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로 학교 못 가 영어 독학 19세 때 미국 고교졸업 자격증 취득 미국 오자마자 부동산 업체 취직 안정된 직업 위해 공무원 다시 도전 입사 15년 만에 매니저로 고속 승진 은퇴 무렵 부하 직원 300명 거느려 1981년 본지 첫 기고한지 벌써 34년 글 쓸 때 가장 즐거운 '60세 문학청년'
익숙하고도 친숙한 얼굴이다.
왜 아니겠는가. 30년 넘게 본지 오피니언란에 얼굴사진 걸고 수시로 칼럼을 써온 이인데. 보는 순간 단박에 그가 바로 그임을 알 수 있었다. 고동운(60)씨다. 30년간 가주 공무원으로 살아온 그는 지난해 봄 은퇴, 상업용 차량 보험사 경영인으로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그가, 학교 문턱도 밟지 않은 그가 80년대 초반 미국에 오자마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만도 예사롭지 않은데 은퇴 후 환갑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칼럼만큼이나 진중하면서도 활기찬 청년 그 자체인 고동운씨를 LA다운타운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문학청년, 미국에 오다
그는 따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두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했던 탓 그저 집에서 혼자 책 읽는 것이 당시 그의 세계의 전부였다. 외부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한 청소년 시절,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문학이었다. 러브스토리에서부터 펄벅의 대지까지 다양한 영문학 서적을 즐겨 읽었던 그는 그 책들을 원서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열세 살 무렵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그의 영어교사는 누나의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와 카세트테이프. 하루 종일 영어 교과서와 테이프를 붙잡고 씨름했지만 워낙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즐겨한 덕분에 지루하고 힘든지도 모르는 시간들이었다.
당시 그의 부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벽제갈비'를 운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탓 생인손이나 다름없었을 장남의 독학을 물심양면 지원했다. 그러다 독학에 한계를 느낀 그는 19세 무렵 당시 한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에 장학금 문의를 한 것이 인연이 돼 용산 미8군 교육센터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석 달 뒤엔 미국 고교졸업 자격증(GED)까지 취득했다. 이런 끈질긴 영어공부 덕분에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됐고 스무 살 무렵부터는 영어 번역출판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1981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오게 된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미국에 오자마자 그는 구인공고가 난 것도 아닌데 관공서와 대기업 등 50여 곳에 무작정 이력서를 돌렸다. 덕분에 가주 재활국과 연이 닿아 필기시험을 보고 그곳에서 연결해준 미국 부동산 업체에 사무직원으로 취직하게 됐다.
"당시 재활국에선 제 이력서를 보고 사무직으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술 교육을 받아보라고 추천했죠. 그러나 제가 사무직 기회를 달라고 우겼고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무직 취업용 필기시험을 보게 해줬죠."
그렇게 부동산에서 2년쯤 일하면서 그는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공무원 취업을 준비했다. 말이 취업준비지 특별한 공부 없이 일단 시험부터 치고 발령을 기다리는 평범한 준비과정이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려 공무원 시험을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1983년 가주 종업원상해보험국 말단직인 사무보조로 입사하게 된다. 말이 쉬워 공무원이지 결코 쉽지 않았을 그의 도전정신과 집념이 놀라울 따름이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죠.(웃음) 저는 성격상 불가능한 일에는 절대 매달리지는 않아요. 대신 될 것 같은 일엔 끈기를 갖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편이죠. 당시엔 공무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일도 잘 수행할 것이라고 제 자신을 믿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말단직으로 입사한 뒤 그는 꾸준히 승진시험에 도전해 2년 만에 오피스 테크니션으로, 7년 뒤엔 수퍼바이저로 승진했고 그 후 15년 뒤엔 매니저 자리에 올랐다. 공무원직라고는 하나 말단 사무보조로 출발해 짧은 시간엔 수퍼바이저가 되고 매니저가 되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목표를 정하면 어떻게든 승부를 봐 끝까지 목표에 이르고 마는 그의 끈기와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은퇴 전까지 그는 300여명이 근무하는 LA사무소에서 수퍼바이저 30명과 매니저 4명을 통솔하는 수석 매니저로 근무했다. 은퇴 직전 부사장급인 지역 사무소장 승진이 코앞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해 봄 은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은퇴 다음날부터 지금의 회사로 출근했고 1년도 채 안 돼 관련 보험 라이선스 4개를 취득할 만큼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공무원으로 30년 근무했으면 적당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마침 사업을 하던 남동생이 좋은 제안을 했었고 더 늦기 전에 인생 2막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죠. 이전에 했던 일이랑 관련은 있지만 또 다른 면도 많아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일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나누며, 소통하며 사는 삶
오래전 그의 은퇴계획은 은퇴 후 한국에 돌아가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여행도 하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그 계획을 조금 미뤘다. 지난해 처남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 남겨진 초등학생 어린 조카남매를 한국에서 데려와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처남의 사망은 저도 그렇지만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죠. 게다가 조카들이 너무 어려서 걱정이 많았던 아내에게 제가 아이들을 키우자고 제안했어요. 여력이 있어 도와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덕분에 요즘은 일과 후에도 아이들 숙제도 봐주고 놀아주느라 더 바빠졌죠.(웃음)"
덕분에 그는 3남1녀를 출가시키고 어느새 6명의 손주를 둔 어엿한(?) 할아버지지만 최근엔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영 대디' 로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바쁜 시간 속에도 그가 잊지 않고 틈나는 대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 즉 본지 오피니언란에 기고할 칼럼들이다. 1981년 본지에 첫 기고를 시작한 이후로 꾸준히 글을 써온 그는 1990년대엔 '이 아침에'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기도 했고 지금은 한 달에 한 편정도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글 쓸 때가 가장 즐겁다는 그는 지금으로서는 언제가 될지 모를 '진짜 은퇴' 후엔 아내와 여행하면서 사진도 찍고 블로그도 운영하며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단다.
이민 1세로서, 불편한 장애를 가진 이로서 그간의 세월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터이지만 그는 진심 행복해보였다. 환경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어깨 위엔 파랑새 한 마리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