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국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넷플릭스에서 본다. 신경외과, 소아외과, 흉부외과, 일반외과,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응급실로 숨차게 뛰어가는 장면, 삶을 위한 열기가 병원 복도에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순간들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과 수술실을 넘나드는 의사 가운과 수술복이 화면에 오버랩 된다. 제각각 자신에게 걸맞은 사랑을 불사르는 외과의사들이 주말이면 어김없이 딩가딩가 5인조 뺀드 연습을 하며 즐거워한다.
전문의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유치하면서도 인간적이다. 간식용 과자 한 조각, 갈비구이 한 토막을 놓고 서로 다투기도 하는 허물없는 관계. 속 생각을 살벌하게 쏟아낸 후에도 아무 뒷말이 없는 우정이 훈훈하고 살갑다.
어려운 심장 수술을 코앞에 둔 어린아이의 엄마가 의사에게 말한다. “선생님, 저 아이를 꼭 살려주세요.” 의사가 공손하게 답한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 저 환자 보호자는 환자를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의사에게 있다는 심정이구나. 의사의 반응인 즉 자신은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뿐, 아이의 목숨에 대한 궁극적인 결정권은 자기에게 없다는 상황을 에둘러 말하는구나. 그렇다. 의사는 판사가 아니다.
자식을 ‘살려달라’는 엄마의 말에 집중한다. 수술이 잘 끝났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을 저런 식으로 토로하는 장면은 저토록 정신이 말똥말똥한 아이와 결이 맞지 않는다. 의식불명 상태라면 몰라도 미국인들은 수술실 앞에서, “Doctor, please save my child’s life.”라 하는 대신에, “I hope everything goes well.” 또는 “Please, take good care of my child.” 하며 조심스레 부탁한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이토록 놀랍다.
물에 사람이 빠졌을 때도 그렇다. 우리는 “사람 살려!”라 소리치고, 서구인들은 “Help (me)!”라 외친다. 용감한 행인이 물에 철버덕 뛰어들어 최선을 다해도 여의치 못한다면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였다는 억울한 비판을 받게 되는가. 우리의 약자는 왜 모든 것을 강자에게 떠맡기는가. 당신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도 찾아내라 한다”는 우리 속담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있다. ‘사람 살려!’는 하나의 서술, ‘진술, statement’이다.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간절한 ‘멘트’를 공포하다니. 그러나 ‘Help (me)!’는 짧은 동사(動詞)일 뿐. 우리의 구조 대상은 ‘사람’인 반면 서구인의 구조 대상은‘나’다. 우리의 발상이 단체주의를 추종하는가 하면 서구인들은 개인주의를 표방하느니.
한국 신문에서 한 국회의원이 여러 사람에게 전화 또는 문자메시지를 통하여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혹은 ‘잘 좀 봐 주세요’라는 부탁을 했다는 논란을 보도한 기사를 읽었다. (2026. 01. 04) 또다시 ‘살려주세요’가 귓전을 때리네.
어떤 상황에서 대두하는 ‘도와달라’는 말은 상대를 ‘도우미’ 취급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잘 좀 봐 달라는 말은 자신의 실책을 눈감아 달라는 부탁으로도 들리는 법. 잘 살펴보라는 언질인지 눈 꾹 감고 못 본 척하라는 말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헷갈리게 한다. 반면에, 과자 하나를 놓고 서로 먹겠다고 대놓고 말다툼을 하는 솔직담백한 외과 전문의들에게 나는 인간적인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들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