “도둑질하러 들어온 강도를 잡겠다는데 무슨 소리인가!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38선을 돌파하라!”고 격노하며 북진을 독려했다. 결국 제3사단은 맥아더의 공식 승인보다 앞선 9월 29일에 38선을 돌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의 중심에는 당시 제3사단장이었던 이종찬 장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복무했던 아픔 때문에 해방 후 한동안 군인의 길을 외면했던 그는 뒤늦게 육사에 입학해 수도경비사령관(1950년), 육군 참모총장(1952년), 국방부 장관(1960년) 등을 역임하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군 동원 명령을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거부해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 한 그의 소신은 이후 미군 장성들의 도움으로 파면은 면했으나, 당시 군이 겪었던 정치적 격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0월 1일은 단순히 기념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날은 혼란의 시대 속에서 나라를 지킨 국군의 용기와, 원칙을 잃지 않았던 한 군인의 신념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평화라는 소중한 가치를 선물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국군 역사 역사적 의미 정치적 중립성 한국군 단독

2025.09.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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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건국전쟁 2’가 던진 질문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는 “역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고,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가들이 말했듯,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거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감독 김덕영)’는 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이 나라를 세웠는가?” “그 위에서 누가 피와 눈물을 흘렸는가?”   영화 속 장면들은 충돌과 혼란, 배신과 살육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재 한국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정의의 문제를 끄집어냈다. 우리는 아직도 ‘건국’이라는 단어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건국 역사를 특정 이념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따라 왜곡될 수 있고, 해석하는 자에 따라 기억이 달라질 수 있다. ‘건국전쟁 2’는 이런 왜곡과 침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영화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혼란기를 조명했다. 이는 단순히 좌우 대립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세우려는 세력과 공산주의 혁명을 꾀한 남로당 세력 간의 치열한 ‘건국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반독재’라는 이름 아래 해방 공간을 단선적으로만 기억해왔다. 좌익 활동의 실체에 대해 말하면 ‘색깔론’이라며 입을 막았고, ‘반공’을 언급하면 낡은 시대의 유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이념은 단순한 사상이 아니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은 아픔의 역사지만, 그 배후에 있었던 조직적인 무장봉기와 폭력 또한 분명히 기록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압하려 했던 국가와 지도자들의 판단 또한, 이해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졌다. 좌익 세력이 경찰서를 장악하고 인공기를 내걸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그들의 자유를 보장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건국을 위해 단호히 제어했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역사 교과서가 진실을 온전히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국전쟁 2’는 좌익 활동의 실체와 그 상처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분열과 갈등을 겪었는지 알게 했다. 이 영화는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재조명하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내렸던 어려운 결정들을 조명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권력 남용과 정치적 갈등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료 중심의 해설, 미국과 소련의 비밀문서,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충실한 기록을 제시했다.   영화 관람 후 느낄 수 있는 불편함, 특정 인물에 대한 감정적 반발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역사이다. 사료 해석은 논쟁적일 수 있고, 감독의 시선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이미 의미가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가 말했듯, “역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건국전쟁 건국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 교과서

2025.09.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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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9·28 서울 수복의 교훈

9월은 우리 국민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다. 바로 9월 28일이 수도 서울을 되찾은 날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사령부는 매년 이날을 기려 옛 중앙청 자리(현 경복궁 앞뜰)에서 서울 수복 기념식을 열었다.   6·25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해 성공시켰다. 이어 석 달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과 9월 28일 서울 수복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 고립돼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시작했고, 이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 서울 수복 작전의 주력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였다. 미 육군과 한국 육군 일부도 작전에 합류했으나, 주도적 역할은 해병대가 맡았다.   둘째, 서울 완전 수복 하루 전날인 9월 27일 새벽, 박정모 소위가 지휘한 해병대 제 2대대 6중대 1소대는 총탄이 빗발치는 광화문대로를 돌파해 옛 중앙청 지붕 돔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대중에 알려진 ‘중앙청 앞마당 국기 게양대’는 사실과 다른 기록이다. 1소대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돔’이 있는 지붕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했다.   셋째, 우리는 한국 전쟁에서 희생된 미군, 유엔군, 국군 전사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기간 유엔군 약 15만 명, 한국군 약 61만 3000명이 목숨을 바쳤다.   마지막으로,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 결정적인 승리를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며 함께 주기도문을 외우자고 했다. 기도가 끝나자 이승만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의 두 손을 잡고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보내주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언급한 ‘신의 은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전한다.     애국가의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가 바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김택규 / 전 서울감신대 객원교수열린광장 서울 수복 서울 수복 서울 완전 수도 서울

