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도심 속 '느린 즐거움' 제공 디지털 시대 종이매체 관심 증가 동네 사람들 이어온 만남의 장소 기억·공동체 담는 공간으로 남아
말리부 뉴스스탠드에서 고객들이 주인 네이선 실즈(맨 오른쪽)와 함께 잡지를 살펴보고 있다. [제이슨 러크레이/LA타임스]
LA 거리의 요란한 버스 소리와 이리저리 움직이는 스케이트 보더들, 길거리 패션 애호가들 사이엔 하나의 포털 같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페어팩스 애비뉴 한복판, 중고 의류 가게와 유대교 회당 사이에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르던 과거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다. 벽에 붙은 표지판엔 ‘잡지(Magazines)?!’라고 적혀 있다. 우연히 지나가던 한 행인은 “와, 아직도 이런 게 있네”라고 말한다.
한때 신문·잡지 가판대는 LA 시민들의 아침 일상이었다. 신문을 사는 일은 에스프레소 한 잔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가판대는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되는, 도시의 보석 같은 존재가 됐다. 잡지를 넘기며 느끼는 촉감과 낯선 사람과의 짧은 대화는 디지털 시대에 점점 사라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을 즉시 제공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레코드 가게가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가판대는 더 이상 주요 정보원이 아니지만, 이제는 오히려 호기심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됐다.
페어팩스 거리에 있는 가판대 ‘코셔 뉴스(Kosher News)는 LA에서 가장 오래된 가판대 중 하나다. 1950년에 문을 연 이 가판대는 2004년 문을 닫았지만, 인근에 살던 에레즈 다 코스타가 이를 인수해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가판대를 동네의 상징으로 여겨왔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은 가판대 운영자들에게 매우 낯선 시기였다. 뉴스 소비 방식이 종이에서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바뀌었기 때문이다. LA의 동네 풍경도 디지털 시대에 맞춰 변했다. 페어팩스 지역은 한때 조용한 유대계 상점들이 모여 있던 거리였지만, 점차 길거리 패션 문화의 중심지로 변했다. 코셔 뉴스는 이러한 변화를 모두 지켜봤다.
2010년대에는 LA 시 조례로 가판대에서 음식, 음료 판매가 금지됐다. 다 코스타는 이것이 많은 가판대에게 중요한 부수입원이었기 때문에 큰 타격이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쳤다. 그 영향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LA의 가판대들은 살아남았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코셔 뉴스를 지켜온 티토 에스트라다 매니저는 “나는 이곳이 정말 좋다. 이렇게 밖에 있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곳은 다른 데에 없다. 난 매일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한 고객이 신문을 읽고 있다. [제이슨 러크레이/LA타임스]
LA의 가판대 앞 계산대에서는 단골과 낯선 사람들이 일요일 헤드라인을 확인하거나 좋아하는 뮤지션이 등장한 롤링스톤(Rolling Stone) 기사를 찾으며 모인다. 과거 브렌트우드 뉴스스탠드의 주인이었던 마크 사르파티는 “가판대는 항상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고 말했다.
가판대 차양 아래 서 있으면 잠깐의 고요가 찾아온다. 남가주의 강한 햇빛에 바랜 천막 아래에서 자동차 소음은 희미해지고 바람에 넘겨지는 종이 소리가 들린다. 형광등 불빛은 패션 잡지를 덮은 비닐을 비추고, 새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선반의 향기가 섞이며 감각을 깨운다. LA에서 이렇게 오래 사랑받은 장소는 많지 않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사람들도 가판대 앞에서는 잠시 멈춘다.
말리부 뉴스스탠드의 주인 네이선 실즈는 “읽으려면 멈춰야 한다. 지금은 여기 서서 페이지를 넘겨보는 잠깐의 순간 자체가 하나의 사치가 됐다”고 말했다.
LA의 가판대 운영자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쇄된 글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잡지와 신문, 독립 출판물 속 이야기를 넘기다 보면 끊임없이 바쁜 도시 속에서도 잠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우리는 어느 순간 오스카상 또는 주목받는 패션쇼의 백스테이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잡지를 손에 들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이런 몰입을 경험하기 어렵다.
실즈는 종이 매체를 “느린 사치”라고 부른다.
요즘 20대의 집에선 오히려 종이책과 잡지가 더 많이 보인다. 뉴욕과 런던에 매장을 둔 클라이맥스(Climax) 같은 상점은 오래된 책과 인쇄물을 중심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이것이 단순한 향수 때문인지, 아니면 스마트폰 속 넘쳐나는 얼굴과 이야기들에 지친 사람들이 다시 익숙했던 물건을 찾기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베벌리힐스 뉴스스탠드와 메이더 뉴스의 주인 에번 메이더는 “새로운 출판물이 많이 나오면서 일종의 르네상스를 보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정체돼 있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활력이 생겼다. 요즘은 패션 디자이너나 건축가 같은 사람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가판대를 찾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말리부 가판대는 지난해 팰리세이즈 화재 이후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화재로 많은 주민들이 떠났고, 태평양 해안도로가 폐쇄되면서 신문 배송도 끊겼다. 실즈는 몇 달 동안 직접 차를 몰고 밸리까지 가서 신문을 가져왔다. 어느 날은 계산대에서 산불이 산 위로 번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 가판대가 30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이웃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한다.
사르파티도 임차 계약이 끝나면서 위기를 겪었다. 그가 계약 연장을 요구하며 시작한 청원에는 6000명의 고객이 서명했다.
오랫동안 라치몬트 지역 명물로 자리했던 어바브 더 폴드(Above the Fold)는 지난해 여름 임차 계약 만료로 문을 닫았다. 지역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셜미디어엔 수백 개의 작별 인사가 쇄도했다. 한 단골은 “마치 내 교회가 불타버린 것 같다”고 적었다.
더 그로브 옆 셸탐스 가판대 전경. [제이슨 러크레이/LA타임스]
가판대는 현대화를 향해 달리는 도시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는 더 그로브 옆에 있는 50년 된 가판대 ’셸탐스‘다. 가판대 주인 폴 소벨은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이들은 방과 후 이곳에 들렀으며 주차장에서 운전 연습을 했다. 그는 “LA 전통의 일부인 가판대가 상징하는 공동체와 인쇄된 글의 가치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날 가판대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곳이기도 하고, 영감을 얻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공유하는 도시에서 가판대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오래 바라볼수록, 그 안에서 우리 모두의 공통된 모습이 다시 우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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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LA타임스 3월 9일자 ’A slow indulgence. L.A. newsstands are no longer regular; they‘re remarkable’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