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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50년의 고름을 멈춘 우연한 행복

Los Angeles

2026.05.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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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논어 안연편에 담긴 이 짧은 문장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제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라는 묵직한 가르침을 전한다. 여기서 ‘살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게 하는 차원을 넘어, 그가 짊어진 고통의 짐을 덜어내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게 돕는 숭고한 의지를 뜻한다.  인술의 길 위에서 매일 고통을 마주하는 의사에게 이 말은 가장 준엄한 본분이자, 평생을 두고 닿아야 할 마음의 종착지다.
 
눈부신 오월의 햇살이 진료실 창가를 비추던 월요일 오전이었다. 예약 환자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정적을 깨고 한의원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내 데스크 직원의 당황한 목소리와 어르신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곳에는 예약 명단에 없는 노부부가 배 한 상자를 든 채 서 있었다. 지난달 허리와 좌골신경통으로 나를 찾았던 환자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아해하던 찰나, 노부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마주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사를 넘어, 한 생애를 짓눌러온 깊은 응어리가 비로소 녹아내릴 때 터져 나오는 회한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 환자에게는 50년 된 지독한 그림자가 있었다. 처음 내원했을 때부터 그는 엎드린 자세에서도 왼쪽 귀에 하얀 솜뭉치를 끼고 있었다. 연유를 묻자 아내가 대신 사연을 쏟아냈다. 중학생 시절, 고향 저수지에서 수영하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제때 치료받지 못한 귀는 결국 만성 중이염이 되었고 반세기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고름을 뱉어냈다. 그 고름은 그의 삶을 옥죄는 족쇄였다. 청년 시절에는 의가사 제대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미국에 유학을 온 후 모진 이민 생활의 풍파를 견디며 자리를 잡는 동안에도 늘 한쪽 귀를 하얀 솜으로 막은 채 살아야 했다.  유명 대학병원에서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았지만 고름은 비웃듯 다시 흘러나왔다. 현대 의학조차 손을 저은 상황에서 그는 “이게 다 팔자려니” 하며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치료하며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외면할 수 없었다. 통증 치료가 본업이었으나, 50년을 고름과 함께 산 그의 고단한 어깨가 자꾸 눈에 밟혔다.
 
나는 그의 귀 뒤편, 기혈이 모이는 예풍(?風), 예명(?明), 완골(完骨)의 이른바 귀 ‘삼방혈(三防穴)’ 자리를 잡고 정성껏 뜸을 놓았다. 진료가 없는 날에도 아내가 남편을 돌볼 수 있도록 자가 뜸 시술법을 일러주고 말린 쑥 한 줌을 정성스레 싸서 손에 쥐어 보냈다.
 
기적은 의외로 담백하고 조용하게 찾아왔다. 다섯 번의 침뜸 치료와 2주간의 정성 어린 자가 시술 끝에, 50년간 멈추지 않던 고름이 거짓말처럼 멎은 것이다.  
 
“선생님, 이제 솜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아이처럼 기뻐하며 눈물 섞인 배꼽 인사를 건네는 노부부를 보며 나는 민망함에 그저 엷은 미소만 지었으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울림이 일었다. 아픈 사람을 매일 만나야 하는 의사의 숙명 속에서 이보다 더한 ‘애지욕기생’의 보람이 또 있을까.
 
한의사로 평생 살다 보면 손끝에 남는 ‘사소한 기술’ 하나가 생기기 마련이다. 내게는 스승 구당 김남수 선생으로부터 사사한 침뜸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뜸을 뜨는 과정은 지극히 정직하고 단순하다. 환자의 몸 위에서 아픈 곳을 세밀하게 눌러 찾고, 그 한 점에 강화 쑥을 연필심처럼 가늘게 말아 올려 불을 붙이는 것이다. 살갗에 불꽃이 닿는 찰나, 두 손가락으로 주변을 지그시 눌러 열기를 깊숙이 밀어 넣는 그 0.1초의 순간이 뜸 기술의 정수다.  환자 가족에게 이 방법을 나누는 것은 치료의 효율을 높일 뿐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일석삼조의 가치가 있다. 50년 된 고름을 멎게 한 것은 나의 의료 기술보다, 환자의 아픈 곳을 꼼꼼히 눌러 찾던 측은지심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의학의 진정한 목적은 질병 치료에만 있지 않다. 50년 만에 솜뭉치를 던져버린 어르신의 환한 미소는 나에게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어느 우연한 행복이 찾아온 진료실에서 나는 오늘도 작은 쑥뜸 하나에 진심을 담아 불을 붙인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 강병선 침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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