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드라마서 영화로 완결 하퍼 감독의 권력··계급 서사 ‘이모틀 맨’ 불멸 아닌 형벌로 킬리언 머피 인간적 연기 압도
넷플릭스를 타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가 영화로 제작되어 그 거대한 신화의 마침표를 찍는다. [Netflix]
제1차 세계대전, 영국 버밍엄의 매연 가득한 거리에서 슬로 모션으로 걸어 나오던 한 남자가 있었다. 붉은 우완 부대를 이끌고, 모자 챙에 면도날을 숨긴 채, 푸른 눈동자로 세상을 얼려버릴 듯 응시하던 토미 셸비.
2013년 BBC에서 시작해 넷플릭스를 타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가 마침내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이모틀 맨’(Peaky Blinders: The Immortal Man)으로 그 거대한 신화의 마침표를 찍는다. 2022년 시즌6가 남긴 모호하고도 서늘한 여운은 이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그 종착역을 발견한다.
2022년 시즌6가 남긴 모호하고도 서늘한 여운은 이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그 종착역을 발견한다. [Netflix]
영화에는 ‘이모틀 맨(The Immortal Man)’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부제는 단순히 한 인물의 불멸성을 의미하기보다는, 토미 셸비라는 신화적 캐릭터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맥락을 찾아야 한다. 시리즈가 권력과 폭력의 상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영화는 그 반대편에 있는 쇠락과 고독, 그리고 죄책감을 응시한다. 그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혹은 이미 죽었으나 차마 떠나지 못한 존재 ‘이모틀 맨’이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와 잃어버린 자들의 영혼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는 형벌에 가깝다. 톰 하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리즈가 구축해온 폭력과 계급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거대한 야심을 드러낸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버밍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시리즈 결말 이후 약 6년이 지난 시점.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토미 셸비는 더 이상 화려한 수트를 입고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갱스터의 수장이 아니다.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나치 음모에 연루되면서, 그는 다시 버밍엄의 진흙탕으로 복귀한다.
1940년의 버밍엄은 시리즈에서 보았던 것처럼 산업화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회의 땅이 아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과 공포에 질린 도시의 풍경은 토미가 평생토록 천착해온 ‘가족’과 ‘권력’의 허망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토미는 과거의 죄와 현재의 위협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 토미의 여정을 지켜봐 온 이들에게는 그의 상처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박히는 경험을 하게 한다. [Netflix]
전쟁이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 개인의 범죄적 야망은 얼마나 초라한가. 영화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토미를 국가적 임무와 개인적 속죄 사이의 외줄 타기에 세운다. 비밀 작전에 뛰어든 토미의 모습은 시리즈보다 훨씬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며 관객의 시각적 쾌감을 충족시킨다.
톰 하퍼 감독이 설계한 이 마지막 장에서 가장 강력한 미학적 전략은 단연 킬리언 머피의 얼굴이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토미 셸비는 냉철함과 카리스마의 화신이었으나 영화에서의 머피는 그 견고한 가면 뒤에서 균열되기 시작하는 남자로 보인다. 카메라가 그의 표정, 숨결, 그리고 긴 침묵을 집요하게 쫓을 때, 관객은 텍스트로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절반을 읽어내게 된다. 가장 깊고 가장 인간적인 토미 셸비의 모습은 대사보다 그의 얼굴 근육의 떨림에서 완성된다.
영화는 이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빛과 그림자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토미가 홀로 고독에 잠기는 실내 장면들은 오직 희미한 촛불이나 창밖에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달빛에 의존한다. 반면, 나치의 음모와 전쟁의 폭력성이 분출되는 외부 세계는 강렬하고 거친 카메라 워크로 묘사된다. 이 명암의 대비는 토미의 내면적 침잠과 그를 가만두지 않는 시대의 폭력을 평행선 위에 배치하며, 영화를 단순한 범죄 액션물이 아닌 한 남자의 영혼을 해부하는 심리극의 영역으로 격상시킨다. 1940년대 버밍엄의 잿빛 풍경은 토미의 심리적 폐허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기능한다.
영화적인 확장을 위해 투입된 새로운 얼굴들도 인상적이다. 레베카 퍼거슨, 배리 키오건, 팀 로스라는 중량감 있는 배우들의 합류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가졌던 태생적 한계를 넘어 스크린에 걸맞은 무게감을 부여한다. 특히 배리 키오건은 특유의 기묘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토미 셸비 이후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 새로운 캐릭터들은 기존 세계관의 밀도를 높이는 동시에, 토미 셸비라는 거대함에 맞설 수 있는 대항점을 형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드라마가 6개 시즌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온 방대한 인물 군상과 복선들을 단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마무리하려다 보니, 일부 조연들의 서사가 생략되거나 갈등의 동기가 모호하고 편의적으로 서둘러 봉합된 인상이 짙다. 특히 토미의 아들이 나치 음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설정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라는 한정된 그릇 안에서 충분히 발효되지 못해 서사적 밀도가 깊이 있게 전달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마지막 시즌이 보여준 그 처절하고도 완벽한 고립에 비하면 영화는 독립적인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 팬들을 위한 감정적 마무리에 더 큰 비중을 둔 느낌이다. 그래서 시리즈 피날레의 강렬함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미학적 정조와 감정적 깊이는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는 철저히 팬들을 위한 보상이자 헌사다. 시리즈의 맥락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세련된 범죄 시대극 정도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토미의 여정을 지켜봐 온 이들에게는 그의 상처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박히는 경험을 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토미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질 때, 관객은 비로소 그가 불멸(Immortal)의 존재가 된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는 죽지 않아서 불멸이 아니라,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이콘으로 남았기에 불멸이다.
‘피키 블라인더스’는 끝이 났다. 하지만 킬리언 머피가 시리즈와 영화를 통해 완성한 잿빛 초상과 정서적 파동은 오랫동안 시네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서늘한 명령은 이제 전설이 되어 스크린 너머로 사라진다. 우리가 이 신화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영화는 가장 ‘피키 블라인더스’다운 방식으로 답한다. 토미 셸비의 마지막은 그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어두웠고, 고독했으며, 그래서 지독하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