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극회' 통해 사회문제 관심 5·18때 LA학생헌혈운동 주도 UC버클리서 사회학 전공 미국 첫 소수인종학 박사 돼
4.29폭동 때 한인사회 대변 SAT2 한국어 채택 일등공신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끌며 미주 이민사 정립 위해 노력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그의 저서 '미완의 시대'에서 말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맞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포기를 모르는 이들의 일보 전진을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역사였으니까.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장태한(59) 교수는 청년시절부터 세상의 그 일보전진을 위해 포기를 모르고 쉼 없이 달려온 이다. 우리에겐 미주 한인이민사 관련 뉴스로 친숙한 인물이지만 지난 30년간 한국과 한인사회의 굵직굵직한 이슈마다 앞장서 온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상아탑에 갇힌 책상물림이 아닌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여전히 변화를 모색하는 열혈청년인 장태한 교수를 만나봤다.
#젊은 날의 초상
그는 18세 때인 1974년 가족이민으로 LA에 왔다. 오자마자 시민권 취득과 대학 학자금 혜택이 있는 미 육군에 입대, 독일로 파병돼 3년간 위생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했다. 제대 후 LA로 돌아와 부모님이 원했던 의사가 되려 LACC에 등록해 생물학을 수강했지만 영 적성에 맞질 않았다고. 그러던 그가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게 바로 사회학. 이처럼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당시 그가 속해있던 '모임극회' 연극단 활동과 무관하지 않은 듯 했다. 특히 이철수 사건을 다룬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이철수 역을 맡는 등 2년여 동안 동료들과 사회성 짙은 소재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며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80년 5월엔 고국에서 들려온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그는 한인 대학생들과 함께 LA적집자사를 점거, 헌혈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회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면서 그는 1980년 UC버클리에 편입, 본격적으로 사회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버클리에선 잠자는 시간 빼곤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죠. 보통 학생들이 한 학기에 12~16학점(unit)을 듣는데 저는 20~21학점씩 들었으니까요. 덕분에 5쿼터 만에 졸업할 수 있었죠."
특히 버클리 재학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 당시만 해도 신생학문이나 다름없던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에 푹 빠진 그는 1982년 대학 졸업 후 캘리포니아에서 유일하게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 석사과정이 있는 UCLA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 뒤 '광주 민중항쟁이 LA사인사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그는 모교인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당시 버클리는 미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수인종학 박사과정을 개설해 1990년 소수인종학 박사 1호 7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유일한 한인이 장 교수다.
#역사의 현장, 그 한가운데서
그는 1989년 캘폴리 포모나 강단에 서기 시작해 1992년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25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평생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학자이지만 지금껏 그의 삶이 보여주듯 그는 그저 평범한 책상물림만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조국을 떠나 동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학을 다녔던 당시 청년들의 어쩔 수 없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그에게도 남이 있는 탓이 아닐까 짐작해 볼뿐이다.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조국의 뼈아픈 현대사를 목도한 20대 한인 대학생의 고뇌와 번민은 미국이라는 복잡다단한 사회에 살면서 인종갈등,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에 가 자연스레 가 꽂혔으리라.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그 해묵은 갈등이 폭발한 역사적 현장 한가운데 서게 된다. 바로 4·29 LA폭동이다. 20년도 훨씬 전 그날의 사건을 그는 어제 일처럼, 시간 단위로, 다큐 필름을 돌려보듯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폭동이 단순히 두 커뮤니티간의 갈등으로 폭발한 것이 아닌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과 흑인사회의 가난이라는 사회구조적 불평등 문제에서 기인했음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폭동당시 하루 10시간씩 미 주류 언론은 물론 각국 언론을 만나 사건의 원인과 본질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한국어 책을 출판해 한인사회에 흑인사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차세대위한 올바른 역사관 정립이 꿈
그의 한인사회를 위한 행보는 단지 4·29 LA폭동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3년 칼리지보드에서 SAT2 한국어 채택을 약속했다 1995년 돌연 불발되자 그는 칼리지보드 회장을 만나 한인사회가 예산 50만 달러를 충당하는 조건으로 한국어 채택을 담판 짓기도 했다. 이처럼 SAT2 한국어시험 채택의 공을 인정받아 그해 김영삼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 1999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2002년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의 강압적 또는 사기에 의해 끌려간 것이라는 증거자료를 찾아내 당시 법적소송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2010년부터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을 맡아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최근 연구소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지난 3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파차파 캠프가 한인촌의 효시임을 밝혀낸 것인데 현재 리버사이드 시정부가 이를 사적지로 추진할 만큼 주류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여름방학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주 한인 인구통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미주 한인인구 디지털 지도' 제작과 미주 한인 구술사 정리 작업 등 연구와 집필활동에도 여념이 없다.
"미주한인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 차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한인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제 오랜 바램입니다."
그의 이런 의지는 분명 자녀교육에도 소리 없는 힘으로 작용했으리라. 캘스테이트 샌버나디노 사회복지학과 자넷 장(58) 교수와의 사이에 외동딸인 앤지 장(29)변호사도 LA법률보조재단에서 근무하며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있다하니 역시 부전여전이다.
나이 듦이 고집이나 아집의 동의어가 아닌 지혜가 넓어지는 것임을, 초심이 더 깊어지는 것임을 그를 통해 배운다. 맞다. 도전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 어디 세상뿐이겠는가. 인생 역시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