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적극 도움으로 정치입문 결심 2006년 주 조세형평국 위원 당선 한인 최고위직으로 정치 날개 활짝 "앞으로 2, 3세들 정계 진출 도울 것"
#현모양처, 정계 진출하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중학생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본여자대학 영문학과 1학년 재학 중인 1975년 미국으로 건너 와 페퍼다인 대학에서 비즈니즈를 전공했다.
그 후 2010년 USC에서 MBA를 취득했다. 당시 경영학과 졸업생답게 당연하게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을 꿈꿨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웬걸. 스무 살 시절 그녀의 꿈은 현모양처였단다.
"수줍음도 많았고 남들 앞에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죠. 그저 살림 잘하고 애들 잘 키우는 현모양처를 꿈꿨죠. 지금도 여전히 남 앞에 나서 연설하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일이 그리 적성에 잘 맞는 건 아닌 것 같아요.(웃음)"
그녀의 바람은 별 탈 없이 이뤄졌다. 테니스 친구로 만난 숀 스틸(67) 변호사와 81년 결혼, 두 자매를 낳고 말 그대로 현모양처로서의 일상을 보냈다. 그렇다고 전업주부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한인가정상담소, KAC, 평통 등을 통해 한인사회에서 왕성하게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 1992년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은 4.29 LA폭동과 맞닥뜨리게 된다.
"당시 한인사회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모습으로 보도되는 걸 보고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그때 정치입문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런 그녀의 결심에 힘을 실어준 이는 바로 부군 숀 스틸 변호사. 현재 전국 공화당 가주 대표 위원인 스틸 변호사는 지금까지 전폭적인 그녀의 후원자로서 인생 동반자를 넘어 가장 든든한 정치 동반자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표심을 잡다
그녀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1993년 LA시 소방국을 시작으로 LA시 공항국, LA카운티 아동가족위원회 등에서 커미셔너를 역임했고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대통령 아태계 자문위원까지 숨 가쁘게 정치 이력을 쌓아왔다. 이때 그녀는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현장에서 주민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디어 2006년 11월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60.5%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시 미국 내 한인으로는 최고위 선출직인 가주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당선됐다.
2010년엔 재선에 성공해 올해 1월까지 조세형평국 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그의 업무는 관할지역인 LA카운티 일부와 오렌지.샌디에이고.리버사이드 카운티 850만 납세자들을 대변하고 1년 조세 540억 달러의 세금행정을 총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OC 수퍼바이저에 당선돼 현재 오렌지카운티 제2지구 수퍼바이저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수퍼바이저란 시단위로 치면 시장과 같은 위치로 현재 OC는 총 5명의 수퍼바이저가 카운티 살림을 공동으로 맡아 하고 있다.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고고씽~
이처럼 그녀가 적잖은 시간 동안 꾸준히 성공적인 정치 이력을 다져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각고의 노력덕분이었다. 완벽주의자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야말로 현재의 그녀를 있게 했다.
조세형평국에서 활약할 때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수퍼바이저로서 그녀에게 하루 24시간은 여전히 모자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8시 출근을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잡혀있는 회의만도 하루 평균 2~3개가 넘고 각종 업무 처리와 행사까지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 도대체 그 업무라는 것이 뭐 그리 많은 걸까 하는 회의적이고 미심쩍은 눈초리에 그녀가 최근 현안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최근 OC 내 가장 큰 이슈중 하나는 405 프리웨이 확장 사업과 관련된 유료화 문제인데 이를 두고 가주 교통국과 협의로 분주하죠. 또 공원에 홈리스가 늘면서 이들을 위한 셸터 건립문제도 지금 현안 중 하나고요. 어디 그뿐인가요. 최근 코요테 수가 갑자기 늘어 나 포획 여부도 결정해야 하고 얼마 전 헌팅턴비치 인근 다리가 무너질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는 부리나케 달려가 전문가들과 직접 다리 현황을 살펴보기도 했죠."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안들을 다 듣고 있다가는 날이 샐 지경이었다. 듣는 사람이 더 숨 가쁜 이 많은 의제들이 다 최근 며칠 사이에 일어난 것들이란다. 게다가 이런 다양한 건의들이 한주 평균 30~40개씩 쏟아져 들어온다고 하니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듯싶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상상하듯 수퍼바이저라 해서 폼 나는 수트 빼 입고 다닐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늘 진과 스니커즈를 신고 현장을 누비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의 정치인생 마지막 목표는 무엇일까.
"앞으로 많은 2세, 3세들이 미 정계에 진출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죠. 그러려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한인사회를 보다 더 심도 있게 알고 다양한 교류를 가져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런 역량 있는 2세들과 한인사회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돕고 싶은 소박한 바람으로 정치를 시작했다는 이 원더우먼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 여정, 좀 시간이 걸린다 해도 괜찮지 싶다. 앞으로 그녀가 만들어갈 그 길이 또 얼마나 어메이징 할지 벌써부터 기대 만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