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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타향살이 고단함 감싸안은 넉넉한 인심

Los Angeles

2015.11.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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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20년' 함지박 김화신 사장
전업주부로 생활하다 미국 이민
3년 넘게 밑바닥부터 식당일 배워
자신있게 개업했지만 곧 실망감
메뉴 줄이고 돼지고기 전문 변신
숯불갈비 인기로 1 년 만에 대박
"남 하는 것 해가지곤 성공 못하죠"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함지박 김화신(78) 사장, LA한인타운 맛집 좀 아는 이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다. 함지박 간판 내걸고 장사한지 어느새 20년. 그 사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지만 그곳은 여전히 여전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욱한 연기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어느새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하는 경쾌한 고기 굽는 소리까지. 결코 낯설지 않은 이 풍경 안에 들어서면 누군가는 대학시절 학교 앞 오래된 고기 집을, 또 누군가는 월급쟁이 시절 회사 인근 골목길 대폿집을 환기시켰을 터.

이 아련한 향수 안주 삼아 소주 한잔 들이키면 그곳이 타향이든 고향이든 무슨 상관이랴. 너나할 것 없이 타향살이의 고단함과 밥벌이에 지친 넋두리, 실없는 농담들을 쏟아 냈으니까. 그렇게 왁자지껄한 식당 창밖으로 하루가 저물어 갔고 신기하게도 누군가 건넨 적도 없는 위로를 양손 가득 챙겨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늘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이가 있었다. 바로 그이, 20년째 변함없이 화통하고 에너지 넘치고 유쾌한 김화신 사장을 함지박 2호점에서 만나봤다.

#평범한 주부, 식당주인 되다

함지박의 20년 내공으로 보나, 화통한 성격으로 보나 김화신 사장은 분명 한국에서부터 식당 사업으로 잔뼈 굵은 이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한국에서 결혼 전까지 그는 그 시절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4급 공무원으로, 결혼 후엔 줄곧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냈다고 한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그는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한국전쟁 직후 UN한국재건단과 유네스코가 공동 설립한 교육기관인 신생활교육원 졸업 후 농촌진흥청에 취직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제 막 재건운동이 시작된 1960년대 초반 그는 수원, 청주, 진천 등 시골 마을에 부임해 과학적인 영농법부터 농촌계몽운동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11년쯤 근무하다 퇴직한 후엔 20년이 넘도록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내다 1989년 미국으로 가족 이민 왔다. LA에 떨어지고 보니 앞길이 막막했다. 특별한 기술도, 밑천도 없는 그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식당일이었다.

"공무원 시절 위생적이고 맛있는 된장 담그는 법을 십 수 년 가르치다보니 된장 담그는 것 하나만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식당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경험이 있어야지. 그래서 일단은 무조건 배운다는 자세로 반찬 잘하는 집, 뷔페 집, 고기 집 등을 다니며 일했죠. 그땐 그저 이 악물고 자식들 데리고 살기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3년 반 넘게 LA한인타운의 크고 작은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식당일이 뭔지 알겠더란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밑천 삼아 수중의 6만달러를 털어 1993년 피코 길에 지금의 함지박을 오픈했다.

#대박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식당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박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개업 후 반년 넘게 하루 평균 매상이 150달러도 안됐고 월 950달러 렌트비 내기도 빠듯했다.

"이렇게 장사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고심 끝에 메뉴 수도 줄이고 전문화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돼지고기 전문집으로 승부하면서 숯불 돼지갈비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죠." 이쯤 되면 함지박 대표메뉴인 돼지갈비 양념 비법을 안 물어볼 수가 없다. 혹시 며느리도 모르는 시크릿 레시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뭐 다른 비법이 있나. 그저 열심히 연구하고 연습했을 뿐이죠. 좀 특별하다면 주문 받고 그 자리에서 양념해 바로 숯불에 굽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좋은 고기를 쓰고 그 신선한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메뉴를 줄이고 전문화하니 주방 운영도 한결 쉬워졌고 고객들 반응도 좋았다. 덕분에 오픈 1년을 넘어서면서부터 함지박은 입소문을 타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루 200달러도 안되던 매상은 5배 넘게 껑충 뛰어올랐고 평일 저녁시간에도 문 밖으로 길게 줄을 늘어설 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그리고 2003년엔 타운 6가 길에 큰 딸과 사위가 2호점을 오픈해 성공을 거두면서 함지박은 LA한인타운 대표 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엄마 같은 인심, 마음을 사로잡다

이런 함지박 성공의 이면엔 맛깔난 솜씨 외에도 김 사장의 넘치게 퍼 주는 배포와 친정엄마 같은 인심이 있었음은 이 식당 단골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많이 알려졌듯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에겐 근무 시간이 아니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고 와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했고 유학생들을 보면 밑반찬이라도 하나 싸서 들려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흐르다보니 엄마 손 붙잡고 식당을 찾았던 꼬마숙녀가 결혼해 3대가 함께 이곳을 찾거나 그가 생일 때 챙겨준 미역국이며 바리바리 싼 준 김치를 잊지 못한 그 시절 유학생들이 LA에 올 때면 어김없이 그를 찾아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은 이젠 함지박에선 흔한 풍경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에 있다.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사람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우죠. 지금의 정육 거래 업체도 20년이 넘었는데 늘 그곳에서 새로운 걸 배우니까요. 새로운 고기에 대한 정보부터 업계 동향까지 많은 정보를 얻은 덕분에 꾸준히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3년 전 교통사고 이후 뇌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뒤부턴 예전처럼 식당에서 자주 볼 순 없게 됐지만 그는 여전히 한식세계화 강의며 타운 봉사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강연을 통해 식당 창업을 준비하려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남들 다 하는 업종이나 유행을 좇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메뉴를 개발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다른 이들이 넘볼 수 없는 대체불가의 메뉴를 가진 식당을 해야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요?"

곧 여든을 앞둔 이라 하기엔 너무 시크하면서도 에지 있는 조언이 아닌가. 남들 가는 비슷비슷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는 그의 충고는 분명 사업가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 터. 삶의 지혜를 묻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동시에 여전히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자신에게 되뇌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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