2025.09.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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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참새와 관세, 보이지 않는 대가

1958년,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밀어붙였다. 당시 그는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어 농업 생산량을 줄인다고 판단하고, “참새는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전국에 동원령이 내려지고,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나무를 두드리고 냄비와 꽹과리를 쳐대며 참새를 쉬지 못하게 했다. 며칠 동안 쉴 곳을 찾지 못해 공중에서 계속 날기만 하던 참새들이 지쳐 땅에 떨어졌고, 불과 몇 달 만에 수억 마리의 참새가 사라졌다.   초기에는 성과처럼 보였지만 참새는 해충의 천적이기도 했다. 참새가 사라지자 메뚜기와 해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중국 전역의 벼농사가 초토화됐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이어진 대기근으로 중국에서는 최소 2000만 명, 많게는 4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둔한 지도자의 단 한 번의 잘못된 정책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중국, 유럽, 한국 등 세계 각국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겉으로는 미국 정부의 관세 수입이 수백억 달러 늘어나고, 철강.자동차 공장의 고용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마치 참새를 없앴을 때 처음 나타난 ‘곡식의 증가’와 같다. 관세증가는 곧장 수입품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피터슨 국제 경제연구소(PIIE)는 이번 조치만으로도 미국의 ‘중위 가구’ 연간 부담이 1200달러를 웃돌 것이라 추정했다.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해외 기업들은 미국을 우회해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창궐했던 것처럼, 눈앞의 관세 수입은 결국 미국 경제에 거대한 부담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조지아주 사바나 인근 현대차 배터리 공장부지에서 벌어진 대규모 이민단속과 한국인 노동자 체포사건은 경제적 문제를 넘어 인권적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관광비자나 무비자로 들어와 건설 현장과 항만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쇠사슬에 묶여 체포되었고, 더럽고 열악한 수용시설에 격리되었다. 단속의 명분은 불법 노동자 정리라지만, 국제 언론은 이를 “21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인권의 참사”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국토안보부가 실적을 위해서 무리한 체포를 감행한 것이든, 한국과의 관세와 투자협정을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해 계산된 고도의 전략이든, 이번 사태로 미국의 인권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고, 교역 파트너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특히 미국을 그동안 영원한 우방이라고 여겨왔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책 결정자는 언제나 ‘보이는 것’에 유혹된다. 관세수입은 즉시 집계되고, 미국노동자들의 고용증가는 즉각 표로 나타난다. 지지자들은 환호하고, 사람들은 당장 경제가 좋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하지만 전세계 국가들의 미국을 제외한 ‘우회교역증가’, 전세계 공급망의 탈미국화, 세계적인 인재들의 미국시장 회피로 인한 미국 시장의 감소와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 축소는 우리 눈에 숫자로 보이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당장의 환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균형과 신뢰 위에 정책을 세워야 한다.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어리석은 지도자가 벌이는 무리한 정책의 부작용은 그가 사라진 후 우리 모두가 운명처럼 짊어져야 할 짐이 되어 찾아 올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참새 관세 관세 수입 한국인 노동자 지도자 모택동

2025.09.2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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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제비의 한여름

