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필요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만약 누군가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식이나 정보, 재산이나 즐거움 같은 차원의 필요였다면, 인류는 이미 그에 걸맞은 위대한 선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지니는 가장 깊은 필요는 무엇일까.
지난 한 해의 여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건넨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선물은, 지나온 시간을 잠시라도 멈춰 서서 돌아볼 수 있는 이즈음의 시간 자체가 아닐까 싶다. 각자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지난 한 해 큰 근심이나 아픔 없이 지낼 수 있었다면, 그 행복을 감사로 누리면 된다. 혹시 근심과 아픔이 동반된 여정이었다면,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하신 성육신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더 깊이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또 한 해의 시간을 살아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나이의 언덕을 하나 더 넘어온 셈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부서지기 쉬움은 세대를 막론하고 더해진다. 병원 원목으로서 환자들과 만날 때, 병리학적 안위보다 영적 안목을 더 많이 나누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병약함과 낙망, 힘겨운 치료의 과정을 지나온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안목이란 단순히 교회 출석이나 종교적 실천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영성의 자세다. 새날을 기다리며 질병과 낙망, 회복과 소망을 돌아보고, 중년과 노년에 접어들며 삶의 목적을 다시 정의해 보는 대화다. 시간과 노화, 사랑과 상실 사이에서 생명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살피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 ‘기계문명의 시대’라고 불러왔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 ‘낙망의 시대’라는 이름도 붙인다. 자동화와 인공지능, 눈부신 기술 발전이 편리함을 제공하며 한때 인류가 희망의 끈을 붙잡은 듯 보이지만, 정작 낙망의 감정이 짙어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다시 극심한 절망의 시대를 통과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눈을 돌리게 된다. 나치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한 정신의학자는, 자유를 얻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강단에 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결코 낡지 않은 메시지를 전했다. 어제 삶의 의미에 대한 긍정이 내일의 희망을 낳았고, 그 희망이 오늘을 버티게 했다는 고백이다. 그는 모든 절망적 환경과 경험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정의는 끝내 퇴색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빅토르 프랭클의 『그럼에도 삶에 예스라 말하다(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에 담긴 통찰이다.
병상 곁에서 수많은 사람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배운 것이 있다. 각자의 가장 큰 필요가 채워지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귀한 영적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모든 사람의 가장 깊은 필요는 여러 차원을 넘어, 마음과 영혼의 평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서는 성육신 사랑의 목적을 이렇게 전한다.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새해의 새로운 시간 여정 속에서, 우리 모든 교민 가정과 일터마다 건강과 평화가 늘 함께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