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가 된 셰프, 헛헛한 청춘을 채워준다
자취생 위한 ‘냉장고를 부탁해’
신 김치, 냉동만두, 시든 파프리카 …
에휴, 어쩌죠? 재료가 너무 없네
이걸로 맵고 든든한 집밥 될까요
15년차 베테랑 김대천 셰프
고추가 없는 대신 고추참치쓰고
부족한 채소는 만두소로 보충하고
'매콤소스필라프' 만들어 볼게요
13분47초 만에 요리 완성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 음식 같네요"
"밥도 못 챙겨먹는 청춘들 힘내세요"
밥밥집 빱밥~ 기름 발라서 굽지도 않은 파래김과 저 푸른 초원 김치뿐인 찬도~'.
그룹 여행스케치가 부른 '집밥'이란 노래의 일부다. 노랫말만 봐도 침이 고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겨울 '집밥'을 그리워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다. 오랫동안 홀로 지내온 자취생들이 그렇다. 더구나 오늘(23일)은 크리스마스이브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몹쓸, 크리스마스! 대학가 주변에서 자취하는 청춘들은 이 화려한 시기가 서럽기만 하다.
청춘리포트는 자취 청춘들을 위한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준비하기로 했다. 자취생들의 썰렁한 냉장고를 탈탈 털어 최고급 '집밥'을 만들어 주자는 아이디어였다. 말하자면 JTBC 인기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의 포맷을 슬쩍 차용하는 셈. 유명 셰프가 자취생의 집을 급습해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를 해 주는 방식이다.
청춘리포트는 서울의 주요 대학가를 중심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체험할 자취 청춘을 찾아다녔다. 2주 남짓 대학가를 수소문한 끝에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4학년 황상범(23)씨가 기적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황씨는 스무 살에 고향 부산에서 올라와 4년째 서울살이 중이다. 집에서 요리란 걸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남자 자취생.
"내년 3월에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요. 최근 3년간 여자친구가 없었는데 군대 가면 앞으로 2년 동안 또 없겠네요. 안 그래도 체육교육학을 전공해 주변에 남자들만 많았는데…. 군대 밖에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인 만큼 특별한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
청춘리포트는 이번 기획이 황씨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외로운 자취 청춘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했다. 해서 국내 최고의 셰프를 섭외해 황씨의 자취방을 찾기로 했다. 서울 신사동에서 프렌치레스토랑 '톡톡(TocToc)'을 운영하는 김대천(36) 셰프를 어렵게 섭외해 황씨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 19일 크리스마스를 엿새 앞둔, 꽤 쌀쌀한 겨울 오후였다.
황씨의 자취방은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었다. 약 19.83㎡(6평)쯤 될까. 성인 남성이 누우면 바닥이 꽉 차는 방에서 황씨는 4년째 자취 중이라고 했다. 집안은 어수선했다. 책장엔 책과 옷가지·모자·선크림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전자레인지 위엔 화장품과 세탁세제, 전기포트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김 셰프가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조심스레 열었다.
"에휴~ 이걸 어쩌죠?" 좁은 방을 가득 채우는 김 셰프의 한숨 소리. 약 50L짜리 소형 냉장고엔 오래된 김치, 말라 버린 양파와 파프리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냉장고 측면엔 슬라이스 치즈와 인스턴트 햄, 냉동 칸엔 돼지 앞다리살 약간과 먹다 남은 냉동만두가 전부였다. 그나마 돼지고기는 유통기한을 일주일 넘긴 상태였다. 김 셰프는 재료들을 공책에 하나하나 적고선 황씨에게 질문을 했다.
▶김=평소에 식사는 어떻게 해요?
▶황=주로 친구들이랑 밖에서 사 먹어요. 학교 근처 분식집에 자주 가죠.
▶김=안색이 어두운 걸 보니 비타민 섭취가 필요한 것 같은데요.
▶황=사실 평소에 채소랑 과일을 잘 못 먹는 편이에요. 자취생들은 다 그럴 거예요.
▶김= 의뢰하고 싶은 음식이 있나요?
▶황=우선 든든한 밥 요리였으면 좋겠어요. 집밥 생각이 간절하거든요. 또 화려한 음식보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요리였으면 좋겠고요. 매운 음식이면 더 좋고요!
▶김=평소에 술은 자주 마셔요?
▶황=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꼭 술을 마셔요. 주량은 소주 세 병 정도 되고요. 그런데 집 근처에 해장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술 마신 다음 날은 대낮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예요. 김 셰프는 대화하는 내내 안쓰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챙겨 온 요리복을 입고 쓱싹쓱싹 칼을 정비했다.
"냉장고에 재료가 많진 않지만…. 채소가 많이 들어간 든든한 밥 한 끼를 만들어 줄게요. 자취생도 금방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가르쳐 줄겸…. 양파와 파프리카 외에 부족한 채소는 만두소를 이용해 보충하면 될 것 같네요. 고추가 있으면 좋은데 없으니까 고추참치로 매콤한 맛을 내볼게요. 요리 이름을 뭘로 할까요. 음…. '매콤 소스 필라프'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경력 15년차 베테랑으로 꼽히는 김 셰프지만 요리가 쉽지만은 않았다. 주어진 조리도구는 냄비 한 개와 프라이팬 한 개, 접시는 밥그릇을 포함해 3개뿐이었다. 김 셰프는 다듬은 재료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가며 요리를 이어 갔다.
레시피는 간단했다. 양파·파프리카 등 채소와 만두, 고추참치를 함께 볶아 양념을 만든 뒤 밥과 굴소스, 간장을 섞어 볶음밥을 만든다. 밥이 익으면 그릇에 밥을 담고 치즈를 올린 뒤 양념을 붓고 파프리카로 만든 고명을 올려 완성한다. 요리에 걸린 시간은 정확히 13분47초.
"프랑스 최고급 레스토랑도 부럽지 않은 맛인데요!"
한 숟가락 뜨자마자 황씨가 외쳤다. 그는 "양념의 매콤한 맛과 치즈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데다 아삭한 파프리카가 식감을 살려 준다"고 말했다. 함께 먹고 싶은 사람으로는 자신이 축구를 가르치는 학생들을 꼽았다. 황씨는 "축구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며 "아이들을 보면 한창 운동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군 제대 후 진로가 걱정이라는 황씨에게 김 셰프는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했다. 김 셰프는 "사실 군악대로 입대할 정도로 드럼을 좋아했다"며 "드럼을 배우러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우연히 요리로 진로를 바꾸게 됐다"고 말했다.
"평소 장 봐서 요리하는 게 취미일 만큼 요리를 좋아했는데 그게 직업이 될 줄 몰랐죠. 여러 가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기면 꿈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자취하며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청춘들, 모두 파이팅 하시길 바랄게요."
소박한 냉장고의 변변찮은 재료로 만들어 낸 향긋한 요리가 마음마저 따뜻하게 덥히는 듯했다. 자취생들, 아니 꿈과 현실의 간극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청춘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김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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