롱아일랜드 끝 시골집, 43년을 살아온 뒷마당에 아직 겨울잠이 채 가시기 전 봄은 또 어김없이 찾아 왔다. 매년 4월 20일이 지나야 왔던 강남 갔던 제비, 올해는 4월 15일 돌아왔다. 너무도 놀랐다. 이렇게 일찍 돌아온 해는 한 번도 없었고 지난해는 4월 17일에 왔었다. 우리 인간은 그들의 계획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자연의 순리대로 어김없는 생존의 기지를 잘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을까.   십여일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봄샘 추위에 떨었고 마침내 후속대가 합세했다. 재잘대는 그들의 언어는 다 알 수는 없지만 42년 동안 지켜온 차고 둥지의 경험을 통해 새끼들에게 내리는 경계의 소리는 알 수 있다. 천적이 나타나면 “째재잭”하고 소리를 낸다. 둥지 속으로 숨으라는 경고에 모두 쏘옥 숨는다. 가족들이 다 모였다. 짝들을 짓는다. 처음 온 두 마리가 알을 품고 고행의 길에 들어갔고 다른 가족들은 둥지 3개를 보수하고 새 둥지도 2개를 만들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네 쌍이나 조금 늦게 알을 품었다. 이따끔씩 엄마 제비의 짧은 외출이 필요할 때는 아빠 제비가 잠깐 교대를 해주지만 엄마의 고행은, 쪼그린 무릎과 다리는 얼마나 힘에 겨울까? 머리만 둥지 밖을 내다보며가슴 털은 따스한 온도를 유지한 채 13~17여일(포란 기간)이 지나면 부화가 이루어지며 어미의 자세가 어정쩡 어색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가슴 털 밑의 움직임을 누를 수가 없다. 새끼들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첫 둥지에 새 생명이 태어날 즈음에 다른 세 둥지가 알을 품었다. 새끼들이 태어나면 어미들은 먹이 사냥에 바쁘다. 24여일 동안을 키워야 한다. 어릴 때는 파리, 모기, 벌 등을 먹이고 크면 나비, 잠자리, 이화명충 나방 등을 먹고 자란다. 올해는 한 번에 여러 둥지에 새 생명을 부화했는데 불행한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 북쪽 둥지에 네 마리가 태어났지만 두 마리가 무더운 기후에 허우적대다가 떨어졌다. 두 마리 모두 둥지 속에 다시 넣어주었지만 한 마리는 끝내 죽어서 땅에 묻어주었다. 동쪽 둥지에서 두 마리는 잘 자라서 하늘을 정복했고 앞쪽 둥지엔 네 마리가 건강하게 잘 자랐다.   일반적으로는 한여름에 두 번 번식한다. 그런데 올해에는 첫 번째로 품었던 짝만 다시 알을 품었다. 좀 늦은 감이 있었다. 계속 관찰을 했는데 세 마리가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빨리 자라는 새끼는 늘 부산스럽다. 그래서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그날도 제일 큰 새끼가 떨어졌고 숨을 거두어 또 묻어 주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네 둥지에 다섯번의 부화가 있었고 두 마리가 희생되었다. 마지막 태어난 형제는 어렵게 하늘을 정복했지만 과연 무난히 제2의 고향에 안착이 될까 걱정이다.   강행군의 비상 훈련 속에 시간이 흘렀다. 모든 식구가 지붕 위의 창공을 수없이 돌고 돌았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8월 25일이면 떠났다. 그런데 8월 20일 아침 집을 선회했던 모습이 마지막 날인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 늘 요란스럽게 재잘대던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빈 하늘 삼각형의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찡했다. 그 다음 날도 그랬다. 너무 일찍 온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보내는 마음과 내년 봄의 기다림이 나를 위로 했다. 그 먼길 얼마나 힘겨웠을까. 두 번째 태어난 두 마리가 눈에 선하다. 잘 무사히 도착했을까. 43년의 역사는 다시 이루어질까. 오광운 / 시인열린광장 한여름 제비 엄마 제비 앞쪽 둥지 북쪽 둥지

2025.09.2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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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미 정부 폭력에 한국은 뭘 했나

