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의 소중한 사랑방으로 자리매김 중독자 회복 모임·46년 된 록 밴드 공연도 영화관 지키려 2023년 비영리단체 설립
가디나 시네마 주차장에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안내하며 차량을 정리하는 주디 김. 그는 사우스베이에서 마지막 단일 스크린 극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해 11월 가디나 시네마에서 열린 펑크 밴드 ‘서클 저크스(Circle Jerks)’ 공연에서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공연을 즐기고 있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의 불빛이 켜지는 순간 관객의 피부색과 언어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같은 장면에 함께 울고, 웃는 소리는 극장의 생기다.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날에도 가디나 시네마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매주 화요일 저녁 알코올 중독자 회복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도 이 극장에서 열린다. 사람들은 이름 대신 익명으로 이니셜을 나누고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술과 싸우며 흩어졌던 삶을 조금씩 다시 이어 붙인다. 대개 이런 모임은 교회나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리지만 이 지역 AA 그룹은 ‘가디나 시네마’를 택했다.
이 모임이 이곳에서 시작된 데에는 주디씨와 자원봉사자 빌 드프란스의 개인사가 맞물려 있다. 주디는 5년 전 술 문제로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 장례식 이후에도 “내가 더 할 수 있었던 건 없었을까”라는 자책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드프란스 역시 술로 삶이 무너질 뻔했다. 팬데믹 초기 과도한 음주로 간에 심각한 염증이 생겨 코마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극장 계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로의 상처를 공유했다. 그리고 아이디어 하나가 나왔다.
“우리 여기서 회복 모임을 열어보면 어떨까.”
지금 가디나 시네마에서 열리는 AA 모임에는 약 40명이 모인다. 참가자 중 상당수는 영화·음악·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이다.
주디씨는 “알코올 중독은 이 업계에서 정말 흔한 문제”라며 “이 극장은 영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누군가에게는 상영관보다 이 모임이 더 중요한 장소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가디나 시네마는 상처를 보듬고 사람들의 기억과 향수를 불러 모으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극장 무대에는 사우스베이 출신 펑크 밴드 ‘서클 저크스(Circle Jerks)’가 섰다. 이 밴드는 1979년 이 지역에서 결성됐다. 그들은 40년 전 개봉했던 영화 ‘리포 맨(Repo Man)’에 출연했다. 이날 시네마에서는 리포 맨 상영과 함께 서클 저크스의 라이브 공연이 함께 열렸다. 이날 극장은 오랜 팬들과 지역 음악 애호가들로 가득 찼다.
주디씨는 “마치 동창회 같은 분위기였다”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나눴다”고 말했다.
무대 앞에서는 관객들이 펑크 리듬에 맞춰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공연을 즐겼다. 나이가 지긋한 팬들은 고개를 흔들며 음악에 심취했고, 젊은 관객들은 스마트폰으로 공연을 촬영했다.
스크린에서는 1980년대 LA의 거친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가디나 시네마는 그렇게 누군가의 청춘을 다시 불러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극장 가장 깊은 자리 한편에는 가족의 기억, 고 김수명(영어 이름 낸시)씨의 사진이 놓여 있다.
주디씨의 어머니 김수명씨는 2022년 5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열리던 날 사람들은 가디나 시네마로 모였다. 극장 안에는 김씨의 사진이 놓였고 사람들은 함께 추모 영상을 지켜봤다. 관객이자 이웃이자 친구였던 사람들은 복도에서 그녀와 나눴던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이날 가족들은 김씨를 그린힐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했다.
주디씨는 “엄마를 보내던 날 마지막으로 거쳤던 집이 바로 이 극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주디씨가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공을 들인 행사가 ‘낸시 김 데이(Nancy Kim Day)’다.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하는 모금 행사이자 이 극장이 버텨온 시간을 함께 축하하는 날이다. 지난해 11월 30일 열린 행사에서는 영화 ‘페이스/오프(Face/Off)’가 상영됐다. 김씨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였다.
주디씨는 이 작품을 이날 세 차례 상영했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낸시가 이걸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상영에 앞서 주디씨는 관객들에게 어머니가 어떻게 극장을 지켜왔는지, 이 작은 극장이 왜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이어졌다. 그날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단지 영화를 보러 온 손님이 아니었다. 한 가족의 기억과 함께 극장을 지키는 증인이었다.
주디씨는 이 극장을 개인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극장을 위한 비영리 단체 ‘프렌즈 오브 가디나 시네마(Friends of Gardena Cinema)’를 만든 이유다. 목표는 건물을 매입해 극장을 역사적 문화 공간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목표 금액은 1500만 달러다. 이 가운데 1050만 달러는 건물 매입 비용이고 나머지는 시설 보수와 운영 기금에 쓰일 예정이다.
주디씨의 아버지 김수웅씨는 이제 여든을 넘겼다. 한쪽 눈의 시력도 잃었다. 하지만 상영 시간이 가까워지면 객석 뒤편에 앉아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는 모습을 바라본다.
가디나 시네마에는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주디씨는 언젠가 이곳을 박물관이자 영화관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저 옛 물건을 전시해 두는 박물관이 아니라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며 영화를 보는 박물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디씨가 지키고 싶은 것은 오래된 물건만이 아니다. 이 극장에 녹아 있는 추억과 사람들이다.
사우스베이의 단일 스크린 극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오래된 붉은 네온 글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한인 이민자 가족과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있는 한 가디나 시네마의 필름은 계속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