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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 읽기] 전원을 끌 때 비로소 켜지는 것들

Los Angeles

2026.03.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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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미국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하다 한국에 돌아온 날이었다. 지인의 연락처를 찾으려 휴대폰을 뒤적이다 방전된 화면 앞에서 당혹해 하는 내게, 곁에 계시던 어머니가 무심결에 번호 열한 자리를 읊으셨다. “그 집 번호? 010-XXXX-XXXX잖아.”
 
메모장 하나 들지 않으신 어머니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단축번호에 의존하며 부모님 번호조차 가물가물해진 박사과정 아들보다, 수십 년 전 인연들을 ‘머릿속 서랍’에 보관해온 어머니의 아날로그적 뇌가 훨씬 생생했던 것이다. 이 소박한 일화는 내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기술을 얻는 대가로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대단히 다층적이다.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 이를 통합해 대상으로 파악하는 ‘지각’,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더 해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우리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술은 감각과 인식의 범위를 넓혀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초기의 기술이 손의 힘을 증폭시키고 이동 속도를 빠르게 한 신체의 ‘연장’이었다면,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의 기억과 사고를 보조하는 ‘외부 뇌’가 되었다. “우리가 도구를 만들지만, 그 후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는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의 말처럼.
 
문제는 인간이 도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인간의 선택과 욕망을 규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유의 근육이 퇴화할수록 우리는 지능을 가진 기계의 보조자로 전락하며 존재의 주권마저 위협받는다. 기술이 신체의 한계를 지워가는 동안, 인지는 ‘디지털 치매(digital dementia)’라는 퇴보의 늪에 빠진 것이다. ‘디지털 치매’란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져 일상적인 정보조차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름이다.
 
인류는 필요 때문에 기술을 발전시켰으나, 역설적으로 기술은 인간의 신체와 사고방식, 나아가 문명의 경로를 재편해 왔다. 초기의 기술은 신체의 ‘연장’이었다. 도구는 손의 힘을 증폭시켰고, 바퀴는 이동의 속도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기술에 적응하며 진화했다. 불을 다루며 소화 기관은 작아졌지만 뇌 용량은 커졌듯, 기술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마저 바꾸어 놓았다.
 
성경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언 23:7)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사유를 대신하고 기계가 기억을 가로채는 오늘날, 인간의 영혼은 본질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이 거대한 기술의 소음 속에서 존엄을 지키는 지혜는 역설적이게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라는 말씀 속에 담긴 ‘멈춤’과 ‘고독’에 있다. 오직 정적 속에서만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적 통찰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영혼의 갈급함까지 채울 수는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보 처리 지능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대면하는 영성이다. 기술의 편리함이 신앙의 치열함을 대체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때, 기계의 회로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신성한 존재의 깊이를 회복하게 된다.
 
기술은 편리함을 줄 뿐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의 속도를 늦추고 인간의 보폭으로 사유할 때, 비로소 만물의 영장으로서 진정한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휴대폰의 전원을 끌 때 비로소 켜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잠든 사유’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켜고 무엇을 끄며 살고 있는가.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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