9월 초, 조지아주 현대-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벌어진 이민세관단속국(ICE)의 합동 단속 현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며 경제적 파트너십을 다지던 한국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손목과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지는 끔찍한 영상은 마치 노예 해방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자국 내 제조업 부흥을 외치던 미국 정부가 정작 그 정책의 주체인 한국 기업과 국민에게 보여준 무자비한 행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의도, 인권도, 외교적 예의와 절차도 무시한 이 폭력적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한국 기업이 근로자들의 합법적 노동 신분 확보에 소홀했다는 실책과, 2026년 중간 선거를 앞둔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존재 이유다. 자국 이익이 외교의 기본이라는 점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주권 국가로서의 한국 정부가 보여준 무능력함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한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감수했던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미 통상 외교에서 보여준 대통령과 협상단의 모습은 과연 적절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수천억 불의 자발적 헌납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기업 총수들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보여주기식 외교로 일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전에 ESTA(무비자 협정) 활용 방안이나, 이미 전례를 남긴 도요타의 대처 방안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의 이익을 위한 '배수진'을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회담 내내 보여준 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교감 앞에 벌받는 문제 학생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란'에서 지적했듯, 한국의 정치 현실은 원칙과 근본적 가치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이익과 당리당략으로 치닫고 있다. 팬데믹이 낳은 무절제한 포퓰리즘의 그늘 아래에 숨어있는 '대중'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대중은 단순히 수적 다수가 아니라, 자기 성찰 없이 주어진 것에 안주하며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성과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집단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대중과 엘리트의 균형, 즉 자유와 질서가 함께 유지될 때 가능하다. 작금의 사회는 오히려 이러한 대중을 교묘히 이용하며 국민의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는 이기적인 정치 세력과 노조 간부들이 만연해 있다는 슬픈 현실에 직면해 있다.   왜곡된 정보는 사람의 기억까지 통제한다. 과연 우리는 '깨어 있는 민중'인가? 현재의 사회 현실이 다음 세대에게 여과 없이 전달된다면, 우리는 역사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 빚더미에 앉아 절망에 허덕일지도 모를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송병길 / 건축가열린광장 정부 폭력 한국 정부 한국 대통령 한국 기업

2025.09.2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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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희생 위에 빛난 9월의 승리

9월은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달이다. 이달은 단순한 계절의 이름을 넘어 전쟁의 참화 속에서 희망과 절망, 기적과 비극이 뒤엉킨 역사의 무대였다. 6.25전쟁의 불길 속에서 노병이 직접 피와 땀을 흘리며 겪었던  달력의 숫자 너머로 그날의 총성과 함성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아군의 상륙작전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나는 기적이었다. 조수간만의 극심한 차와 험한 지형,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과감히 단행된 이 상륙작전은 패배의 그늘에 짓눌린 민족에게 새로운 새벽을 열어주었다.     연합군의 함포가 인천에 꽂히던 순간,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희망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기적이자, 자유를 향한 절규가 이룩한 역사의 반전이었다.   이어 9월 28일, 공산치하 잿더미 위에 다시 휘날린 태극기는 서울 탈환의 감격을 알렸다. 폐허가 된 도시는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다시 살아난 수도는 민족이 결코 굴복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그날의 태극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무너진 조국이 다시 일어서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9월의 기적과 비극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전한다.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오직 피와 희생, 땀과 눈물 위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쟁의 불길 속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소총을 껴안은 채 어린 학도병은 "엄마"를 목터지게 부르다 스러져 갔다. 꿈에도 보이는 생생한 기억이다.     그리고 10월 1일, 마침내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평양 입성, 압록강까지의 진격은 민족사에 드물게 찾아온 통일의 문턱이었다. 그러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고 중공군의 대규모 인해전술 개입으로 국토 통일의 꿈은 바로 문전에서 무너졌으며 우리는 천추의 한을 안은 채 후퇴의 길로 내몰려야 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좌절이 아닌 끈질긴 재기의 몸부림이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그날의 젊은 영령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선물이다. 그들의 희생은 한강의 물결처럼, 태극기의 바람결처럼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들의 마지막 눈빛, 얼어붙은 산야에 피로 뿌리고 간 이름 없는 용사들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년 9월을 맞을 때마다 단순한 기념을 넘어, 역사의 무게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승리와 좌절, 희망과 한(恨)이 교차한 이달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책무다. 그것은 수많은 젊은 생명의 희생이 남긴 귀한 유산이다.   9월에 펄럭이는 하늘의 태극기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민족의 표상이다. 민족의 기적과 비극이 새겨진 불멸의 장이며, 후손들에게 남겨진 영원한 과제다. 기적과 비극이 교차한 9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자유의 가치를 지켜낼 때, 비로소 9월은 절망의 달이 아니라 희망의 달로 다시 빛날 승리의 달이 될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희생 승리 희생 땀 절망 기적 우리 민족사

