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주변으로 Deer Road니 Deer Ridge, Deer Path 같은 길 이름과 사슴을 그린 표지판이 많아 자칫 사슴 동네에 사람이 잘 못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뉴저지에는 대략 11만5000에서 12만5000 마리의 사슴이 사는 것으로 집계돼 있는데 내가 사는 서머셋 카운티에는 유독 숲과 공원과 농지가 많아 평방 마일 당 주 평균 5~15마리보다 많은 60~150마리의 사슴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 녹용과는 관계가 없는 ‘흰 꼬리 사슴’이다.
이처럼 사슴이 많지만 12월에서 2월까지는 거의 볼 수 없어 혹시 겨울에 모두 동사했거나 아니면 따뜻한 지방으로 이동한 것은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1월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슴들은 눈이 쌓이거나 기온이 내려가면 나가봐야 먹이가 없는 것을 알고 에너지도 절약할 겸 산속에 칩거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이 암컷은 임신을 하고 초록색 풀이 돋고 새싹 나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산과 들에 눈이 소복이 쌓이는 날이면 그 위로 성큼성큼 뛰어다니는 사슴을 상상해 보곤 한다. 1968년에 방송된 김수현 작, 김포천 연출의 ‘저 눈밭에 사슴이’ 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강하게 입력된 탓이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애증과 복수가 주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제목에서 주는 하얀 눈과 착한 사슴은 조합이 잘 된다. 주변에서도 성품이 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 그러면서 왠지 고독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사슴을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따뜻한 계절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에 운전하다 보면 숲에서 나와 길을 건너는 사슴 무리를 자주 목격한다. 길을 건너다 말고 가족이 다 건너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듯 목을 길게 늘어뜨려 바라보는 사슴을 만나면 노천명 시인이 노래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을 느끼기도 하고 ‘언제나 점잖은 편, 관(冠)이 향기로운’ 고고한 리더십을 보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은 누구의 과실인지 알 수 없으나 간혹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사슴을 볼 때가 있다.
사슴들로 해서 교통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옥수수나 콩, 과일 등 농작물의 피해가 따르기도 하고 질병 전파와 함께 특정 식물만 먹어 숲의 다양성을 해치는 폐단도 없지는 않으나 주민들은 정서적 안정과 환경 교육, 생태계의 유익함이라는 더 많은 장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뉴저지 주 당국은 사슴이 멸종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번식하지 않도록 ‘사슴 관리 매뉴얼’ 을 만들어 적절하게 관리를 한다고 한다.
산골에서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이 어디 사슴만이랴, 모든 동물과 식물, 자연과 우리는 공존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자연의 지혜도 놀랍다. 산속의 나무들이 무한경쟁을 하며 자라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 뿌리를 엮어 홍수에도 공원을 지켜내는가 하면 울창한 숲속에서도 용케 햇볕이 들어갈 틈은 만들어 놓는 것을 본다.
인간은 그동안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동물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어내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산허리를 마구 뚫어 길을 내고 흐르는 강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그 결과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라는 엄중한 후과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복잡한 저잣거리에서 멀리 떠나와 숲속 가까이 자리 잡은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자평한다. 그러나 지난여름 유별난 더위를 체험한 데 이어 올겨울엔 이전에 볼 수 없었다는 혹독한 한파를 겪으면서 자연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자연은 결코 양보하지도 협상하지도 않는 것이 분명하다.
성공회대학 교수였던 신영복 선생의 주장처럼 ‘더불어 숲’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내가 사는 산골에서도 여러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모든 인종과 모든 자연이, 심지어 인간사회에 깊이 파고든 AI(인공지능)와도 연대하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