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사회와 얼마나 밀접할까. 국가와 민족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오늘날 교계 곳곳에서는 기독교의 가치와 의미가 '나' 또는 '개인'에게만 국한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초기 한국 기독교는 달랐다. 개인을 넘어 민족을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107년 전 그 외침이 담긴 노래 가사가 지난 8일 UCLA 옥성득 교수(한국기독교학)에 의해 공개됐다.
본지 3월8일자 A-3면 옥 교수를 통해 당시 기독교가 영적인 복음운동을 통해 시대의 희망이 됐던 이유를 알아봤다.
1909년 9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약 1년간 전개됐다. 이번에 공개된 한글 가사는 이 운동의 주제곡 가사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암울했다. 일제 침략에 맞선 의병운동이 실패하면서 민족의 희망이 서서히 사라지는 시점이었다.
이때 기독교가 민족을 향해 숨결을 불어넣고자 했다.
1909년 9월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등으로 구성된 대한복음주의공의회는 모임을 갖고 백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한국 내 개신교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다. 이를 100만 명으로 늘리자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전도운동이 아니었다.
UCLA 옥성득 교수는 "백만명구령운동은 교육 운동, 계몽운동이 결합한 구국 운동이었다"라며 "의병 전쟁처럼 일제에 물리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미래를 책임질 '십자가 군병'을 모집하는 운동이었다"라고 말했다.
백만명구령운동은 당시 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을 하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을 위해 전도에 필요한 마가복음 특별판 70만 부와 전도지 400만 장이 제작됐다. 주제곡(백만 명 구원가)과 포스터까지 만들어졌다.
옥 교수는 "전도의 열기는 뜨거웠다. 전도인들이 집집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났고, 길에서 전도활동도 열심히 했다"며 "서울의 경우 토론할 수 있는 장소를 빌려서 매주 집회를 했고 기독인들이 글이나 칼럼 등을 외부에 보내는 등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전도에 헌신했던 운동"이라고 전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펼치는 백만명구령운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일본이 한국 기독교의 움직임에 부담을 느끼며 경계했던 이유다.
학계에서는 백만명구령운동을 '한일병탄(1910년 8월29일)'전 한국 기독교가 주도했던 마지막 애국 운동으로 꼽는다. 교회를 통해 민족의 요소와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대대적인 구국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운동은 100만 명을 채우지 못했다. 옥 교수는 "기독교인이 약 5만 명 정도 늘어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백만명구령운동이 한국 사회에 남긴 의미는 컸다.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민족의 독립과 근대화의 주축이 됐고, 천도교와 함께 항일 종교 조직체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일제는 백만명구령운동 말미에 한일병탄을 계기로 기독교 박해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교회와 항일 독립 운동과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일본은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기독인을 체포해 고문했던 '105인 사건(1911년)'을 날조하면서 교회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인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고, 독립운동이 기독교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불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