2025.09.2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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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조동진, 가을의 길목에서 다시 만나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고 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계절은 가을로 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서 더욱 생각나는 조동진의 명곡 '나뭇잎 사이로'의 가사다.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이자 '얼굴 없는 가수'의 효시였던 그는 1978년 첫 앨범 '행복한 사람'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980년 발표한 2집 앨범의 '나뭇잎 사이로'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서른을 넘어 뒤늦게 솔로로 데뷔했지만, 그는 평생 여섯 장의 앨범만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1집 앨범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에 밥 딜런이 있다면 한국에는 조동진이 있다고 할 만큼, 그는 계절의 변화와 삶의 진리를 주옥같은 노랫말에 담아냈다. '제비꽃', '겨울비', '진눈깨비', '빗소리' '달빛 아래서', '해 저무는 공원', '배 떠나네'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노래들은 계절과 시간,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과 사랑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낮은 목소리, 느린 걸음걸이, 깊은 눈빛, 그리고 맑고 청아한 통기타 선율을 떠올린다. 그를 추억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끝내 이루지 못했던 LA 단독 콘서트의 꿈을 추모 콘서트로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지난 12일 가을의 문턱에서 그를 추억하는 많은 이들이 LA에서 모였다.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음악을 이야기하고,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서로에게 털어놓는 동안, 그의 노래는 마치 그가 우리 곁에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한밤의 선율은 공연장 안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팝 피아니스트 김영균, 플루트와 색소포니스트 주훈, 트럼펫 연주자 강진한, 드러머 듀크 김, 보컬 겸 기타리스트 박강서, 그리고 주성까지,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로 뭉친 이들의 앙상블은 조동진의 '제비꽃'에서 절정에 달했다.   조동진이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세상에 내놓았다는 '제비꽃'은 인간의 성장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다'는 노랫말처럼, 사람에 대한 그의 깊은 애착은 공연장을 찾은 모두에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날 공연에는 조동진이 음악의 꿈을 키웠던 7인조 재즈 록 밴드 '쉐그린'의 멤버 이태원과 전언수까지 서울과 뉴욕에서 날아와 그 의미를 더했다.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처럼 그 인생이 흘러간다고 했던가. 불후의 명곡 '행복한 사람'을 모두가 떼창을 하는 그 순간 영상 속 그의 모습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가을의 한 페이지는 조동진의 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 넘어가고 있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조동진 가을 조동진 가을 한국 대중음악사 언더그라운드 음악

2025.09.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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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온라인 학위 취득, 과연 바람직한가

나는 한국의 모교에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했었고, 또 이곳 LA지역에 있는, 연관된 분야의 대학에서도 방문 교수로 강의를 했다. 물론 강의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하는 ‘대면’강의다.   그런데 현시대는 모든 분야가 급격히 변하는 시대이므로, 과거의 제도나 방법론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교육계 분야도 그런 추세를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교육은 옛날부터 ‘학교’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수준이 있는 ‘선생님’이 학생들과 대면하여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제도나 방법론에 변화가 오면서, 그중에 하나로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교육 방법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온라인 강의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전통과 역사가 있는 대학교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92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던 뉴햄프셔 유니버시티(Southern New Hamphshire University)’는 100퍼센트 온라인교육으로 200여 종의 학사 및 석사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140년 역사의 애리조나 주립대학(Arizona State University)도 온라인교육으로 학위 및 증서(Certificate)를 주는데, 올해 가을학기 신입생 수는 무려 4만2900명이라고 한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컬럼비아 등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들도 일부 과목에 대해 온라인 강의제를 시행하고 있다. 심지어 캠퍼스가 없고, 사무실 하나를 사용하면서 ‘대학’ 간판을 내걸고 온라인 강의방법으로 학위를 주는 부실 학교도 있다.   특정 신분의 ‘직책’ 양성을 위한 대학교들도 온라인 강의제를 채택하고 있다. 내가 방문교수로 강의를 했던 LA 지역의 한 신학대학교는 현재 강의실 대면 교육을 폐지하고, 전면 온라인 강의제를 시행하고 있다. 학생 수 감소 및 예산 절감 등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현상들이 바람직한 것일까. 교육기관으로서의 목적이 온라인 교육으로 달성될 수 있을까.   군과 국가의 지도층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생각해 보자. 교육 환경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사관학교가 온라인 강의를 채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대학이 단순한 지식의 주입을 넘어, 그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리더를 양성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에서의 대면 교육은 단순히 학문과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교수와 학생 간의 인격적 교류와 영향력, 그리고 학생들 상호 간의 소통을 통해 사회적, 인격적 ‘성장’을 이루게 했다.   오프라인 교육이 가진 이러한 중요한 가치들은 온라인 교육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물론 온라인 교육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없애는 장점도 있지만, 대학 교육의 본질인 ‘인간적 교류’와 ‘사회적 성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대학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김택규 / 전 서울감신대 객원교수·드루대학교,D.Min.열린광장 온라인 학위 온라인 강의방법 온라인 강의제 온라인 교육

