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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심장은 비어있어야 편하다

Los Angeles

2026.01.20 17:23 2026.01.2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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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 / 강병선 침뜸병원장

강병선 / 강병선 침뜸병원장

새해가 시작되는 이맘때가 되면 나는 고 이외수 작가가 남긴 「구조오작위(九釣五作尉)」의 글이 떠오른다.  
 
지난 2004년 새해, 필자가 미국 이민을 앞두고 유독 차를 좋아하시던 그분께 보이차를 전할 겸 춘천 중앙로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의학을 전공하던 내게 그는 『동의보감』의 한 구절인 ‘허심합도(虛心合道)’를 빗대어, 구조오작위라는 독특한 새해 덕담을 건넸다.
 
구조오작위는 ‘아홉 번 낚시를 해도 다섯 번만 벼슬을 준다’는 뜻이다. 장기의 등급 체계를 차용해 낚시꾼의 단계를 비유한 글이다. 장기판의 졸·사·마·상·포·차·궁을 본떠 조졸(釣卒)에서 시작해 조사·조마·조상·조포·조차·조궁을 거친 뒤, 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이라는 다섯 작위와, 최종 단계인 조선(釣仙)과 조성(釣聖)에 이르는 모두 열네 단계로 구성된다. 이는 단순한 낚시 기술의 서열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집착, 성찰과 초월의 과정을 은유한 인생의 지도라 할 만하다.
 
가장 아래 단계인 조졸은 낚시를 오직 고기 잡는 행위로만 여기는 초보자다. 마음은 조급하고 기술은 미숙하며, 결과가 없으면 분노와 술로 감정을 풀어낸다. 조사 단계에 이르면 경험이 쌓이면서 장비와 용어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고수라 착각하며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다. 이 집착은 조마 단계로 이어져, 일상 속에서도 찌와 물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중독 상태에 이른다.
 
조상 단계에서는 낚시가 가정과 사회적 삶을 잠식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 흔히 말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단계다. 결국 조포 단계에 이르면 낚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고, 인생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스스로를 절제하려 애쓴다.
 
이후 조차 단계에서는 다시 낚시로 돌아오되 태도가 달라진다. 고기의 유무에 연연하지 않고, 낚싯대를 드리운 자리에서 세월과 자연을 먼저 마주한다. 조궁 단계에 이르면 낚시는 수행이 되고, 삶의 이치를 하나 둘 깨닫기 시작한다.
 
남작 이후의 다섯 작위는 인격의 성숙을 상징한다. 남작은 자연 앞에서 겸허함을 알고, 자작은 자비와 무욕 속에서 자신을 놓아준다. 백작은 끊임없는 배움 속에 지혜를 쌓고, 후작은 깊이를 지니되 드러내지 않는다. 공작에 이르면 모든 것을 비운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이미 입신의 문턱에 선다.
 
마지막 단계인 조선과 조성은 낚시와 삶, 자연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마다 무릉도원이 되고, 걷는 곳마다 삶의 안식처가 된다. 이는 오늘날 낚시꾼의 대명사로 불리는 강태공의 경지와도 닮아 있다. 그가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고, 그때를 위해 무려 72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구조오작위가 전하는 교훈은 분명하다.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는 다르며, 결정적인 순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찾아온다. 늦었다고 한탄할 이유는 없다.  
 
동의보감 내경편에 ‘허심합도(虛心合道) 이도치신(以道治身)’이라 했다. 마음을 비워 도(道)에 합치하고, 도(道)로써 몸을 치료한다는 말이다. 지나친 감정과 집착은 오장의 균형을 깨뜨리고, 회복하기 어려운 병의 씨앗이 된다.  
 
고작 1치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심장 속에 두려움도 넣고 슬픔도 넣고 질책도 넣고 기쁨도 넣고 분노도 넣고 걱정도 넣어서 터질 듯이 만들어버리면 심장은 결국 견디기가 힘어 중풍이란 무서운 병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심장을 비우라고 말이다.  
 
해부학적으로 심장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마음속에 든 허욕과 과욕을 버리라는 말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비어있으며 욕심이 없으면 진기가 잘 보존될 것이니 어찌 병이 생겨나겠느냐고 하였다.
 
2026년 새해, 나는 스스로 묻는다. 나는 지금 구조오작위 열네 단계 중 어디쯤 서 있는가. 그리고 내 인생의 완성의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그 답의 출발점은 여전히 같다. 허심합도, 심장은 본디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편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가슴 깊이 새기며 새해를 맞는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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