2025.09.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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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불완전한 사장의 비서 채용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인간은 합리적인 인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가장 옳은 결정을 하는 인간이다.    경제학적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인간을 ‘호모 이코노믹스(Homo-economics)’라고 부른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줄여서 ‘이콘(Econ)’이라고도 부른다. 이콘은 계산하는 인간이며 완벽한 인간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다르다. 정보는 불완전하고, 소비 결정에는 가격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 감정 같은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이렇게 기존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행동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행태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다.     행태경제학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휴리스틱(Heuristic)’, 즉 경험을 통해 얻은 단순한 규칙과 직관에 따라 판단한다고 본다. 언뜻 보면 주먹구구식 같지만, 수많은 실험은 인간이 이런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은 전통 경제학이 주장하는 완벽한 합리적 인간상에 의문을 던졌다. 그는 인간이 무한한 정보를 계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제한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만족스러운 선택(Satisficing)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완벽한 이콘(Econ)’이 아닌, 현실의 인간을 설명하는 첫걸음이었다.     이후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심리학적 실험을 통해 휴리스틱의 구체적 유형을 밝혀냈다. 그들의 연구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합리적 계산보다는 직관적인 규칙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카너먼의 ‘자동차 보험 가입 실험’은 유명한 실험이다. 한 그룹에는 “보험료는 연간 200달러”라고 제시했고, 다른 그룹에는 “보험료는 하루 0.55달러”라고 제시했다. 두 금액은 동일하지만, 사람들은 하루 단위로 제시된 조건을 훨씬 저렴하게 인식해 그쪽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았다. 인간의 선택이 숫자와 확률보다 직관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수학자들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재미있는 문제 하나가 있다. 바로 ‘비서 문제(Secretary Problem)’다.   사장은 100명의 지원자를 순차적으로 면접하고, 그 자리에서 채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 번 거절한 지원자는 다시 부를 수 없으며, 마지막 100번째 지원자까지 모두 거절한다면 결국 아무도 뽑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완벽히 합리적이라면, 사장은 수학자들이 계산한 최적의 전략을 택할 것이다. 즉, 처음 37명은 무조건 거절하고 관찰만 한 후, 그때까지 만난 지원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63명 가운데 처음 37명 중 가장 뛰어났던 사람보다 우수한 지원자가 나오면 즉시 채용하는 것이다. 이 전략을 따르면 가장 우수한 지원자를 뽑을 확률은 37%로 최대가 된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어떤 사장은 초반 10명쯤 보고 금방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사장은 끝까지 기다리다 허둥지둥 채용을 하기도 한다. 사장만의 성격, 경험, 감정 같은 수많은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이콘(Econ)이 아니다. 휴리스틱을 통해 내리는 ‘충분히 괜찮은 결정’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불완전 사장 비서 채용 비서 문제 합리적 계산

2025.09.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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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망치와 모루 작전

1950년 9월 15일, 9월 23일, 그리고 9월 28일은 대한민국이 적으로부터 회생과 반격의 불씨를 되살린 역사적인 날들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T-34 탱크 242대와 122 미리 곡사포 172문을 앞세워 국군의 2배나 되는 20만여 병력으로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남침했다. 불과 3일 만에 한국은 수도 서울을 함락당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적군에 갈피를 못잡던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8일,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UN군 총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겼다. 그러나 전황은 계속 악화했다. 10월 19일에는 중공군 83만명이 압록강을 도하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했고, 11월에는 소련군 미그기가 청천강 일대에 출몰하여 위협을 가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급박한 형세를 일시에 해소하기 위해서 만주 일대 원자력 폭탄을 투하할 구상을 했지만 반대가 심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급기야 UN군과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며 대한민국의 영토는 경상남북도로 축소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맥아더 장군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고안한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 작전을 구상했다. 망치는 불로 달군 쇠를 두드리는 연장이고, 모루는 그 쇠를 올려놓는 받침대다. 이 작전은 적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양쪽에서 공격하는 포위 섬멸 전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조수 간만의 차가 10m에 달해 수많은 미군 장성들이 반대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위험이 클수록 기습 효과가 크다며 작전 수행을 강행했다.   1950년 9월 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다. 미 해병 제1여단, 미 육군 제7보병사단, 한국 해병 2개 대대, 육군 제17연대로 구성된 UN군과 한국군 상륙부대는 인천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들은 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며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모루 역할을 수행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했던 미 제1기갑사단과 UN군, 한국군으로 편성된 제8군은 9월 23일 낙동강을 도하해 북진하며 망치 역할을 맡았다.   이 양동작전으로 북한군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10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고, 3만 명의 잔여 병력은 북으로 도주하는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작전은 전세를 뒤집고 대한민국의 존망을 지켜낸 기념비적인 승리였다.   그후로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도를 점령당하면 패전한다”는 옛 병법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악랄한 북한군을 불과 40km 거리에 두고 있다. 6.25 전쟁 당시처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노 방어선과 같은 철통같은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나치군이 파리를 정면 공격하지 못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회해야 했던 것처럼, 방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쟁 억지력을 높여야 한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망치 모루 작전 수행 낙동강 방어선 한국군 상륙부대

2025.09.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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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10여 년 전 레지오 주 회합 때의 일이다. 단원 12명이 매주 일요일 성당에서 모임을 갖는 행사였다. 지각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여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단원 한 명이 불현듯 김일성을 찬양하며 북한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자 한 사람이 “당신 빨갱이구먼”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상대가 “빨갱이가 뭡니까, 좋은 말 놔두고…”라고 반박하자 그분은 “그럼, 빨갱이보고 빨갱이라고 하지 뭐라고 말하느냐”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자 “진보라고 해야지요”라고 맞받으면서 두 사람은 육탄전 일보직전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단장인 내가 그 언쟁을 제지하려 회합을 속히 진행했다.     정치 성향에 대한 갈등은 미국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체육관에서 함께 운동을 하며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두 명 있는데 미 육군에서 전역한 짐은 공화당 성향이었고 다른 친구 토니는 민주당원이었다. 토요일 11시경 세 명이 브런치를 먹는 좌석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화제가 정치 쪽으로 흘렀다. 두 사람이 의견 차이로 언성이 점점 높아져 살벌해졌다. 내가 “화제를 바꾸자”고 제안했더니 두 사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명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정치적, 종교적인 대화는 삼가자는 것이 일반적 추세다. 언쟁이 유발되기 십상팔구이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좋았던 관계가 금이 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나 미국이 진보와 보수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좌파와 우파는 있는데 중도파가 없는 것이 문제다.     검은색에 흰색을 배합하면 회색이 된다. 회색은 흑색이나 백색보다는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중도 성향을 선호한다. 그렇다고 두 진영에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자나 보신주의자가 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극단적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다양성을 포용하자는 것이다. 중도 성향은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있다. 한국은 3개월 전에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진보 성향의 정부든 보수 성향의 정부든 국민을 화합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 힘쓰는 정권이라면 상관없지 않은가. 국민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게 해주어 행복하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약 50여 년 전 중국의 정치 지도자가 ‘흑묘 백묘’론을 주장하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논리다.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금언이다. 좌파든 우파든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정부라면 개의치 않는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이미 퇴출된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좌파 정치인들에게 국민은 혐오감을 갖고 있다. 또한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기만 한 우파 정치인들에게도 국민은 실망하고 있다.   모든 일은 자신의 입장에서 아전인수격 사고로 판단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진용 / 수필가열린광장 좌파 정치인들 우파 정치인들 진보 성향

2025.09.1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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